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퇴사한 게임 개발자가 너무 유능함-3화 (3/147)

퇴사한 게임 개발자가 너무 유능함 3화

1. 프로듀서 유태연(3)

‘잘 썼다!’

자신으로서는 감히 엄두조차 낼 수 없는 유려한 글솜씨!

수연은 5화까지 읽은 뒤 조심스레 물었다.

“이 글 쓰신 분이 이번에 새로 오실 분인가요?”

“백영훈 씨가 과거에 연재했던 글이에요.”

그녀가 멍한 표정을 짓다가 되물었다.

“레벨 파트 백영훈 씨 말씀하신 거죠?”

“네.”

경악하는 최수연에게 태연이 말했다.

“저는 백영훈 씨에게 시나리오 기획 리드를 맡길 거예요. 최수연 씨는 작가가 아닌 기획자로서 업무에 참여하셔야 하고요. 어떻게 하실래요?”

태연은 선택을 강요했다.

기획을 배워 다시 시작해 볼 것인가.

더 좋은 조건을 찾아 이직할 것인가.

‘후자는 불가능하지.’

최수연의 연봉은 3,600만 원.

5년 차 시나리오 기획자에게 이 정도를 맞춰 줄 수 있는 회사는 흔치 않다. 큰 회사로 가면 되겠지만 그녀는 그럴 수 있을 능력도, 인맥도 없다.

현실을 생각하면 남아 있는 게 옮다.

사실 굴욕이라고 말할 것도 없다.

일 더 잘하고, 많이 아는 사람이 관리직에 앉는 게 맞는 일 아닌가?

“어떻게 하시겠어요?”

“저는…….”

태연의 압박을 견디지 못한 최수연은 고개를 푹 숙였다.

* * *

태연이 시나리오 파트 개편에 전념하는 동안, 강건은 넥플 본사를 방문해 사업총괄 이태영 이사와 만남을 가졌다.

정장을 입은 중년의 사내, 이태영이 웃는 얼굴로 말했다.

“한계돌파 참 매력 있는 게임이죠. 매출이 꾸준히 늘고 있고, 패치 내용도 좋아서 유저 호평이 자자하잖아요. 운영 본부에서도 관리가 참 쉽고 재미있는 게임이라고 칭찬이 자자하더라고요.”

이태영의 극찬에 강건의 표정이 밝아졌다.

“넥플 운영팀이 잘해주신 덕분이지요.”

가벼운 주제로 화기애애한 대화를 이어가던 두 사람은 분위기가 어느 정도 무르익자 본론을 꺼냈다.

강건 대표가 먼저 말했다.

“이전에 말씀드렸다시피 판데모니움은 두 달 후에 테스트가 가능할 것 같습니다.”

이태영이 진지하게 받았다.

“사실 저는 일전에 보여주신 작업물도 만족스럽습니다. 바로 퍼블리싱 계약 맺고 브랜드 사이트 만들어 홍보 시작하는 것도 좋지 않겠습니까?”

“아직 보완해야 할 부분이 많은 게임입니다. 사실 요 근래에는 제 실무 복귀를 심각하게 고려 중입니다.”

그 말에 이태영이 고개를 갸웃하더니 물었다.

“지금 판데모니움 개발 총괄이 유태연 피디 아닙니까?”

“어? 어, 어떻게 아셨습니까?”

“어떻게 알게 됐습니다. 그런데 제가 들었던 내용에 의하면 젊지만 개발 내공이 상당하다고 하던데…….”

빠르게 표정을 수습한 강건 대표는 무거운 음성으로 말했다.

“기획팀장으로서는 좋았죠. 라이브 팀까지 관리를 맡기니 이 친구가 업무를 감당하지 못하고 허덕거리더군요. 그냥 팀장 그릇이었던 거죠.”

“아, 그런 일이 있었군요.”

“그래서 다시 실무를 잡으려는 겁니다. 나름 노력하고는 있는 것 같지만 결과물이 제 성에 차지 않아서…….”

강건 대표는 다시 밝은 얼굴로 말했다.

“그런 상황이니 걱정 말고 두 달만 기다려 주십시오. 이사님을 절대 실망시켜 드리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믿겠습니다.”

한 시간가량의 면담이 끝나고 강건 대표가 돌아가자 이태영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잠시 후, 까만 뿔테 안경을 낀 날카로운 인상의 중년 사내가 이태영의 집무실에 들어왔다.

넥플의 개발 총괄 손영상 이사였다.

“바빠 죽겠는데, 뭐야? 무슨 일이야?”

투덜거리며 자리에 앉는 오랜 친구에게 이태영이 사람 좋은 미소로 물었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유태연 피디라고 알지?”

“잘 알지. 그 친구 내가 자네에게 알려준 거잖아. 실력 있고 유능한 개발잔데 놓쳐서 아쉽다고.”

“방금 강건 대표 만났는데 이상한 소리를 하더라고.”

이태영은 강건 대표와 나눴던 이야기를 들려줬다. 손영상이 혀를 차며 말했다.

“최 피디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았네.”

“갑자기 최 피디 이야기가 왜 나와?”

“최 피디 연결해 준 게 유태연 피디라는 거 예전에 말해줬잖아.”

“아, 맞아. 그랬지.”

“그 최 피디가 보증하는 개발자가 바로 유 피디야. 요즘도 자주 연락하면서 친한 친구로 지낸다고 하더라고. 이전 게임 개발 당시에도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하더라. 무슨 말이 더 필요해?”

“그러면 강건 대표가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소리들을 한 걸까?”

“뻔한 거 아냐? 유 피디 영향력이 더 커질 걸 두려워하는 거지. 그게 아니면 개발자로서 명예에 눈이 멀어서 혼자 스포트라이트 받으려는 속셈이거나.”

거친 발언에 이태영이 찡그린 얼굴로 물었다.

“강건 대표에게 뭐 원한 가진 거라고 있어?”

“예전부터 별로 안 좋아 했어. 내 지인 중에 그 사람과 일하다가 치를 떨며 나간 사람 몇몇 있거든.”

“그런 일이 있었군.”

이태영은 확실히 알겠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퍼블리싱 사내 테스트 연장 요청을 한 게 이런 이유 때문이었군. 유태연 피디 내려 앉힌 뒤 자기가 그 자리 차지하려고.”

“…….”

“우리야 좋은 게임 잡아서 계약 잘하면 끝날 일이지만 유태연 피디는 타격이 크겠어.”

“그렇겠지. 강건 대표를 존경해서 좋은 제안 뿌리치고 손해 감수하며 따라간 거니까.”

안타까운 표정으로 무언가 고민하던 손영상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태영이 물었다.

“그 친구에게 알려주려고?”

“내가 뭐 하러 그런 짓을 해? 그냥 최 피디 만나러 가는 거야.”

그렇게 손영상이 집무실을 나서자 이태영이 피식 웃었다.

“하여튼 저 오지랖…….”

* * *

강건에게 부름 받은 태연은 뜬금없는 선언에 멍한 표정을 지었다.

“개발팀에 내 자리 하나 준비해 둬.”

‘이게 무슨 소리야?’

태연은 당황한 나머지 더듬거리며 반문했다.

“다시…… 개발에 참여하시려고요?”

“우리 회사 명운이 걸려 있잖아. 나도 뭔가 해야 할 거 아냐.”

회사 대표의 뜻이 그러하다면 어찌할 수 없는 일.

‘감이 많이 떨어졌을 텐데…….’

전작 한계돌파가 마지막 참여작이었고 프로듀서로 이름을 올리긴 했지만 실질적인 디렉팅은 태연이 도맡아 했다.

그 후로는 계속 회사 경영에만 전념했던 강건이다.

이제 와서 다시 게임 개발에 참여하겠다고?

‘감을 많이 잃었을 텐데…… 상태창을 확인해 보자.’

강건의 상태창을 확인한 태연이 눈살을 찌푸렸다. 난데없는 표정 변화에 강건이 물었다.

“왜 그래?”

“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러면 언제부터 일 시작하실 건가요?”

“내일.”

“네. 오늘 안으로 업무 세팅 끝낼게요.”

도망치듯 집무실을 떠난 태연은 강건의 상태창을 떠올렸다.

[강건]

CEO(게임 프로듀서)

게임 개발 5/10

게임 운영 5/10

인력 관리 5/10

사업 감각 6/10

호감도 : -5/10

‘호감도가 마이너스 5라니? 이게 뭐야?’

이런 경우도 있을 수가 있나?

지금 태연에게 다른 수치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설마 대표님이 날 싫어한다는 거야?’

충격적이다.

‘내가 뭘 잘못했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신이 실수한 건 없다.

신입 시절부터 지금까지 충실히 강건 대표의 지시를 따랐다. 그의 신경에 거슬리는 행동을 한 적이 없었다.

심지어 기약 없는 보상에 대해 일언반구도 한 적이 없었다. 속으로만 끙끙 앓았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감도가 마이너스 수치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이유가 없어.’

자리에 돌아오고 나서도 충격을 벗지 못한 태연은 멍하니 모니터만 보고 앉아 있었다. 지금에서야 이런저런 감정이 많지만 강건은 스승이었고, 또한 존경의 대상이었다.

-웅웅웅!

그때 책상에 올려 둔 스마트폰이 진동음을 냈다.

[최종학]

넥플 개발총괄 손영상에게 소개해 줬던 시스템 파트장 출신 프로듀서였다.

회의실로 이동해서 전화를 받자마자 우울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종학이냐?”

-음? 목소리가 안 좋은데, 무슨 일 있었어?

“그럴 일이 좀 있었다. 무슨 일이야?”

-오늘 저녁 식사나 같이 하자고. 내가 방금 도저히 흘려들을 수 없는 소리를 들었거든.

최종학의 음성도 진지했다.

‘나와 관련된 일이구나.’

심상치 않은 일을 직감한 태연이 대답했다.

“항상 보던 곳에서 보자.”

판교 일식집에 도착한 태연은 먼저 두 개의 메뉴를 준비하고 창밖을 내려다봤다.

‘대표님이 왜 나를 싫어하는 걸까? 이제 내가 못 미더워졌나? 기대에 부흥하지 못해서?’

머릿속이 복잡했다.

잠시 후, 강력반 형사를 연상케 하는 근육질 체구와 흉악한 얼굴을 지닌 남자가 맞은편에 앉았다.

“식사 주문했어?”

“네가 좋아하는 규동 정식 주문해 놨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식사가 나왔다.

“일단 먹고 이야기하자고.”

식사를 마친 뒤, 인근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본격적인 대화가 시작됐다.

“어제 강건이가 넥플 이태영 이사님을 만나러 왔어.”

그렇게 시작되는 이야기.

한참 후에야 태연은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얼굴로 물었다.

“그거…… 정말이야?”

“나 손영상 이사님에게 들은 거 그대로 전해주는 거야. 그분이 형한테 좋은 감정 가지고 있는 거 알지?”

“잘 알지.”

“아직까지는 강건이 이런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게 아니겠냐, 추측만 하고 있는 상황이라 형에게 직접 말하기는 뭐해서 나에게 알려주신 거야.”

이야기를 듣고 나니 비로소 확신할 수 있었다.

‘날 싫어하는 게 맞구나.’

다른 사실보다, 그것이 유난히 태연의 심장을 깊숙이 찔렀다.

상처받은 얼굴로 말을 잇지 못하는 태연에게 최종학이 짜증스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내가 예전부터 말했지? 강건 너무 믿고 신뢰하지 말라고.”

“…….”

“형 업계에 입사한 이후 기획 맡은 게임 전부 성공시켰잖아. 다른 건 몰라도 드림 소프트 시절에 만든 무협 MMORPG 제국의 검, 그리고 전작 한계돌파는 누가 뭐라고 해도 형이 1등 공신이었어. 다른 회사였다면 형 진작 부자 됐다고. 알아?”

최종학은 가슴에 답답하게 쌓인 한숨을 거칠게 뱉어냈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개발팀에 자기 자리 세팅하라고 했다면서? 그거 형 스포트라이트를 뺏으려고 수 쓰는 거잖아.”

“내가 생각하기에도 그런 것 같다.”

태연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태연은 솔직히 조언을 구했다.

자기 일처럼 흥분하던 최종학이 흘끔 쳐다보며 물었다.

“형 판데모니움 못 버리지?”

“그렇지. 내 드림 프로젝트라는 거 너도 잘 알잖아.”

“사실 손영상 이사님은 형 스카우트하고 싶어 해. 이번에 미국 D사에서 히어로 영화 IP 몇 개 가져온 게 있거든.”

태연은 말없이 쳐다보았다.

허튼소리 말고 질문에 대답이나 하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최종학은 피식 웃더니 반문했다.

“사실 답은 이미 정해져 있는 거 아닌가? 그저 형 각오가 필요할 뿐이지.”

“…….”

“준비 됐어?”

태연은 눈을 감고 잠시 갈등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최종학은 피식 웃으며 말을 시작했다. 태연은 그 말을 귀담아들었다.

* * *

강건이 판데모니움 개발 작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그의 첫 번째 지시는 바로 업무 보고였다.

현재까지의 업무 진행 사항을 파악한 뒤 자신이 지휘권을 갖겠다는 의도였다.

태연은 순순히 그 지시에 따랐다.

겉으로는 그랬다.

“……이상입니다.”

강건은 회의가 쓸데없이 길어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태연이 신입 시절부터 그랬다. 이 외에 그의 성격을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파악하고 있었으니 태연은 모처럼 만의 프레젠테이션으로 그를 흡족하게 했다.

“유태연, 회의 끝내기 전에 확실히 말해두고 싶은데…….”

잠시 말을 끌던 그는 엄중한 모습으로 말했다.

“내가 개발에 참여하긴 하지만 이건 네 프로젝트야.”

태연은 이어지는 말을 경청했다.

“내가 프로듀서로서 제작 지휘를 하지만 기획을 비롯한 실무 전반은 네가 참여해서 이끌어야 해.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지?”

이전이었다면 심기일전해서 열심히 하라는 소리로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편하게 누워서 떡을 드시겠다 이거지.’

울분이 치밀었지만 태연은 그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지금은 발톱을 감춰야 할 때였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좋아. 가봐.”

회의실을 나선 태연은 차가운 눈빛을 번뜩였다.

* * *

얼마 지나지 않아 기사가 터지기 시작했다.

[스타 개발자 강건, 현역 복귀 선언!]

[비장의 캐주얼 MMORPG 출격 준비!]

[강건 프로듀서, 다시 한번 디렉팅 시작!]

아직 퍼블리싱 계약이 성사되지는 않았지만 한계돌파 이후, 또 다른 신작을 준비 중이라는 사실에 제일 먼저 매니아들이 열광했다.

기자들이 찾아와 개발 현장을 촬영했고 아트 디렉터, 프로그램 팀장과 함께 최고 개발자 셋을 인터뷰했다.

그런데 그곳 어디에도 태연의 이름은 없었다.

언급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눈에 띄는 메인에서는 내려갔고 대부분은 강건의 이름만 부각되었다.

-내가 뭐라고 했어? 그 인간 분명히 수작 부릴 거라고 했지?

참다못한 최종학이 전화를 걸어 분기를 터뜨렸다. 태연은 한숨 쉬며 말했다.

“나도 화가 나기는 하지만…… 어쩌겠어. 이미 예정되어 있던 일이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는데. 지금은 움츠리고 있어야지. 네가 그렇게 하라고 했잖아.”

-그거야 그렇지만…… 아오, 진짜 인터뷰 기사 보는데 열 받아서 죽는 줄 알았네. 지가 뭐라고 스타 개발자야?

자기 일처럼 화를 내주는 동생, 최종학이 고마웠던 태연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너도 알겠지만…… 진짜 개발은 이제부터 시작이거든. 뒷수습 어떻게 할지 기대되네.”

그렇게 두 달이 지나고, 마침내 넥플 개발본부, 퍼블리싱 본부가 주관하는 판데모니움 테스트가 진행되었다.

* * *

한참 테스트를 진행하던 손영상은 뿔테 안경을 벗고 미간을 꾹 눌렀다. 그때 누군가 그의 자리로 찾아오더니 차가운 아이스커피 한잔을 내밀었다.

친구이자 넥플 사업 총괄 이태영 이사였다.

“어때?”

의미심장한 물음.

손영상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대답했다.

“이건 분명히 성공할 거야. 그 친구가 계속 이 게임을 만든다면 말이지.”

“이미 결정 내린 거야?”

“이전에도 실력은 잘 알고 있었는데 이번에 확실히 결심했어.”

손영상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유태연 피디, 데려와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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