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한 게임 개발자가 너무 유능함 20화
13. 새로운 업무
이른 아침, 업무석에 도착한 태연은 책상 위에 놓인 커피와 샌드위치를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누구지’
커피에 쪽지가 붙어 있었다.
[감사합니다. 유 PD님 덕분에 직원들에게 겨우 체면 세울 수 있었습니다.]
쪽지의 주인공은 자신이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주어가 빠져 있었지만 내용은 짐작이 어렵지 않았기에 태연은 웃어넘겼다.
그리고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유 팀장님. 감사합니다.”
“이거 드세요.”
수시로 누군가 찾아와 음료수, 간식거리 등을 놓고 도망치듯 사라졌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은 연봉 협상을 진행해야 하는 위치에 있는 각 부서의 장들이었다.
그런 상황이 계속되니 이영애 팀장이 다가와 물었다.
“PD님. 대체 우리 모르게 무슨 일을 저지른 건가요? 솔직히 털어놓으시죠!”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는 홍민석 AD도 말을 안 할 뿐, 강한 눈빛을 쏘아내고 있었다. 어서 털어놓으라는 무언의 압박이다.
“이러다 편의점 차리셔도 되겠네. 우리 PD님 왜 이렇게 인기가 좋은 거야?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급기야 프로그램 팀장까지 다가와 웃으며 압박한다.
제대로 된 답변을 듣기 전에는 떠나지 않을 기세였다.
태연은 한숨을 내쉬었다.
“카페테리아나 갑시다.”
‘다른 부서 사람들 없지?’
보안을 요하는 일이었다.
“잘 듣고 마음에만 담아 둬요.”
그리고 짐짓, 험상궂은 표정을 지으며 협박한다.
“어디 가서 입방정 떨지 마요. 인트라넷, 직장인 앱 같은 곳에 익명으로도 올리지 말고. 퍼지면 무조건 당신들 책임이야!”
“거 참, 말 많으시네!”
“알았으니 어서 어떻게 된 일인지 이야기 좀 해봐요!”
“우리 못 믿어요? 와, 갑자기 섭섭해지려고 하네!”
직원들을 한 명 한 명 째려본 뒤에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떻게 된 일이냐면…….”
태연은 연봉 협상과 관련된 이야기들을 들려줬다.
물론 유진성 회장이 당부했던 ‘기밀’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의도한 건 아니지만 내가 이 정도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다! 라는 걸 내세운 꼴이 되어버렸다. 말하면서도 민망한 순간이었다.
“대충 그렇게 된 거예요.”
탄성이 터져 나온다.
“우와, PD님 다시 봤어요!”
“스타 개발자 아무나 되는 거 아니구나! 회장님하고 담판 지어서 전 직원 평균 연봉 몇 퍼센트 정도는 올려줄 수 있어야 그런 칭호 얻을 수 있는 거구나!”
“어우, 난 엄두도 못 내겠다. 회장님 앞에서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지? 대단하네!”
태연은 질색했지만 다른 이들은 이영애 팀장의 말이 맞다며 수긍했다.
그렇게 대화 주제가 느닷없이 자신에 대한 칭찬으로 흐르니 태연은 부담감에 한숨을 내쉬었다.
‘제발 조용히 마무리되었으면 좋겠는데…….’
* * *
얼마 지나지 않아 대대적인 연봉 협상이 진행됐다.
언제나 그렇듯, 결과에 대한 호불호는 존재했고 이것을 납득하지 못한 이들이 항의를 하거나 심하면 이직을 준비하기도 했지만 작년에 비하면 꽤나 조용히 넘어간 편이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직원들 사이에 묘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원래 이번 연봉 협상은 동결 수준이었는데 유태연 PD가 나서서 회장님을 설득했다더라.
태연의 우려가 현실로 드러난 것이다.
심지어 갈대나무 숲 어플, 넥플 직원 전용 게시판에도 소문의 진위를 확인하려는 글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또 이러네.’
지난 소란으로, 태연은 이런 식으로 자신과 관련한 이야기가 다뤄지는 걸 질색하게 되었다. 게임 홍보가 아니라면 가급적 조용히 지내고 싶은 것이 태연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하지만 한 번 찍힌 낙인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 법이었다.
-소문이 사실이라면 유진성 회장이랑 유태연 PD랑 혈연관계 같은 거 의심해 봐야 하는 거 아니냐?
-응. 아냐.
-지난번 고소 사건 때 뭐하고 있었냐? 그때 아무 관계도 없다는 거 다 드러났음. 넥플 입사한 후 처음 봤다더라.
-해줘도 지랄.
-아니, 이상하잖아. 원래 동결이었는데 유 PD가 나서서 바꿨다고? 그 사람이 뭐라고 그런 걸 해줘? 넥플에서 한 게 뭐 있다고? 아직 게임도 안 나왔는데.
‘그래. 이런 소리 나올 줄 알았다.’
기껏 나서서 자기들에게 좋은 일을 해줬는데…… 오히려 이상한 의혹이나 사고 있지 않나.
의혹은 끊이지 않고 제기됐다.
고소 사건 여파가 잦아든 지 얼마나 됐다고, 또다시 새로운 의혹들이 고개를 들고 있었다.
그래도 과거와 확실히 다른 점은, 이번에는 태연의 편을 들어주는 이들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점이었다.
-이 병신들이…… 유 PD가 뭘 한 게 없어? 가서 넥플 주가 좀 보고 와라.
-넥플 플러스 생기고, 판테온 발표로 기대감 급상승시킨 것 덕분에 회사 주가 계속 오르는 중.
-요즘 퍼블리싱 본부로 국내, 해외 기업에서 온갖 문의 날아오고 있는 중. 덕분에 일 많아서 다들 죽어간다. 난 얼마 전 신입 데리고 모 대기업 미팅 다녀왔다. -_-;
-유 PD님 입사하고 1년도 안 돼서 회사 이미지 엄청 좋아짐. 여러 방면에서 대활약을 해주고 계신다.
-그 대활약 덕분에 요즘 이력서가 쏟아지고 있어서 우리 인사팀도 죽어나는 중.
-신기가 있는 건지, 사람 보는 눈도 굉장해서 요즘은 최종 면접관 업무도 그분에게만 부탁하고 있다. 업무량이 엄청날 텐데 힘든 기색 없이 웃으면서 최선을 다해주심. 그러니까 아무것도 모르면 입 싸물고 있어.
개발 스튜디오 외에, 온갖 부서에게 태연에게 받은 도음, 목격한 활약 등을 털어놓기 시작하니 의혹은 금세 사그라들었다.
태연도 그것을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놓고 보니 정말 많은 일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실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요 근래에 인사팀은 물론이고 사업, 퍼블리싱, 인사지원, 인재관리 등, 정말 수많은 부서들과 엮여 많은 일을 처리해 왔다.
가장 버거운 건 역시 최종 면접관 노릇, 그리고 견학 및 외부 초청 강의였지만 태연은 어떤 요청도 거절하지 않고, 가급적이면 최선을 다해 도우려 했다.
그 모든 노력들이 이 순간 빛을 발하고 있었다.
‘역시 세상 혼자 살 수는 없는 법이라니까.’
그래도, 가급적이면 게임 외적인 부분에서 자신의 이름이 거론되는 건 피하고 싶다!
‘게임 개발만 집중할 수 있는 날은 과연 찾아올까?’
태연은 한숨을 내쉬며 스마트폰을 책상에 내려놓았다.
소란은 며칠 지나지 않아 가라앉았다.
* * *
한 달 후, 태연은 미국 출장길에 오르게 되었다. 유진성 회장이 함께했고, 그 외에 수행을 담당할 직원들이 몇 명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비로소 태연은 이번 출장 목적을 듣게 되었다.
“과천 슈퍼랜드 알지?”
과거 대한민국 테마파크 빅3 중 한 곳으로 꼽혔지만 노후화가 진행되어 발길이 거의 끊긴 곳.
태연이 아는 건 이 정도였다.
“지금 K월드 그룹이 인수를 주도적으로 추진하고 있어.”
“이유가 뭐예요?”
“거기에 새로운 테마파크를 짓겠다며 컨소시엄을 만들었어. 우리도 참여했고.”
“이유가 뭐죠?”
“일단 우리도 IP 만들어 파는 회사 아니냐. 수입도 하고. 그것 때문이야.”
“사업 영역을 더 확장하겠다는 뜻이군요.”
“바로 그거지.”
유진성 회장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원래 초창기에 나왔던 이야기는 디즈니랜드 유치였어. 그런데 일본에 이미 있고 중국에도 벌써 두 곳이 완공되어 운영 중이잖아. 한 곳 더 추가로 작업 들어간다는 소리도 있고.”
“그러면 유니버셜 스튜디오 유치로 목표를 바꾼 건가요?”
디즈니랜드와 유니버셜 스튜디오를 흔히 세계 2대 테마파크라고 부른다. 두 곳이 가장 규모가 크고 오랜 시간 널리 사랑받아 왔기 때문이었다.
디즈니가 아니라면 남은 건 유니버셜밖에 없으니 태연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것도 베이징에 상당히 큰 규모로 지어지고 있잖아. 오사카에도 하나 있고. 그쪽은 내키지 않는단다.”
그곳도 아니란다.
태연은 푹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대체 어떻게 하시려는 건가요?”
“일단 디즈니와 이야기를 해보려고.”
“…….”
태연은 얼굴을 찡그렸다.
“방금 디즈니랑 안 하신다면서요.”
“내가 언제?”
“분명…….”
대화를 되짚어 보던 태연은 입을 다물었다.
아니라고 딱 잘라 대답한 적은 없었던 것이다.
유진성 회장은 끌끌 웃으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디즈니가 폭스 인수한 거 알고 있지?”
“네.”
“거기 말고도, 지금 크고 작은 콘텐츠 회사를 미친 듯 흡수하면서 빠르게 몸집을 키우고 있잖아.”
디즈니는 전 세계적으로 많은 테마파크를 운영 중이지만 자신들이 보유한 모든 콘텐츠를 적극 활용하고 있지는 못했다.
이미 운영 중인 파크 구간을 허물고 새로운 콘텐츠 구간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엄청난 규모의 자금과 시간, 인력 등의 소모를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최신 콘텐츠를 도입해서 기존 매니아들을 끌어들이겠다는 뜻이군요.”
“그렇지.”
“새로운 형태의 디즈니 테마파크가 되겠네요.”
“승산 있어 보이지 않아?”
“충분히 있어 보입니다. 단, 현지화와 차별성 부분에 힘을 쏟아야겠지만요.”
이번 사업에 뉴월드가 주도하는 컨소시엄 외에도 디즈니 본사, 그리고 서울시도 적극 참여해서 경쟁력 높은 관광단지 완성을 노린다고 한다.
‘이거 사업 규모가 최소 조 단위로 들어갈 것 같은데?’
그리고 자연스레 따라오는 의문이 또 하나 있었다.
“제가 가서 무엇을 해야 하는 겁니까?”
“잘하는 거 하고 돌아오면 돼. 손 이사가 확신하더라. 국내 게임 업계에서 그걸 너만큼 할 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을 거라고.”
태연은 조바심을 이기지 못하고 재촉했다.
“대체 그게 뭔데요?”
이어지는 말은 태연이 상상도 못 했던 답변이었다.
“이벤트, 그리고 맵 기획.”
“…….”
“네가 가장 자신 있어 하는 분야 맞지?”
태연은 아무 말도 못 했다.
‘자신 있긴 하지만…… 테마파크는 내 영역이 아닌데?’
* * *
‘나를 이곳까지 데려온 진짜 이유가 뭘까?’
그 유명한 디즈니 본사를 통과하면서도 태연은 의구심을 억누르지 못했다.
이벤트와 맵 기획,
얼핏 생각하면 테마파크 기획과 어느 정도 통하는 부분이 있긴 할 것 같다. 하지만 테마파크 관련 업무를 논하러 왔다면 자신이 아니라 테마파크 기획자를 섭외해서 데리고 왔을 것이다.
‘다른 숨겨진 이유가 있어.’
문제는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것.
유진성 회장의 생각을 가늠해 보려고 애쓰던 태연은 차가 멈추자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모르겠다.’
차에서 내리니 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들어온다.
넥플 유진성 회장의 마중 나온 디즈니 본사 간부들이었다.
그리고 ‘엘렌’ CEO
디즈니 최초의 여자 CEO이자, ‘제국’을 완성시켰다고 평가받은 전임자의 뒤를 아주 훌륭하게 이어가고 있는 인물.
그녀는 햇살만큼이나 찬란한 미소를 지었다.
“어서 오세요. 환영합니다.”
한국과 미국 콘텐츠를 대표하는 두 거인의 만남이었다. 그 광경을 바로 곁에서 지켜보는 태연의 가슴이 크게 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