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한 게임 개발자가 너무 유능함 2화
1. 프로듀서 유태연(2)
태연은 주말 내내 자신의 상태창 파악에 전념했다. 그리고 몇 가지를 정리할 수 있었다.
1. 상태창은 명령어로 간단히 껐다 켤 수 있다.
2. 능력치는 직업 관련 수치만 간략히 표시한다.
3. 능력치 옆에 붙는 괄호 수치는 ‘잠재력’으로 추측되며, 모든 사람에게 표시되는 건 아니다.
4. 호감도는 상대방이 자신에게 가지고 있는 호감 정도를 수치화한 내용이다.
5. 자신의 상태창은 확인할 수 없다.
‘내 능력을 확인할 수 없다는 게 답답하긴 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가 어디야?’
상태창 능력이 전부가 아니다.
‘자신감이 솟구치고 있어.’
그리고 또 하나.
‘기억력이 굉장히 좋아졌다!’
분명 단순한 기분 탓은 아니었다.
세월에 희석되어 희미해진 지식들이 바로 방금 들은 것처럼 뚜렷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심지어 가볍게 스쳐 지나간 것들까지도 기억이 생생하다.
이를 기반으로,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넘쳐난다.
‘이건 분명히 팔찌의 능력이야.’
팔찌를 벗으면 기분도, 기억력도 원래대로 돌아오니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이건 기회다.
신이 내려주신 큰 행운이다.
‘잘 활용하면 큰 도움이 될 거야.’
개발력을 인정받은 프로듀서들 중, 극소수만 성공을 경험하고 다수는 실패한다. 그리고 그 가장 큰 이유로 ‘용인술’을 꼽는다.
본인의 능력이 부족해도 사람을 적재적소에 잘 쓸 수 있다면 얼마든지 좋은 게임을 만들 수 있다.
그뿐일까?
후에 회사를 운영할 때에도 용이하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회사에 출근한 태연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한 여성과 마주치게 되었다.
“안녕하세요.”
판데모니움 개발 스튜디오의 상큼발랄한 기획자 윤소라였다.
태연은 심호흡을 하고, 내심 준비했던 명령어를 읊조렸다.
‘상태창 on!’
그러자 눈앞에 반투명한 상태창이 떠오른다.
[윤소라]
게임 기획자(콘텐츠)
시스템 : 4/10
콘텐츠 : 6/10(15)
레벨 : 6/10
시나리오 : 5/10
호감도 : 5/10
내용 출력이 정말 간결하다.
이 정도로 윤소라의 수준을 명확히 파악하기는 어려웠다.
‘오늘 확실히 비교 분석해 보면서 파악해 두자.’
태연은 그렇게 생각하며 스튜디오로 이동했다.
* * *
두 달 안에 많은 것을 바꿀 수는 없다.
기획에서 해결을 봐야 한다.
‘시나리오 퀘스트를 중점적으로 손보자.’
덧붙여 해야 할 일도 있다.
바로 현 작업자들의 능력치를 파악해서 확실한 기준을 잡는 것.
태연은 즉각 기획팀 전원을 회의실에 소집했다.
시스템 기획자 2명.
콘텐츠 기획자 2명,
레벨 기획자 2명.
시나리오 기획 1명.
기획팀장을 포함한 총 8명이 회의실을 채웠다.
“지난주, 대표님이 빌드 버전 테스트한 거 알고 계시죠?”
회의실에 긴장감이 휘몰아친다.
“다른 말 안 할게요. 수정 작업 진행하기 전에 버그 이슈를 최대한 빨리 수정하려고 해요. 각자가 안고 있는 이슈를 공유해 주세요. 우선 시스템 파트부터.”
그 말에 체크무늬 남방을 입은 안경 낀 뚱뚱한 사내가 일어섰다.
“우선 전투 시스템부터 말씀드리면…….”
[여민석]
게임 기획자(시스템 파트장)
시스템 : 5/10
콘텐츠 : 4/10
레벨 : 4/10
시나리오 : 5/10
호감도 : 3/10
‘시스템 기획 수치가 5라고?’
이 정도면 콘텐츠 기획자인 윤소라보다 조금 나은 수준이 아닌가?
‘그러고 보니 윤소라 씨 첫 직장에서 시스템 기획을 맡아 본 적이 있다고 했었지?’
그렇다면 두 사람의 시스템 기획서를 비교해 보면 수준 차이가 어느 정도인지 답이 나올 것이다.
태연은 그렇게 생각하며 다음 사람을 확인했다.
“시스템 파트 정훈섭입니다. 먼저 스킬 시스템 문제점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정훈섭]
게임 기획자(시스템)
시스템 : 8/10(15)
콘텐츠 : 7/10
레벨 : 7/10
시나리오 : 6/10
호감도 : 5/10
‘음? 평균 능력치가 꽤 높네?’
태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금까지 본 세 명의 기획자 중, 단연 최고의 능력치를 지니고 있었다.
‘이런 사람이 그냥 파트원이었다고?’
태연은 처음으로 혼란을 느꼈다.
시스템 파트의 차례가 끝나고 시나리오 기획자가 일어섰다.
30대 초반의 여성으로, 이번이 세 번째 프로젝트인 5년 차 시나리오 작가였다.
[최수연]
게임 기획자(시나리오)
시스템 : 3/10
콘텐츠 : 3/10
레벨 : 3/10
시나리오 : 4/10
호감도 : 2/10
“…….”
형편없는 능력치에 태연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심지어 호감도도 거의 최악 수준이 아닌가?
최수연은 날카로운 목소리로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거두절미하고, 퀘스트 모든 문제의 근원은 인력 부족에서 비롯된 퀄리티 저하입니다.”
심지어 자기 능력 탓은 안 하고, 인력 부족을 원인으로 돌린다.
태연은 무시하며 다음 사람을 확인했다.
실내에서도 후드를 뒤집어쓰고,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으며 슬리퍼를 끌고 다니는 사내였다.
한때 힙합 뮤지션 지망생이었다고 했다.
[신수경]
게임 기획자(레벨 파트장)
시스템 : 4/10
콘텐츠 : 5/10
레벨 : 5/10
시나리오 : 4/10
호감도 : 4/10
‘어중간하네.’
슬슬 수치에 대해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태연은 발표는 듣는 둥 마는 둥, 다른 미 발표자를 둘러보다가 한 남자에게 시선이 멈췄다.
‘어?’
[백영훈]
게임 기획자(레벨)
시스템 : 5/10
콘텐츠 : 5/10
레벨 : 6/10
시나리오 : 7/10(15)
호감도 : 5/10
‘이건 또 뭐야?’
왜 이렇게 시나리오 능력치가 높지?
심지어 잠재력도 개방되어 있다.
과거 어떤 경유로든, 시나리오 관련 일을 해본 게 분명했다.
‘이런 것도 모르고 있었다니…….’
지금 가장 급한 게 시나리오 퀘스트였다. 최수연만 생각하면 머리가 아팠는데 숨겨진 능력자가 레벨 파트에 있었다니.
태연은 스스로의 무신경함을 자책했다.
자신이 조직 관리에 조금 더 관심을 쏟았다면 어떤 식으로든 알게 되었을 내용이었다.
마지막으로…….
[정유환]
게임 기획자(기획팀장)
시스템 : 6/10
콘텐츠 : 4/10
레벨 : 5/10
시나리오 : 4/10
호감도 : 6/10
마침내 모든 기획자들의 발표가 끝나자 태연이 한마디 하고 일어섰다.
“지금까지 거론된 모든 문제점들, 기획팀장님이 엑셀로 정리한 뒤 파트별로 취합해서 모두에게 공유하세요.”
자리로 돌아온 태연은 판데모니움 개발팀만 접속할 수 있는 공유 폴더에 접속했다. 그 안에 장급만 확인할 수 있는 이력서, 포트폴리오 폴더도 존재했다. 그중 몇 개의 폴더에 모든 입사 지원 기록이 담겨 있다.
이후로 태연은 상태창 수치와 포트폴리오, 현재 작업물 등을 비교 분석했다.
그렇게 오전 시간을 보냈다.
* * *
‘감 잡았어.’
태연은 한참 끄적이던 수첩을 확인했다.
1~3레벨 : 하수
4~6레벨 : 중수
7~8레벨 : 고수
9~10레벨 : 베테랑
‘분류는 단순할수록 좋지.’
하수는 업계에 막 입문한 단계.
보통 1, 2년차들이 여기에 속한다.
개발 지식은 어느 정도 갖추고 있지만 경험이 부족해서 회의 내용을 잘 따라가지 못하는 초짜들.
이들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대부분 전력 외 취급을 한다. 회사에서도 큰 활약을 기대하지 않고 시간과 비용을 투자해서 인재로 육성해 보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중수부터는 콘텐츠를 맡아 각 담당자들과 협업하여 처리할 수 있게 된 수준을 말한다. 이 시점부터 경력자 대우를 받을 수 있다.
고수는 파트, 팀의 업무를 이끌어 갈 수 있을 정도의 실력자를 말한다.
베테랑은 어디에서 어떤 프로젝트를 맡게 돼도 제 몫을 완벽히 해낼 수 있는 사람들을 말한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프로젝트의 주역들이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 기획팀의 장급들을 분류해 보면…….’
기획팀장 정유환 중수.
시스템 파트장 여민석 중수.
레벨 파트장 신수경 중수.
콘텐츠 파트장 지서아 중수.
아쉽지만 충분히 납득 가는 결과였다.
고수, 베테랑급 인재들은 그만큼 몸값이 비싸고 블레스 같은 중소규모 회사에 잘 지원을 하지 않는다. 필요하면 직접 찾아가서 스카우트를 해야 하는데 이 정보를 파악하기도 쉽지 않다.
잠시 고민하던 태연은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기획팀 개편은 나중에, 일단 시나리오 기획자부터 손을 보자.’
* * *
“백영훈 씨, 과거에 시나리오 관련 일을 했던 적 있었죠?”
“네?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갑자기 회의실로 불려온 백영훈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영훈 씨 면접 때 얼핏 들었던 게 떠올랐어요. 아무튼, 정확히 어떤 일을 했었는지 알 수 있을까요?”
“과거에 소설을 연재했던 적이 있어요.”
“소설 연재요?”
“네. 웹소설 전문 플랫폼에서 유료 연재했었어요.”
“지금도 볼 수 있어요? 제목이 뭐예요?”
“예전에 썼던 거라 보여드리기 민망한데…….”
“괜찮으니 말해줘요.”
백영훈은 민망해하며 정보를 알려줬다.
제목은 달빛 기사단.
판타지 소설이었다.
플랫폼 어플을 다운받아 접속한 뒤 제목을 검색했다. 결과가 꽤나 놀라웠다.
350화 완결에 평균 조회 수는 5,000회.
‘대단한데?’
태연은 기대감을 갖고 프롤로그부터 진중히 글을 읽어 내렸다.
중세 유럽 배경.
왕의 명령을 받아 온갖 더러운 일은 도맡아 처리하는 특수 집단, ‘달빛 기사단’의 이야기.
소설 분위기는 전반적으로 어두웠지만 캐릭터들이 살아 있었다. 그리고 배경, 갈등, 전투 요소 등의 표현이 수준급이었다.
태연이 웃는 얼굴로 칭찬했다.
“아니, 이런 글 실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왜 시나리오가 아니라 레벨 기획자를 하고 있었어요?”
“제 꿈이 게임 프로듀서거든요. 제가 만든 세계관과 이야기로 게임 만들어 보는 게 꿈이었어요. 그런데 시나리오 기획자가 되면 그걸 못 하잖아요.”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기획팀장과 프로듀서는 시스템과 레벨 업무에 능해야 하잖아요. 당장 PD님도 시스템 기획자 출신이고요.”
“그런 식이라면 프로그래머가 훨씬 유리하죠. 기획서 내용을 실제로 구현시켜주는 사람들인데요.”
백영훈은 아무런 반박을 못 했다.
태연이 빙긋 웃으며 물었다.
“혹시 시나리오 기획 업무 맡아 볼 생각 없어요?”
“제, 제가요?”
“저는 백영훈 씨라면 잘 해낼 거라고 생각해요.”
“저 한 번도 해본 적 없는데…….”
“기획 업무를 모두 습득하고 있잖아요. 그것도 꽤 수준급으로. 남몰래 타 파트 업무 공부도 열심히 하셨죠?”
“……!”
귀신이라도 본 듯한 표정이었다.
태연의 본격적인 설득을 시작했다.
“기획을 할 줄 아는 시나리오 퀘스트 작업자가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아세요?”
“그, 그런가요?”
“잘만하면 어중간한 조직장보다 돈을 훨씬 많이 벌 수 있어요. 그런 사람이면 부르는 게 몸값이죠.”
“…….”
백영훈이 혹하는 게 보인다.
태연은 못을 박았다.
“내년 연봉 협상 때 특별히 신경 써 드릴게요. 대신 제가 기대하는 포지션에서 충분히 활약을 해주셔야 해요.”
“기대하시는 포지션이라면……?”
“정말 제대로 된 시나리오 기획자.”
태연이 음성에 힘을 실었다.
“백영훈 씨가 그게 무엇인지 모두에게 똑똑히 보여주세요. 그리고 최수연 씨를 이끌어 주세요.”
“제가 최수연 씨를요?”
“최수연 씨, 기획자로서는 많이 부족한 거 알죠? 승낙하시면 시나리오 파트장 되시는 거예요.”
“…….”
“어떻게 하실래요?”
계속 흔들리던 백영훈은 태연의 유혹에 완전히 넘어가 버렸다.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잘 부탁해요. 아, 나가시면서 최수연 씨 불러주세요.”
“부르…… 셨어요?”
심장이 조이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최수연은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태연이 겨울철 한파보다도 차가운 얼굴로 앉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컨셉은 그대로 두고 세계관, 메인, 서브 시나리오와 퀘스트, 동선, 캐릭터 설정과 튜토리얼 등등, 모든 것을 전면 수정하기로 했어요. 수연 씨, 이거 감당할 수 있겠어요?”
“……!”
최수연이 당황했다.
섣불리 대답을 못 하는 그녀에게 태연이 불쑥 물었다.
“혹시 웹소설 같은 거 써본 적 있어요?”
“네? 예, 예전에 시도만 잠깐…….”
“그러면 이거 한 번 보세요.”
태연이 보여준 것은 달빛 기사단 연재본이었다.
“그 자리에서 쭉 읽어 보세요. 충분히 기다려 드릴 테니까.”
최수연은 어리둥절해 하며 글을 읽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