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한 게임 개발자가 너무 유능함 25화
16. 새로운 친분(2)
태연은 출근하자마자 부름을 받고 유진성 회장의 집무실로 향했다.
“어제 김종학 부회장 만났다면서?”
“어? 어떻게 아셨어요? 비밀로 하려고 했는데…….”
“그 녀석이 너 자기 집 데리고 가서 술 마시다가 형 동생 하기로 했다며 자랑질을 하더라.”
“아…….”
“못된 놈. 내가 그렇게 잘 해줬는데…… 돈 많은 놈이 꼬드긴다고 홀라당 넘어가?”
“제가 뭘 넘어갔다고 그러세요? 그냥 저녁 식사만 같이 한 거예요.”
“그놈 천성이 사람 좋아한다지만 아무나 자기 집에 들이지는 않아. 그래서 그놈이 뭐라고 하든? 자기가 투자 해줄 테니 빨리 나와서 회사 차리래? 아니면 그룹 입사해서 게임 회사 하나 맡으래?”
태연은 한숨을 내쉬며 어제 있었던 일들을 실토했다. 물론 아주 잠깐 오갔던 회사 창업과 관련된 이야기는 제외했다.
잠자코 이야기를 듣던 유진성은 이마에 내 천(川) 자를 그리며 중얼거렸다.
“이 자식이 치사하게 미인계를 써? 불과 일주일 전에 내 거 탐내지 말라고 그렇게 경고했는데…… 내 휴대폰 어디 있어?”
태연은 어이없어 물었다.
“뭐가 미인계에요?”
“김윤아 소개해 주고 식사 때 네 옆자리에 앉혔다면서?”
“그냥 제가 팬이라니까 형수님이 불러준 거죠. 왜 미인계 이야기가 나와요? 그거 김윤아 님에게 실례에요!”
“예로부터 부부는 일심동체라고 했다.”
“너무 나가셨어요. 그건 진짜 아니에요.”
“그러면 이거 하나 물어보자. 너 김윤아와 전화번호 교환했어, 안 했어?”
“…….”
태연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자 유진성 회장이 역정을 냈다.
“거봐라!”
“김윤아 님이 먼저 물어봐 주셔서 알려 드릴 것뿐인데요.”
“분명 뒤에서 몰래 뭔가 이야기를 들은 거야. 그게 아니라면 천하의 김윤아가 왜 네 번호를 궁금해할까?”
“그, 그거야…….”
“네가 대체 뭐라고? 잘생긴 것도 아니야, 돈이 많은 것도 아니야, 그렇다고 키가 크거나 몸이 좋은 것도 아닌데…….”
“…….”
명치를 묠니르로 얻어맞은 것 같은 극심한 충격!
‘해도 해도 너무하시네?’
반박할 수 없는 팩트라는 게 더 뼈아팠다.
제대로 삐진 태연이 들으라는 듯 중얼거렸다.
“진짜 투자받아서 독립을 해버릴까 보다.”
“뭐, 인마? 너 지금 뭐라고 했어?”
“아무 말도 안 했어요.”
“했잖아!”
“안 했다니까요.”
* * *
극약처방이긴 했지만 유진성 회장의 팩트 폭격 덕분에 태연은 이성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래. 내가 뭐라고…….’
저녁 식사가 끝나기 전, 모두와 전화번호 교환을 하면서 태연은 한순간 혹시 김윤아가 나에게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건가 하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냥 그 자리에서 자신을 민망하게 하고 싶지 않아 예의상 번호를 물어본 게 확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등록만 해놓고 서로 메시지를 주고받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김종학 부회장님은 내 어디가 마음에 들었던 걸까?”
그 정도 되는 사람이라면 분명 자신에 대해 모든 것을 사전에 조사하고 파악해 뒀을 게 분명하다.
게임 개발자로서, 나름 독특한 경력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대기업 후계자가 관심을 가질 만큼 대단한 건 아니다.
태연은 그렇게 생각하고 자신도 미처 알지 못했던 특별한 점이 있었던가, 고민해 봤지만 집히는 건 없었다.
‘그래도 나쁜 기분은 아니야. 덕분에 좋은 집에서 미녀 스타 두 명과 저녁 식사도 하고 대화도 해보고…… 좋은 경험이었잖아.’
또 언제 만날 수 있을지, 알 수는 없지만 그런 행운이 찾아오지 않는다고 해도 실망하지 않기로 했다.
그냥 인생에 두 번 다시 없을 특별하고 놀라운 이벤트.
그 정도로 여기는 게 여러모로 이로울 것 같았다.
“어? 안녕하세요.”
지나가던 중 조선아 대리와 마주쳤다.
그녀도 빼어난 미모를 지녔지만 바로 어제 신계에 위치한 미녀 톱스타 둘을 봐서 그런지 평범해 보이는 기분이었다.
‘나란 놈도 어쩔 수 없는 남자구나.’
모태솔로 주제에 불경하게…….
태연은 황급히 자만심을 지운 뒤 웃는 얼굴로 물었다.
“혹시 오늘 데이트 약속 있으세요?”
“네? 그런 건 없는데…… 왜요?”
“너무 예쁘게 하고 오셔서 그냥 물어본 거예요.”
“와, 유 PD님 그런 말도 할 줄 아세요?”
칭찬에 좋아하기보다는 평소 그러지 않았던 사람이 의외의 말을 했다는 것에 놀라기만 하는 그녀.
‘그래. 이게 내 위치지. 앞으로도 헛된 자만심 따위는 품지 말자.’
처리해야 할 일이 태산인 월급쟁이 대표 처지에 연애에 대한 두근거림 같은 감정 따위는 사치다.
담소를 마치고 자리로 돌아온 태연은 업무를 처리하며 다시 한번 스스로를 다잡았다.
* * *
3일 후, 또다시 김종학 부회장에게 메시지가 날아왔다.
[오늘 저녁 우리 집에 와라. 와이프가 너 초대했다.]
이번에는 무려 한설아의 초대였다.
‘마음을 다잡은 지 얼마나 됐다고…….’
또다시 묘한 기대감이 스멀스멀, 고개를 치켜들기 시작한다.
‘엉뚱한 기대하지 말자. 난 별거 아니야. 그냥 내가 착한데 혼자 산다니까 불쌍해 보여서 맛있는 밥이라도 먹여 주려고 초대한 걸 거야.’
아무튼 초대를 받았으니, 고민 끝에 태연은 회사 앞 백화점에서 인터넷에서 평이 좋은 와인 몇 명과 안주용 치즈 세트, 그리고 한설아를 위한 꽃다발과 고급 홍삼즙 세트를 구매해 서판교로 이동했다.
“어머나, 선물 고마워요!”
“하하하하!”
태연의 방문 선물을 한설아는 기쁘게 받았지만 김종학 부회장은 웃느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홍삼즙 세트라니, 심지어 우리 계열사에서 만든 거잖아. 나 즐겁게 해주려고 그런 거야?”
“그게 아니라 예전에 우리 부모님께 선물해 드렸는데 좋아하셨던 기억이 있어서…… 이상한가요?”
“아니, 좋아. 아주 마음에 들어.”
식탁에 이미 요리가 준비되어 있었다.
안심 스테이크와 연어 샐러드가 메인이었다. 거기에 태연이 가져온 와인 한 병이 곁들여졌다.
“잠시 기다려요. 금방 윤아 올 거예요.”
“윤아 님이요?”
태연이 놀란 얼굴로 되묻자 한설아가 빙긋 웃었다.
“사실, 제가 슬쩍 물어봤어요. 태연 씨 어떠냐고.”
태연은 대학 합격 발표를 눈앞에 둔 사람 마냥 잔뜩 긴장했다. 그런 태연의 표정 변화를 김종학 부회장은 재미있는 영화 보듯 관찰하고 있었다.
“윤아가 그러더라고요. 태연 씨 착하고 말 재미있게 잘하는 것 같다고. 느낌 좋다고 그러네요.”
“아…….”
“그래서 오늘 저녁 식사에 초대할 생각인데 함께하지 않겠냐고 권유해봤더니 흔쾌히 수락하더라고요. 잘 됐죠?”
“아…….”
믿을 수가 없었다.
동경하던 최고의 스포츠 스타가 자신을 좋게 생각해 줬다니!
잠시 후, 어제와 크게 다르지 않은 복장으로 김윤아가 등장했다. 떨림을 숨기지 못한 채 인사를 나누고 두 번째 저녁 식사를 시작했다.
식사 자리에서, 태연은 자신이 넥플에 오게 된 계기를 들려줬다. 이는 태연이 먼저 꺼낸 이야기가 아닌, 어떻게 넥플에 입사해서 유진성 회장과 친해질 수 있었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다.
당연히 블레스 시절 강건 대표에게 받았던 부당한 대우, 넥플 프레젠테이션과 투자 결정, 이직 중 벌어진 다툼 등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경력 있는 회사원들도 쉽게 겪기 힘든 일들이었다. 질문을 던진 김종학 부회장은 물론, 회사원들의 삶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한설아와 김윤아도 경청했다.
대화 중간, 개발자들에게 끊임없이 업무 메시지, 혹은 전화가 걸려왔다. 태연은 양해를 구하고 최대한 신속하게 이를 처리하려고 했지만 대화 분위기에 맥이 끊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정말 미안해요. 사실 담당하고 있는 온라인 게임 하나가 CBT 중이거든요.”
“CBT가 뭐에요?”
“클로즈 베타 테스트의 약자인데 그게 뭐냐면…….”
태연은 한설아의 의문을 알기 쉽게 풀어줬다.
신입 사원과 학생들 상대하는 일이 워낙 많다 보니 게임 문외한들을 이해시키는 일 정도는 너무도 쉬웠다.
CBT를 시작으로, 태연은 지금 하고 있는 일들과 관련해 경험한 재미난 에피소드들을 들려줬다.
그중에는 김명욱 대표의 부탁으로 일본으로 넘어갔던 일, 타키자와 사토시를 설득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제안으로 벌어진 게임 플레이에 대한 일화도 포함됐다.
그렇게 재미있게 이야기를 하다 슬쩍 시간을 확인하니 저녁 아홉 시.
태연은 메시지 몇 개를 보고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제 슬슬 회사로 복귀해서 업무를 봐야겠네요.”
그 말에 모두가 놀란 반응을 보였다.
김윤아가 물었다.
“회사에 일이 많아요?”
“원래 이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시기가 시기인지라…… 가서 서버 닫는 거 보고 넥플 엔터테인먼트 대표님과 사업 쪽 논의도 해야 해요.”
태연은 그렇게 대답해 주고 김종학, 한설아 부부에게 진심을 담아 말했다.
“오늘 저녁 식사 분위기 정말 좋았어요. 제 생에 최고의 요리였던 것 같아요. 초대해 주셔서 고마워요.”
마음 같아서야 태연도 조금 더 함께 있고 싶었지만 이미 충분히 즐겼다. 이 정도에서 만족하고 일터로 돌아가야 했다.
태연은 ‘예의상’ 말했다.
“다음에는 제가 세 분을 제가 넥플에 초대할게요. 제가 개발 중인 게임도 보여드리고 회사 시설도 구경시켜 드리고…… 충분히 재미있는 시간 보내실 수 있을 거예요.”
* * *
몬스터 이터 온라인 CBT는 무사히 종료됐다. 크리티컬한 이슈가 발생하지 않았고, 모든 팀에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다.
유저 반응도 좋았다.
-솔직히 다른 것보다 운영에 대해 걱정이 많았는데 큰 문제 없이 잘 했음. 버그 제보에 대한 반응이나 대처도 좋았고.
-무엇보다도 시작부터 글로벌 버전 따라잡고 간 게 마음에 들었음. 현지화 작업도 잘된 것 같고 무엇보다 오타 오역이 보이지 않아서 만족.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근접 딜이 좀 불리한 것 같아. 이 문제 좀 어떻게 해줄 수 없겠냐고 하루에 한 번씩 메일 보냈는데…… 정식 서비스 때 두고 보겠어.
태연은 유저 대응을 운영팀에게만 맡겨두지 않았다. 때때로 석유 수준으로 고인 유저들은 어려운 문제에 대한 해답을 구해왔다.
그럴 때마다 태연이 나섰다.
유저들에게 공개할 패치 노트도 직접 작성해서 게시했고 댓글에 답도 달아줬다. 누군가 작정하고 욕설을 퍼부어도 부드럽게 받아넘기는 모습을 보였다.
사실 이런 건 태연에게 있어서 그다지 특별할 것이 없는 일이었다. 강건 대표 밑에서 근무하던 시절, 직접 라이브를 총괄하며 운영 노하우를 충분히 습득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모나거나, 까칠하거나, 과할 정도로 예민한 유저들은 많았다.
태연은 그들을 다루는 데 이골이 난 몸이었다.
이 같은 상황이 유저들에게도 알려지며 재미있는 반응이 보였다.
-유태연 PD 직접 고객 응대도 하고 그러던데, 다른 게임 운영도 직접 담당해 줬으면 좋겠음.
-지금 운영으로 말아먹고 있는 게임 겁나 많은데 차라리 유태연 PD에게 라이브 운영 모든 권한을 주면 안 되나?
태연이 다른 게임 운영도 맡아주면 안 되겠냐는 문의가 날아들기 시작했다. 공식 홈페이지나 카페, 혹은 커뮤니티 사이트에서도 이런 글들이 보였다.
물론 어림도 없는 일이었고 글을 올린 유저들도 대부분 그 사실을 자각하고 있었다.
그저 오랫동안 재미있게 즐기던 게임이 운영, 혹은 잘못된 패치로 망가지는 광경을 지켜보는 게 아쉬워서 해보는 소리였다. 태연도 그 사실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조용히 웃어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