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한 게임 개발자가 너무 유능함 1화
1. 프로듀서 유태연(1)
귀엽고 아기자기한 캐릭터들이 잘 꾸며진 필드를 돌아다니면서 몬스터들을 무찌른다.
다양한 스킬, 화려한 이팩트와 애니메이션.
그 모든 광경을 무감정한 얼굴로 컨트롤하던 중년의 사내, 강건 대표가 마침내 입을 뗐다.
“무난하네. 무난해서 문제야.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맞은편에 앉아 있던 젊은 청년, 유태연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태연아. 솔직히 말하면 이 정도로 넥플 퍼블리싱 테스트에서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없을 것 같아. 이태영 이사를 납득시키지 못하면 투자도 날아가는 거야.”
넥플!
대한민국 최고의 게임 회사!
그곳이 태양이라면 강건이 이끄는 블레스는 횃불 수준이었다.
개발 자금이 부족해서 투자를 받아야 회사를 계속 운영할 수 있는, 아직은 초라한 회사.
태연은 바로 그곳의 게임 개발자였다.
“이제 두 달 정도밖에 시간이 없어. 그 안에 완성도를 지금보다도 더 끌어올려 보자. 알았지?
“네!”
“그래. 수고해.”
태연은 힘없이 집무실을 나섰다.
* * *
젊은 시절, 스타 개발자로 알렸던 강건 대표는 게임 회사 ‘블레스’를 설립, PC MMORPG ‘한계돌파’를 제작했다.
유태연은 그 게임의 기획팀장이었다.
하지만 실질적인 디렉터나 마찬가지였고, 함께 개발했던 이들은 그를 디렉터, 피엠, PD 등의 명칭으로 혼용해서 불렀다.
게임은 다행스럽게도 성공을 거두었다.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반응이 좋았다. 그것으로 업계의 관심을 받은 두 사람은 확실히 자리매김을 하기 위한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캐주얼 MMOPRG 판데모니움.
마계를 배경으로, 다양한 마족들의 이야기를 담은 게임이었다.
태연이 신입 시절부터 홀로 만들어 오던 기획을 강건이 설득해 프로젝트로 진행한 것이다.
한계돌파가 좋은 성과를 거두긴 했지만 엄청난 돈을 벌어들인 건 아니었다.
조금씩 투자금을 회수하고 있는 정도였다.
강건 대표의 말에 따르면 그랬다.
그런 이유로 태연은 어떤 약속도 받지 못했다.
다른 개발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강건은 판데모니움 개발 중 투자를 받아낸다면 보상을 해주겠다고 약속했지만 감감무소식이었다.
결국 한계돌파로 검증된 실력 있는 개발자들 대다수가 회사를 박차고 나가 버렸다.
태연 역시 비슷한 심정이었지만 자신의 드림 프로젝트였던 판데모니움을 내팽개치고 나갈 수는 없었다.
그래서 손해를 감수하고 남아 지금까지 개발 작업을 이끌어왔다.
태연은 정말 최선을 다했다.
잠도 세 시간 정도밖에 자지 못했고 공휴일도 반납했다.
그렇게 만든 테스트 빌드였다.
하지만 오늘, 강건 대표의 평가가 그리 좋지 않으니 태연 입장에서는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바람이나 쐬고 오자.’
태연은 점심시간이 되자마자 홀로 회사 건물을 나섰다.
‘아직도 머리가 복잡해.’
점심시간은 진작 끝났지만 아직 업무에 복귀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태연은 계속 거리를 떠돌았다. 그러다 무의식적으로 육교 위를 걷게 되었다.
‘응?’
노인이 운영하고 있는 액세서리 가판대가 하나 있었다.
참 별일이었다.
이런 곳에 가판대가 있다니.
‘저기서 저러면 쫓겨날 텐데…….’
겨울이라 날씨가 무척 추웠다.
점심시간도 끝나서 오가는 사람도 없었다.
도저히 장사를 할 수 없는 상황인데 노인은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 모습이 태연의 가슴에 와 닿았다.
‘돌아가신 우리 할머니도 노점에서 야채를 팔았었지.’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태연은 가까이 다가가 가판대를 확인했다.
‘이거 시계랑 같이 착용하면 예쁘겠네.’
눈에 들어온 것은 검은 가죽 팔찌 하나.
그런데 가격이 무려 오만 원이었다.
‘비, 비싸잖아!?’
잠시 망설여졌지만 애초 도우려는 마음으로 온 것이니 흔쾌히 구매했다.
“다음에 또 올게요.”
조용히 미소 짓기만 하는 노인.
태연은 자리를 떠나며 팔찌를 주머니에 집에 넣었다. 그리고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슬슬 돌아가자.’
이미 점심시간이 한참 지났다.
‘회사에 가기 싫다.’
태연은 무거운 발걸음을 억지로 옮겼다.
“파트장님. 저 몸이 안 좋아요. 오후에 반차 쓸게요.”
시나리오 기획자 최수경이었다.
그녀는 이미 귀가 채비를 완벽히 마친 상태였다. 아프다면서, 겉으로 보기에는 무척 쌩쌩해 보인다.
“수경 씨 이틀 전에 오후 반차 썼잖아요.”
“저 어제도 약 먹고 힘들게 글 썼어요. 오늘도 어떻게든 해보려고 했는데 도저히 안 되겠어요. 집에 가서 좀 쉬어야 할 것 같아요.”
참고로 오늘은 금요일.
몸이 아픈 직원들이 속출하는 독특한 날이다.
“오후 시나리오 연출 회의 어쩌려고요?”
“다음 주로 미룰게요.”
어쩌면 저렇게 당당할까?
태연은 한마디를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인내심을 발휘하며 힘겹게 말했다.
“가봐요.”
서둘러 스튜디오를 벗어나는 그녀.
그 광경을 보고 태연은 시름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어떻게든 해내야지.’
* * *
오후에 두 건의 면접을 진행했다.
태연은 한계돌파 라이브와 판데모니움 개발을 동시에 이끌고 있는 회사 유일 프로듀서였다. 동시에 개발 총괄이니 실무자 최종 면접과 채용은 태연의 몫이었다.
‘힘들고 지친다.’
면접 일정을 모두 마치고 나니 온몸이 녹초가 되었다.
시간은 이미 오후 다섯 시.
오늘 업무는 사실상 끝이나 다름없었다.
할 일은 많은데 감당해야 할 업무가 너무 많아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머리가 너무도 아프고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조금만 쉬자. 조금만…….’
태연은 엎드린 채 눈을 감았다.
이대로 조금 쉬면 좀 나아질까 싶었다.
하지만…….
“피디님, 오후 연출 회의 어떻게 하죠? 기획 담당자들 아무도 없는 것 같은데…….”
판데모니움 AD의 말에 눈이 번쩍 뜨였다.
“오늘 끝내고 일 분배해야 월요일부터 작업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오늘 어떻게든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실무 담당자가 자리를 비운 마당이니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저랑 하시죠.”
태연은 죽은 좀비처럼 일어서서 회의실로 향했다.
* * *
태연은 본래 술을 즐기는 편이 아니었다. 유흥업소는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었다.
‘오늘은 마셔야겠어.’
하지만 오늘만큼은 다른 수단이 필요했다.
스트레스가 머리를 뚫고 폭발할 지경이었다.
인터넷 검색으로 알게 된 펍에 도착한 태연은 무작정 술과 안주를 주문한 뒤 입에 퍼 넣기 시작했다.
‘내 인생이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지?’
초짜 기획자 시절에는 파트장이 되면 인생에 긍정적인 변화가 찾아오리라 막연히 믿었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변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남들은 되고 싶어 안달인 프로듀서가 됐는데, 꿈의 일부가 이루어진 건데 이상하게 불행했다.
‘괜히 정 대표를 따라왔어. 이럴 줄 알았다면 그때 넥플 이사님의 제안을 따르는 게 좋았을 텐데.’
이전 회사 퇴사 직전, 넥플의 개발 업무를 총괄하는 손영상 이사가 찾아와서 이런 제안을 했었다.
일본의 유명한 IP를 확보했으니 그걸로 모바일 게임을 프로듀싱 해보지 않겠냐고.
그걸 거절해 버렸다.
다름 아닌 강건 대표에 대한 의리 때문이었다.
그때 태연은 당시 개발 동료였던 시스템 파트장 최종학을 소개했다. 그렇게 그는 넥플로 이직했다.
그렇게 제작을 시작한 게임이 지금으로부터 2년 전 오픈했다.
그리고 런칭 첫해에 6,000억이라는 엄청난 매출 기록을 세워 버렸다.
솔직히 말하면, 조금…… 이 아니라 꽤 많이 배 아팠다.
‘그 제안을 거절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이제 와서 후회하면 무엇하랴?
모든 것은 결국 자신의 결정에서 비롯된 일이다.
떠올릴수록 한숨만 새어 나올 뿐이다. 술로 쓰린 가슴을 위로해 볼 수밖에.
‘시끄럽네.’
기분 같아서는 취할 때까지 마시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오후 아홉 시가 되니 펍에 손님이 가득 차서 소란스러워진 것이다.
특히 옆자리 손님들의 대화가 무척 거슬렸다.
“피디 개새끼. 개발의 개 자도 모르는 새끼가 정치질로 피디가 되더니 프로젝트를 망치고 있어.”
“내가 지금 피디 해도 그 새끼보다는 잘할 자신 있어. 대표님 친한 후배라던데 인맥으로 피디가 됐으니 아무것도 모르지.”
왠지 내 욕을 하는 것 같아 얼굴을 확인해 보니 모르는 이들이다.
평상시 같으면 충분히 웃어넘길 수 있었던 일도 기분이 안 좋은 상황이라 곱게 들리지 않았다.
‘일어서자.’
자리를 정리하고 지갑을 꺼내려다 무언가, 이질적인 물건이 잡혔다.
‘어제 산 팔찌구나.’
사 놓고 착용은커녕, 제대로 살펴보지도 않았다. 뒤늦게야 살펴보니 가죽 표면에 눈동자를 비롯, 온갖 희귀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그것을 계속 쳐다보고 있노라니 기분이 묘해졌다.
‘한번 차볼까?’
기껏 비싼 돈 주고 샀는데 쓰지 않고 묶여 두는 것도 아깝고.
태연은 오른쪽 팔목에 팔찌를 착용했다.
번쩍!
그러자 놀랍게도 눈동자 문양에서 빛이 번뜩이더니 태연의 이마를 관통했다.
“으악!”
우당탕!
깜짝 놀란 태연이 뒤로 넘어가고 말았다. 시끄러웠던 펍이 조용해졌다. 모두가 태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급히 사과를 하고 자리에 앉으니 다시 소란이 찾아온다. 태연은 심장이 급격히 뛰는 것을 느끼며 다시 팔찌를 살폈다.
마치 모 영화 속의 절대 반지 마냥, 팔찌 문양에 빛이 발생하고 있었다. 두려운 마음에 황급히 팔찌를 벗어 버렸다. 빛이 가라앉았고 평범한 팔찌로 돌아왔다.
‘이게 대체 뭐지? 내가 취한 건가?’
망설이다가, 조심스레 팔찌를 다시 착용했다. 눈동자 문양과 마주친 순간, 다시 한번 빛이 솟구쳐 나와 태연의 이마를 관통했다. 태연은 또 다시 움찔했지만 이번에는 뒤로 넘어가지 않았다.
눈동자를 시작으로 모든 문양이 하나씩, 천천히 빛을 발한다. 태연은 두려웠지만 꾹 참고 그것을 지켜봤다.
마침내 모든 문양이 빛을 발했을 때.
번쩍!
펍 전체에 환한 빛이 가득 찼다.
깜짝 놀라 눈을 질끈 감았던 태연은 빛이 가라앉고서야 다시 눈을 떴다.
“…….”
펍은 여전히 소란스러웠다.
누구도 방금 전의 일을 인식하지 못한 듯 보였다.
‘그것도 이상하지만…….’
더 큰 문제가 생겼다.
‘저 상태창 비슷한 것들은 대체 뭐지?’
태연이 누군가를 바라볼 때마다 반투명한 창이 떠올랐다. 그 안에는 이름, 직업, 그리고 수치 등등이 기입되어 있었다.
태연은 고개를 돌려 옆자리에서 가장 시끄럽게 떠들고 있는 한 청년을 쳐다봤다.
상태창이 떠올랐다.
[최호준]
게임 기획자(레벨)
시스템 2/10
콘텐츠 3/10
레벨 3/10
시나리오 2/10
호감도 : 0/10
‘분명 게임 개발자라고 했었지?’
기획팀은 보통 네 파트로 분류된다.
‘직업에 따른 능력치가 표기된 거야!’
마치 게임처럼…….
옆 사람의 얼굴을 쳐다보니 이번에는 그의 정보가 떠올랐다.
상대의 능력을 표기한 상태창이 떠오른다!
무의식적으로 팔찌를 확인하던 태연이 깜짝 놀랐다.
‘팔찌가 사라졌어!’
갑자기 어디로 간 걸까?
대신, 팔목에 눈동자 마크가 새겨져 있었다.
아무리 문질러도 지워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대체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혼란, 두려움.
더 이상 앉아 있을 수 없었던 태연은 서둘러 펍을 나섰다.
사람이 스쳐 지나갈 때마다 상태창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태연은 고개를 숙인 채 황급히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