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한 게임 개발자가 너무 유능함 24화
16. 새로운 친분(1)
바쁜 걸음으로 넥플 플러스 스튜디오로 향한 태연은 개발팀을 모아놓고 말했다.
“내일부터 크라잉 소프트 몬스터 이터 개발팀과 협력해서 최적화 작업을 분담 진행할 예정입니다. 프로그램 팀장님, AD님은 작업 준비해 주세요.”
타키자와 사토시는 의외로 흔쾌히 허락했다.
-정말 고마운 제안입니다. 저는 이번에도 유 PD님을 믿어보고 일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얼굴 붉히는 상황이 생기면 어쩌나 걱정했던 태연에게 있어서도 고마운 상황이었다.
태연은 타키자와 사토시와 함께 최적화 협력팀을 구성했고, 무조건 하루에 한 번, 일정을 정해 화상회의 및 공동 업무 보고를 진행하기로 했다.
프로그램 팀장과 아트 디렉터가 누구보다도 이 결정을 반겨 했다.
“사실 지금도 특별히 하는 일 없이 월급만 많이 챙겨 가는 것 같아서 마음이 불편했는데, 이제야 비로소 일다운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네요.”
“그렇지 않아도 거슬리던 부분이 많았으니 쭉 리스트 뽑아서 오늘 퇴근 전까지 공유하도록 하겠습니다!”
“앞으로 화상 회의 한 시간 전까지, 금일 예정 작업이 모두 끝나 있지 않아도 좋으니 약식으로라도 업무를 보고해 주세요. 제가 자리에 없으면 클라우드 폴더에 보고용 파일 넣으셔도 돼요.”
회의를 마치고, 태연은 즉각 자리로 돌아가 운영팀에서 실시간으로 공유하고 있는 버그 리포트를 확인했다.
크리티컬한 이슈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빼곡히 쌓이는 버그들을 보고 있노라면 체한 것처럼 불편한 태연이었다.
‘내가 처리할 수 있는 건 모두 처리해 버리자.’
운영팀이 팀별로 이슈 거리를 공유, 분배해 주면 그것을 해당 팀의 개발자가 가져와 처리한 뒤 확인 요청을 하는 시스템이었다.
개발팀이라면 어디든 갖추고 있는 방식이지만 스튜디오의 최고 책임자가 버그를 직접 처리한 뒤 검토 요청을 보내는 일은 거의 전무하다 봐도 좋았다.
하지만 태연은 흔하지 않은 프로듀서였다.
자신이 장급들을 불러 관리자 노릇만 하지 말고 실무를 적극적으로 하라고 당부했으면서 손만 빨고 일 돌아가는 것만 지켜보고 있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태연은 퇴근 전까지 자리를 지킨 채 일 처리에 몰두했다.
* * *
태연은 퇴근 한두 시간 전, 적잖은 사람들로부터 저녁 식사 제안 문자를 받는다.
유진성 회장을 비롯해 손영상 이사, 이태영 이사, 김명욱 대표, 인사팀장 등등.
처음에는 유진성 회장의 요청을 우선시했지만 부르는 일이 너무 잦아지니 특별한 일이 없으면 거절하고 중요한 일이 있는 사람, 혹은 제일 먼저 제안한 사람과 시간을 보냈다.
그래도 전부 넥플 관계자였지만 오늘은 예외적으로 다른 회사 사람과 저녁 약속이 잡혀 있었다.
퇴근 전, 태연을 거울을 보고 상태를 체크한 뒤 강남으로 향했다.
태연이 도착한 곳은 작년 이전한 뉴월드 그룹 본사 사옥 앞이었다.
태연은 사옥 안으로 들어가 문자를 보냈다.
[도착했습니다.]
[네. 지금 내려갈게요.]
퇴근길이라 사옥 로비에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통행 중이었다. 태연은 그들을 보며 생각했다.
‘확실히 대기업은 게임 회사와 업무 환경이 다르구나.’
뉴월드 그룹은 대한민국 재계 서열 7위의 대기업이다.
그룹 연 매출은 8조.
7개의 상장사를 포함한 서른 개의 계열사를 보유했고 추정 자산 총액만 30조에 달한다.
이런 대기업의 본사에서 근무하는 이들이라면 어디 가서 학력으로 꿀릴 일 없는 최고의 엘리트들일 것이다.
한참 구경하고 있는데 한쪽이 소란스러워졌다.
태연이 바라보니 김종학 부회장이 직원들의 인사를 받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태연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맛있는 고기 사주신다기에 냉큼 달려왔습니다.”
“차 가져왔어요?”
“차 없어서 전철 타고 왔습니다.”
“판교에 산다고 했죠? 잘됐네요. 제 차 타고 우리 집으로 같이 가죠. 저도 판교에 살아요.”
김종학 부회장이 친근하게 대해주는 젊은 청년이라니.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호기심으로 가득해진다. 그 와중에 태연을 알아본 소수의 사람들은 휴대폰으로 촬영을 하거나 동행 중인 이에게 정체를 알린다.
태연은 자신과 김종학 부회장이 SNS 떴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채 정문 앞에 대기 중인 검은색 세단 뒷좌석에 탑승했다.
* * *
김종학 부회장의 거주지는 한국의 베벌리 힐스라 불리며, 수많은 유명인들이 거주하는 서판교 고급 주택 단지에 위치해 있었다.
“여기 체조여왕 김윤아 님도 거주하는 곳이라고 들었는데, 혹시 마주친 적 있으세요?”
“아침 운동 때마다 마주치죠. 제 와이프하고 친해서 시간 날 때마다 같이 카페 비롯해 이곳저곳 놀러 다닌다고 하더라고요.”
“저, 정말요?!”
“아니, 뭐 그런 걸로 감탄을 해요? 혹시 윤아 씨 팬이에요?”
“네! 솔직히 대한민국 사람 중 김윤아 님 팬 아닌 사람 없잖아요? 저 광팬이에요!”
그리고 태연은 흥분을 이기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부럽네요. 김윤아 님이랑 같이 차도 마시고 놀러 다닐 정도의 친분이라니…… 정말 굉장하다. 부럽다.”
그 말에 김종학 부회장이 폭소를 터뜨렸다.
태연이 의아한 얼굴로 쳐다봐도 그는 웃음을 그치지 못했다.
태연은 집에 도착해서야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마침 식사 준비 거의 끝나가니 잠시만 기다리세요.”
태연은 자신을 맞아주는 미녀를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2000년대를 주름 잡았던 대한민국 최고의 미녀 배우 한설아.
그녀가 눈앞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웃으셨구나.’
체조 여왕이라는 별명의 김윤아는 분명 세계적인 스포츠 스타지만 적어도 대한민국과 아시아 지역에 한해서라면 한설아의 유명세와 존재감이 몇 수는 위에 있다.
미모, 지성, 연기력, 스타성 등등.
그녀를 한 단어로 정의하면 ‘전설’
이제 40대를 바라보는 나이지만, 그녀는 아직도 현역 시절 전설처럼 거론되는 미모를 유지하고 있다.
‘그런 것도 모르고 김윤아 님과 친해서 부럽다느니, 그딴 소리나 지껄였으니…….’
김종학 부회장은 방금 들었던 이야기를 그대로 전해줬고, 앞치마를 두르고 있던 한설아는 폭소가 터져 눈물까지 흘렸다.
그녀는 멋쩍은 표정으로 서 있는 태연에게 말했다.
“윤아 팬이셨구나. 자기, 윤아 불러서 같이 저녁 식사 할까요?”
“나야 상관없는데 태연 씨는 괜찮겠어요?”
“네?”
“우상과도 같은 사람을 앞에 두고 마음 편히 식사할 수 있겠냐고요.”
“부회장님과 한설아 님만으로도 충분히 불편한데요.”
그 말에 두 부부가 웃음을 터뜨린다. 한설아는 주방으로 이동하면서 휴대폰으로 통화를 시작했고 김종학은 태연을 식탁으로 이끌었다.
‘톱스타 한설아가 내 앞에서 저녁 식사 준비를 하고 있다니…….’
이 사실을 알려주면 최종학은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보고 있으면서도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한편으로는 자신이 김종학 부회장에게 이 정도로 대우를 받을 일을 한 게 있는지, 진지하게 고민해 보기도 했다.
잠시 후, 식사 준비가 완료되었고 시기적절하게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도착했나 봐요.”
“내가 가서 열어줄게.”
그 순간, 태연의 심장이 마구 뛰기 시작했다.
잠시 후 모습을 드러낸 여인은 회색 레깅스와 하얀색 후드티 차림, 화장기가 없는 생얼을 하고 있었다. 누가 봐도 방금 집에서 외출 나온 티가 역력했다. 하지만 운동으로 단련된 빼어난 비율, 과즙미 넘치는 상큼한 미모 덕분에 모든 것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아, 안녕하세요. 게임 개발자 유태연입니다.”
“말씀 들었어요. 김윤아예요.”
그녀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니 태연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보다가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내밀어 간신히 맞잡았다.
정말 보기 애처로울 정도의 떨림이라 한설아와 김윤아가 소리 내어 웃었다.
반면 김종학 부회장은 황당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기업 대표들 앞에서 프레젠테이션할 때는 전혀 긴장하지 않고 잘만 하더니…….”
태연은 김윤아와 접촉한 손을 한참 동안 때지 못했다.
* * *
본격적인 저녁 식사가 시작되었다.
메인 요리는 매콤한 소고기 찜, 여기에 고급스러운 레드 와인이 곁들여지니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만찬이라 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긴장해서 제대로 먹지도 못하던 태연은 한설아가 찜을 먹기 좋게 찢어 주며 자상하게 권해주자 비로소 맛을 보기 시작했다.
요리 솜씨는 상상 이상으로 훌륭했고, 고기를 사르르 입에서 녹았다. 양념 간도 완벽했다.
분위기가 어느 정도 만들어지고서야 김종학 부회장이 물었다.
“그때 오찬 자리에서 이야기를 제대로 듣지 못해서 아쉬웠는데, 이 자리에서 다시 들려주는 게 어때요? 사실 진성 형님에게 이야기를 대충 듣기는 했는데 너무 말을 아끼셔서…….”
“혹시 회장님과 자주 만나시나요?”
“자주는 아니고 가끔 봐요. 최근에는 일주일 전에 같이 저녁 식사를 하면서 와인을 마셨는데…… 내가 태연 씨에 대해 물어보는 걸 그다지 안 좋아하시더라고요.”
“이유가 뭘까요?”
“내가 태연 씨 채가기라도 할까 봐 경계하는 거죠, 뭐. 하여튼 그 양반 성격은 예나 지금이나…….”
어감이 묘했다.
태연이 혹시나 싶은 마음에 물었다.
“예전부터 개인적인 친분이 있으셨던 건가요?”
“대학 시절 한 학년 선배였어요.”
“아…….”
“아무튼 이야기 좀 해줘요. 대체 어떤 일이 있었고 어떤 활약으로 디즈니 간부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는지 자세히 좀 듣고 싶네요.”
태연이 멋쩍은 얼굴로 주위를 보며 물었다.
“괜찮을까요? 두 분께는 지루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는데…….”
한설아와 김윤아는 빙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최대한 재미있게 이야기를 해야겠다.’
회사 보안에 걸리는 내용들은 제외하고, 태연은 저녁 식사 중, 미국 출장을 갑작스레 통보받았던 시점부터 이야기를 시작했다.
태연은 자신의 활약상에서는 최대한 겸손하게, 별일 아니었고 운이 좋았던 것처럼 표현하려 했다.
하지만 듣는 사람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도 아니었고, 특히 김종학 부회장은 대기업의 실질적 총수였다.
“그 깐깐한 진성 형님이 괜히 아끼는 게 아니네요. 계속 듣다 보니 정말 탐나네.”
“정말 운이 좋았던 것뿐이에요. 그리고 회장님이 판을 잘 깔아 주셨어요. 전 그 호의를 누렸던 것뿐이죠.”
“이것 봐봐. 말을 참 예쁘게 잘하잖아. 이러니까 사랑받는 거야.”
대화가 진행되는 내내 태연을 향한 두 여인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러나 태연은 거듭되는 칭찬에 어쩔 줄을 몰라 하느라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 후로도 한참 대화를 이어나가던 김종학 부회장이 넌지시 물었다.
“넥플에 말뚝 박을 건 아니죠?”
“그야 뭐…….”
넥플이 아무리 잘해줘도, 자신은 월급쟁이일 뿐,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시간이 지나 기회가 오면 자신만의 회사를 세우리라는 꿈을 아직도 품고 있다.
김종학 부회장은 그 사실을 꿰뚫어 보고 눈빛을 번뜩였다. 그러나 더는 반응하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우리 앞으로 종종 만나서 와인이나 한잔하죠. 태연 씨도 괜찮죠?”
“네. 마침 집도 멀지 않으니 불러 주시면 언제든 찾아뵙겠습니다.”
“이제부터 말 편하게 해도 되나요?”
“물론이죠.”
“그러면 이재부터 동생처럼 대할 테니까 너도 부회장님이라고 하지 말고 그냥 형님이라고 불러.”
이후로는 한결 더 편해진 분위기 속에서 대화가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