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한 게임 개발자가 너무 유능함 19화
12. 연봉 협상
이른 아침, 모처럼 늘어지게 늦잠을 잔 거실 커튼을 걷고 아침 햇살을 온몸으로 만끽했다.
‘좋다.’
이제부터 3일 동안 휴식이다.
‘따뜻한 봄이 왔으니, 모처럼 기차 여행이라도 떠날까?’
꽃구경도 하고 맛있는 음식도 먹고.
업무에서 해방되어 걱정 없이 돈 펑펑 쓰고, 발길이 닿는 대로 돌아다니며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자!
‘그리고 게임도 하고.’
이게 가장 중요했다.
좋아하는 게임!
‘치킨을 먹으면서 게임을 하면 더 재미있을 거야!’
태연은 생각을 즉각 실행으로 옮겼다.
3일 동안 푹 쉬고 돌아온 덕분에 몸과 머리가 개운해졌다.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입니다.”
출근길, 업무석에 앉기까지 많은 이들과 웃으며 인사를 나눈 태연은 빠르게 이메일을 검토했다.
곧 표정이 굳어졌다.
‘연봉 협상 5% 동결이라…….’
슬슬 연봉 협상 시즌이었다.
넥플도, 유니버스도, 스튜디오가 만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태연은 그냥 넘어갈 수 있지만 다른 곳은 사정이 달랐다.
연봉을 많이 올려주고 싶어도 4%로 한계가 정해져 있다면, 사람에 따라서는 100만 원도 올려 받지 못하는 사람이 생긴다.
‘난리 나겠네.’
연봉 협상 시즌은 다른 말로 이적 시즌이라고도 불린다.
이때 자신에게 책정된 연봉에 불만을 품은 이들이 대대적으로 회사를 떠나 이적하기 때문이다.
태연은 혀를 차며 다음 메일을 확인했다.
본인의 일이 아니라지만, 같은 회사, 업계의 일이니 절로 마음이 무거워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 * *
점심시간 전, 태연은 타 스튜디오 피디들로부터 식사 제안을 받았다.
세 명 정도가 모였는데, 그들은 식당에 도착하자마자 한숨을 토해냈다.
“회장님도 정말 너무하시네요. 정말 총매출을 3조 가까이 찍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 정도면 대부분 직원들은 물가 상승률 정도밖에 올려 받지 못해요. 사실상 동결이나 다름없죠.”
“곧 연봉 협상을 진행해야 하는데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그들의 고민에 공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의아해했다.
‘나한테 왜 이러는 거지?’
뭔가 바라는 게 있는 건가?
태연은 겉으로는 고민에 공감해 주면서도 속으로는 점점 의문을 키웠다.
식사를 마치고 카페에서, 마침내 본심을 털어놨다.
“유 PD님은 회장님과 친분이 좀 있으시죠?”
“회장님께 말씀 좀 해주시면 안 될까요?”
“최고 5% 제한은 너무 짠데…… 이러면 진짜 필요한 인력들이 떠나 버릴지도 몰라요.”
태연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회장님은 좀 어려운데…… 그리고 제가 말씀드린다고 의지를 바꿀 것 같지도 않은데요.”
“바꿔 달라고 강요하는 게 아니라 그냥 말씀만이라도 드려 달라는 거예요.”
“이대로라면 직원들 볼 면목이 없는데…… 해볼 수 있는 건 최대한 해보고 싶어서요. 일단 저희도 회장님 찾아가서 말씀을 드리자고 의견을 모았어요.”
그러니까 회장님 설득에 자신들과 뜻을 함께해 달라는 것이다.
‘설득이라…….’
유진성 회장이 설득이 먹힐 사람인가?
잠시 고민해 보던 태연은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외면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우르르 몰려가면 보기에 별로 안 좋으니 그냥 제가 따로 요청드려 볼게요.”
“고맙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렇게 흔쾌히 승낙해 주실 줄은 몰랐는데…… 제가 앞으로 잘하겠습니다!”
PD들은 진심으로 기뻐하며 웃었다.
정말 쓰레기 같은 인성의 소유자가 아닌 이상, 함께 고생한 동료를 더 챙겨주고 싶어 하는 마음은 같았기 때문에.
태연에게는 그 모습이 좋게 보였다.
[회장님. 저 밥 한 끼 사주시면 안 될까요?]
태연은 문자를 보내고 가슴을 졸였다.
건방지다고 생각하면 어쩌지?
답이 안 오면 전화를 해봐야 하나?
하지만 그런 걱정은 기우일 뿐이었다.
[퇴근 시간 때 내 업무실로 찾아와. 소고기 사줄게.]
자상한 답변!
태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한편으로는 의아해했다.
‘이렇게 쉽게 시간을 허락해 주시다니…… PD들 말처럼 정말 날 아껴주시는 걸까?’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이미 정해진 연봉 인상률을 높이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태연이 고민하는데 덩치가 큰 인사팀장이 죽상을 하고 다가와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안녕하세요. 유 PD님. 제가 커피 한 잔 사드려도 될까요?”
“얼굴 표정이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
“무슨 일, 네. 있죠. 엄청 큰일이요 아시잖아요.”
“아…….”
태연은 혀를 차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용건이 무엇인지, 태연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저 좀 도와주세요.”
인사팀장은 푸념을 늘어놓았다.
온갖 부서에서, 심지어 자회사에서도 전화를 걸거나 직접 찾아와 연봉 인상률 제한선에 대해 따졌다는 것이다.
욕이란 욕은 다 얻어먹었고, 지금도 실시간으로 먹고 있다고 말했다.
“이대로 연봉 협상을 감행하면 줄 퇴사가 시작되고 저는 또 천 년까지 살 수 있을 분량의 욕을 먹게 되겠죠. 아니, 그 전에 배 터져 죽을지도 몰라요.”
덩치와 인상에 맞지 않은 엄살!
불쌍한 표정의 향연에 태연은 허허 웃으며 물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에요?”
“회장님께 말씀 좀 드려 주십시오!”
태연은 피식 웃고 말았다.
그가 의아해하자 점심시간에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저녁 식사 사주신다고 하셨으니 그때 한 번 말씀드려보려고요.”
“세상에. 마치…… 빛?!”
“에이, 그러지는 마시고요.”
“설득의 달인! 협상의 달인이신 유 PD님만을 믿습니다! 제발 저와 프로듀서들을 살려주세요! 이대로 협상 진행되면 배 터져 죽을 때까지 욕먹습니다!”
“부담스럽게 그러지 마시라니까요!”
“믿겠습니다!”
과묵하고, 카리스마로 유명한 인사팀장이 그러고 있으니 지나가던 직원들이 다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인사팀장은 결연한 얼굴로 말했다.
“이야기 잘 해주시면 제 이름을 걸고 조선아 대리와 소개팅을 연결해 드리…….”
“됐거든요!”
* * *
결전이 다가왔다.
태연은 결연한 얼굴로 열심히 소고기를 구웠다. 오죽했으면 유진성 회장이 폭소하며 한마디 했을 정도였다.
“그 얼굴 보며 식사하다가는 얹히겠다. 그냥 본론부터 말해.”
“네?”
“뭔가 아쉬운 소리 하고 싶어서 밥 사달라고 한 거잖아. 뭐야. 뭐가 문제야?”
태연을 대하는 유진성 회장의 태도가 무척 편해졌다. 그동안 메시지로 대화도 많이 했고, 두 이사를 동반해서 식사 시간도 종종 가진 덕분이었다.
태연은 유진성 회장의 앞접시에 잘 구워진 소고기를 놓아두며 말했다.
“연봉 인상률 좀 높여주십시오!”
“넌 연봉 협상도 안 하면서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뭐 부탁이라도 받았냐?”
“뭐,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것도 있긴 하지만 꼭 그런 이유로 이러는 건 아닙니다. 5%라면 100만 원도 올려 받지 못하는 직원도 있을 텐데…… 그건 좀 너무 하다 싶어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유진성 회장의 표정에 웃음기가 사라졌다.
태연도 진지하게 말했다.
“어떤 의도로 그런 결정을 내리셨는지 잘 모르겠지만 조금만 더 아량을 베풀어 주십시오. 최소 10%는 올려 받아야 넥플이 그래도 날 신경 써주는구나, 하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누가 부탁한 거야?”
“누구라고 말씀드리면 혼내시려고요?”
태연이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반문하니 유진성 회장이 기가 막힌 듯 추궁했다.
“야, 너는 날 뭘로 보고 그런 소리를 하냐?”
“회장님으로 보죠.”
“그런데 그런 소리를 해? 내가 그렇게 속 좁은 인간인 줄 알아?”
“아니면 인심 좀 써주십시오. 에이, 솔직히 5%가 뭡니까? 무슨 강건 대표도 아니고…… 직원 대접 그렇게 하면 평생 욕 듣습니다.”
“야, 넌 뭐 부탁을 그렇게 껄렁껄렁하게 해? 도게자 같은 건 바라지도 않았지만 그런 식으로 부탁하는 건 너무 무게감이 없잖아!”
“전 무게 잡는 거 잘 못 합니다. 아무튼 조금만 더 올려주세요. 그 정도로는 일반 직원에게는 마트에서 소고기 스테이크 하나 사면 없어지는 금액이에요. 이건 아니죠. 천하의 넥플 직원이 꼴랑 5%…… 회장님 그러시면 진짜 욕 엄청 먹어요!”
술을 따르며 자신을 책망하는 태연을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던 유진성 회장은 잔을 신경질적으로 들이켰다.
“내가 살다 살다 너 같은 놈은 처음이다.”
그리고 그는 자기 폰을 들어 무언가 메시지를 열심히 찍어 보내더니 그것을 태연에게 보여줬다.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인사팀장, 10%로 올려서 재공지해.]
“이제 됐냐?”
“사랑합니다! 자자~ 건배 한 번 하시죠!”
“이거 웃기는 놈이라니까…….”
맑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런데 5%는 대체 어떻게 나온 겁니까?”
태연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미간을 찌푸리며 인상 쓰던 유진성 회장이 엄하게 말했다.
“너 이거 어디 가서 퍼뜨리면 안 된다.”
“저 입 무겁습니다.”
그는 고기 하나를 집어 먹은 뒤 놀라운 정보를 알려줬다.
“유니크 크리에이티브 알지?”
“알죠. 세계적인 엔진 회사 아닙니까? 온라인 게임 유통 사업에 손대고 있기도 하고…….”
“거기 인수하려고.”
“……!”
무심코 대답하던 태연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유진성 회장은 아무렇지 않게 고기를 우물거리며 말했다.
“텐젠트가 노리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거든. 거기까지 빼앗기면 게임 업계 진짜 웃기게 되는 거야. 유통 사업이 시원치 않아서 내부 사정이 좋지 않다니 이번 기회를 노려보려고.”
“아, 그래서…….”
그 정도면 충분히 납득 가는 이유였다.
“유니크 소프트가 유통 사업을 이상하게 진행해서 그렇지, 거기 알짜 회사야. 알지?”
“물론이죠! 기술력 하나는 끝내주는 회사죠.”
“거기 먹으면 따라오는 게 많아.”
유니크 소프트에서 제공하는 유니크 엔진 시리즈는 게임 업계뿐 아니라 애니메이션, 영화 등의 영상 제작사에서도 폭넓게 사용된다.
유니크 소프트를 인수하는 그들이 지금까지 구축해 놓은 인프라 역시 흡수하는 셈이니 당장 출혈은 크겠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최적의 투자라고 할 수 있다.
“역시 생각하는 게 우리 같은 사람들과는 차원이 다르시네요.”
“그렇게 아부해도 떨어지는 거 없어.”
“아부하는 게 아닌데요. 제 진심을 그렇게 곡해하시다니…….”
태연의 억울한 표정을 외면하며 유진성 회장은 계속 말을 이었다.
“이거 그룹 내에서도 아는 사람 그리 많지 않으니까 보안에 각별히 유의해. 알았어?”
“네!”
“조만간 이태영 이사랑 미국 건너가기로 했는데 그때 같이 가자고. 너 보고 있으니까 재미있는 생각이 떠오르네.”
“뭐가 떠오르시는데요?”
“있어, 그런 거. 아무튼 내일이나 모레쯤에 일정 알려줄 테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일방적인 공지였지만 이런 제안 자체가 태연에게는 귀중한 기회였다. 어떤 체험을 하게 될지 모르겠지만 절대 평범한 업무는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