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한 게임 개발자가 너무 유능함 29화
18. 런칭 전야
OBT가 가까워지며 신경이 점점 예민해지고 있었다. 스트레스가 커졌고 작은 이슈에도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었다.
태연은 신경질적인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자신만 힘든 게 아니라 근무 중인 모두가 힘들다.
일찍이 태연은 김명욱 대표와 충분히 논의를 마친 뒤, 런칭이 성공하면 인센티브를 최대한 공평하게 분배할 것이라 공언했고, 또한 내년 연봉 협상에도 긍정적인 영향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다들 야근을 불사하며 노력하고 있다.
놀고 싶고, 자신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을 텐데 그것을 포기하고 일에 매진하고 있는 것이다.
이건 그 노력에 대한 최소한의 보상일 뿐.
그러니까 마지막까지 함께 웃기 위해서는 힘들수록 담담히 이겨낼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분위기를 만들어야 할 사람은 프로젝트 매니저인 자신이다.
태연은 직접 편의점에 가서 사온 물건을 풀어 놓으며 소리쳤다.
“고생이 많아요. 아이스크림 사왔으니 먹고 합시다!”
“와아아!”
직원들이 우르르 몰려온다.
아이스크림 하나를 들고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이 게임, 반드시 성공시켜야겠다는 다짐과 함께 책임감이 몰려왔다.
‘제발 좋은 결과가 있었으면…….’
매출을 조금이라도 더 올리기 위해서는 자신이 쉬지 않고 움직여야 한다.
태연은 잠시 휴식을 취하는 직원들을 바라보다가 또 다른 봉투를 들고 타 부서로 이동했다.
늦은 시각, 시간을 장작 삼아 열정을 불사르고 있는 이들은 개발팀뿐이 아니었다.
11시에 퇴근한 태연은 곧장 윤아의 집 앞으로 향했다. 어두운 골목에서 잠시 기다리고 있으려니 레깅스, 집업 후드, 모자, 마스크로 철저히 무장한 김윤아가 모습을 드러낸다. 태연은 주위를 한 번 더 살핀 뒤 다가가 끌어안았다.
“오늘 하루 잘 지냈어?”
“응.”
그녀의 체온, 체향을 마음껏 만끽한 뒤, 팔짱을 끼고 늦은 밤, 산책을 시작했다.
이것이 요 근래 태연과 윤아의 데이트였다.
인근 공원에 도착하자 가로등 아래, 벤치에 자리 잡고 앉은 뒤 쇼핑백에서 물건 하나를 꺼내 건넸다.
포장 상자를 받고 윤아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이게 뭐야?”
“별거 아닌데, 재경팀 여직원 책상에 있는 거 보고 예뻐서 샀어.”
윤아는 기대감을 갖고 포장을 풀었다.
불빛이 나는 예쁜 스노 글로브였다.
“예쁘다!”
소소한 선물이었지만 윤아는 무척 기뻐했다. 그 모습에 흐뭇해하던 태연이 또 다른 선물을 꺼냈다.
“이건 선물 사다가 구입한 거야.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유명 브랜드의 신상 립스틱이었다.
“얼마 전에 새로 출시된 건데 인터넷 검색해 보니까 요즘 여자들 필수품처럼 소지하고 다닐 정도로 인기가 좋다더라.”
윤아는 엄청난 재산을 가지고 있었지만 소비 행위 자체에 큰 관심이 없는 성격이었다. 그저 운동하고, 독서하고, 가끔 촬영 스케줄에 임하고, 생활 패턴이 그게 전부였다.
만나는 사람도 얼마 되지 않았다.
근래에는 한설아 아니면 태연이 전부였다. 그래서 태연이 주는 이런 소소한 선물을 무척 좋아했고 태연도 그런 모습을 무척 좋아했다.
문자, 전화뿐 아니라 이렇게 만났을 때에도 정말 많은 대화를 나누지만 소재는 끊이지 않았고 질리지도 않는다.
소소하게, 새로운 취미를 찾아 공유하며 노력하기 때문이다. 이 역시 태연의 노력으로 인한 결과였다. 김효원 교수의 말을 듣고, 태연은 윤아가 체조 외에, 또 다른 삶의 의미, 혹은 목적을 찾았으면 하는 작은 바람을 품고 있었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 즐거운 시간을 보낸 뒤 아쉬움을 접고 그녀를 다시 집 앞까지 배웅했다.
태연은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털어놨다.
“항상 느끼는 건데, 이렇게 너 집에 보낼 때마다 정말 아쉬워. 요즘은 수시로 네가 보고 싶고 그래.”
윤아는 가만히, 태연의 품에 안긴 채 그 얼굴을 올려다봤다. 그러다 발끝을 들어 입술에 입을 맞추고 말했다.
“나도 마찬가지야.”
잠시 놀란 표정을 짓던 태연이 빙그레 웃으며 끌어안은 팔에 살짝 힘을 줬다.
그리고 포옹을 풀며 말했다.
“잘 자.”
“도착하면 전화해.”
홀로 돌아가는 길, 태연은 그 날 쌓인 모든 스트레스가 어느새 사라져 있음을 느끼고 미소 지었다.
‘정말 신기하다니까.’
태연에게 윤아는 마법과도 같았다.
* * *
몬스터 이터 온라인 OBT 일주일 전.
넥플 플러스뿐 아니라 넥플 본사 모든 직원들이 수시로 클라이언트에 접속해 게임을 플레이하기 시작했다.
물론 단순한 플레이는 아니다.
테스트 협력으로, 이는 태연의 요청과 주도로 진행되고 있는 또 다른 중요한 일정이었다.
테스트는 수시로 동향을 체크하고, 이슈를 보고 받으며 업무를 처리했다. 넥플 직원들의 수만 수천 명이 넘다 보니, 테스트 내용이 수시로 게임 커뮤니티 사이트, 혹은 업계 뒷담화 게시판에 오르내렸다.
이 또한 홍보의 일종이고 유저 반응이라는 생각에 태연은 유심히 살폈다.
-서버 상태 좋고 현지화 작업 잘 되어 있네. 넥플 플러스 신경 정말 많이 쓴 게 보인다.
-난 무엇보다도 시나리오 번역 상태가 제일 마음에 들어. 흔한 오타나 비문 따위도 안 보이고 간간이 초월 번역도 눈에 들어온다.
-아무리 이미 서비스 중인 게임이라지만 이렇게 이슈가 적을 수가 있나? 웃긴 게 뭐냐면 지금 해외 서버가 한국 테섭 패치 내용 따라가고 있다는 거다. 패치 파일도 공유해서 수시로 같이 작업 진행하고 있는 것 같아.
-최적화 업데이트도 하루에 한 번씩 꾸준히 진행되고 있는데 크라잉 소프트 팀과 플러스 팀이 협력해서 같이 하고 있다네.
-모처럼 마음에 든다. 나도 넥플 직원이긴 하지만 이렇게 제대로 된 서비스 운영은 처음이네.
특히 갈대나무 숲 어플 ‘게임’ 게시판에 관련 글이 무척 많이 보인다. 몬스터 이터 온라인 테스트 관련 후기글, 혹은 OBT를 기대하는 글만 계속 올라올 정도였다.
태연은 이런 반응을 수시로 타키자와 사토시에게 공유했다. 누구보다 현지 반응을 궁금해할 사람이 바로 메인 프로듀서 겸 디렉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별거 아니지만 막상 하려면 정말 성가신 일이었는데 태연이 그런 기색 없이 꾸준히 이야기해 주니 타키자와 사토시는 무척 좋아했다.
일주일 후, 마침내 오픈 베타 테스트가 진행됐다.
* * *
“세상에…….”
동접자 현황을 살피던 프로그래머들이 입을 다물지 못했다.
무려 이십 만 명에 달하는 유저가 접속한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태연이 이를 예측하고 충분히 조치를 취해놨다는 점이다.
넥플의 역량을 최대로 끌어모아 동접 삼십만 명까지, 대기열 없이 접속해서 쾌적하게 게임을 즐길 수 있도록 했다.
레이드 컨텐츠가 강점인 몬스터 이터 온라인은 버그 없는 쾌적한 게임 환경의 제공이 생명과도 같다.
정식 서비스 때, 결제 유저를 충분히 확보하려면 OBT때 잘해야 한다.
그래서 시작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넥플에서의 첫 공식 커리어야. 반드시 성공시켜야지.’
태연은 긴장감을 늦추지 않았다.
둘째 날 최고 동접률은 22만 명이었다.
유저 수가 감소하지 않고 꾸준히 상승하고 있었다.
-대기열도 없었고 서버 다운도, 긴급 점검도 없었다. 렉이 없는 건 아니지만 신경 쓰일 정도는 아니었음.
-뭐지? 이건 넥플 답지 않아!
-해외 서버보다 훨씬 낫네.
-지금 그쪽 패치도 여기 따라가고 있는 중. 뭔가 상황이 웃기긴 한데 그만큼 잘하고 있다는 증거니까 기분은 좋다. 이대로만 하자!
예정된 OBT 기간은 한 달.
이 분위기가 계속된다면 휴식 기간 없이 바로 정식 서비스를 시작해도 될 것이다.
김명욱 대표는 빠르게 움직였다.
기자회견을 통해 런칭 프로모션 계획을 발표했고, 타키자와 사토시, 현지 운영팀이 함께 하는 OBT 및 런칭 기념 인터넷 중계방송 일정을 진행했다. 그야말로 정신없이 돌아다니며 홍보 및 외부 일정을 소화해내는 저력을 과시했다.
그 결과는…….
[국내에 상륙한 세계적인 MMORPG 몬스터 이터 온라인, 동접자 35만 명 돌파!]
[대한민국 게임 OBT 동접 신기록 수립!]
[기록 경신은 현재 진행 중. 세계적인 IP의 저력 과시!]
대한민국 게임업계뿐 아니라 수많은 언론과 대중이 주목할 정도로 놀라웠다.
그러나 태연과 개발팀에게는 들떠 축배를 들 시간이 없었다.
동접자 수가 늘었다는 것은, 해야 할 일이 그만큼 많아지고 있다는 말과 같으니까.
더욱이 온갖 클레임이 쏟아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기대와 관심이 예상치를 훌쩍 뛰어넘으니 현재 운영팀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을 지경이 되어 버렸다.
이에 대해 태연은 라이브 본부로부터 베테랑 운영자들을 지원받아 전화 및 이메일 업무를 맡겼다.
태연이 OBT 이전부터 라이브 본부장들로부터 협력 약속을 받아놓았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한 게 주효했던 것이다.
기획, 프로그램, 아트 담당자들은 운영팀으로부터 넘겨받은 문의 내용 답변에 전념했다.
OBT 31일 차.
마침내 모든 테스트 일정이 끝났다.
‘바로 시작할 수는 없겠어. 며칠 동안이라도 쉬어야지.’
서비스 기간은 31일이지만 사전 작업을 더하면 개발, 운영팀은 무려 두 달 동안 철야 근무를 감행하며 일에 전념해 왔다.
무엇보다도 휴식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그건 태연 본인에게도 해당되는 일이었다.
“오늘부터 다음 주까지, 아무것도 하지 말고 쉬어 봅시다!”
“우오오오!”
“드디어 휴식이다!”
“여기서 더 했으면 나 분명 과로사했을 거야.”
넥플 플러스 직원들은 거무죽죽한 얼굴로 환호를 터뜨렸다.
* * *
태연에게 주어진 휴식 기간은 단 하루.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넥플 플러스 직원들이 담당할 게임은 몬스터 이터 온라인 하나였지만 태연은 세 개, 거기에 다른 업무들도 포함되어 있었으니까.
‘그래도 하루는 편하게 쉴 수 있다.’
태연은 하루 종일 윤아와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이른 아침, 집에서 식사를 준비하는 손길이 분주하다.
얼큰한 김치찌개, 계란찜, 간고등어구이 등등.
십여 년 이상의 자취로 단련한 요리 실력을 모두 쏟아부었다.
조리를 막 마치고 환기를 시키고 있을 때.
띵동.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왔구나!’
태연은 황급히 달려가 출입문을 열었다.
스키니한 청바지에 하얀 티셔츠,
긴 머리를 깔끔히 말아 올려 가느다란 목선을 드러낸 윤아가 방긋 웃고 있었다.
“막 아침 식사 준비 끝난 참이야. 어서 와.”
그녀의 첫 방문이었다.
줄곧 운동, 특히 몸매 관리가 생명인 체조를 해왔던 탓에 소식이 습관이 된 윤아였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금기를 깨기로 작정한 것 같았다. 식사를 마친 후, 커피 대신 그녀가 자주 마시는 차를 가져온 태연이 말했다.
“잘 먹어줘서 기쁘긴 한데, 너무 무리한 거 아냐? 과식했지?”
“…….”
얼굴이 조금, 아니, 사실은 많이 불편해 보인다.
무리한 게 맞았다.
시원한 차를 조심조심 마시는 광경을 보고 태연은 웃는 얼굴로 물었다.
“그냥 사이다 줄까?”
절레절레 고개를 흔드는 그녀.
“왜, 트림 때문에? 난 상관없어.”
“내가 신경 쓰여.”
“음식을 조금만 만들 걸 그랬다. 앞으로는 참고해야겠네.”
차를 마신 후 가볍게 아파트 단지를 산책했다. 평일 오전이었기에 사람이 없어서 여유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점심은 집에 미리 준비해 둔 치즈 케이크 한 조각, 마카롱 몇 개로 때웠다. 그리고 소소한 대화를 나누다가 함께 책을 읽었다.
몰입하던 태연은 그녀의 눈이 귀엽게 깜빡거리는 광경을 보고 말했다.
“졸리면 눈 좀 붙여.”
잠시 고민하던 윤아가 그대로 엎드리려고 하자 태연이 황급히 제지했다.
“그러지 말고 그냥 내 침대에서 자. 깨끗이 쓰고 자주 세탁해서 불쾌한 냄새는 나지 않을 거야. 아, 옷도 좀 갈아입고. 그 상태로는 불편하잖아.”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간편한 트레이닝복 세트를 내온다. 윤아가 눈에 이채를 띠었다.
“이거 내가 광고하는 거네. 나 주려고 준비한 거야?”
“오늘 하루 종일 집에 같이 있기로 했잖아. 그래서 어제 이것저것 준비 좀 했지. 세면도구랑 자주 쓰는 화장품도 챙겨놨어.”
“준비성이 철저하네.”
“그래야 프로듀서 노릇도 할 수 있거든. 갈아입고 나와 봐.”
잠시 후, 바뀐 복장으로 모습을 드러낸 윤아를 보며 태연이 감탄했다.
“굉장하네. 난 광고 사진 보고 보정이 어느 정도 들어갔겠지 생각했는데…….”
민망했던지, 그녀는 냉큼 세면장으로 들어가 버렸다. 태연은 미소 지으며 잔잔한 음악을 재생시키고 책을 계속 읽었다.
한가로운 시간은 계속 이어졌다.
* * *
특별히 무언가를 하지 않았고, 대부분 집에서 시간을 보냈지만, 진정한 ‘휴식’이란 어떤 것인지 체험한 시간이었다.
이른 아침, 태연은 차를 이용해 윤아를 자택까지 데려다준 뒤, 회사에 출근했다.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았다.
모든 것이 상쾌하고 완벽한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