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퇴사한 게임 개발자가 너무 유능함-35화 (35/147)

퇴사한 게임 개발자가 너무 유능함 35화

21. 짐을 덜어내다

[유 피디 수고 많았다! 서울 올라오면 바로 어디 가지 말고 잠깐 내 집무실에…….]

“죄송합니다 회장님. 저 지금 급해서요!”

회장이고 나발이고 지금은 더 급한 게 있었다.

“나 왔어!”

힘껏 현관문을 열어젖히는 순간 맛있는 된장찌개 향이 풍겨 나온다.

앞치마를 입은 국민 영웅 화사한 미소로 맞아준다.

“오빠 왔어? 식사 준비 다 됐으니 잠시 기다리면…… 꺅!”

윤아의 말을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태연이 다가와 와락 끌어안아 버린 것이다.

“……!”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심장이 크게 뛰고 두 눈이 휘둥그레진다.

그런 그녀의 귓가에 다음과 같은 음성이 들려왔다.

“아. 이제야 치유되는 느낌이야.”

“…….”

처음으로 덩치만 큰 어린 소년을 대하는 느낌이 들었다. 달콤한 사탕발림도, 멋진 이벤트나 선물 같은 것은 없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이 남자의 마음이 깊게 와닿는다.

태연에게 처음으로 모성애를 느낀 윤아는 살포시 안고 다독여주며 말했다.

“고생 많았어, 오빠.”

이 순간 맛있냐는 질문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태연이 온몸으로 표현해 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직접 장을 봐서 엄마에게 배운 요리 솜씨를 한껏 발휘하기까지, 결코 쉽지 않은 과정이었다. 그런데 결과를 눈앞에서 보니 이렇게 뿌듯하고 행복할 수가 없었다.

방실방실 웃는 윤아에게 태연이 물었다.

“안 먹을 거야?”

“난 배불러서…….”

“내가 먹을까?”

“응?”

“안 먹을 거면 내가 먹을게.”

태연은 윤아의 밥과 반찬을 통째로 가져가 또다시 한순간에 해치워 버렸다.

이쯤 되니 한 가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서 밥 제대로 안 챙겨 먹었어?”

“이렇게 맛있는 음식은 없었지.”

준비한 멘트는 아닌 것 같은데, 무심코 던진 말이 이상할 정도로 뿌듯하게 다가온다.

그렇게 식사를 마친 태연은.

“이제 살 것 같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얼굴로 윤아를 바라봤다.

그 시선에, 표정에 윤아 역시 세상에서 제일 행복해졌다.

그때 태연이 무심코 중얼거린 한 마디가.

“평생 이렇게 살고 싶다.”

윤아의 심장을 빨리 뛰게 만들었다.

‘무슨 뜻이지?’

표정을 확인한 순간 윤아는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날 떠보는 거야!’

이어진 말이 증거였다.

“우리 결혼하면, 항상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되는 건가?”

머리가 하얗게 변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하지?’

윤아가 내놓은 대답은…….

-저녁은 오빠가 해야지.

늦은 밤.

윤아를 바래다주고 돌아오는 길 태연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크게 터뜨렸다.

‘역시, 더 이상 망설일 필요 없겠어.’

이제 큰 짐을 하나 덜어낼 순간이 왔으니 본격적으로 준비해도 될 것 같다.

청혼.

‘일사천리로 진행해도 될 것 같군.’

잠시 떨어져 있으면서 깨달았다.

‘내 옆에 항상 윤아가 있으면 좋겠어.’

부끄러움이 많아 퉁명스러운 척하지만 사실은 자상하고 맑은 그녀.

그런 그녀가 언제나 자신의 옆을 항상 지켜줬으면 좋겠다.

그리고 자신 또한 윤아에게 있어서 그런 존재가 되어주고 싶었다.

‘대규모 업데이트 끝나고 프로듀서 자리에서 물러나면 최소 보름 정도는 여유 시간을 좀 가져야겠어.’

홍민석, 이영애 AD 부부의 조언을 듣고 갖게 된 생각이었다.

‘맨해튼 스카이라운지가 그렇게 낭만적이라지?’

부부가 소개해 준 바로 그 장소에서 청혼을 할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무리를 잘해야겠지?’

* * *

온라인 게임을 취급하는 회사에서 ‘크런치 모드’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여기서 크런치 모드란 마감을 맞추기 위해 야근과 특근을 반복하는 것을 뜻한다. 한마디로 일상 다 포기하고 오로지 업무 하나에만 올인하는 것이다.

테스트하고, 버그 발견하면 상황을 똑같이 구현시켜본 뒤 원인 찾아내서 수정하고, 또다시 테스트하고.

그래. 게임, 소프트웨어 개발자들에게 크런치 모드란 숨 쉬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이다.

“하지만 전 이번에는 크런치 모드를 하지 않을 거예요.”

“……!”

회의실의 개발자들의 놀란 얼굴들이다.

그들의 상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눈치만 보며 대답하지 못하는 개발자들.

난 담담하게 말했다.

“할 수 있습니다.”

당장 많은 이들이 주어진 업무 시간에 일만 하지는 않는다.

담배 피우고, 수다 떨고, 화장실 다녀오고 물 마시고, 카페테리아 가서 콧바람 좀 쐬고 오고 전화 통화 하고 웹 서핑이나 유튜브 시청하고…….

이런 일로 날려 먹는 시간들 다 합쳐보면, 정말 집중해서 업무 하는 시간은 아마 4시간도 되지 않을 것이다.

“근무 시간에 딴짓하지 말고 열심히 일을 하면 돼요.”

거기까지 말하고 피식 웃는다.

“이렇게 말해봐야 공감이 안 되죠? 그래서 준비했습니다.”

팀별로 파일첩을 나눠준다.

“업데이트 전까지 여러분 전원이 하루에 쳐내야 할 업무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용물을 살펴보던 직원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업무 일정표가 개인별로 세밀하게 짜여져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였다.

‘설마 모든 직원들의 업무를…….’

‘완벽히 꿰고 있는 건가?’

심지어 아트와 프로그램 업무까지도?‘

기획팀장이 더듬거리며 물었다.

“아트나 프로그램 업무도 할 줄 아셨습니까?”

“게임 디렉터라면 모든 업무를 혼자서 다 쳐낼 수 있을 정도의 역량을 갖추고 있어야죠. 그게 상식 아닙니까?”

“…….”

다음 디렉터로 내정된 기획팀장은 아무 말도 못 했다. 자신에게는 불가능한 소리였기 때문이었다.

태연은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AD님. 기획팀장님. 프로그램팀장님.”

“네!”

세 명의 각 팀 총괄이 대답한다.

“오늘부터 다섯 시까지 업무 완벽하게 끝난 거 확인하고 체크표 가져와서 저에게 보고 올리도록 하세요.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

일일 업무 일정 마감 시간이 오후 다섯 시라는 이야기다.

“제때 일하고 제때 퇴근합시다.”

긴장감으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전 직원들을 슥 둘러보고, 태연이 회의를 끝냈다.

“해산.”

숨 막힐 듯한 업무 분위기가 시작됐다.

‘크런치 모드는 없다.’

‘제때 일하고, 제때 퇴근한다.’

마치 태연이 회의실에서 내뱉었던 음성이 스튜디오 전체에 퍼져 나가고 있는 듯했다.

태연 역시 평상시보다 많은 시간을 보내며 자신에게 할당된 업무를 처리해 나갔다.

총괄 디렉터라는 사람이 본인들보다도 많이 할당된 업무를, 분야와 난이도를 가리지 않고 완벽하게 처리해 나가는 모습에 직원들은 감탄과 위기의식을 동시에 느꼈다.

‘저런 디렉터는 처음 봐.’

‘허세가 아니라 정말 게임 만드는데 필요한 모든 업무를 완벽하게 꿰뚫고 있어.’

대강 아는 정도로는 이런 기행이 불가능하다.

‘저 정도는 해야 총괄 디렉터 자리에 오를 수 있나?’

‘저 정도 실력을 갖춰야 큰 투자를 받고 내 게임을 만들 수 있는 거였구나!’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게임을 만들고 싶어서 입문한 것은 아니다. 어쩌다 보니, 전공을 살리려고, 혹은 단순히 직업적인 의미로 입사해서 출퇴근하는 이들도 많다.

그러나 개중에는 순수하게 PD, 디렉터가 되어 자신의 게임을 만들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존재했다.

그런 이들에게 근래에 떠오르는 신성, 유태연 개발자라는 사람은 좋은 본이었다.

스타 개발자의 자질을 가진 남자.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나도 저렇게 화려한 개발자의 길을 걷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그런 그의 업무 역량을 지금 이 순간 제대로 목격하고 나니 자신이 얼마나 안일한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깨닫게 된다.

게임 개발에 대한 이해도와 쌓은 역량, 경험치 같은 것들이 아득할 정도로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조용하면서도 신속하게 업무를 처리하고 이를 공유해가는 모습은 그저 경이로울 뿐이었다.

오후 다섯 시.

“일일 업무 일정 마감 보고 시작하세요.”

태연의 목소리가 긴장감을 몰아치게 한다.

“…….”

팀장들은 당황한 얼굴로 서로 눈치를 본다.

태연이 외쳤다.

“빨리 업무 보고 하세요!”

망설였던 이유가 있었다.

‘짐작했지만……’

제때 업무를 끝낸 사람이 얼마 되지 않았다.

‘그래도 끝낸 사람이 있다는 게 용하군.’

빠르게 이름을 기억해 둔 뒤 말했다.

“지금부터 정확히 30분 줄 테니 그 안에 남은 업무 끝내고 보고 하도록 하세요. 정시 퇴근 합시다. 알겠죠?”

“네!”

살얼음판이었던 분위기가 다시 숨 가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업무 끝난 분들 눈치 보지 말고 퇴근하세요.”

여섯 시 정각.

태연의 외침에 사람들이 하나둘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이후 태연은 남은 이들을 한 명 한 명 찾아가 물었다.

“뭘 얼마나 더 해야 해요?”

풀리지 않는 문제에 대해 해답을 제시해 주고, 단순한 테스트와 수정에 대한 업무는 본인도 일부를 가져와 함께 나눈다.

“이 부분은 단순 확인 작업이니 내일 계속 하시죠. 오늘은 퇴근하세요.”

무리해서 일일 업무를 모두 끝내도록 하지는 않는다.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는 문제였다.

그렇게 모두를 퇴근시키고 나니 오후 일곱 시.

‘서두르면 제때 도착할 수 있겠군,’

요 근래, 태연과 윤아는 영화 심야 관람에 맛을 들였다.

우선 넓은 극장을 둘이 오붓하게 사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사람이 없으니 집중이 더 잘되기도 했다.

윤아가 예약한 음식점에서 식사를 하고 그녀가 예매한 영화를 관람했다.

영화가 끝났을 때는 자정이 조금 넘은 시각.

주차장에 내려가는 동안 사람과 단 한 명의 사람과도 마주치지 않았다.

차에 탑승해서야 모자와 마스크를 벗어 던진 그녀였다.

“영화 참 재미있었다. 그치?”

“응. 로맨틱 코미디가 이렇게 재미있는 장르일 줄은 몰랐네.”

영화 취미도 없었거니와, 가끔 보면 액션 영화, 혹은 슈퍼히어로물이 전부였다. 로맨틱 코미디 영화를 본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던 태연이다.

그런데 오늘 연인과 함께 관람한 영화는 꽤나 재미있고 신선했다.

영화가 재미있었기 때문에?

‘아니야. 그냥 윤아와 함께 무언가를 하는 것 자체가 즐거운 거야.’

함께 새로운 취미를 더 많이 만들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나도 즐겁지만…….’

“우리 나중에 영화에 나왔던 수목원 한 번 놀러 가보자. 꼭 가보고 싶어!”

“그래. 그러자.”

그녀가 즐거워하니까.

이전에 없던 활력을 얻게 된 덕분인지, 회사에서 업무 효율이 크게 상승한 기분이었다.

아니, 그저 기분 탓은 아닐 것이다.

“요즘 넥플 플러스 직원들이 여기저기 피디님 칭찬하며 다니더라고요”

“업데이트 끝나면 피디님 하고도 이별이라며 아쉬워하던데…….”

이런 말들이 귀에 들려오니까.

실제로 업데이트 일이 가까워지며 여러 가지 상황이 펼쳐졌다.

“저…… 저도 혹시 피디님 따라서 갈 수 있을까요? 판테온이나 프로젝트 D 스튜디오, 둘 중 어느 곳이라도 상관없으니…….”

전환 배치를 문의해 오는 사람들.

“기획팀장님을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피디님이 물러나신 이후에도 몬스터 이터가 지금 같을 수 있을지 걱정되네요.”

불안해하며 아쉬워하는 사람들.

넥플 개발 총괄, 손영상 이사는 이런 말까지 했다.

“이번 업데이트 끝나면 너 몬스터 이터에서 빠진다는 소문 다 퍼져서 유저들도 굉장히 불안해하고 있어. 그냥 유 피디가 계속 맡아주면 안 돼? 정 힘들면 딱 1년만 더…….”

“이제 저도 제 게임 만들어야죠. 언제까지 남의 게임 붙잡고 있을 수도 없잖아요.”

하지만 그 어떤 상황에도 태연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저 앞만 보고 미친 듯 달릴 뿐이었다.

* * *

마침내 몬스터 이터 총괄 디렉터 직의 피니시 라인이 가까워졌다.

“업데이트 시작합니다!”

그날, 태연은 프로그램 팀장과 함께 스튜디오에 남았다.

밤을 새우며 업데이트가 마무리되는 것을 지켜볼 생각이었다.

다음날 오전 아홉시.

“서버 오픈합니다!”

업데이트가 완료됐지만 아직은 안심할 수 없었다. 정말 아무 문제 없이 업데이트가 적용되었는지, 유저 반응을 모니터링해야 하기 때문이다.

밤을 새워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지만 하루 종일 긴장감을 유지해야 했다.

오후 여섯 시 정각.

“이제 퇴근합시다!”

자잘한 이슈는 있었지만 크리티컬한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다.

첫 대규모 업데이트가 무사히 완료됐다는 증거였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피디님 정말 고생하셨어요!”

넥플 플러스 직원들이 태연에게 박수를 보냈다.

태연은 미소로 화답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마침내 크고 무거웠던 짐을 하나 덜게 되는구나!’

이것으로 몬스터 이터와의 인연은 끝났다.

눈곱만큼의 아쉬움이나 미련 따위 없이, 태연은 속 시원하게 넥플 플러스 스튜디오를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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