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한 게임 개발자가 너무 유능함 26화
17. 봄과 겨울이 함께 찾아오다(1)
태연은 넥플 플러스 직원들을 모두 모아놓고 말했다.
“모두 고생 많으셨어요. 내일부터 3일 동안 휴가 드릴 테니 일 생각하지 말고 집에서 푹 쉬다 오세요.”
그리고 이어진 말에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오늘 업무는 여기서 끝, 뭐해요? 빨리 퇴근하세요!”
넥플 플러스는 업무 공간은 순식간에 텅 비었다.
“이럴 때는 행동이 참 빠르네.”
태연은 그렇게 중얼거린 뒤 넥플 엔터테인먼트 개발실로 이동했다.
판테온을 개발하는 ‘유니버스’와 ‘프로젝트D’ 개발팀이 각자의 공간에서 열심히 개발 작업을 진행 중이었다.
‘일이 끊이지를 않네.’
자리에 앉아 점심도 거른 채 일을 처리하던 태연은 오후 세 시 정각, 조선아 대리의 연락을 받고 강당으로 이동했다.
그곳에 무려 세 자릿수에 달하는 수많은 학생들이 질서 정연하게 앉아 빈 강당을 바라보고 있었다.
청연 문화산업 대학교 견학생들이었다.
조선아 대리의 소개를 받고 자연스럽게 강연 대에 선 태연이 마이크를 들고 웃는 얼굴로 말했다.
“안녕하세요. 게임 개발자 유태연입니다. 넥플에 방문해 주신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 * *
오후 다섯 시, 견학생 강의를 마친 뒤 그들이 보내온 포트 폴리오를 살피며 피드백을 하고 있던 태연은 손영상 이사의 부름을 받았다.
그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태연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그러다 죽겠다. 요즘 계속 새벽 시간까지 철야 작업 하고 있다면서? 좀 쉬는 게 어떠냐?”
“그러고 싶은데 여건이 허락하지 않네요. 그래도 CBT가 끝난 지 얼마 안 돼서 그만큼 여유가 생겼어요.”
손영상 이사가 고개를 저었다.
“요즘 네 활약 덕분에 견학 요청이 쇄도하고 있다던데, 당분간 그거 내가 맡을 테니 좀 쉬어라. 너한텐 여유가 좀 필요해.”
태연은 뭔가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손영상 이사의 눈빛이 단호했다.
“내일 하루 정도는 푹 쉬어. 데이트라도 하라고.”
“친한 여자가 없어서…….”
“조선아 대리 있잖아.”
“그냥 직장 동료 관계일 뿐이죠.”
“그러다 누가 채가면 어쩔래? 분명 후회한다, 너.”
“진짜 아무 관계도 아니고 특별한 감정도 없어요. 그리고 조 대리님은 이미 만나는 사람이 있어요.”
“그래? 누군데?”
“말씀 못 드리죠. 사생활인데.”
태연이 넉살스럽게 웃자 손영상 이사도 피식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아무튼 쉬어. 오늘 야근하지 말고 정시 퇴근해서 집으로 가. 내가 확인해 볼 거야.”
“네. 그렇게 할게요.”
마침 오늘 저녁은 특별한 약속이 없었다.
식사 요청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태연이 거절했다.
요 근래 몸 상태가 좋지 않았고 쉽게 회복되지 않으니 약이라도 좀 먹고 일찍 잠을 잘 생각을 하고 있었다.
손영상 이사의 집무실을 나와 넥플 엔터테인먼트 업무석으로 돌아가던 중, 태연은 카페테리아에서 흥미로운 광경을 볼 수 있었다.
김명욱 대표와 조선아 대리가 창가 자리에 마주 보고 앉은 채 함께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분위기나 미소가 심상치 않았다.
‘잘 어울리네.’
태연은 첫 만남 순간을 떠올렸다.
갑작스레 김명욱 대표를 소개받았던 순간.
태연은 그때 이미 두 사람 관계에 자신이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음을 깨달았다. 김명욱 대표가 멋진 외모만큼 성격도 좋은 남자라는 걸 확실히 알게 된 이후에는 일말의 아쉬움도 접어버렸다.
손영상 이사에게 아무 관계도 아니고, 감정도 없다는 소리를 했던 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빨리 결혼이나 해버려라.’
내 짝은 어디 있을까?
갑자기 외로워졌다.
연애는 시기상조라고 생각했었는데 요즘, 이상하게 아이들이 예쁘고 주위에 커플들만 눈에 띈다.
‘……한 번 시도라도 해볼까?’
문득 떠오른 얼굴이 있었다.
자리에 앉은 태연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문자를 보냈다.
[오늘 저녁에 시간 괜찮으시다면 같이 식사 어때요?]
과연 어떤 대답이 날아올까.
‘아니, 그 전에 반응이나 해주려나?’
자신이 넘보기에는 너무 굉장한 여인이 아니던가?
그런 생각을 하기 무섭게 답변이 날아왔다.
[몇 시에 어디서 볼까요?]
태연의 표정이 환해졌다.
답문을 보내는 손길이 무척 빨라졌다.
* * *
차가 없어서 도보로 서판교 고급 주택가로 향했다. 근처에서 도착 알림 문자를 보내니 잠시 후, 검은색 모자와 마스크, 청바지와 집업 후드를 착용한 김윤아가 나왔다.
태연이 다가가 어색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근처 일식집 미리 예약해 놨어요. 그곳으로 가요.”
“네.”
은퇴했다지만 그녀는 아직도 세계적인 스포츠 스타였고 수많은 이들의 우상이었다. 동선, 요리점 섭외 등, 보안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태연은 윤아와 적당히 간격을 유지한 채 대화를 주도하며 첫 번째 목적지로 향했다.
김윤아는 언론에 알려진 것처럼 성격이 과묵했다.
말수가 적고 리액션도 크지 않았지만 태연의 이야기를 잘 들어줬다. 가끔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으면 미소를 지어주기도 했다.
‘일전에도 느꼈지만 성격이 정말 차분하구나.’
어쩌면 먹는 동작도 저렇게 기품이 넘쳐흐르는지.
태연은 김윤아에게 더욱 빠져드는 자신을 느꼈다.
식사 후 이동한 카페에서, 태연은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다.
“혹시 영화 감상 좋아하세요?”
“네. 주로 집에서 혼자 IPTV로 감상해요.”
그 말에 태연은 알겠다는 듯 말했다.
“아무래도 영화관은 좀 피하게 되죠?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을 테니…….”
“그게 아니라 같이 볼 사람이 없어서…….”
그녀는 민망해했고 태연은 잠시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금방 평정심을 되찾고 물었다.
“마지막으로 언제 가봤어요?”
“글쎄요, 기억이 잘…….”
“그러면 내일 저랑 함께 가보는 건 어때요?”
그녀가 놀란 표정으로 태연을 바라본다.
태연은 애써 침착한 척,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저 내일 연차에요. 윤아 씨가 커피 사주시면 제가 내일 영화랑 밥 쏠게요.”
그 말에 윤아가 머뭇거렸다.
‘싫어서 그런가?’
태연은 저도 모르게 실망한 기색을 드러내며 물었다.
“싫어요?”
“아,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알고 보니 이유는 다른 것에 있었다.
“괜찮으시겠어요? 저랑 같이 있는 거, 혹시라도 알려지면 곤란하실 수도 있는데…….”
오히려 자신을 배려했던 것이다.
다시 기분이 좋아진 태연이 당당하게 말했다.
“제가 범죄 경력이 있는 것도 아닌데 뭐 어때요? 전 찔리는 거 하나도 없는 사람이에요. 윤아 씨만 괜찮다면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그러면…….”
윤아가 수줍은 듯 고개를 끄덕이며 수락하자 태연은 내심 환호를 터뜨렸다. 표정 수습도 어려워 헛기침을 터뜨리고 커피를 마셔 봐도 벌게진 얼굴과 귓불은 어쩔 수가 없었다.
삼십 년 모태솔로 인생에 첫봄이 찾아왔다.
* * *
엘리트 운동선수 출신인 김윤아는 무척 부지런한 편이었다. 은퇴한 지 1년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이른 아침 일어나 한설아와 함께 아침 운동을 했다.
집으로 돌아와 샤워를 마친 뒤 옷을 차려입고 외출을 하려 하니 식사 준비를 하던 어머니가 물었다.
“아침 식사라도 좀 하고 가지. 광고 촬영이라도 있어?”
“음, 그건 아니고 그냥 약속.”
이른 시간부터 약속?
그녀는 물론, 식탁에서 미니 태블릿으로 뉴스 기사를 읽던 아버지 또한 고개를 치켜들었다.
부모님의 놀란 표정에 김윤아가 황급히 말했다.
“왜? 나도 약속 있을 수도 있지.”
“친구도 없는 애가…… 설마 너 남자 만나니?”
“……!”
대번에 정곡을 찔린 김윤아는 당황해서 대꾸를 못 했다. 그녀의 어머니가 놀란 얼굴로 손뼉을 쳤다.
“맞구나. 남자네! 세상에, 이리 와서 앉아봐. 누구야? 뭐하는 사람이니? 언제 어떻게 만난 거야? 응?”
“그런 거 아니야. 나 다녀올게!”
김윤아가 택한 건 긴급 회피였다.
황급히 거실을 벗어나는 딸의 모습을 보고 그녀는 기분 좋게 웃었다.
“우리 딸이 드디어 연애를 하는구나! 어디 보자, 설아라면 어떤 남자인지 알고 있겠지?”
그녀는 바로 한설아와 전화 통화를 시작했다.
잠시 후, 웃음소리와 함께 이름 하나가 거론되자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중년 남성이 태블릿으로 이름을 검색했다.
잠시 후, 관련 정보가 우르르 쏟아졌는데 그 양이 상당했다.
유명세가 상당하다는 뜻!
당황한 것도 잠시, 그는 빠르게 기사 제목을 훑어봤고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을 터치했다.
그 제목은 다음과 같았다.
[핫이슈. 오늘의 인물! 넥플 엔터테인먼트의 젊은 수장 유태연 프로듀서를 말한다.]
전 세계가 인정한 체조여왕 김윤아의 아버지.
S대학교 법과대학 김효원 교수의 눈빛이 번뜩였다.
그는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하게 기사 내용을 탐독하기 시작했다.
* * *
‘요즘은 저런 것만 눈에 보이네.’
태연의 눈에 백영훈과 배수현이 가까이 붙어 앉아 같은 모니터를 보며 즐겁게 대화 나누는 광경이 보였다.
같은 시나리오 작가니, 서로 가르치고, 배우며 성장하라는 의도로 붙여 놓긴 했지만 한창 젊은 선남선녀요, 둘 다 성격이 사근사근, 비슷한 점이 많아 급격히 가까워진 듯 보였다.
어쩌면 좋은 소식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혹은 숨기고 있는 것일 수도 있고.
그런 광경은 다른 곳에서도 펼쳐지고 있다.
남자 기획자와 여자 아트 디자이너.
판테온 개발팀의 노총각 프로그래머와 여성 스토리보드 작가 등등.
그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사람은 역시 신입 성태희.
그녀는 넥플 엔터테인먼트 모든 남직원들에게 인기 폭발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S대 미대 출신의 엘리트 원화가.
숏컷이 잘 어울리는 세련된 외모와 몸매, 패션 센스 등으로 얼핏 보면 게임 개발자가 아니라 모델, 혹은 아이돌 그룹 센터를 연상시켰다.
갈대나무 숲 넥플 전용 게시판에는 성태희를 여신처럼 숭상하는 이들이 종종 눈에 뜨이곤 했다.
문제는 그녀가 연애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
모두에게 친절하고,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며 일의 결과물도 나날이 좋아지고 있으니 직원으로서 더할 나위 없이 좋다.
하지만 연애에 대해서만큼은 철저하게 장벽을 친다. 이영애 AD의 증언에 따르면 대시했다가 거절당한 사람 숫자만 벌써 두 자릿수가 넘어간단다.
그중에는 타 스튜디오 직원들도 있었고 회사 재경팀 엘리트들도 있다고 했다. 태연은 그녀에게 이성으로서 관심이 눈곱만큼도 없었지만 그래도 흘려 듣지는 않았다.
수많은 퇴사 사유 중 의외로 과반수를 차지하는 것이 인간관계, 특히 연애 문제와 관련한 것이 많기 때문이다.
일 잘하고 성격 좋은 사람이 연애 문제 때문에 돌발 행동을 보이는 광경을 태연은 그동안 많이 겪어왔다. 남 일이라고, 사생활이라고 외면할 수도 없는 문제였다.
지금도 그녀를 의식하며 심란해하는 이들이 몇몇 눈에 띄었다. 이런 분위기를 적당히 관리해 주는 것도 태연의 업무 중 하나였다.
‘점심 식사라도 같이 하면서 이야기 좀 해봐야겠다.’
태연은 짝사랑의 부작용으로 괴로워하는 몇몇 청춘들을 보며 조용히 혀를 쳤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자신 역시 저들과 다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완전히 망각해 버린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