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한 게임 개발자가 너무 유능함 10화
6. 부담감을 느끼다
답답한 마음을 해소하려고 카페테리아 갔다가 엄청나게 큰 짐을 떠안고 와버렸다.
-몬스터 이터의 예비 프로젝트 매니저로서, 타키자와 프로듀서와의 미팅에 참석해 주십시오.
본래 넥플의 경우, 이미 서비스 중인 게임은 ‘라이브 본부’에서 총괄한다.
하지만 예외가 몇 개 있다.
최종학이 런칭한 6,000억 매출의 모바일 게임과 넥플 게임 매출 절반가량을 책임진다는 캐주얼 액션 RPG ‘워 크라잉’이었다.
만약 사업팀이 이번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면 몬스터 이터 온라인이 세 번째 예외가 될 것이다.
글로벌 유저 수 190만 명을 자랑하는 히트작이기 때문에.
김명욱은 퍼블리싱 계약이 성사되면 자회사를 두고 집중적으로 관리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이미 퇴근 시간이었다.
몇 안 되는 직원들은 이미 칼퇴근해서 스튜디오에 태연 홀로 남겨져 있었다.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는 했지만…….’
여유가 많지 않았다.
경쟁사인 플레이 펀즈 사업팀에서 목숨을 걸고 있기 때문.
‘빨리 결정해야 해.’
사실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승낙하는 순간 고생길이 시작될 것이 뻔히 보이니 망설이고 있었을 뿐. 이걸로 연봉이 더 올라가거나 하지는 않지만, 정식 서비스 성과가 좋으면 인센티브로 소정의 보상이 주어진다.
“유 PD님 퇴근 안 하셨네요?”
그때 선아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녀가 미안한 표정으로 다가와 말했다.
“괜히 저 때문에 부담만 떠안으신 것 같아서…… 죄송해요.”
태연은 고개를 저었다.
“선아 씨 책임이 아니에요. 김명욱 팀장님이 두 분 이사님을 거론하셨잖아요. 선아 씨에게 물어본 건 레퍼런스 체크의 일종이었던 거죠.”
“아…….”
“그러니까 저에게 미안해하실 필요 없어요. 능력 있는 제 책임이죠. 제가 너무 잘나서 벌어진 일이에요.”
태연의 너스레에 그녀가 미소 지었다.
“제가 도울 일 있으면 연락 주세요.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는지, 조금은 밝아진 얼굴로 자리를 떠났다.
태연은 피식 웃으며 남은 업무를 진행했다.
* * *
태연은 다음 날 아침, 김명욱 팀장에게 확답을 줬다.
“한번 해보죠. 미팅 일정 잡아서 알려주세요.”
“감사합니다!”
“저 진짜 큰마음 먹은 거예요. 아시죠?”
“아이고, 물론이죠! 오늘 시간 괜찮으신가요? 제가 좋은 요리 대접해 드리겠습니다! 하하하!”
정말 기분이 좋았던지, 그는 주변 시선도 개의치 않고 웃음을 터뜨렸다. 잠시 대화를 나누고 자리로 돌아온 태연은 업무 일정을 조정했다.
그리고 잠시 고민했다.
‘타키자와 사토시 프로듀서를 설득하려면 어떤 수를 쓰는 게 좋을까?’
태연의 눈동자가 점점 깊어졌다.
* * *
서울과 달리 오사카는 꽤 선선한 편이었다.
이른 오전 시간에 도착했기에 라멘을 먹고, 커피를 마시며 미팅 준비를 하다 보니 금방 점심시간이 지났다.
“이제 갈까요?”
“네. 들어가죠.”
태연과 김명국은 인근에 위치한 빌딩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이 바로 몬스터 이터의 제작사, ‘크라잉 소프트’ 본사 사옥이었다.
공교롭게도, 타키자와 사토시 프로듀서는 한국의 다른 퍼블리셔와 미팅 중에 있었다.
빈 회의실에서 기다리는 동안, 김명국이 초조한 음성으로 물었다.
“설마, 벌써 결정을 내리지는 않았겠죠?”
“두고 봐야죠.”
겉으로는 무덤덤한 척했지만 태연도 내심 긴장감을 느끼고 있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일이 잘 안 풀리게 된다면 돌아가는 내내 찝찝할 것 같았다.
잘된다고 해도 고생길은 열리겠지만, 이왕이면 좋은 결과를 받아서 귀국하고 싶었다.
잠시 후, 문이 열리더니 바람머리를 한 40대 중반의 사내가 들어왔다.
체인이 걸려 있는 청바지에 몬스터 이터 로고가 새겨진 하얀색 티셔츠.
“타키자와 사토시입니다.”
“게임 개발자 유태연입니다.”
일본에서도 손꼽히는 스타 개발자.
태연은 명함을 교환한 뒤 자리에 앉았다.
약간은 피곤한 표정.
“피곤하시죠? 이거 드세요. 제가 애용하는 제품인데 맛과 효력이 상당합니다.”
김명욱은 냉큼 한국에서 가져온 비싼 피로 회복제를 건넸다.
신기한 듯, 병을 건네받고 단번에 들이킨 그가 두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며 말했다.
“포션 효력이 상당하군요! HP가 가득 찼어요!”
그 광경에 태연이 눈빛을 반짝이더니 재빨리 물었다.
“혹시 소드 마스터 유저신가요?”
“어? 어떻게 아셨죠?”
“포션 마실 때 포즈를 보고 단번에 알아봤습니다.”
“몬스터 이터를 해보셨습니까?”
“저 한정판으로 초기작부터 모두 소지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온라인 버전도 일본 현지 런칭 때 바로 시작해서 보름 만에 만렙 찍었죠.”
“굉장하시네요!”
순수하게 감탄하는 그에게 태연이 영혼을 담은 립서비스를 날렸다.
“사실 제 꿈이 프로듀서님과 레이드 한 번 해보는 거였는데, 괜찮으시면 나중에라도 제 소원 좀 들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저 진짜 PD님 게임 좋아합니다. 일이고 뭐고, PD님 뵐 수 있다는 생각에 업무 미루고 찾아온 겁니다.”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감동을 참지 못한 그가 흔쾌히 승낙했다.
“나중은 무슨, 지금도 가능하죠! 우리 게임 한 판 할까요?”
“좋죠!”
“오, 드래곤 슬레이어의 영광 풀 세트라니! 얻기가 정말 까다로운 장비 아닙니까?”
“그러는 타키자와 PD님 장비도 만만치 않군요. 고대 흉신의 무구라니, 심지어 반지는 베히모스의 축복이군요. 설마 프로듀서 권한으로 치트 쓴 건 아니시겠죠?”
“그럴 리가요. 저 이거 맞추려고 정말 많은 공을 들였습니다. 밤새려고 연차도 몇 번 썼고요.”
두 사람은 게임을 하는 내내 한시도 입을 가만두지 않았다.
마침내 첫 레이드가 끝났다.
타키자와 사토시는 이대로 끝내기 아쉬웠던지 태연에게 제안했다.
“한 마리만 더 잡아 볼까요?”
“좋죠!”
이미 김명욱은 안중에도 없었다.
두 사람은 자신들만의 세계에 푹 빠져 있었다.
태연은 플레이, 역 기획 경험을 살려 반드시 수정되었으면 하는 점을 지적했고 타키자와 사토시는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한 시간가량의 플레이를 끝내고서야 그가 말했다.
“퍼블리싱, 맡아 주시죠!”
‘해, 해냈다!’
그 순간, 김명욱은 환호를 터뜨리고픈 충동을 억누르느라 안간힘을 써야 했다. 그래도 부들부들 떨리는 입꼬리만큼은 주체하지 못했다.
기쁜 마음은 태연 또한 마찬가지.
활짝 피어오르는 미소를 숨기지 않고 타키자와 프로듀서가 내민 손을 붙잡았다.
“믿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실망하게 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 *
인력 채용에 앞서 태연은 세 가지 규칙을 세웠다.
-몬스터 이터 시리즈에 대한 이해도가 높을 것.
-상태창 능력치 평균이 최소 ‘중수’ 이상일 것.
-원활한 커뮤니케이션 가능자일 것.
유니버스 스튜디오 개발자 채용이 아니니, 태연은 채용 기준을 넉넉히 잡았다.
‘여기서도 까다롭게 굴 필요는 없지. 최대한 빨리 작업을 끝내 버리자.’
퍼블리싱 계약 후 한 달이 지났다.
우선 김명욱 팀장이 ‘넥플 플러스’ 대표가 되었다.
몬스터 이터 외를 비롯해 크라잉 소프트가 개발 중인 인기 IP 온라인 게임 퍼블리싱 계약에 성공한 공을 인정받은 것이다. 월급 사장 수준이지만 어쨌든 놀라울 정도의 승진이었다.
넥플 플러스 개발 본부장이 된 태연은 현지화 작업을 위해 총 70명의 개발팀과 운영팀을 뽑았다.
상태창의 도움을 받아 양질의 인력을 뽑을 수 있었고, 특히 운영자들을 직접 교육, 관리하면서 일에 더 몰입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연봉을 연차에 맞는 개발자 수준으로 올려줬다.
돈은 쥐꼬리만큼 주면서 충성, 열정만 강요하는 것만큼 추하고 더러운 일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
이것은 김명욱 대표는 물론, 넥플의 절대 권력자인 두 이사도 찬성했다.
번역, 성우 녹음을 비롯해 현지화 작업을 진행하며 현지 개발팀과의 피드백에도 크게 신경 썼다.
태연은 일본을 대표하는 스타 개발자인 타키자와 사토시와 언제든 손쉽게 통화하며 농담도 나눌 수 있는 사이였다.
얼마 전에는 한국에 방문한 타키자와 사토시를 자신의 집에 머물게 하며 3박 4일 여행 가이드를 해주기도 했다. 그 이후 타키자와 사토시는 태연을 크게 신뢰했다.
“한국어뿐 아니라 일본어, 영어 등 다른 나라 텍스트와 성우 음성도 들을 수 있도록 해주세요.”
“뭐, 작업이 어려울 것 같지는 않지만…… 그게 과연 필요한 일일까요?”
“세계적인 콘텐츠를 원작 그대로 즐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덕 중의 덕, 타키자와 씨라면 누구보다도 잘 이해해 주리라 생각했는데요.”
“생각해 보니 맞는 말이군요. 좋아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또 요청 사항이 있습니까?”
“서버 스트레스 관련, 기획 단계에서 조정할 수 있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서 논의해 볼까 하는데…….”
태연은 타키자와가 바랬던, 현지 프로젝트 매니저로서 역할을 완벽하게 해냈다.
소스를 받아 현지화 작업만 준비하는 게 아니라 개발팀이 바라는 기획 아이디어, 혹은 다양한 이슈와 관련한 대안을 주저 없이 제시했다.
타지카와 사토시만큼은 아니지만 태연도 10년을 게임 개발에 매진해 오며 엄청난 경험을 쌓아왔다. 적어도 온라인 서비스에 대해서만큼은 몬스터 이터 개발팀보다 태연이 가지고 있는 스킬, 경험치가 훨씬 높았다.
그것을 주저 없이 풀고, 때로는 현지로 넘어가 일본 개발팀과 개발 회의까지 진행하는 열정을 보였다.
태연의 아이디어는 추후 진행될 글로벌 패치에 적극 반영되었다.
김명욱 팀장은 이 사실을 대대적으로 기사화하여 한국 정식 서비스에 대한 기대감을 높이는 한편, 유태연이라는, 아는 사람만 알고 있던 숨겨진 실력자를 수면 위로 끄집어내기 시작했다.
* * *
판테온 개발팀도 어느새 25명이 되었다.
가장 고심했던 프로그램 팀장은 예상치 못한 부분에서 쉽게 해결이 됐다. 판테온과 몬스터 이터의 존재감이 부각되자 넥플 타 스튜디오 개발자들이 전환배치 신청을 해왔는데, 그중에 신작을 성공적으로 런칭하고 다른 일거리를 찾고 있던 경력자들도 있었다.
주현영은 경력 20년의 여성 프로그래머였다.
서버와 클라이언트, 모든 부분에 능했다.
실력이 엄청나게 뛰어난 것은 아니지만, 40대 중반이고 학교에 다니는 두 아이들의 어머니이면서도 게임 개발자로서 스킬 향상에 열정을 불태우는 멋진 여성이었다.
레퍼런스 체크 결과도 무척 좋았다.
성격이 어찌나 좋았던지, 이전 신규 개발팀에서는 ‘엄마’라고 불렸다고 한다. 안 풀리는 일이 있으면 며칠 밤을 새워서라도 해내고야 말았고 다른 직군들과 잘 어울려서 다양한 아이디어를 제공하기도 했다.
태연은 그녀를 프로그램 팀장으로 임명했고, 그녀를 위주로 상태창 능력치가 좋고 성격도 좋아 보이는 이들을 뽑아 프로그램 팀을 구성했다.
“일단 이 정도면 충분해.”
이제 이 인원으로 알파 버전을 만들어 사내 시연회를 진행한다.
거기서 평가가 좋으면 물량전으로 돌입, 사람을 더 많이 뽑아 총 70명 정도로 개발을 빠르게 진행하는 게 목표였다.
일정을 정리하는 태연에게 누군가 다가와 조심스레 말했다.
“PD님. 학생들이 기다리고 있어요.”
조선아 대리였다.
그녀가 나타나자 스튜디오의 노총각들이 정신 차리지 못하고 흘끔거리기 시작했다. 태연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물었다.
“깜빡했네요. 오늘은 어디에서 견학을 왔다고 했죠?”
“대구대학교 미디어커뮤니케이션 학과 학생들이에요.”
“전국 대학교 학생들 다 한 번씩 보게 생겼네요.”
잠시 후 도착한 회의실에 수십 명의 대학생이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태연은 먼저 마이크를 잡고, 빙긋 웃으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게임 개발자 유태연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 * *
“요즘 활약이 굉장하더군요.”
태연은 바짝 굳어 있었다.
유진성 회장과 독대 중이었기 때문이었다.
퇴근 전, 갑자기 저녁 식사를 함께하자며 호출한 유진성은 판교 외곽에 위치한 고급 일식집으로 데려가 술을 한 잔 따라줬다.
유진성 회장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누가 그러더군요. 유태연 피디가 이번 달, 대한민국 모든 게임인들 중 가장 기사를 많이 탄 사람일 거라고.”
하긴, 인터뷰다 뭐다, 엄청나게 기사가 쏟아졌었다.
심지어 일본에도, 타키자와 프로듀서 현지 언론과 인터뷰하며 계속 태연을 거론했고 그게 한국에도 알려지면서 서서히 유명인물이 되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갑자기 이런 자리를 만든 이유가 뭘까?’
뭔가, 바라는 게 있는 걸까?
태연이 잔뜩 긴장한 채 머리만 굴리고 있는데 유진성 회장이 갑작스러운 말을 해왔다.
“유 PD가 견학, 외부 강연 행사를 거의 전담하고 있다죠?”
“네? 네. 전담…… 까지는 아니고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어요. 사실 그 행사, 제가 한국 게임 업계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좀 바꿔보고 싶어서 직접 기획했던 거였거든요.”
조선아에게 들었던 이야기라 이미 알고 있던 내용이었다. 태연은 조용히 이어지는 말을 경청했다.
“그래서 인재관리 부서라는, 다른 회사에 없는 외부 행사 전담 부서까지 조직했어요.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반응이 시원치 않아서…… 지금까지는 기분이 좀 그랬어요.”
선아도 같은 말을 몇 번 했었다.
자기들이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정작 중심이 되어줄 개발자가 없으니 힘이 빠진다고.
심지어 행사를 진행해 놓고도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하니 자신이 왜 이 회사에 있어야 하는 건지 의문도 들었다고 했다.
“그런데 유 PD 등장 이후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어요. 강의 퀄리티도 좋고, 만족도가 높아서 요즘 문의가 쉴 새 없이 밀려온다고 하더군요.”
“제가 잘해서 그런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저는 그냥 제가 아는 업계 이야기를 들려줬을 뿐인데…… 칭찬받을 사람은 조선아 대리지요. 참 열심히 하는 분입니다.”
“그렇죠. 사실 입사 전부터 주목하고 있던 친구예요.”
그 말에 살짝 의아한 느낌이 들었지만 유진성 회장이 술을 따라주니 금방 머릿속에서 지워졌다.
잔을 비우고, 유진성 회장이 계속 말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판데온 개발도, 넥플 플러스 개발 총괄 역할도, 그리고 강연자 역할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저는 재능이 있고 열정도 뜨거운 순수한 개발자들을 정말 좋아해요. 요즘 그런 사람들이 잘 안 보였는데…… 유 PD는 다르게 보이네요. 적어도 제 눈에는요.”
의미심장한 미소였다.
자리를 파하고 홀로 돌아가는 길, 태연은 고민했다.
‘판테온, 반드시 성공시켜야겠네.’
회장까지 호감을 보이고 있는 상황이다.
일단 이런저런 일로 점수는 많이 따놨지만…… 막상 판테온 개발 과정에서 문제가 생기거나, 런칭했는데 성적이 좋지 않으면 이 호감이 갑절의 화가 되어 돌아올 것이다.
신뢰를 쌓는 건 어렵지만, 그것을 날려 버리는 건 한순간이면 충분하다.
‘부담스럽다.’
태연은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