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 영원히,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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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 영원히,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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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 영원히, 함께
2023.02.15.
구름 한 점 없이 새파란 맑은 날, 꽃들이 아름답게 장식된 야외 정원에서 혜수의 결혼식이 열렸다. 늦가을이라 추우면 어쩌나 걱정하던 것이 무색하게 완벽한 날씨였다.
도영은 정원의 입구에 있는 아치형 장식 앞에 서서 하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가 걸치고 있는 옷과 헤어스타일까지 어느 하나 모자람이 없었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도영이 그 어느 때보다 커다란 미소를 짓고 있다는 것이었다.
가은의 손을 잡고 안에 들어가던 재성이 입을 떡 벌렸다.
“주 교수님 얼굴 대박. 혼자 화보 찍고 계시네. 저 얼굴로 저렇게 웃으면 반칙 아냐?”
“오늘 교수님 스타일링이 특히 더 잘 어울리기는 해. 그치?”
넋을 놓고 도영을 보던 재성이 갑자기 심각한 게 있는 듯 흐음, 소리를 냈다.
“그런데 이러면 혜수가 너무 밀리지 않아? 교수님이랑 나란히 서면 더 그래 보일 것 같은데.”
“어머? 오빠? 무슨 소리야. 우리 혜수가 제대로 꾸미면 얼마나 예쁜데?”
“욕하는 거 아니고 걱정해 주는 거야. 혜수가 좀 밋밋하게 생겼잖아? 주 교수님 옆에 세우면 어떡하냐고.”
“와, 이 오빠 말 이상하게 하네. 혜수가 도화지가 좋다고. 제대로 화장하면 절세 미녀라니까?”
“본판이 있는데 화장을 해봤자지.”
“오빠 지금 그 말 분명 후회할 거야.”
“글쎄다?”
가은과 재성이 티격태격하는 사이 모든 준비를 마친 혜수가 도우미의 부축을 받으며 나타났다.
혜수의 등장에 소란스럽던 장내가 일순 조용해졌다.
야외 결혼식에 걸맞게 장식이 너무 화려하지 않은 심플한 드레스를 입은 혜수는 여신이라고 칭해도 과하지 않았다.
머리 위에 놓인 온갖 보석이 주렁주렁 달린 티아라도, 귀에 꽂힌 커다란 다이아몬드 귀걸이도 모두 혜수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저 혜수를 돋보이게 해주는 들러리의 역할만 할 뿐.
재성이 눈을 몇 번 비비더니 입을 떡 벌린다.
“진……짜네? 쟤 내가 아는 신혜수…… 맞아? 딴 애 아니야? 대역인가?”
계속 헛소리를 해대는 재성의 등을 가은이 한 대 때렸다.
“거 봐. 내 말 맞지? 혜수 제대로 꾸미면 정말 예쁘다니까? 역시 내 친구.”
가은은 의기양양하게 머리를 한 번 어깨 뒤로 넘겼다.
다른 사람들에게서도 감탄이 터져 나왔다.
“신부도 정말 예쁘네.”
“응, 둘이 너무 잘 어울린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칭찬만을 해주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혜수를 잘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시기 어린 말들이 돌아다녔다.
“신부는 뭐 하는 사람이래?”
“같은 병원 레지던트라던데?”
“외과 의사?”
“그렇다더라.”
“집안은 어떤데? 신랑 아버지는 그 유명한 주기철이잖아.”
“집안은 잘 모르겠는데. 별말 없는 걸로 봐선 평범하지 않을까?”
“그런데 너무 집안 차이가 나면 안 좋지 않아?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구박한다던가.”
“음, 저걸 봐선 구박하는 걸로 보이지는 않긴 한데.”
단아하게 한복을 차려입은 은숙은 혜수를 시종일관 챙겼다. 드레스가 얇은데 춥지 않니, 아침에 일찍 일어나느라 힘들었지, 배는 고프지 않니 등 다정한 말을 쉴 새 없이 했다.
혜수를 보는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지는 게 아들인 도영보다 며느리인 혜수를 더 살갑게 대하는 게 느껴졌다.
실제로도 그랬다. 은숙에게는 무뚝뚝한 도영보다는 귀여운 혜수가 훨씬 예뻤다.
“쇼하는 건지 어떻게 알아.”
“그건 그래. 이런 건 둘만 있을 때 어떻게 하는지 봐야 하는데.”
“너무 차이 나는 집안이랑은 결혼하면 행복하지 않다는 거, 진짜래.”
“나도 그 말은 들었어.”
“주기철이 돈 많은 정치인으로 유명했잖아. IT 사업가 출신이라 돈이 엄청 많은 정치인. 요새 다시 대표이사직 맡았다던데? 저 정도면 재벌이지. 심지어 시어머니는 왕년의 그 김은숙 배우야.”
“그렇지.”
“저 집안에 시집가려고 뒤에서 무슨 짓을 했을까 궁금하네.”
둘의 대화를 가만 듣고 있던 가은이 고개를 휙 뒤로 돌려 그들을 쏘아봤다.
“저기요, 무슨 말을 그렇게 하세요? 꼭 저 둘이 힘들길 바라는 것처럼 보이는데.”
갑작스러운 가은의 참견에 신나게 떠들던 둘의 입이 꾹 다물렸다.
“우린 그, 그런 게 아니라.”
“부러우면 부럽다고 말을 해요. 뒤에서 이렇게 괜히 좋은 사이 갈라놓지 말고. 그리고 혜수가 뭘 했다고 그래요? 우리 혜수 그런 애 아니거든요? 당신들처럼 근거 없는 말을 하는 사람들 때문에 헛소문이 퍼지는 거 아니에요?”
붉은 머리 가은이 내뿜는 기세가 머리 색만큼이나 활활 거세게 타올랐다.
가은은 혜수가 악의가 담긴 소문들 때문에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는지 잘 안다. 그래서 더욱 들어줄 수가 없었다.
대화를 나누던 사람들이 깨갱 꼬리를 내렸다.
“미, 미안해요. 그런 뜻은 아니었는데…….”
“미안하다니 못 들은 걸로 해줄게요. 다시는 그러지 말아요. 흥!”
가은은 다시 휙 고개를 돌렸다. 혜수를 향해 손을 흔들며 환호성을 질렀다.
“짱 이쁘다, 신혜수! 내 친구 최고야!”
결혼식이 시작되었다.
감미로운 선율의 음악이 울려 퍼지고, 손을 굳게 잡은 도영과 혜수가 나란히 앞으로 걸어갔다. 화동들이 뿌려주는 색색의 꽃잎 사이로 혜수의 하얀 드레스가 아름답게 나부꼈다.
사람들의 박수와 환호가 끊이지를 않았다.
“예뻐요.”
“둘이 너무 잘 어울려요.”
“행복하세요.”
결혼식은 주례가 없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대신 양가의 아버지들이 성혼선언과 축사를 각각 해주었다.
먼저 기철이 성혼선언문을 읽었다.
“신랑 주도영 군과 신부 신혜수 양은 일생 동안 고락을 함께할 것을 다짐할 것입니다. 저는 이 두 사람의 증인으로 여러분께 두 사람의 만남과 결합을…….”
기철의 발음은 느렸으며 어눌했다. 사정을 잘 모르는 하객들 사이에서는 귓속말이 번졌다.
“저분 발음이 왜 저래?”
“소식 못 들었어? 심근경색 후유증이라잖아.”
“그렇구나. 심근경색이 무섭긴 하네.”
“그래도 이거 하려고 연습 많이 했대. 원래는 발음이 더 안 좋았다더라.”
“정말?”
“그랬대. 지금은 알아들을 수는 있잖아?”
어눌한 발음을 조금이나마 또렷하게 하기 위해 기철은 피나는 연습을 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재활도 열심히 했다. 덕분에 온전한 발음은 아니었지만 무슨 말인지 모두가 알아들을 수 있었다.
기철의 성혼선언이 끝나자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기철은 뿌듯하게 웃으며 혼주석에 다시 앉았다.
다음은 축사의 순서였다. 사회자의 소개에 맞춰 양복을 잘 차려입은 정섭이 등장했다.
단상 위로 올라간 정섭은 도영과 혜수를 차례로 바라보았다.
둘을 보는 정섭의 눈시울은 붉게 변해 있었다. 정섭과 눈이 마주친 혜수는 속이 아릿해짐을 느꼈다.
‘아빠, 혹시 우신 거예요? 왜 울어요, 걱정되게.’
입 밖으로 꺼낸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정섭은 혜수의 마음을 느꼈나 보다. 혜수를 보고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준 뒤 다정하게 웃어주었다.
그리고 준비해 온 축사를 꺼내 찬찬히 읽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내 아들, 딸, 도영과 혜수야. 힘든 과거를 딛고 마침내 이루게 된 둘의 사랑을 응원한다.”
여기까지 읽은 정섭은 잠시 말을 멈췄다.
목이 메인 탓이다. 참으려 했지만 눈가에는 어느새 눈물이 맺혀버렸다.
“둘이 함께일 때 더욱 행복하니 평생을 함께 잘 지내라는 것, 축사로 흔한 말이더구나. 하지만 이미 너희는 알 테니 굳이 더 말하지는 않으마. 그냥 그 마음 그대로 순간을 아끼며 하루를 소중히, 즐겁게 지내면 좋겠구나.”
결국 정섭의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잠시 숨을 삼킨 정섭은 가까스로 말을 이었다.
“……둘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아빠…….’
혜수의 볼에도 눈물이 흐르고 말았다.
결혼식에서는 절대 울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정섭의 눈물을 본 순간, 축사의 내용을 이해한 순간 마음을 제어할 수가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두 사람, 도영과 정섭이 그들의 과거를 모두 이겨냈다는 사실에, 덕분에 도영과 제가 이 자리에 나란히 서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아마 정섭도 똑같은 마음으로 글을 읽고 눈물을 흘리지 않았을까.
“흑.”
눈물은 자꾸 흘러내리는데 행여나 화장이 번질까 걱정되어 세게 닦을 수가 없었다.
혜수는 손으로 찍어 흐르는 눈물을 개미 눈곱만큼 훔쳐냈다. 덕분에 눈물이 마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옆에서는 다음 순서로 축가의 준비가 한창인데, 신부의 얼굴에 눈물이 줄줄 흘러내려 고개를 들지를 못할 정도이니 도영이 옆에서 안절부절못한다.
“혜수야.”
“흐윽…….”
“울지 마.”
손수건이라도 꺼내 닦아주고 싶은데 예식용으로 맞춘 옷이라 평소 챙겨 다니던 것들이 하나도 없었다.
“나 좀 봐.”
어쩔 수 없이 도영은 손을 들어 혜수의 눈가를 훔쳐주었다. 도영이 낀 흰 장갑이 눈물로 젖어갔다.
“그만 울자.”
“흐윽.”
그래도 혜수의 울음이 그칠 생각을 않는다. 이를 어쩌나 고민하던 도영은 본능이 시키는 대로 행동했다.
“이리 와.”
혜수에게 다가가 잘록한 허리를 붙잡고 당겨 안았다. 둘 사이는 순식간에 종이 한 장 들어가지 못하게 좁아졌다.
그 모습을 모든 사람들이 똑똑히 보았다.
곧바로 야유가 쏟아졌다. 두툼한 뱃살을 양복 속에 감추고 있던 과장 상훈이 제일 크게 외쳤다.
“이 사람들, 지금 뭐 하는 거야? 주 교수, 진짜 이럴 건가?”
상훈의 옆에 앉아 있던 노총각 교수도 손을 항의하듯 흔들며 거들었다.
“너무한 거 아니냐고요. 애인 없는 사람은 부러워서 살겠냐고요.”
하지만 도영의 귀에는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 않았다.
지금 내 소중한 신부, 혜수가 울고 있는데 그보다 중요한 게 뭐가 있단 말인가.
“내가 어떻게 하면 눈물이 멈출까.”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며 중얼거린 도영은 망설임 없이 허리를 숙였다.
그대로 혜수의 눈가에, 볼에, 입가에 입맞춤을 해주었다. 마치 눈물을 전부 대신 삼켜버리겠다는 듯이.
저돌적으로 혜수의 얼굴을 향해 달려든 것에 비해 피부에 닿는 입술은 다정하기 그지없었다.
하객들의 반응은 더욱 격해졌다. 요란하게 발을 굴리는 소리가 사방에서 울린다.
“꺄아악!”
“내가 지금 뭘 본 거야? 영화의 한 장면인 줄.”
“이 닭살 커플!”
매사에 자신 있는 가은도 친한 친구와 그 남편의 애정행각은 못 보겠는지 손으로 눈을 가렸다.
“어우, 신혜수, 내 눈 어떡할 거냐고!”
물론 벌린 손가락 틈으로는 모든 걸 다 보고 있었다.
축사를 마치고 내려가던 정섭이 다시 돌아와 마이크를 쥐었다.
“아니, 이게 무슨 일입니까. 사위, 아직 키스 타임은 멀었다네! 혜수가 아무리 예뻐도 그렇지!”
정섭의 넉살에 장내에는 한바탕 요란한 웃음이 퍼졌다.
은숙도 기철도 도영의 처음 보는 모습에 놀라워하면서도 곧 웃음을 터트렸다. 혜수도 언제 울었냐는 듯 푸핫, 웃고 말았다.
축가와 하객에 대한 인사까지 끝나고 결혼식의 마지막 순서로 남은 것은 신랑과 신부의 행진이었다.
하얀 카펫 앞에 선 혜수와 도영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둘이 너무 예뻐요.”
“잘 어울려요!”
“행복하세요.”
쏟아지는 하객들의 축복 속에서 도영은 혜수에게 손을 내밀었고 혜수도 그 손을 굳게 맞잡았다.
“이제 갈까. 나랑 같이, 영원히 함께.”
“좋아요.”
“다시는 놓지 않아.”
“응. 꼭 그래 줘요.”
도영은 혜수를 이끌었다.
둘이 내딛는 걸음마다 따사로운 햇살이 환하게 비추었다.
가슴이 벅차도록 아름다운 이 순간, 서로가 서로의 가슴속에 더욱 깊게 새겨졌고, 또 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