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 해피엔딩 (完)
(110/110)
110. 해피엔딩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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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 해피엔딩 (完)
2023.02.18.
인천국제공항.
혜수와 도영은 누군가를 기다리며 출발 층에 있는 한 카페에 앉아 있었다.
“왜 안 오지요?”
“곧 올 거야. 시간 됐으니.”
문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으니 잠시 뒤, 찾던 사람이 나타났다. 바로 자기 하반신만큼이나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있는 승원이다.
혜수는 한 손으로는 제 손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논문을 읽고 있는 도영에게 승원이 왔음을 알려줬다.
“교수님, 승원 오빠 왔어요.”
둘이 온 것을 눈치채지 못한 승원은 그대로 카운터로 가서 티켓팅을 하고 짐을 맡겼다. 주위를 잠시 두리번거린 뒤에는 근처에 있는 의자에 앉으려 했다.
하지만 앉으려는 순간, 등에 멘 작은 가방이 옷에 걸려버렸다. 아무리 해도 가방이 등에서 떨어지질 않는다.
한동안 승원이 혼자 서서 끙끙대는 모습을 보던 도영이 혜수에게 물었다.
“도와줘야겠는데. 같이 갈래?”
잠시 생각하던 혜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전 안 가는 게 맞아요. 그냥 교수님만 다녀와요. 제 몫까지 배웅해 주세요.”
“알았어.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도영은 혜수를 카페에 두고 홀로 승원에게 걸어갔다.
인기척을 느낄 만큼 가까이 가도 승원은 가방을 떼내기에 여념이 없다.
“한승원.”
도영의 부름에 놀란 승원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주도영? 여긴 어떻게…….”
도영은 말없이 승원의 등에서 얽혀 있는 끈을 떼 가방을 건네줬다.
“받아.”
“……고맙다.”
“네가 잡았던 멱살 이렇게 갚는 거고.”
“……이것 참 고마워서 어쩌나.”
“별말씀을.”
어깨를 으쓱해 보인 도영은 자리에 털썩 앉았다. 그런 도영을 기가 차다는 듯 위아래로 훑어보던 승원도 이내 옆에 앉았다.
“나 오늘 가는 건 어떻게 알았어?”
오늘 승원은 교수에게 주어지는 1년간의 안식년을 활용해 아프리카로 봉사활동을 떠난다.
도영과 혜수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일부러 말하지 않았다기보다는 혜수와 도영을 만날 일 자체가 없었다.
‘어찌 보면 내가 만남을 피한 것이긴 하지.’
그런데 도영이 이렇게 말도 없이 나타날 줄이야.
“정형외과 병동에 소문이 파다하던데. 대천사 한승원이 사라져서 병동이며 수술방이 지옥으로 변했다고.”
“네가 알 정도면 온 병원에 소문 다 났겠네.”
“그렇지. 오늘 가면 언제 오는데?”
“내년 12월에.”
“1년을 꽉 채우는군.”
“어.”
고개를 끄덕인 승원은 도영의 옆에 늘 붙어 있던 사람을 찾았다.
“혜수는? 같이 안 왔어?”
“혜수는.”
혜수의 부탁대로 집에 있다, 오지 않았다고 할까 고민하던 도영은 혜수가 앉아 있는 카페를 향해 턱짓을 했다.
“저기.”
“온……거야?”
“잘 다녀오라더군. 몸 건강히.”
도영의 시선 끝에는 혜수가 앉아 있었다. 손을 턱에 괸 채 창밖 하늘을 보고 있었다.
혜수를 눈에 담자마자 승원은 속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오르는 걸 느꼈다.
오랜만에 보는 혜수가, 이제는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된 사람이 여전히 그리워서.
하지만 이제는 표현해서는 안 되는 마음임을 안다. 승원은 꾹꾹 잘 눌러냈다.
“……고맙다고 전해줘. 그…… 결혼식은 잘했고?”
“끝난 지가 언젠데 이제 물어.”
도영에게 청첩장은 받았지만 갈 수가 없었다. 다른 이를 위해 드레스를 입은 혜수를 보는 것은 아직 자신이 없었다.
또한 혜수의 이모이면서 자신의 옛 어머니인 지선이 결혼식장에 올 테니 더욱 갈 수 없었다. 지선의 얼굴을 보는 것 또한 승원에게는 여전히 괴로운 일이었다.
“신혼집은 어딘데? 너네 집?”
“맞아.”
이 질문을 끝으로 둘 사이에는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어색함을 깨고 승원이 다시 입을 열었다.
“주도영, 넌 내가 밉지 않아? 어떻게 배웅을 다 나왔어.”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도영은 오히려 웃고 말았다.
“한때는 그랬지. 한승원이 좀 날 방해했어야지. 사사건건 훼방을 놨으니.”
“나도 한때는 네가 너무 미웠어. 네가 내게서 혜수를 뺏어갔다 생각했거든.”
“그럼 지금도 미운가?”
“아니.”
승원은 부드럽게 고개를 저었다.
“혜수를 보면 알겠지만. 네가 아니었어도 우린 이어지지 않았을 거야. 난 혜수에게 영원히 남자는 될 수 없었거든.”
“…….”
“그냥 나 혼자 악을 썼던 거지. 그러다가 안 되니까 원망할 대상이 필요했고. 때마침 나타난 게 너였던 거야.”
둘 사이에는 또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이번에는 누구도 그 긴 고요함을 어색해하지는 않았다.
시계를 보며 시간을 가늠하던 승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들어가야겠다.”
도영도 같이 몸을 일으켰다.
승원은 도영에게 손을 내밀었고 도영도 그 손을 마주 잡았다.
“늦었지만 결혼 축하한다. 잘 살아.”
“당연한 소리를. 너야말로 몸 건강히 잘 다녀와.”
“갈게. 내년에 보자.”
“그래, 내년에.”
도영을 다시 만나겠단 약속을 나누고 승원은 입국장 안으로 들어갔다.
당장이라도 고개를 돌려 카페에 앉아 있는 혜수를 다시 눈에 담고 싶었지만 끝까지 잘 참아 냈다.
***
5년 뒤, 인천국제공항.
혜수는 입국장의 한 벤치에 앉아 있었다. 시계를 보니 비행기 도착까지 남은 시간은 단 오 분.
조금 있으면 기다리던 사람이 나타날 것이다. 원래라면 두 시간 전에 도착했어야 할 비행기였지만 연착이 되는 바람에 늦어졌다.
‘슬슬 불러야 하는데.’
공항에 같이 온 일행을 찾았다.
‘어디로 갔지?’
고개를 쭉 빼 들고 살펴보니 저 멀리 한 수제 쿠키 숍의 쇼케이스 앞에 찾던 이들이 서 있는 게 보인다.
‘또 먹을 걸 사러 간 거야? 아까도 먹었는데?’
혜수는 일어나 숍으로 걸어갔다. 혜수의 발소리가 들리지 않는지 여전히 그들은 쇼케이스에 바짝 붙어 서서 안을 쳐다보고 있었다.
가까이 가자 그들의 대화 소리가 고스란히 들려온다.
“아빠, 도빈이 초콜릿 쿠키 먹을래요.”
그러자 도빈의 손을 잡고 있던 도영이 반대쪽 손으로 쿠키를 가리키며 점원에게 물었다.
“저 쿠키, 밀가루로 만든 겁니까?”
도영을 본 점원이 대번에 얼굴을 붉혔다.
‘이 사람 뭐지? 엄청 잘생겼어.’
심지어 그의 옆에 있는 조그만 아이도 그를 똑 닮아 잘생겼다.
“네, 맞아요, 손님.”
“밀가루의 원산지는 어딥니까?”
생긴 것과는 다르게 이상한 질문을 한다. 당황한 점원은 몇 번 눈을 깜빡이다 말해주었다.
“저희가 만든 것이라 국내산입니다.”
“계란은요?”
“그것도 국내산입니다.”
“우유도 국내산입니까?”
“예, 맞아요.”
“가격을 보니 유기농은 아니겠고.”
“하하…….”
“그럼 쿠키 하나에 설탕과 버터는 각각 몇 퍼센트씩 함유되어 있습니까.”
“네에?”
“초코칩에 쓰인 초콜릿은 카카오버터로 만들어졌습니까? 아니면 준 초콜릿입니까? 카카오버터로 만들어진 것이라면 카카오버터의 함유량은 얼마입니까?”
“저, 그, 손님, 카카오버터로 만들어진 진짜 초콜릿이기는 한데, 버터의 함유량은 저도 잘 모르겠는데요…….”
“하. 어떻게 그걸 모를 수가 있습니까?”
도영이 답답함에 한숨을 푹 내쉬던 그때. 뒤에서 혜수가 도영의 옷깃을 잡아끌었다.
“교수님.”
무감한 얼굴로 직원에게 다다다 질문해대던 도영의 얼굴에 순식간에 미소가 피어났다.
“언제 왔어?”
“그렇게 무서운 표정으로 물으면 저분이 놀라시잖아요. 게다가 아르바이트생인 것 같은데 어떻게 알겠어요.”
“흠.”
“다른 사람이랑 대화할 땐 저한테 하는 것만큼은 아니더라도 이렇게.”
혜수는 도영의 눈꼬리를 잡아 눌렀다.
“이렇게라도 웃으시라니까요.”
“이렇게?”
도영은 혜수가 시키는 대로 웃었다. 햇빛에 비치는 도영의 환한 미소는 그 이상으로 눈부셨다.
“네, 이렇게.”
잠깐 생각하던 도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곤란한데. 이 웃음은 네게만 보일 수 있는 건데. 다른 사람에겐 억지로 하려 해도 안 되더군.”
둘의 대화를 지켜보던 점원은 못 볼 걸 보기라도 한 듯 입을 비틀며 멀찍이 떨어졌다.
이 상황이 익숙한 도빈은 아무렇지 않게 혜수의 손을 잡아당기며 칭얼거렸다.
“엄마, 도빈이 쿠키 먹고 싶은데에요.”
“쿠키?”
“응!”
“아빠가 만들어 주신 건 다 먹었어?”
“응, 아아까아 다 먹었지이.”
“그랬구나. 더 가지고 올 걸 그랬네. 이렇게 공항에 오래 있게 될 줄은 엄마가 몰랐어.”
도빈의 입술이 삐죽거린다.
“우리 아빠가 만든 쿠키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데.”
도영은 매일 도빈을 위한 간식을 손수 만들었다. 아이를 키우다 보니 달달한 음식을 안 먹일 수가 없었다.
“이왕 먹인다면 조금이나마 건강하게 먹이겠어.”
이유식부터 직접 만든 도영은 도빈이 과자를 먹을 나이가 되어서는 간식까지 만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한두 번 하고 말겠지 했는데, 도빈이 네 살이 된 지금까지 도빈의 간식은 모두 도영이 만들어냈다.
“그럼 어쩔 수 없지. 이번만 엄마가 사 줄게.”
혜수는 도빈이 가장 좋아하는 초코칩 쿠키를 하나 사서 도빈에게 건넸다.
“이것만 먹고 오늘은 그만 먹자. 더 먹으면 배가 아야해, 알겠지?”
“응, 알았어요. 밥 먹어야지!”
밥 먹을 생각을 하면 즐거운지 도빈이 해맑게 웃었다.
올해 네 살이 된 도빈은 도영을 닮아 쑥쑥 자랐다.
팔다리도 길쭉한 데다가 벌써 키는 6세 수준이다. 밥도 가리는 것 없이 잘 먹고, 간식은 없어서 못 먹는다.
은숙과 기철의 말에 의하면 도영이 어릴 때 꼭 그랬다고 했다.
“이거 먹고 이제 삼촌 보러 가자. 삼촌 곧 나온대.”
“진짜? 가자, 엄마, 아빠, 얼른 가요.”
마음이 급한지 도빈은 그 좋아하는 쿠키를 받아드는 것도 잊고 도영과 혜수를 다시 붙들었다.
“삼촌, 삼촌, 삼초오온.”
“도빈아, 넘어져, 천천히.”
“응, 엄마!”
둘을 잡아끄는 도빈은 신이 나 가장 좋아하는 노래까지 흥얼거렸다.
입국장 앞으로 가니 때마침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찾는 사람은 언제 나오나, 셋이 목을 쭉 빼 들고 있는데, 드디어 커다란 카트를 밀며 한 사람이 나타났다.
“삼초오온!”
“도빈아.”
산더미 같은 짐을 쌓아 올린 카트를 밀고 나타난 사람은 승원이었다. 아프리카의 뜨거운 햇빛에 보기 좋게 그을린 모습이 이제는 익숙했다.
“삼촌, 도빈이가 삼촌 진짜아 보고 싶었어요!”
승원은 도빈을 안아 번쩍 들어 올렸다.
“나도, 우리 도빈이 엄청 보고 싶었어.”
도빈은 다리를 동동대며 손가락을 하나씩 꼽았다.
“도빈이는 삼촌이랑 포로로 파크에도 갈 거구요, 밀가루 놀이터에도 갈 거구요, 아쿠아리움에도 갈 거구요, 사자 보러도 갈 거고, 악어도 봐야 하고요, 참. 나 자전거도 탈 수 있어요! 삼촌 우리 자전거도 타요.”
누굴 닮았는지 속사포 같은 말을 하나도 틀리지 않고 또박또박하는 도빈이다. 도영은 도빈을 잡아끌었다.
“주도빈. 삼촌 힘드니 발 그만 흔들어. 아니, 그냥 내려오지?”
“싫어. 나 삼촌이랑 있을래요.”
도빈은 더욱 승원의 목을 끌어안았다. 승원도 도빈을 꼭 안아주었다.
“괜찮아. 내가 안는 게 나도 좋아.”
승원은 이번엔 혜수를 바라보았다.
“혜수는 잘 지냈어?”
“응. 오빠 이번엔 얼마나 있다 가?”
“이 주.”
“그렇게 빨리?”
“요새 바빠. 비자 때문에 잠시 들어온 거야. 홍수가 나서 식수원이 오염됐어. 덕분에 배앓이 하는 사람들이 많아. 어디 부러지고 다치는 사람도 많고.”
1년을 계획하고 의료봉사를 떠났던 승원은 아예 그곳에 자리를 잡았다.
유일하게 원했던 혜수를 놓고 떠난 아프리카에서 의외로 승원은 삶의 의미를 찾았다.
자신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기쁘게 해주는 것이 좋았다.
아마 어릴 적 보육원에서 살면서 짧은 기간이었지만 모르는 이들에게 도움을 받았던 과거가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아빠는? 다리 다친 건 괜찮으셔?”
승원이 한대 교수직을 관두고 아프리카로 간 뒤, 정섭도 경비원 일을 관두고 승원이 있는 곳으로 갔다. 그곳에서 둘은 같이 의료봉사를 했다.
이번 방한 때 원래 승원과 정섭이 같이 오려 했으나 정섭이 다리를 다치는 바람에 승원 혼자만 오게 되었다.
“거의 다 나았어. 후유증도 없고.”
“다행이다.”
“다음에 올 땐 다 같이 올게. 겨울에는 삼 개월 정도 있다가 갈 거야. 그리고 그땐 레이나도 같이 올 거야. 레이나도 이번에 오려 했는데 이모부 간호 때문에 남겠다고 해서.”
“진짜? 그럼 케빈도 오겠네?”
“응. 우리 둘 다 오는데 케빈도 와야지.”
“레이나 언니랑 케빈 빨리 보고 싶다. 케빈은 직접 보는 것 처음이잖아. 맨날 영상통화만 했지.”
“이젠 제법 말을 해. 엄마, 아빠 같은 것.”
“엄청 귀엽겠다!”
레이나는 승원의 아내고 케빈은 둘 사이에서 나온 아들이다.
의료봉사로 간 아프리카에서 승원은 삶의 의미뿐만 아니라 삶의 보물 또한 두 가지나 찾았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레이나와 케빈. 그들은 승원이 삶을 이끌어가는 원동력이었다.
트렁크에 차곡차곡 승원의 짐을 실은 도영은 운전대를 잡았다.
“한승원. 우리 집으로 가는 거지?”
“아니. 강남으로 가. 호텔 예약했어.”
“당장 취소해. 우리 집으로 오라고 말했을 텐데.”
“이 주나 너네 집에 있으라고? 나야 좋지. 하지만 너네가 불편하지 않겠어?”
“전혀. 도빈이 좀 봐. 나도, 혜수도 당직이 많아.”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도영을 보며 승원은 코웃음을 쳤다.
“너, 목적이 이거였지?”
“알면 됐고.”
“그럼…… 먹을 거나 잘 내놔.”
“당연한 말을.”
“오랜만에 주도영 요리 실력 좀 보자. 그새 또 늘었는지.”
“그것 또한 당연한 말.”
“아오, 주도영. 혜수랑 결혼하더니 쓸데없는 말만 늘어가지고.”
“부부는 닮는다더군. 좋은 현상이지.”
“아, 서러워. 나 아프리카로 돌아갈래! 빨리 레이나랑 케빈 보고 싶어!”
서울로 가는 차 안, 끊이지 않는 대화 소리와 함께 웃음 또한 끊길 틈이 없었다.
지금껏 그랬듯 앞으로 펼쳐질 그들의 앞날 또한 웃음만이 가득할 예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