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퇴사한 게임 개발자가 너무 유능함-4화 (4/147)

퇴사한 게임 개발자가 너무 유능함 4화

2. 프로젝트 판테온(1)

넥플 본사.

비어 있는 접객실에서 초조한 듯, 기다리던 강건은 이태영이 들어오자 밝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다 손영상을 보고 살짝 표정이 굳었지만 잠시뿐, 어느 때보다 반가운 얼굴로 다가가 악수를 청했다.

“두 달 만에 뵙습니다, 이태영 이사님. 회사 차리고 처음 뵙죠? 건강해 보이십니다. 손영상 이사님.”

이태영은 웃는 얼굴로, 손영상은 고개만 살짝 끄덕여 보였다. 소파에 마주 보고 앉은 세 사람의 본격적인 대화가 이어졌다.

이태영이 말했다.

“바쁘실 테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퍼블리싱 계약은 예정대로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됐어!’

강건이 테이블 아래에 내려 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부분이 남았다.

“그리고 투자 규모 말인데요.”

꿀꺽.

강건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10억으로 결정됐습니다.”

순간 강건은 귀를 의심했다.

‘뭐?’

결코 적은 액수는 아니지만 기대에 못 미치는 액수였다.

겨우 10억이라니?

강건이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이, 일차 투자 규모가 그 정도라는…… 말씀이십니까?”

대답 대신 날아오는 건 묘한 미소뿐.

크게 당황한 강건이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거렸다.

“호, 호시 판데모니움 테스트 결과가 마음에 안 드셨나요?”

“아니요. 충분히 잘 만든 게임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 퍼블리싱 중인 한계돌파 반응도 나쁘지 않고…… 감안해서 최종적으로 정한 투자 규모입니다.”

어느새 이태영의 얼굴에 사람 좋은 미소가 사라져 있었다.

“계약서 사인하시면 바로 입금해 드리도록 하죠. 어떻게 하시겠어요?”

“…….”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액수였다.

투자 규모가 겨우 10억이라니?

당초 예상했던 금액은 최대 100억, 최소 80억 규모였다. 혼자만 품었던 뜻이 아니라 개발 초창기, 알파 버전을 이태영에게 보여주고, 계약 밑그림을 그려나갔을 때 은연중에 맞췄던 액수가 그 정도였다.

‘갑자기 왜……?’

정말 생각도 못 했던 상황이라 뒤통수가 얼얼했다.

가까스로 마음을 다잡은 강건이 무거운 음성으로 대답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 * *

강건이 접객실을 나서는 모습을 지켜보던 이태영이 말했다.

“어때 보여?”

“충격이 커 보이는군. 당초 이야기했던 규모는 100억이었다면서?”

“그때는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이태영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야.”

“저러다 다른 곳에 보여주면 어쩌려고?”

“그래서 투자 확정되면 좋은 거지. 정 대표는 투자받아서 좋고, 퍼블리셔는 단꿈 꿀 수 있어서 좋고, 우리는 경쟁자 통수 얻어맞고 아파하는 거 실시간으로 지켜볼 수 있으니 좋고.”

“사람 심보 한 번…….”

혀를 차며 시계를 확인한 손영상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슬슬 시간이 됐군. 준비 끝났다니 어서 가보자고.”

“드디어 소문의 주인공을 직접 보게 되었군. 최 피디가 그 친구를 프레젠테이션의 달인이라고 칭찬했다면서?”

“많이 배웠다고 하더군.”

대화를 나누며 장소를 이동한 두 사람은 작은 회의실 앞에 도착했다.

입실하니 그 안에 한 청년이 서서 기다리고 있는 게 보였다.

자리에 앉은 손영상이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곧, 담담하면서도 힘 있는 음성이 울려 퍼졌다.

“안녕하십니까. 게임 개발자 유태연입니다. 지금부터 ‘판테온’의 프레젠테이션을 시작하겠습니다!”

처음으로 게임 개발자를 꿈꿨던 시기는 중학생.

그때 태연은 많은 게임을 접하고, 나름대로 연구하면서 하나의 거대한 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만신전 판테온.

만마전 판데모니움.

두 세력의 대립과 얽힌 거대한 이야기를.

원래는 한 게임이었지만 시간이 흐르고, 디테일에 신경 쓰며 두 이야기의 규모도 자연스레 커졌다.

그래서 결국 두 개의 서로 다른 시작점을 부여하게 되었다.

이야기를 듣던 손영상이 눈빛을 반짝였다.

“서로 다른 프로젝트로 시작하지만 결국 하나의 세계관을 공유하기에 언젠가는 합일점을 갖게 된다는 소리군.”

“네. 미국 M사의 히어로 유니버스 컨텐츠를 떠올려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이미 판데모니움 테스트 버전을 경험한 두 사람은 이 원대한 그림을 떠올리며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태영이 흥분한 얼굴로 물었다.

“굉장하네요. 판데모니움의 게임성을 생각하면 충분히 승산이 보이는 프로젝트입니다. 문제는 판권인데…….”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판권은 저에게 있는데 계약은 아직 안 한 상황이거든요.”

“판권을 가지고 있어요? 어떻게요?”

나는 판테온과 판테모니움 컨텐츠를 구상한 뒤, 습작 삼아 인터넷에 이북으로 연재, 출판한 경력이 있었다.

“이북 계약서입니다.”

“오호. 그러면 블레스와 계약 문제는 어떻게 된 거죠?”

“대표님이 제 판권을 존중해 주겠다고, 계약을 하자고 했었는데 여러 이유로 미뤄지다 지금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난 그때를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당시 정 대표님과 의리를 생각해서 판권료를 많이 부를 생각도 없었습니다만 그것조차도 아까웠던 모양입니다.”

“사람이 참 얍삽하군. 아무튼 판데모니움 타이틀도 가져와서 작업을 계속 진행할 수 있겠어. 다행이야.”

“제작된 소스를 가져오지 못하는 게 좀 아쉽긴 하네.”

“전혀 아쉬울 것 없습니다.”

태연은 자신에 찬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원래 저는 신형 유니크 엔진을 이용해서 카툰 렌더링으로 애니메이션 같은 느낌을 부여하고 싶었거든요.”

“카툰 렌더링?”

“애니메이션이라, 그거 좋네. 지금도 좋지만 그쪽이 훨씬 좋을 것 같아!”

개발자로서 흥미를 드러내는 손영상은 비교적 침착했지만 이태영은 달랐다. 아무래도 그의 사업 감각에 청신호가 켜진 듯 보였다.

두 이사의 반응이 이토록 좋으니 태연도 신이 나서 지칠 줄 모르고 열성적으로 프레젠테이션을 진행했다.

준비된 문서는 진작 끝을 보였지만 그와 별개로, 세 사람을 쉴 새 없이 의견을 주고받았다.

저녁 식사 시간이 되어서야 정신을 차렸다.

이태영은 이대로 헤어지기 아쉬웠던지,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저녁 식사 같이 하는 건 어때요?”

“저는 좋습니다만…… 아까부터 종학이가 결과 어떻게 됐냐며 계속 귀찮게 하네요.”

“오, 그래요? 그러면 최 피디도 부르죠. 우리 이제 남이 아니잖아요. 안 그래요?”

이태영의 말이 무척 의미심장했다.

태연은 떨리는 표정으로 손영상을 바라봤다. 개발자들 사이에서는 철혈로 알려진 그가 옆집 아저씨처럼 따뜻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태연은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애써 억누르며 최종학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두 달,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준비한 신규 프로젝트 프레젠테이션이 그렇게 끝났다.

* * *

넥플의 제안을 납득할 수 없었던 강건은 다른 회사를 돌아다녔다.

그러나 투자, 퍼블리싱 계약이라는 것은 그렇게 쉽고 빠르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넥플의 제안을 따라야 하나.’

강건은 난감한 상황에 처했다.

투자가 예정대로 진행되지 않으니 개발 일에 눈에 들어올 턱이 없었다. 원래 제작을 총괄하는 것도 프로듀서의 업무이긴 했지만 그는 디렉터 역할도 자신이 담당하겠다고 선언했던 상태였다.

그리고 두 달 동안은 태연을 적절히 활용해서 스타 개발자로서 위용을 한껏 부려 업무를 장악해 왔다.

그러던 그가 자리를 비우는 일이 많아지니 업무가 원활히 돌아갈 턱이 없었다. 더욱이 프로듀싱, 디렉터 업무에서 몇 걸음 뒤로 물러선 태연은 예전처럼 열정적이지 않았다.

‘확실히 결정이 날 때까지는 조용히 있어야지.’

최종학의 주선으로 시작된 프레젠테이션은 분명 반응이 좋았다.

넥플의 절대 권력자인 두 이사가 걱정하지 말고 좋은 결과를 기다리고 있으라 했으니 뒤통수를 얻어맞을 일도 없었다.

태연은 현재 돌아가는 상황을 흥미롭게 주시했다.

‘강건 대표는 과연 어떤 판단을 내릴까?’

* * *

프레젠테이션을 계기로 손영상이 태연을 찾는 일이 늘었다.

-특별히 할 일 없으면 오늘 저녁 식사나 함께하도록 하죠.

“그럴까요?”

그 날도 눈치 보지 않고 칼퇴근을 한 태연은 인근 고깃집으로 향했다. 미리 고기와 술을 주문하고 기다리고 있으니 뿔테 안경을 착용한 날카로운 인상의 사내가 들어왔다.

그는 태연 앞에 마주 앉자마자 경계를 모두 해제하고 따뜻한 미소로 말했다.

“유태연 피디 자주 보게 돼서 참 좋네요. 요즘 기분이 어때요?”

“비밀공작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기분이에요. 뭔가 확실히 결정 날 때까지 제 입장을 최대한 드러내지 않고 활동해야 하니까요.”

“하하하!

고기를 굽고 술잔을 부딪치고, 분위기가 몹시 화기애애했다. 지금 손영상의 태도를 넥플 관계자들이 목격했다면 크게 경악했을 것이 틀림없다.

그는 결코 웃음이 많지 않은 사람이었으니까.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무렵, 그의 분위기가 진지해졌다. 태연도 그것을 느끼고 조금은 흐트러졌던 자세를 바로 했다.

손영상이 말했다.

“투자 규모는 백억. 한 달 안에 합류해서 개발 업무를 진행해 줬으면 해요.”

‘배, 백억?!’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엄청난 금액이었다.

태연은 침을 꿀꺽 삼키며 이어지는 말을 경청했다.

“1년 안에 알파 버전을 보여줬으면 하는데, 괜찮겠어요?”

“충분히 가능합니다!”

“좋아요. 프레젠테이션에서 클로즈 베타 스펙 완성 예정일을 2년 5개월 정도로 잡았는데, 지금도 유효하죠?

“네!”

“도움이 필요한 일 생기면 저나 이태영 이사에게 말해요. 그리고 합류일 가급적 빨리 정해서 알려줘요. 회장님이 유 피디하고 식사 한번 하고 싶어 하시거든요.”

“회장님께서요?”

“회장님도 개발자 출신인 거 알고 계시죠?”

“물론이죠.”

지금은 개발 일선에서 물러섰지만 넥플 유진성 회장 역시 뛰어난 개발자였다. 넥플 초창기 온라인 게임들 대다수가 손영상과 유진성 회장, 두 사람 손에서 탄생했다.

“유 피디 프로젝트에 관심을 많이 보이시더라고요. 직접 만나서 여러 이야기들을 듣고 싶어 하세요.”

“…….”

“부담 갖지 마세요. 그냥 저처럼 대하면 돼요. 성격이 화통하시거든요.”

어떻게 부담을 안 가질 수가 있을까?

대한민국 최고 게임 회사, 넥플 신화의 주인공이 자신에게 기대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데.

‘속 탄다.’

관심 그 자체는 나쁘지 않다.

문제는 그것을 조금이라도 채우지 못했을 경우 벌어질 일들이다.

태연은 술을 한 잔 따라 단번에 들이켠 후 중얼거렸다.

“갑자기 체할 것 같네요.”

“하하하!”

손영상의 웃음을 뒤로하고 태연은 연거푸 소주를 마셨다.

‘내가 과연 잘 해낼 수 있을까?’

* * *

모든 것이 좋게 결정 났으니 더 이상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다. 태연은 강건에게 말했다.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뭔데. 말해 봐.”

일이 잘 풀리지 않는지, 신경질적으로 대답한 강건은 태연의 표정이 진지한 것을 보고 태도를 바꿨다.

“진지한 이야기야?”

“네.”

“그래, 나가서 커피나 한 잔 마시자.”

도착한 곳은 사내 카페테리아가 아닌 건물 바깥에 있는 카페였다. 강건은 태연이 가져온 카페라테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팔짱을 끼고 말했다.

“이제 말해 봐.”

태연은 망설이지 않고 직구를 던졌다.

“저 회사 그만두겠습니다.”

“뭐라고?”

“회사 그만두겠다고요.”

강건은 그제야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너 갑자기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

그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태연은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힘들어서요.”

“뭐가 힘든데?”

“모두 다. 그냥 전부 힘들어요.”

그 말에 화가 치솟았던지, 눈을 부릅뜨고 욕을 쏟아내려던 강건은 가까스로 분기를 억눌렀다.

“너 제대로 말해. 뭐가 불만이야? 혹시 좋은 조건으로 이직 제안을 받은 거야?”

“대표님과는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해서 나가려는 거에요. 이제 제가 하고 싶은 거 해보려고요.”

“야, 그게 무슨 소리야? 판데모니움 네 프로젝트잖아. 네가 하려던 게 바로 그거잖아!”

“제 거였죠. 하지만 대표님이 가져가 버리셨잖아요.”

“…….”

기가 찬 표정을 짓던 강건이 맹수처럼 으르렁거렸다.

“너 설마 내가 네 자리 뺐었다고 생각한 거야?”

단순히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지만, 그것이 계기가 된 것은 맞기에 태연은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다.

강건이 결국 참지 못하고 화를 터뜨렸다.

“그걸 말이라고 해!”

조용하던 카페에 벼락이 내려쳤다. 바리스타와 다른 손님들이 깜짝 놀라 강건을 쳐다봤다.

그는 타인의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고 호통을 쏟아냈다.

“너 나를 그런 치졸한 놈으로 생각하고 있었어? 내가 네 프로젝트를 빼앗았다고? 내가? 왜? 어째서! 내가 뭐가 아쉽다고!”

태연은 대답 대신 게임 커뮤니티에 올라온 판데모니움 관련 기사 전문을 보여줬다.

“보세요. 스타개발자 강건의 게임이네요.”

“그건 그냥 기사 제목일 뿐이잖아!”

“이런 기사가 한두 개도 아니고 수십 개가 넘는데요? 인터뷰 내용들도…….”

“그냥 기사일 뿐이라고! 기자의 주관적인 생각이 담긴 기사! 너 그 정도도 구분 못 해?”

그가 진정할 기미를 보이지 않으니 눈치를 보던 여자 바리스타가 다가왔다.

“목소리 좀 낮춰주시면 안 될까요?”

카페 분위기가 몹시 살벌했다. 눈치를 보던 손님들이 투덜거리며 나가고 있었다. 상황이 이런데도 강건은 오로지 태연만 노려보고 있었다.

‘완전히 이성을 잃었군,’

태연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죄송해요. 금방 나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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