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한 게임 개발자가 너무 유능함 27화
17. 봄과 겨울이 함께 찾아오다(2)
점심시간과 오후 시간, 태연이 면담한 사람은 총 두 명이었다.
며칠 전부터 계속 성태희를 흘끔거리거나, 어디론가 데려갔다가 안 좋은 표정으로 돌아왔던, 그 이후 계속 멍한 표정으로 모니터만 바라보던 남자 개발자들이었다.
물론 성태희는 아무 죄가 없다.
굳이 찾아보자면 과할 정도로 매력적이고 성격이 좋다는 것 정도?
대부분 남자 겜돌이, 개발자들이 여성 면역이 없는 모태솔로라는 것을 감안하면 존재 그 자체가 치명적인 셈이다.
“그냥…… 계속 신경 쓰여요. 거절당하긴 했지만 기분 나쁘게 거절한 것도 아니었고 지금도 업무 이야기할 때는 웃으며, 친절하게 잘해 주거든요. 그래서 더 혼란스럽고 마음이 가고 그래요.”
올해 서른 살이 넘은 남자 시스템 개발자는 그렇다고 하고…….
“솔직히, 같이 일해 본 남자 개발자치고 태희 씨에게 흔들려보지 않은 사람 없을 걸요? 동료라서 잘해 준 것뿐이니 내가 특별하니 그런 거라고 잠깐이나마 착각했던 게 실수죠.”
그녀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원화가는 오히려 스스로의 어리석음에 대해 자책한다.
태연은 동료 개발자에게 이성적인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어서 공감대 형성이 어려웠지만, 아예 이해 못 할 내용이 아니니 안쓰러운 표정으로 귀담아들었다.
충고 따위는 필요 없는 문제였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본인들이 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냥 들어주고, 같은 눈높이에서 대화를 주고받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위로가 되어줄 수 있다. 태연은 그 사실을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놓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니 내가 잘 챙겨야지.’
이런 일로 퇴사해 버리면 곤란하다.
두 청춘과 면담을 끝낸 뒤, 태연은 성태희를 바라봤다. 그녀는 이영애 AD의 자리에서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아트 여직원 관리는 이영애 AD님이 잘하고 계시니까…… 신경 쓰지 말자.”
여직원은 정당한 업무 사유 외에 가급적 부딪히지 않고 사적인 대화도 섞지 않는다.
이것이 태연이 지금까지 지켜 온 원칙 중 하나였다. 이걸 제대로 못 해서 엄한 일을 저지르거나, 혹은 잘못 엮여 회사를 떠난 이들을 많이 보아왔기 때문이었다.
‘그게 아니라도 이제는 더 조심해야지.’
왜냐면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니까.
업무용 책상 앞에 놓인 작은 화분을 보고 히죽 웃던 태연이 누군가에게 문자를 보내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누군가 유심히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채.
* * *
요 근래 태연은 퇴근하면 곧장 서판교 카페거리로 향하고 있었다.
꽃집을 연상케 하는 예쁜 카페에 들어가자마자 태연은 카운터의 여사장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네. 어서 오세요.”
“안에 있죠?”
“네. 2층에 있어요.”
그녀는 김윤아의 오래된 지인이었다. 얼마 전 김윤아로부터 정식 소개받았고, 그 후로 이곳을 약속의 광장마냥 애용하게 되었다.
2층도 꽃과 화분, 정글을 연상케 하는 각종 장식물이 가득했다. 외곽에 칸막이가 있는 자리가 있었는데 바로 그곳에 모자를 깊숙이 눌러 쓴 김윤아가 앉아 있었다. 그녀는 이어폰을 착용한 채 독서에 빠져 있었다.
태연이 조심스레 맞은편에 앉자 인기척인 느낀 그녀가 이어폰을 빼고 빙긋 웃어 보였다.
“왔어?”
“응. 뭐 읽고 있었어?”
그녀가 보인 책은 유명 작가의 수필집으로, 태연이 선물한 물건이었다.
태연은 그녀가 독서광이라는 사실을 알고 책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같은 눈높이에서 대화를 하려면 간단한 취향부터 맞출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태연도 가방에서 똑같은 책을 꺼냈다.
“어디까지 읽었어? 난 지금 124페이지 읽고 있는데…….”
이런 노력 덕분에 대화거리가 더욱더 풍성해졌다.
정식 교제를 시작한 건 이제 겨우 한 달 정도였지만 그 전까지 많은 일이 있었다.
첫 영화관 데이트 때, 자신의 마음에 확신을 갖고 있던 태연은 늦은 저녁, 고백했고 그날 자정이 되기 전 문자로 긍정적인 답변을 받았다.
그 후에 알게 된 사실은 서로가 서로에게 첫 연인이라는 것.
김윤아는 체조에, 태연은 게임 개발에만 전념해 왔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근처 중식집에서 식사를 마친 후, 어두운 공원을 산책하는데 그녀가 머뭇거리는 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곤란한 용건이 있는 모양이라 태연이 먼저 물었다.
“무슨 일 있어?”
“부모님이 오빠를 만나고 싶어 하셔서, 어떻게 말해야 하나 고민 중이었어.”
태연은 깜짝 놀라 물었다.
“우리 사귀는 거 부모님이 알고 계셔?”
“난 감추려고 했는데 설아 언니가…….”
“아, 형수님…….”
태연이 요 근래 알게 된 또 다른 사실 중 하나는 한설아가 상당한 수다쟁이라는 것이다.
김윤아의 어머니는 큰 사업채를 거느리고 있는 유명 패션 디자이너였고 당연히 톱스타 한설아와 오래전부터 인연을 맺고 있었다.
“부담스럽지?”
눈치를 보는 모습이 왜 이리 사랑스럽던지.
“조심스럽긴 하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윤아 부모님을 처음 뵙는 자리니까.”
태연은 부모님의 취향에 대해 묻기 시작했다.
그 날 어떤 옷을 입을지, 선물은 어떤 것을 준비하는 게 좋을지 미리 상의하고 준비하려는 것이다.
윤아는 태연의 이런 모습이 기꺼웠다.
자신과의 관계를 그만큼 소중하고 진지하게 여기고 있다는 증거였으니까.
3일 후, 캐주얼한 세미 정장을 갖춰 입고, 오른손에는 꽃다발, 왼손에 쇼핑백을 든 태연이 윤아의 자택 앞에 서 있었다.
‘들어가자!’
태연은 조심스레 초인종을 눌렀다.
“오빠 왔어?”
청바지와 셔츠를 단정히 입은 윤아가 마중 나왔다. 함께 거실로 들어가니 심상치 않은 기품을 풍기는 중년 부부가 보였다.
태연은 먼저 윤아의 어머니, 최윤옥에게 꽃다발과 고급 향수가 든 포장 상자를, 아버지 김효원 교수를 위해서는 조금 묵직한 사각형의 선물 상자를 건넸다.
“어머나, 뭘 이런 걸 다…….”
예쁜 꽃다발과 향수 앞에 최윤옥의 카리스마가 한순간에 해체됐다.
반면 김효원 교수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게감이 꽤 있군, 이건 뭐지?”
“윤아의 조언을 듣고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마련했습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선물을 풀었다.
최신형 맥북으로, 김효원 교수 자신이 강의 준비 때 사용하는 것의 상위 기종이었다.
김효원 교수가 최신 전자 제품을 무척 좋아하고, 요 근래에 강의용 노트북을 바꾸기 위해 가격 비교 사이트를 유심히 보고 있다는 정보를 윤아로부터 입수하고 준비한 선물이었다.
“준비성이 좋군.”
그 말에 태연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윤아도 미소 짓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안심을 하기에는 일렀다.
윤아의 부모님은 태연 이상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상대해 왔기에, 사람의 정신을 헤집어 놓는 일에 대해서는 달인이나 다름없는 사람들이었다.
취조, 아니, 본격적인 대화가 시작됐다.
“부모님은 뭐하시나?”
김효원 교수의 첫 질문이었다.
“여수에 거주 중이시고 아버지는 쌀장사, 어머니는 꽃 가게를 하십니다.”
두 사람의 대화는 마치 대기업 면접을 연상케 했다.
모녀는 그 광경을 당혹스러워했다.
그러건 말건,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고졸이던데, 대학에 진학하지 않은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가?”
“당시에는 하루빨리 게임을 개발하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로 업계에 입문해서 일을 시작했습니다.”
“군대는 어디 나왔지?”
“당시 입사했던 회사에서 방위산업체 혜택을 받았습니다.”
“일을 정말 잘했나 보군.”
“열심히 했습니다.”
힘들었지만 꿈과 열정으로 버텼던 시간이었다. 태연은 그때를 생각하며 미소 지었다.
그 얼굴을 가만히 살펴보던 김효원 교수가 다른 질문을 던졌다.
“자네 요즘 회사 경영하지?”
“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경영학을 배운 적이 없을 텐데, 전문 지식이 부족해서 어려움을 느껴본 적은 없나?”
그 말에 찔리는 게 있었던 태연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솔직히 대답했다.
“요즘 절실히 느끼고 있습니다.”
“늦게라도 대학에 진학에서 공부해 볼 생각은 안 들던가?”
“가지고 있긴 하지만 과연 언제 시간이 날지 확신이 서지 않아서…….”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그때까지 가만히 경청하던 최윤옥은 시계를 확인하곤 갑자기 나섰다.
“거기까지 하고 슬슬 밥이라도 한술 뜨는 게 어떨까요? 유 서방도 아침 식사 하지 않았을 텐데.”
“뭐? 유, 유 서방? 누구 마음대로 벌써 서방이야?!”
“엄마!”
부녀는 당혹스러워했다.
반면 태연은 기다렸다는 듯 넙죽 받았다.
“주시면 감사히 먹겠습니다, 장모님!”
“준비를 좀 해야 하는데, 기다리면 금방 차려 줄게요.”
“저 자취 경력이 십 년이 넘어서 어지간한 요리라면 능숙하게 해낼 수 있습니다. 제가 도울 게 있다면 돕겠습니다!”
태연의 살가운 태도에 최윤옥은 웃음을 터뜨릴 정도로 좋아했다. 그 모습을 못마땅한 듯 바라보던 김효원 교수가 부끄러워하는 김윤아에게 단호히 말했다.
“난 아직 허락 안 했다.”
“아빠!”
* * *
직접 설거지를 끝내고 다시 거실 소파에 앉으니 이번에는 최윤옥의 주도로 티타임이 시작됐다.
태연은 잔뜩 긴장했지만 최윤옥의 방식은 김효원 교수와 달랐다.
“인터뷰 기사에서 봤어요. 판교에 집 장만했다죠?”
“아니, 초면에 그런 걸 왜 물어봐?”
“가만히 있어 봐요, 좀!”
“뭘 가만히 있어? 자꾸 쓸데없는 질문만 하잖아!”
“쓸데없긴 뭐가 쓸데없어요? 이게 얼마나 중요한 건데, 쯧쯧, 예나 지금이나 세상 물정 모르는 소리만 한다니까.”
최윤옥의 관심사 대부분은 태연의 신변, 특히 경제 능력에 대한 부분이었다.
이 부분도 걸릴 것이 없었기에 태연은 성실히 대답에 응했다.
태연이 집을 벗어난 시간은 오후 다섯 시 경이었다. 윤아는 태연에게 무척 미안해했다.
“당혹스러웠지?”
“음? 아니야. 난 장인 장모님 심정 충분히 이해해. 나였다면 아마 더 했을 거야.”
윤아의 미간이 귀엽게 찡그려졌다. 태연은 그 부분을 손가락으로 콕 찌르며 물었다.
“왜 그런 표정을 지어? 나랑 결혼하는 거 싫어?”
“아직 프로포즈도 안 했잖아.”
“할 거야. 지금 준비하고 있어.”
“정말?”
“응. 야구장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곳에서 아주 거하게…….”
“하지 마!”
“아니면 방송에 나가서 말할 시간 좀 달라고 한 다음에 카메라 보고 무릎 꿇으면서 노래를 부른다든지…….”
“그런 거 하지 말라니까!”
질색하는 윤아를 보며 태연은 무척 즐거워했다.
‘역시, 더 이상 시간 질질 끌 필요는 없겠어.’
이미 마음은 정해졌다.
태연은 윤아의 허리를 끌어안고 노을을 보며 걸었다. 부끄러워 잠시 머뭇거리던 윤아가 태연의 어깨에 기댔다.
한참 후에야 태연이 속삭이듯 말했다.
“다음 주에 우리 부모님 뵈러 가자.”
“응. 그런데 여수까지 고속버스나 기차 타고 갈 거야? 난 상관없는데…… 괜찮겠어?”
잠시 말문이 막혔던 태연이 헛기침을 터뜨리고 물었다.
“내일 보러 가야겠네. 차는 어떤 게 좋아? 중형 세단? 아니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