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한 게임 개발자가 너무 유능함 28화
17. 봄과 겨울이 함께 찾아오다(3)
태연이 중고차 구입을 선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굳이 새 차 살 필요 있을까? 그냥 깔끔하고 연식 오래되지 않은 중고차 사는 게 어떨까?
윤아가 제안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태연은 차에 대해 잘 아는 최종학의 도움을 받아 유명한 양재 중고차 시장에서 신형, 독일제 SUV를 구매했다.
“고생했다. 수고비로 한우 사줄게.”
“이야, 돈 많네. 그런데 무슨 바람이 들어서 갑자기 차를 산 거야?”
태연은 운전하며 말없이 미소만 지었다.
잠시 후, 두 사람은 서판교의 한 고깃집에 도착했다.
태연은 최고급 한우를 넉넉히 주문한 뒤 말했다.
“사실 소개해 주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굳이 이곳까지 데려온 거야.”
“소개? 누구?”
어리둥절해 하던 최종학은 잠시 후 모습을 드러낸 김윤아를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녀는 수줍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말씀 많이 들었어요.”
“어, 어떻게……!”
태연은 입을 다물지 못하는 최종학에게 그녀와의 인연에 대해 들려줬다.
최종학은 식사 내내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너한테 제일 먼저 알려주는 거야. 사실 우리 부모님께도 말씀 못 드렸어. 다음 주말에 찾아뵙기로 했어.”
“그렇구나. 우와. 아직도 얼떨떨하네.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야. 세상에, 평생 연애 한 번 못해 본 모태솔로 우리 형이 여왕님과 만나고 있었다니…….”
최종학이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저, 나중에 사인, 사진 촬영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저 진짜 팬이었거든요.”
“지금 하면 되죠. 그런 건 얼마든지 해드릴 수 있으니 편하게 말씀하세요.”
바로 소원풀이를 한 최종학이 바보처럼 웃으며 기뻐했다.
문득 떠오르는 게 있어 태연이 물었다.
“너 그거 함부로 자랑하고 다니지 마.”
“내가 바본 줄 알아? 나 SNS도 안 하니까 걱정 마.”
종학은 바꿀 때가 되었다며 애물단지 취급하던 휴대폰을 소중히 끌어안았다. 태연은 그 광경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나 오후에 약속 있어서 이만 가볼게. 형수님도 좋은 시간 보내세요.”
식사를 마치자마자 종학은 뒤늦게 급한 일이 떠올랐다는 듯 어디론가 가버렸다. 태연은 아무렇지 않게 윤아에게 물었다.
“차 뽑은 첫날이니 가볍게 드라이브라도 하자. 괜찮지?”
그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윤아가 가늘게 뜬 눈으로 물었다.
“오빠, 이러려고 동생분 눈치 줘서 쫓아낸 거야?”
“에이, 우리 종학이 누구 눈치 보며 사는 녀석 아니야.”
“거짓말, 아까 오빠가 눈빛으로 무언의 협박을 하는 거 내가 봤는데?”
“눈에 뭔가가 들어가서 그랬던 거야. 안전벨트 착용 끝. 가보실까?”
태연이 너스레를 떨며 시동을 켜자 윤아도 웃고 말았다.
* * *
3주 후에 몬스터 이터 온라인 OBT가 시작된다. CBT 결과가 무척 좋았고 대형 게임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벌써부터 후기, 공략, 영상 등이 올라오며 뜨거운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더욱이, 벌써부터 넥플 본사에서 광고를 쏟아내고 있었기에 OBT 때 많은 유저들이 몰릴 것이 확실한 상황이었다.
CBT가 별일 없이 끝났다고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처리해야 할 자잘한 버그 이슈가 꽤 쌓인 상황이었기에 이걸 처리하고 테스트까지 끝내려면 3주라는 시간도 부족할 수 있었다.
판테온의 경우, 회사 간부들에게 선보일 알파 버전 완성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현재 두 개의 플레이어 캐릭터가 존과 필드를 뛰어다니며 간단한 퀘스트 수행이 가능한 단계까지 작업 됐다. 모든 개발자들이 예정된 알파 버전 빌드 완료를 위해 본인의 업무 처리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테스트도 그들의 몫이었다.
프로젝트 D의 경우, 세계관 정리, 메인 시나리오 작업이 진행 중이었다. 이 작업은 태연과 시나리오 작가 배수현이 함께 진행 중이었다.
세 명의 스토리보드 작가들은 태연이 컨펌을 낸 텍스트를 그림으로 옮기는 작업을 진행 중이었다. 아직 초안 단계이기에 콘티 그림을 디테일하게 그리지는 않았지만 세 명이 베테랑 작업자이고 팀워크도 잘 맞다 보니 초안 작업조차도 감탄이 나올 정도로 훌륭했다.
그래픽 구현은 디즈니로부터 넘겨받은 애니메이션 리소스를 기반으로 진행 중이라 그 속도가 매우 빨랐다.
그래픽 작업에 한해서라면 판테온보다도 결과물이 빨리 뽑히고 있었다. 그래서 예정보다 일찍 기획자와 프로그래머 채용을 진행 중이었다.
일정을 따져보던 태연이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두 달 안으로 몬스터 이터 온라인 정식 서비스가 시작될 테니…… 앞으로 몇 달 동안은 죽었다 복창해야겠구나.’
OBT가 시작되면 정식 서비스 후 반년 동안은 정말 정신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야 한다.
라이브 서비스를 컨트롤하면서 신규 콘텐츠 업데이트 준비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퍼블리싱 게임이 아니었다면 동시 개발 진행 같은 일은 엄두도 못 냈을 것이다.
‘이러면 윤아 만날 시간이 줄어들 수밖에 없는데……
오늘도 야근이다.
남들 퇴근할 때 시니어 개발자들과 모여 업무 보고 및 일정 회의를 두 건 진행해야 한다. 그게 끝나면 본사 사업팀, 김명욱 대표와 만나 광고 일정 및 시안을 체크한다.
그게 끝나면 밤 아홉 시.
그러면 퇴근하냐고?
이제 그때부터 몬스터 이터 온라인 개발자 전용 인트라넷에 접속해서 이슈 체크 및 컨펌을 진행한다.
현재 시니어 개발자들도 실무 작업으로 돌렸기에 작업 확인 및 최종 승인은 오롯이 자신의 몫이다. 이게 이루어져야 본사 QA팀이 테스트해서 결과를 통보해 준다.
이것 외에 할 일도 많지만 일단 오늘은 거기까지.
끝나고 나오면 오후 열 시에서 열 한 시 사이.
그때부터 집으로 갈 수 있냐면 그것도 아니다.
‘잠깐이라도 좋으니까 윤아 얼굴을 봐야지.’
하루 일과 중 가장 중요한 시간이다.
사실 요즘은 이 마지막 일정 하나만 바라보고 꿋꿋이 버티고 있는 중이다.
‘그냥 빨리 결혼해 버리고 싶다.’
퇴근 후 집에 가면 윤아가 맞아주는 상황.
거기에 그녀를 닮은 아이도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할 것 같다. 모든 피로가 씻겨나가겠지?
잠시 행복한 망상에 젖어 있던 태연은 정신 차리고 업무를 재개했다.
이제 겨우 오후 네 시.
예정 퇴근 시간까지 일곱 시간 남았다.
“퇴근 시간을 어떻게든 당겨보자.”
키보드와 마우스를 조작하는 손길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 * *
주말, 태연은 이른 아침부터 윤아를 태우고 여수로 이동했다.
오후가 되어서야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나 이상한 곳 없어?”
“아주 예뻐. 부모님이 좋아하실 거야.”
“올림픽 경기 때보다 더 떨려. 진정이 안 돼.”
부모님 자택은 인적이 거의 없는 여수 산골 부근에 위치해 있었다.
단아한 투피스 차림에 옅은 화장.
평소 하지 않던 귀걸이와 목걸이도 착용했다.
태연 역시 깔끔한 캐주얼 룩으로 예의를 갖췄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차 안에서 서로의 모습을 공들여 체크한 뒤 낡은 아파트 안으로 들어갔다.
초인종을 누르자마자 잔뜩 들떠 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태연이냐? 잠시 기다려라!
“우리 엄마야.”
“…….”
태연은 속삭이며 덜덜 떨고 있는 윤아의 손을 잡아줬다.
잠시 후, 문이 거칠 게 열리며 순박한 인상의 중년 부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 아들, 어서 와라!”
“태연이 놈이 정말 여자 친구를 데리고 왔어? 아무래도 믿을 수가 있어야지. 제깟 놈이 대체 무슨 수로…….”
한걸음에 달려 나온 어머니와 투덜거리며 뒤따라온 아버지.
뻣뻣하게 굳어 있던 김윤아는 황급히 고개 숙였다.
“아, 안녕하세요. 태연 오빠와 사귀고 있는 김윤아라고 해요.”
“어디서 많이 봤는데……?”
“어? 잠시만……?”
곧, 부모님이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윤아를 알아본 것이다.
“그 체조 여왕 맞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확실하네. 내가 TV에서 봤어!”
윤아도 당혹스러워하며 태연에게 속삭였다.
‘오빠, 부모님께 나에 대해 말씀 안 드렸어?’
‘응. 놀라게 해드리고 싶어서.’
‘정말…….’
눈을 흘기는 윤아에게 웃어 보인 뒤 태연이 말했다.
“언제까지 바깥에 세워 둘 거야? 이러다 배고파 죽겠다.”
“어머, 내 정신 좀 봐. 어서 들어와라. 엄마가 네가 좋아하는 거 다 해놨어!”
“어어……!”
어머니는 금방 이성을 되찾았지만 아버지는 김윤아를 보며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만큼 놀랐던 것이다.
김윤아는 대한민국이 자랑하는 체조여왕이자 스포츠 영웅이었으니까.
그 위명은 생업에 종사하는 시골 토박이 중년 부부에게도 아주 잘 알려져 있었다.
“일단 밥부터 먹을까? 아무것도 안 먹었지?”
“응. 엄마 밥 먹으려고 아침 일찍 나와서 휴게소도 안 들리고 온 거야.”
“잘했다. 일단 먹자. 먹고 이야기하자.”
어머니는 멍하니 서 있던 아버지의 옆구리를 세게 때리며 윽박질렀다.
“정신 안 차려? 계속 애 앞에서 추태 부릴 거야?”
“뭐야? 내가 언제 추태를 부렸어? 그리고 때리긴 왜 때려? 아파 죽겠네, 정말.”
“그게 아파? 아이고, 못났다, 정말. 쯧쯧.”
부모님의 정겨운 모습에 태연은 미소 지었다. 그리고 윤아의 귀에 속삭였다.
“정신없지? 우리 집안 분위기가 원래 이러니까 이해해 줘.”
“으응.”
시끌벅적한 분위기 속에 식사가 시작됐다.
윤아로서는 처음 경험해 보는 집안 분위기였다.
한참 수다를 떨다 보니 어느새 날이 어두워졌다.
태연은 아쉬움을 접어두고 말했다.
“이제 가봐야 할 것 같아요.”
“벌써?”
“자고 가지?”
이른 작별에 아쉬워하는 부모님.
태연은 씨익 웃었다.
“판교로 올라오시는 게 어때요? 자주 뵐 수 있을 텐데.”
“엄마는 꽃 가게 해야지.”
“쌀장사 네가 대신 해줄 거 아니면 조용히 해라.”
돈이 많았다면…….
태연은 항상 아쉬움을 갖고 있었다.
그랬다면 부모님이 이런 허름한 곳이 아닌 판교처럼 좋은 동네에서, 멋진 집과 상점을 하나씩 선물한 뒤 자주 마주치며 살 수 있었을 것이다.
‘몬스터 이터 성공하면 인센 얼마나 나오려나.’
개발 총괄에 대표에 피디라지만 결국 회사에 묶인 월급쟁이 신세였다.
더욱이 가진 돈 모두 털고 대출까지 받아 집을 구매한 게 아직 1년도 되지 않았다.
“제가 돈 많이 벌면 판교로 모실게요. 거기 아파트 좋은 거 많아요. 상점도 목 좋은 곳 많고.”
“엄마는 여수가 좋아.”
“친구들도 다 여기에 있는데 판교까지 가서 뭐하냐. 난 여기서 살란다.”
아쉬운 감정을 주고받는 태연 가족을 윤아가 조용히 지켜봤다.
배웅하는 길.
시동을 걸어 둔 차 앞에서 아버지가 헛기침을 하더니 물었다.
“그래서 결혼은 언제 할 거냐?”
엄마도 관심을 보인다.
윤아만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었다.
태연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올해 넘기지 않으려고요.”
“그래. 그래야지.”
그것으로 작별인사는 끝.
아쉬워하는 부모의 얼굴을 다시 한번 눈에 담은 뒤, 태연은 길을 떠났다.
* * *
며칠 후, 태연은 윤아 아버지의 부름을 받고 저녁 시간, 잠시 짬을 내어 윤아의 집으로 이동했다.
“내가 한 가지 제안해도 되겠나?”
“네. 말씀하세요.”
“난 자네하고 윤아가 대학에 입학해서 공부를 했으면 좋겠어.”
“대학…… 이요?”
“조건을 거는 게 아니야. 거절해도 자네는 어떤 불이익을 겪지 않을 거야. 그냥 아쉬워서 해보는 제안이지.”
태연은 묵묵히 김효원 교수의 말을 경청했다.
“자네도 그렇고 윤아도, 너무 이른 나이에 일을 시작했어. 나름의 위치에서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는 것 같지만 둘 다 아직 한참 어리고 젊은 나이란 말이지. 사람은 배워야 해. 아는 만큼 세상이 보이는 법이야. 내가 보기에 두 사람이 보고 있는 세상은 아직도 너무 좁아.”
태연은 그 말에 느껴지는 게 있었다.
“특히 자네, 자네는 지금보다 더 큰 일을 할 사람이야. 맡은 일, 이상을 해내고 싶다면 공부를 해야 해. 윤아도 마찬가지야. 은퇴 후 뭘 해야 할지를 몰라서 돈과 시간만 축내고 있어. 인생은 이제부터 시작인데…… 내 마음, 어떤지 알겠나?”
“네.”
태연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잠시 고민한 뒤 대답했다.
“당장은 어렵습니다. 맡고 있는 일이 워낙 많아서요.”
“당장 하라는 게 아니야. 여유가 생기면 해보는 게 어떠냐고 권유하는 거지.”
과연 언제 가능할까?
잠시 일정을 생각해 보던 태연은 그 기간을 3년 후로 잡았다.
판테온 런칭.
몬스터 이터 온라인 PM직 사퇴.
그리고 프로젝트 D 정식 출시까지.
‘몬스터 이터 온라인 PM 재직 기간은 이제 2년도 남지 않았으니…… 최대한 빨리 끝내 버리고 바로 판데모니움 제작에 들어간다고 하면……?’
김효원 교수는 묵묵히 차를 마시며 태연의 생각이 정리되는 순간을 기다렸다.
이윽고, 태연이 입을 열었을 때.
“정확한 일정은 말씀드리기 어렵지만…… 3년 후. 지금 진행 중인 프로젝트들이 끝나면 그때를 기점으로 학업 일정을 잡도록 하겠습니다.”
태연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일이 꼬여 일정이 늦춰지더라도, 반드시 저와 윤아의 대학 졸업장을 아버님과 어머님께 선물 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좋아. 그 정도면 충분해.”
김효원 교수는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태연을 알게 된 이후, 처음으로 드러낸 긍정적인 감정이었다.
그 광경을 목격한 태연은 조심스레, 마음에 담아 둔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저, 그리고 그것과 별개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