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한 게임 개발자가 너무 유능함 15화
10. 유명세
“으으, 부담스럽다. 이러고 판테온 망하면 나는…….”
“거 참, 여기까지 와서…… 성공시키면 되지! 왜 약한 소리를 하고 그래? 재수 없게 정말.”
“성공이 쉽냐? 아, 미치겠다. 숨 막혀 죽을 것 같아. 다시 은따였던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다. 그때가 좋았어.”
골골대는 태연을 황당한 듯 바라보던 최종학이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허튼소리 그만하고, 그래서 그 후에 어떻게 된 거야?”
“뭐가 어떻게 돼?”
“강건 대표. 어제 형한테 전화했다며, 술에 잔뜩 취해서.”
“아, 그거…….”
태연은 어젯밤, 잠들기 전의 상황을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그 사람, 궁지에 몰린 것 같더라고.”
* * *
태연은 잠들기 전, 언제나처럼 기획 문서를 검토했다.
그 날 일정을 모두 정리하고 나서야 안도했고,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이제 잘까?’
슬슬 수마가 몰려와 기획서를 한쪽에 밀어두고, 베개에 머리를 댄 채 눈을 감는데 전화가 왔다.
강건 대표였다.
“이 사람은 왜 또 전화질이야?”
잠시 고민하다가 액정을 터치했다.
-태연이냐?
‘한 잔 하셨구만.’
태연은 혀를 차며 물었다.
“밤중에 무슨 일이세요?”
거친 숨만 몰아쉬던 강건 대표가 불쑥 소리쳤다.
-너 인마, 나한테 그러는 거 아니야 인마!
‘갑자기 무슨…….’
-자식아, 그렇게 뛰쳐나갔으면 됐지. 꼭 그런 식으로 과거 일을 들춰서 나를 욕 먹여야겠어?
무슨 말인가 싶어 얼굴을 찡그리던 태연이 탄성을 터뜨렸다. 갈대나무 숲 어플에서 시작된 논쟁으로, 태연의 과거가 주목받게 되며 블레스 퇴사 경위 역시 재조명받았다.
태연은 한마디도 안 했지만 모든 정황이 적나라하게 까발려졌다. 블레스 직원, 퇴사자들의 저격이 시작된 것이다.
더욱이 드림 소프트 시절 함께 일해본 적이 있었던 업계인들이 작정하고 강건 대표의 악행을 고발하니 강건 대표의 명성은 처참할 지경으로 무너지는 중이었다.
이게 지금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었다.
태연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본의 아니게 벌어진 일이에요. 아실지 모르겠지만 전 해명문에서 대표님과 블레스에 대해 언급 자체를 안 했어요.”
-시끄러, 인마! 이게 결국 다 네가 나 배신하고 뛰쳐나가서 벌어진 일 아냐 인마!
“…….”
씩씩거리던 강건 대표는 돌연 태도를 바꿔 사정했다.
-내가 다 잊을 테니까 다시 돌아오면 안 되겠냐? 우리 다시 잘해보자. 내가 진짜 잘해줄게. 응?
“죄송하지만 넥플과 두 타이틀을 계약해 버려서…….”
-계약금 받았다고 했지? 야, 그거 얼마냐? 까짓거, 해봐야 몇억 수준일 거 아냐? 내가 대신 내줄 테니까 넥플 나와! 그리고 나랑 다시 해보자. 응?
음성이 처절했다.
언뜻 들어보니 울먹이는 것 같기도 했다.
떠날 때만 해도 그렇게 미웠고 배신감 크게 느꼈는데…….
‘약해지면 안 되지. 어차피 돌이킬 수 없는 일이니까.’
강건 대표는 정치질에 능한 사람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드림 소프트 시절에도 대표이사가 따로 있었지만 회장의 적극적인 비호 속에 최고 권력자가 된 것에는 개발력 외에, 정치질도 한몫했다는 소문이 있었다.
이 또한 어떤 술수일지 모른다.
태연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설령. 제가 그렇게 나갔을 때 벌어질 일들, 감당할 자신 있으세요?”
-…….
“유진성 회장님, 손영상 이사님, 이태영 이사님, 제가 그런 식으로 나가 버리면 저는 물론이고 대표님도 가만 안 놔둘 텐데, 뒷감당 어떻게 하시려고 그러세요?”
그는 한참 동안 거친 숨만 몰아쉬었다.
그리고 곧 끓는 듯한 음성을 내뱉었다.
-유태연, 너 이런 식으로 뒤통수 치고 나가면, 혼자 잘 살 수 있을 것 같지?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느낌.
-내가 너 절대 가만 안 놔둬. 이 배은망덕한 자식, 나하고 마주치지 말아라. 응? 알았어?
태연은 욕을 퍼부을까, 진지하게 고민하다가 전화를 끊어 버렸다. 그리고 그의 전화번호를 차단해 버렸다.
그 날 밤, 태연은 밤잠을 설치고 말았다.
* * *
넋 놓고 이야기를 듣던 최종학이 한마디 했다.
“아주 미친 새끼네.”
“그러게 말이다.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투자 계약이 원활히 진행되지 않는 것 같아. 그것 때문에 초조해진 모양이야.”
잠시, 얼굴을 찡그리던 최종학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밝은 표정으로 통화를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김 이사님. 저 종학이에요. 잠시 시간 괜찮으세요? 묻고 싶은 게 있는데…….”
한참 웃고 떠들며 대화를 하던 최종학은 전화를 끊자마자 진지하게 말했다.
“강건 대표가 플레이 펀즈, NT 소프트 모두 찾아갔었다는데 분위기가 그다지 좋지 않았다는 모양이야.”
“누군데?”
“N큐브 최영섭 이사님.”
“아, 코코아 톡에 투자했던 벤처캐피탈?”
“응. 이분이 게임 업계 쪽 투자 담당이라 이쪽 소식에 밝으시거든. 혹시나 해서 물어본 거야.”
“와, 그런 사람도 알고…… 대단하다, 내 동생.”
“에이, 이상한 소리 좀 그만하고 아무튼, 플레이 펀즈 쪽에서는 원래 반응이 좋았다나 봐. 그런데 이번 사건 터지고 강건 대표 과거 경력이 안 좋은 쪽으로 재조명받으면서 태도를 바꿨다나?”
“음…….”
“시대가 많이 바뀌었고, 지금도 엄청난 속도로 바뀌고 있는데 개발에서 손 놓은 지 오래된 강건 대표가 흐름을 잘 따라잡을 수 있겠느냐, 이 부분에 의심을 가지고 있다는 모양이야.”
“음…….”
“강건 대표가 형을 부각시키지 않으려고 했던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었잖아. 본인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으니까 회사 상장시켜서 비싸게 팔아먹을 수 있게 되거나, 인재풀이 넘쳐날 지경이 되기 전까지는 형을 꽁꽁 싸매서 자기 품에 숨겨 두려고 했던 거지.”
“대우 잘 해줬으면 이럴 일 없었잖아.”
“형이 설마 그런 식으로 퇴사하리라 생각지도 못했던 거야. 강건 대표 머릿속에 형은 능력은 있지만 순진무구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양이었으니까. 언제든 자기 마음대로 다룰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거야.”
“야, 아무리 그래도 순진무구라니, 내가 그 정도는 아닌데…….”
태연이 씁쓸한 표정을 짓자 최종학이 말했다.
“아무튼, 당분간 처신 잘하는 게 좋을 거야. 강건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 * *
언론 보도 담당 부서 여직원이 태연을 찾아와 물었다.
“유태연 PD님. 지금 인터뷰 요청이 밀려오고 있는데, 어떻게 할까요?”
“모두 거절해 주시면 안 될까요? 저 지금 그럴 여력이 없어서…….”
그 말에 여직원이 처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선아 씨는 다 도와주시면서 우리만…….”
그 말에 태연이 찔끔했다.
“설마 유 PD님, 외모로 사람 차별하고 그러는 분 아니죠?”
“당연히 아니죠!”
자신의 말이 먹히는 듯싶자 그녀가 간절한 표정으로 애원했다.
“그러면 몇 개만이라도 승낙해 주시면 안 돼요? 계속 거절만 하는 것도 미안한데…….”
“그런데, 몇 개 승낙하면 결국 다 해야 되잖아요.”
누구는 해주고 누구는 안 해주고.
특히 언론 쪽에서 이런 말이 나오게 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태연이었다.
해주면 다 해주는 게 맞았다.
끙끙대던 태연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알겠어요. 제가 뭘 어떻게 하면 될까요?”
* * *
태연은 자신의 결정을 금방 후회했다.
하루에 여러 번씩, 기자들과 인터뷰를 해야 했고, 수시로 기획, 아트 자료를 편집해서 보도 자료용으로 넘겨줘야 했다.
[넥플 신규 프로젝트 판테온을 말한다!]
[게임인 집중 탐구. 불패의 프로듀서 유태연!]
[제국의 검, 한계돌파, 그리고 판테온!]
자신이 게임 개발자인지 연예인지 모를 나날이 시작됐다.
계속되는 인터뷰, 그리고 수시로 터져 나오는 기사.
더욱이 세계적인 온라인 게임인 몬스터 이터와 관련한 비하인드 스토리가 터져 나온 마당이었다. 이슈에 목말라 있던 게임 기자들이 이 사실을 파고들지 않을 리가 없었다.
모든 질문에 친절히 대답해 주고 나오면 녹초가 되어 걸어 다니기도 힘들 정도였다. 그러나 인터뷰가 태연의 주 업무가 아니기에, 게임 개발 관련 업무를 비롯해 프로듀서로서 해내야 할 다양한 업무를 감당해내야 했다.
그중에는 언제부터인가, 태연의 공식 업무처럼 변해 버린 견학생들에 대한 강의도 포함되어 있었다.
‘오늘은…… 마땅한 인재가 보이지 않네.’
좋은 인재를 발견하면 기분이 좋지만 그러지 못하면 조금 우울하다. 언제부터인가, 태연은 강의를 해준 학생들의 포트폴리오와 이력서를 확인 후 채용을 진행한다는 소문이 퍼진 상태였다. 태연이 유명세를 타면서 이에 대한 기대감이 더 커졌다.
이제는 태연이 따로 언급하지 않아도 강의가 끝나면 바로 그 날 저녁, 이력서가 무더기로 밀려왔는데 이제는 회사 인사팀에서도 이런 메일에 대해서는 자신들이 검토하지 않고 바로 태연에게 토스했다.
인사팀장은 태연이 직접 보고 판단할 메일이기에 그렇게 지시했단다.
어쨌든 포트폴리오와 이력서를 봤으니, 작은 코멘트라도 달아 답변을 보내줘야 했다. 사실 채용은 크게 기대하지 않으니 제발 포트폴리오에 대해 피드백이라도 해달라는 요청 글이 무척 많았다.
‘힘들다, 힘들어.’
수십 건의 메일을 무려 한 시간에 처리하는 기염을 토한 뒤 태연은 그대로 쓰러져 버렸다.
‘조금만 쉬자.’
* * *
태연은 강건 대표와 블레스의 일에 신경을 끄고 살고 싶어 했다. 하지만 주변에서 가만 놔두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피디님, 저 기억하시죠? 기획팀장 정유환입니다! 저, 이번에 퇴사하려는데 혹시 기획팀에 남는 자리가 있을까 해서…….
-안녕하세요. 저 판데모니움 애니메이터였던…….
이전 개발자들이 계속 연락을 취해왔기 때문이었다.
본래 넥플 같은 큰 기업은 경력자에게도 높은 입사 허들을 적용한다. 하지만 디렉터나 프로듀서의 추천이라면 상황이 달라진다.
업계 최고 넥플에, 개발 환경 좋기로 소문이 자자한 태연의 개발팀이다. 과거의 인연을 핑계로 채용 청탁을 해오는 이들이 무척 많았다.
‘이것도 곧 사그라들겠지.’
태연은 그렇게 생각하며 인내했다.
예상이 맞았다.
대략 한 달 정도가 지나고, 태연의 언론 노출도가 줄어드니 비로소 평화가 찾아왔다.
‘이제 개발에만 집중할 수 있겠지?’
하지만 태연이 잠시 망각하고 있던 게 있었다.
봄이 찾아오면 성남 백현지구 컨벤션 센터에서 세계 최대 규모의 ‘게임 페스티벌’이 개최된다는 사실을
또한 이번 게임 페스티벌 메인 스폰서 업체가 바로 넥플이었다.
넥플 배급 예정 게임 중, 최고 기대작으로 꼽히는 ‘몬스터 이터 온라인’ 시연회는 절대 빠질 수 없는 특급 이벤트였다.
“그런 이유로, 철저한 준비 부탁해요.”
“…….”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