퇴사한 게임 개발자가 너무 유능함 36화
22. 노하우 전수
몬스터 이터 총괄 디렉터 직을 내려놓은 다음 날. 태연은 휴가를 천명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2주만 쉬고 올 테니 그동안 잘 부탁합니다.”
사실을 아는 홍민석, 이영애 AD 부부는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
태연은 애써 모르는 척 외면했다.
* * *
휴가 며칠 전.
“우리 뉴욕에 놀러 가자.”
태연은 윤아에게 휴가를 제안했다.
예기치 못한 말을 들어서인지 윤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뉴욕? 이렇게 갑자기?”
“싫어?”
“아니, 싫은 건 아닌데 너무 갑작스러우니까…….”
곧, 커다란 두 눈이 초롱초롱 빛난다.
“뭐야, 갑자기 무슨 일이야? 바쁜 거 아니야? 뉴욕 갈 수 있어? 시간 돼?”
쏟아지는 질문!
태연은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대응했다.
“몬스터 이터 알지?”
“응. 오빠가 총괄직 맡고 있는 일본 게임이잖아. 나도 해봤어.”
“어? 정말? 언제?”
“오빠가 맡고 있다고 해서 예전에…… 매니저 오빠 도움받아서. 그런데 그게 왜?”
“나 조만간 그 게임 총괄 디렉터 직에서 물러날 예정이야.”
“어, 왜? 그 게임 지금 굉장히 잘되고 있는 거 아니야?”
“나도 이제는 내 게임 만들어야지.”
“아…….”
“빨리 큰 짐 하나 덜어내고 내 팀원들과 윤아 너에게 더 집중하고 싶어서 내린 결정이야.”
“…….”
말없이 태연을 바라보던 윤아가 다른 질문을 던졌다.
“난 좋은데…… 오빠는 괜찮겠어?”
“뭐가?”
“감당할 수 있겠냐고. 우리가 나란히 공항에 등장하는 순간부터 열애 기사가 터질 텐데.”
“아…….”
그러고 보니, 윤아는 연예인은 아니었지만 슈퍼스타 이상의 위용을 자랑하는 국민적 영웅이었다.
한창 선수로 활약하던 시절의 별명이 국민 여동생이었을 정도로 지금도 엄청난 관심과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존재다,
그런 사람이 웬 남자하고 다정하게 공항에 등장했다?
대한민국이 뒤집힐 일이다.
하지만 태연은 애초부터 이 부분에 대해 각오가 되어 있었다.
“난 오히려 너한테 피해가 올까 봐 걱정이야.”
“무슨 피해?”
“하필 사귀어도 그런 없어 보이는 남자랑 사귀냐. 김윤아는 눈도 없냐. 차라리 나랑 사귀자! 뭐 이런 소리라도 듣게 된다면……?”
말이 끝나기 무섭게 폭소가 터졌다.
“오빠 자학 개그 진짜 잘한다. 그게 뭐야? 아하하!”
딱히 웃기려고 한 말은 아니었는데…….
그래도 윤아가 즐거워하니 이왕 시작한 말, 농담으로 끝맺는다.
“너하고 열애설이 터질 수 있다면 굉장한 영광이지. 기사 스크랩해서 나중에 우리 자식들에게 가보로 물려줄 생각이야.”
* * *
뉴욕으로 바로 떠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최소한 일주일의 여유는 필요해. 스케줄 정리를 해야 하거든.”
그걸 생각지 못했군.
그래서 태연은 그 자리에서 휴가를 취소, 윤아의 스케줄이 정리되는 동안 회사에 출근하며 기다리기로 했다.
막상 출근하니 떠나기 전에 정리해야 할 일이 많았다.
“피디님 시나리오 언제 나와요? 최소한 캐릭터 컨셉 설정이라도 있어야 아트 작업 들어갈 수 있는데.”
“맵 설정도 필요해요. 그게 있어야 레벨 작업도 할 수 있어요.”
“아이템은요?”
현재 판테온의 정식 시나리오 작가는 ‘블레스’에서 데려온 백영훈 한 명뿐이었다.
동화 작가 출신 배수현은 프로젝트 D 담당이고, 그게 아니라도 지금 써먹기에는 경험도, 역량도 부족했다.
문제는 백영훈이었다.
“영훈 씨, 아무래도 시나리오 프레젠테이션 해야 할 것 같은데, 가능하겠어요?”
“어, 어어…….”
모든 게임 작업은 시나리오 작가로부터 시작된다.
시나리오에서 캐릭터, 세계관, 맵, 아이템, 스토리 등의 컨셉과 설정을 만들어줘야 다른 기획팀이 시스템, 콘텐츠 등의 작업을 할 수가 있다. 기획팀에서 기획서가 나와야 아트, 프로그램이 작업에 들어갈 수가 있다.
한마디로 시나리오 기획자는 게임 기획의 중심에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문제는 백영훈에게는 이 정도의 경험이 없다는 것이다.
“프레젠테이션 만들어 봤어요?”
“대학교 때…….”
당연한 이야기지만 게임 회사에서 요구하는 것은 대학교 프레젠테이션과 다르다.
“일단 이틀 안에 프레젠테이션 문서 준비해 봐요.”
“3일 안에요?”
하얗게 질린 얼굴.
‘역시 힘들겠지?’
잠시 고민해 보고 묻는다.
“4일 줄게요.”
“그, 그때까지라면 어떻게든…….”
이것도 벅찬 것 같지만, 백영훈은 어쨌든 수락했다.
‘백영훈 씨에게만 맡길 수는 없겠어.’
아무래도 나도 따로 프레젠테이션 문서, 발표 준비를 해야 할 것 같다.
백영훈을 써먹지 못할 상황이라면 자신이 나서야 하니까.
* * *
천만다행스럽게도 넥플 프레젠테이션 때 정리해 둔 자료가 있었다.
[이걸 활용해요.]
백영훈에게 문서를 모두 공유하고, 자신도 그것을 기반으로 프레젠테이션 문서를 만들어나간다.
하루 만에 그럴듯한 문서가 완성됐다.
‘워낙 익숙한 작업이니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
문제는 백영훈이다.
4일 안에 발표 퀄리티를 맞출 수 있을까?
‘사실 나가서 깨져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되겠지만…….’
문제는 백영훈은 아직 초보 시나리오 기획자라는 것.
그리고 자신이 뽑아 놓은 판테온 작업자들은 하나같이 굉장한 사람들이다. 가차 없는 지적이 날아들 것이고, 고스란히 폭격에 노출된 백영훈은 회복이 어려울 정도의 큰 충격을 받게 될 것이다.
‘거기까지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렇게 되었을 때 2주 동안 사람들이 작업을 못 한다는 게 문제지.’
상처?
까짓거 입을 수도 있지!
옆에서 케어해 주면 금방 회복되고, 가르치면 성장할 것이다. 백영훈은 훌륭한 인재니까 잘 따라와 줄 것이다.
하지만 무의미하게 흘려 버린 작업 기간은 되돌릴 수 없다.
‘그러니까 내가 해야지.’
그렇게 4일이 흘렀다.
“준비됐어요?”
“네에. 저, 그런데……?”
“뭐죠?”
“…….”
머뭇거리던 백영훈이 고개를 젓는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말씀해 보세요. 뭐라고 안 할 테니까.”
우물쭈물하던 백영훈이 조심스레 말한다.
“부족한 부분이 조금 있어서…….”
“문서 작성을 못 끝낸 건가요?”
“그건 아닌데…….”
“그러면 됐어요. 해보시죠. 일단 봅시다.”
“……네에.”
백영훈의 첫 시나리오 프레젠테이션이 시작되었다.
“흠흠!”
헛기침을 내뱉은 백영훈이 프레젠테이션 시작을 알린다.
“지, 지금부터 판테온 시나리오 발표를 시작하겠습니다.”
빔 프로젝트에 그가 4일간 공들여 작성한 발표 문서가 띄워진다.
“세계관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태, 태초에 선과 악이 있었고…….”
시작부터 절로 한숨이 흘러나온다.
‘그놈의 태초…….’
어째 MMORPG 게임 세계관은 다 시작이 똑같을까?
‘일단 지켜보자.’
내용이야 수정해 주면 되니까.
그런데…….
“……그래서 선과 악은…….”
그놈의 태초 이야기가 끝나지 않고 이어진다.
유태연이 가만히 듣고만 있던 탓인지, 자신감을 회복한 백영훈은 열변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렇게 돼서 본격적인 메인 시나리오가 시작됩니다. 아, 잠시만요. 물 좀 마시고…….”
흠흠!
목을 축이고 헛기침을 터뜨린 뒤 다음 문서로 넘긴다.
“아이구.”
자신도 모르게 탄식을 터뜨려 버렸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전장에 이어 이번 PPT 역시 글자로 빼곡했던 것이다.
인터넷에서 긁어 온 참조 이미지 한두 개 정도가 붙어 있었고.
“그러면 계속 이어서…….”
“잠깐만요.”
더 이상 못 들어주겠다.
태연은 본격적으로 나섰다.
“다음 장 넘겨봐요.”
그제야 뭔가 잘못됐다는 사실을 인지한 백영훈이 급격히 소심해졌다.
눈치를 보며 시키는 대로 따른다.
“다음 장.”
사락.
“계속 넘겨봐요.”
사락, 사락.
온통 텍스트투성이이다.
“후우, 이래서야 게임 프레젠테이션인지 소설 낭독회인지 분간이 안 갈 지경이군요.”
“…….”
백영훈의 얼굴이 빨개졌다.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태연이 말했다.
“한 가지 놀라운 비밀을 알려줄까요?”
“……?”
“개발자들은 시나리오 문서를 잘 안 봐요. 본인 일 쳐내기에 바쁘지.”
“……!”
“초창기에는 열심히 숙지하려고 하죠. 그런데 수정이나 설정 추가가 계속되고 분량이 급격히 늘어나면 그다음부터는 이해를 포기해 버려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눈동자를 굴리던 백영훈이 소심하게 대답했다.
“설마…… 계속 이런 식으로 발표를 해야 하는 건가요?”
“당연하죠.
“어, 언제까지요?”
“시나리오가 컨펌 날 때까지.”
“……!”
“그리고 모든 개발자가 시나리오를 이해했을 때까지.”
“…….”
“나중에는 각 팀과 파트에서 본인 업무와 관련된 부분의 발표를 부탁해올 거예요. 그것도 다 해결해 줘야 해요.”
무엇이든 한 번에 결정 나는 일은 없다.
수정, 수정, 수정…….
막판에도 안심할 수 없는 게 이 업계였다.
세계적인 히트 게임, 몬스터 이터조차도 수시로 여러 문제가 터져서 태연이 진화 반장 노릇을 톡톡히 해야 했다.
“…….”
쯧.
전의를 상실한 백영훈을 보고 태연을 혀를 찼다.
그리고 정장 상의를 벗어 의자에 걸쳐 두고, 와이셔츠 소매를 팔목까지 걷어 올린 뒤 말했다.
“앉아서 제가 하는 거 지켜봐요.”
“……?”
“시나리오 기획자의 프레젠테이션이란 무엇인지 똑똑히 가르쳐줄게요.”
백영훈은 기대감이 가득한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필기 준비를 하던 그는 좋은 생각을 떠올리고 급히 물었다.
“피디님! 프레젠테이션하시는 모습 영상으로 촬영해도 될까요?”
“영상 촬영을 한다고요?”
“보고 배우려고요! 받아 적는 건 아무래도 한계가 있으니까…….”
나쁘지 않은 생각이군.
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시죠.”
촬영이 시작되었다는 사인을 받고서야 태연은 프레젠테이션을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유니버스 스튜디오 총괄 프로듀서 유태연입니다. 지금부터 시나리오 프레젠테이션을 시작하겠습니다.”
‘아, 내가 인사하고 자기소개를 잊었구나!’
이어 펼쳐진 문서는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내용 압축이 잘 되어 있었다.
“신화 파트는 생략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중요한 내용이 아니니까요. 나중에 여유가 될 때 공유한 문서 참고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각 파트의 실무에 있어서 정말 중요한 내용들을 위주로.
이미지, 그래프, 표 등등…….
다양한 비주얼 자료를 동원하여 알기 쉽게 들려준다.
‘아……!’
보고 있으면 그저 감탄이 절로 나온다.
모든 작업자들이 어떤 내용을 확실히 알고 어떤 식으로 작업해야 하는지를 명확히 가이드해 주고 있었던 것이다.
‘이래서 학교 프레젠테이션과 다르다고 말씀하셨구나!’
말 그대로 내부 개발자를 위한 프레젠테이션.
‘하지만 누구나 따라 할 수 있는 건 아니야. 이건 모든 작업을 자기 전문 분야처럼 꿰고 있어야 가능한 거야.’
심지어 프로그래머들에게도, 어떤 식의 협업이 필요한지를 분명히 설명하고 지나간다.
“……이상으로 판테온 시나리오 프레젠테이션을 끝마치겠습니다.”
백영훈은 부서져라 손뼉을 쳤다.
그리고 흥분에 가득 찬 얼굴로 외쳤다.
“정말 굉장했어요! 제가 앞으로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개발 프로세스가 어떤 식으로 돌아갈지 명확히 알 수 있었어요!”
“이건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 우리 게임이 어떤 것인지 알려주기 위한 프레젠테이션이 아니에요. 각자 전문 분야가 따로 있는 작업자들의 업무를 보조하기 위한 프레젠테이션이죠. 우선 그것을 명확히 인지하고 시작해야 해요.”
태연은 열심히 자신의 노하우를 전수했다.
아직 동영상 촬영이 이어지고 있었지만 백영훈은 그것을 잊어버린 듯, 질문하고 받아 적기에 열을 올렸다.
하지만 대화는 끝까지 이어갈 수 없었다.
“아무래도 여기까지 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네? 아, 아직 물어보고 싶은 게 더 남았는데…….”
태연은 대답 대신 회의실 바깥을 가리켰다.
투명한 유리 외벽 너머, 수많은 이들이 몰려와서 지켜보고 있었다.
태연은 민망한 얼굴로 말했다.
“아무래도 제 목소리가 컸던 모양이네요. 카페테리아에서 이야기를 계속 이어서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