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한 게임 개발자가 너무 유능함 9화
5. 퍼블리싱 교섭
“오늘 강연의 주제는 게임에서의 ‘아트’입니다.”
학생들이 알고 싶어 하는 것을 알려주는 게 강의의 본질이라면, 태연은 훌륭한 강연자라 할 수 있었다.
아트 디자이너들이 받는 초봉 평균부터 비롯, 게임에서 아트팀이 어떻게 구성되고, 각자 어떤 역할을 하게 되며 업계 대우, 인식은 어떠한지 아주 솔직히 들려줬다.
말로만 한 게 아니라 프레젠테이션 자료까지 준비해서 도표로 보여주기도 했다.
그렇게 한 시간이 훌쩍 지났고 준비된 강의도 모두 끝났지만 학생들은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앵콜! 앵콜!”
“질문 받아주세요!”
“질문이요!”
뜨거운 성원!
학생들의 이러한 반응에 교수들도 놀란 모양이었다. 태연은 어느새 뒷자리에서 강연을 지켜보고 있던 학장을 쳐다보며 시계를 가리켰다. 학장은 알아서 하라는 듯 미소 지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좋습니다. 그러면 질문 몇 개만 받아보도록 하죠.”
태연은 미리 찍어 둔 한 여학생을 지목했다.
요즘 말로, 걸 크러시 이미지에 무척 가까운 보이쉬한 스타일의 여학생이었다.
“학생 이름이 뭐죠?”
“성태희입니다!”
성태희
(미대생, 게임 원화가 지망생)
애니메이터 : 4/10
3D 모델링 : 4/10
원화 : 9/10(15)
연출 : 7/10
배경 : 9/10(15)
이팩트 FX : 6/10
호감도 : 6/10
“궁금한 게 뭐죠?”
“저는 졸업을 앞둔 게임 원화가 지망생입니다. 아는 지인분께 들은 내용으로는 신입 아트 디자이너 업계 진입이 무척 힘들고, 그중에서도 원화가 경쟁률이 가장 높다고 들었습니다. 사실인가요? 만약 그렇다면 우리 같은 학생들은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요?”
잠시 생각을 정리한 태연은 대답을 시작했다.
“어느 정도는 사실이라고 말씀드리고 싶군요. 사실 현시점에서 원화는 경력자 이직도 상당히 힘든 상태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아…….”
여기저기서 실망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성태희 학생의 표정도 매우 어두웠다.
그때 태연의 음성에 힘이 실렸다.
“하지만 기초가 튼튼하고 재능과 열정이 넘치는 실력자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라고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공기의 흐름이 바뀌었다.
실망하던 학생들의 눈빛이 다시 반짝거린다.
그중에서 가장 빛나는 별을 가진 건 성태희 학생이었다.
“일단, 저뿐만 아니라 아트 담당자들은 학원에서 가르친 티가 확 나는, 혹은 강사의 손길이 묻어나는 그런 포트폴리오는 무조건 거르고 봅니다. 이상하게 그런 작업물들은 다 티가 나더라고요. 수학의 정석 같은 게 있는 건지…….”
웃음이 터져 나온다.
“문제는 그런 포트폴리오가 거의 대부분이라는 거, 심지어 그림 같지 않은 그림도 정말 많이 받아봤습니다. 문제는 경력자 중에도 수준 미달자들이 상당히 많다는 거죠.”
태연은 물을 한 모금 마신 뒤 말을 계속했다.
“물론, 실력자들 중에도 시기가 안 맞고, 혹은 조건을 맞추지 못해서 입사, 이직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도 충분히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현실을 바로 보고, 눈을 조금 낮추면 금방 해결되죠.”
“PD님도 신규 프로젝트를 준비 중이라고 하셨는데, 그곳에서도 원화가를 뽑나요?”
성태희의 재질문.
“물론입니다. 바로 며칠 전에 경력, 인성, 실력, 삼박자를 완벽히 갖춘 아트 디렉터님과 원화 팀장을 채용했고 같이 일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 바로 이력서와 포트폴리오를 제출하면 검토해 주실 건가요?”
“물론이죠.”
태연은 프레젠테이션 마지막 페이지를 띄웠다.
그곳에 두 부부가 함께 완성한 공중 도시, 판테온의 드로잉과 함께 아트 팀 구인 구직 정보가 적혀 있었다.
“와……!”
“세상에……!”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 나온다.
“참고로 브레인스토밍 중에 완성된 그림입니다. 이거 그리는데 진짜 얼마 안 걸렸어요. 대충 그린 거라서 버리겠다는 거 제가 아득바득 우겨서 겨우 들고 온 겁니다. 굉장하죠?”
“네!”
“그냥 필기하듯이 슥슥 그렸는데 작품 만드시는 거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세계에서 활약하는 톱 아트 디자이너는 달라도 확실히 다르더군요.”
미대생은 드로잉을 보며 단순히 감탄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속닥속닥, 다양한 의견과 감상을 주고받았다.
성태희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반짝거리고 있었다.
‘전문가들의 시선에는 다르게 보이는 모양이로군.’
태연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물었다.
“또 질문 있으신 분?”
여기저기서 무서운 기세로 손이 들어 올려졌다.
무려 30분을 추가로 쓰고서야 태연은 겨우 강연을 끝낼 수 있었다.
“정말 고생하셨어요!”
조선아가 기분이 몹시 좋았던 모양이다. 맛집을 데려가 주겠다더니, 대낮부터 호프집에 데려와 치킨과 생맥주를 사줬다.
“PD님은 정말 강의 체질인 것 같아요. 사실 제가 친하게 지내던 동생들도 강의를 들었어요. 반응이 정말 좋더라고요!”
“다행이네요. 열심히 준비한 보람이 있어요.”
“아무튼, 잘해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릴게요.”
태연은 조용히 미소 지으며 맥주를 들이켰다.
* * *
다음 날, 또다시 인사팀으로부터 이력서 폭탄이 넘어왔다. 그중에 성태희의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역시 엘리트는 달라도 뭔가 다르구나.’
미술 관련 경력이 화려하고 게임에 맞춘 리얼, 캐주얼 타입 원화 퀄리티도 지적할 부분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완벽했다.
적어도 태연이 보기에는 그렇다는 것이다.
‘전문가가 보기에는 또 다를지도 모르니까…….’
태연은 아트 지원 메일을 홍민석에게 토스했다. 성태희에 대해 첨언을 할까, 고민했지만 고개를 저었다.
‘아트팀 채용에 대해서는 아트 디렉터의 판단에 맡겨야지.’
뽑힐 만한 사람이면 뽑히겠지.
태연은 그렇게 생각하며 성태희에 대한 것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기획자, 프로그래머 면접 네 건을 연속으로 마치고 나니 오후 다섯 시가 되었다
‘오늘 하루도 면접으로 끝났네.’
드림 소프트, 블레스 시절이었다면 엄두도 내지 못했을, 굉장한 스펙의 경력자들과 마주했다.
하지만 그들 중 같이 일하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사람은 없었다.
‘차라리 백영훈 씨를 기획팀장으로 하면…….’
백영훈은 최선을 다해 기획과 시나리오를 공부하고 있다. 판테온 프로젝트에 대해 벌써 큰 애정을 보이고 있다.
몇 번이나 고민했지만, 정말 이 사람이다 싶은 사람이 나타나지 않으니 점점 마음이 기울게 된다.
지원자들에 비해 당장 스펙은 부족해 보일지는 몰라도, 자신이 도와주고, 또 좋은 사람을 뽑아 함께 머리를 맞대게 하면 부족함은 충분히 매울 수 있으리라.
‘그건 그렇게 하고 프로그램 장급 인력들은 역시 면접으로 뽑을 수밖에 없나?’
사실, 제국의 검, 한계돌파를 함께 만들었던 과거 프로그램 장급 인력들에게 이미 연락을 돌렸었다. 하지만 모두 거절했다.
현재 위치, 프로젝트에 만족한다는 것이다.
‘좋은 인력들은 이미 다 자리 잡고 일하고 있단 말이지. 아니면 갈 곳을 이미 정해뒀거나.’
답답한 마음에 카페테리아로 이동했다.
‘응? 선아 씨네?’
사람이 꽤 많았는데 하얀 블라우스에 미니스커트를 입고, 머리를 깔끔하게 뒤로 묶은 그녀가 유난히 눈에 띈다.
‘역시 미모가…… 그런데 누구지?’
그런데 정장 차림에, 젊고 말끔한 인상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신경 쓰지 않으려고 해도 이상하게 계속 시선이 간다.
‘에이, 빨리 커피만 받고 가야지.’
기판으로 음료를 주문한 뒤 잠시 기다리고 있는데 누군가 문자 메시지가 도착했다.
[왼쪽이요!]
돌아보니 그녀가 반가운 얼굴로 손을 흔들고 있었다.
다가가니 그녀가 남자를 소개했다.
“마침 유 PD님 이야기하고 있었어요. 여기 이분은 사업팀 김명욱 과장님이세요.”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IP사업팀 김명욱 팀장입니다.”
“유니버스 스튜디오 유태연입니다.”
아무래도 의도가 있어서 부른 모양이라 명함을 교환한 뒤 선아를 바라봤다.
태연의 예상이 맞았다.
“요 근래에 김명욱 과장님이 골머리를 썩고 있는 문제가 있는데 제가 유 PD님이라면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서 한창 어필 중이었어요.”
“도움이라면…… IP 관련 문제인가요?”
선아는 대답 대신 김명욱 과장을 바라봤다. 그가 웃으며 권유했다.
“시간 괜찮으시면 상담 가능하시겠습니까?”
* * *
IP사업팀은 넥플이 보유 중인 수많은 IP로 여러 사업을 추진하거나, 외부 IP를 수입하여 사업을 진행하는 부서였다.
김명욱 팀장이 안고 있는 문제라면 이와 관련한 사안일 게 분명했다.
“이제부터 들려드리는 정보에 대해서는 오프 더 레코드 부탁드립니다.”
태연이 고개를 끄덕이자 설명이 시작됐다.
“최근, 넥플에서는 일본 유명 게임 ‘몬스터 이터 온라인’ 퍼블리싱을 놓고 몇몇 회사와 경쟁 중에 있었습니다.”
“아!”
몬스터 이터(Monster Eater).
세계적인 인기를 구사하는 콘솔용 헌팅 액션 장르의 게임이었다.
전작들이 게임 오브 더 이어를 휩쓸다시피 했었고 몇 년 전, 글로벌 서비스를 시작한 PC 온라인 버전 역시 세계적으로 놀라울 정도의 매출을 기록 중이었다.
“우리가 150억을 불렀고, 가장 큰 경쟁자로 여기고 있는 플레이 펀즈에서도 대략 비슷한 조건을 부른 것 같습니다.”
넥플 규모는 아니지만, 플레이 펀즈 역시 국내 4대 게임 회사 중 하나로 꼽힐 정도로 거대한 기업이었다.
“문제는 돈이 아니라 프로듀서 타키자와 사토시입니다. 그는 믿을 수 있는 현지 프로듀서를 통해 런칭 작업을 진행하고 싶어 합니다.”
“적임자를 찾지 못하신 건가요?”
“어렵더군요. 몇 안 되는 적임자분들은 난색을 표하셔서…….”
김명욱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제가 제일 먼저 찾아뵌 분은 최종학 PD님이셨습니다.”
“거절당하셨네요.”
“맞습니다.”
“그 녀석, 여력이 없었을 거예요. 게임 두 개를 감당하고 있잖아요.”
“그래도 혹시나 싶어서 부탁을 드려봤는데…… 아무튼, 고민하던 중 유태연 PD님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최종학 PD님뿐 아니라 두 분 이사님께도 평가가 매우 좋으시더군요.”
그리고 선아를 보고 웃는다.
“선아 씨는 아주 열성팬 수준이고요. 두 건의 외부 강의를 아주 완벽하게 해내셨다죠?”
“강의에서 앵콜이 터져 나온 건 처음 봤어요. 정말 열광적이었다니까요?”
“그 정도는 아니었는데…….”
조선아의 극찬에 태연은 몹시 민망해했다.
김명욱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정말 간절한 마음으로 부탁드립니다. 저 좀 도와주십시오!”
예상했던 요청.
태연은 난감한 표정으로 조선아를 바라봤다.
그녀는 자신은 상관없는 일이라는 듯, 빨대로 음료를 들이켜며 먼 산 쳐다보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