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 결혼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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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 결혼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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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 결혼해 줘
2023.02.11.
놀이공원에는 웃음과 활기가 가득했다.
덩달아 신이 난 혜수는 기념품 숍으로 가서 동물 귀가 달린 머리띠를 샀다. 도영은 토끼 모양, 혜수는 사자 모양.
도영이 기다란 토끼 귀를 가리켰다.
“나도 이걸 쓰나?”
“놀이공원에선 써줘야 제맛이죠.”
그런데, 토끼 귀 모양 머리띠를 도영의 머리에 씌워주자마자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비가 오는데.”
“허억.”
도영이 겉옷을 벗어 혜수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추운가?”
“그건 괜찮은데요…….”
“그런데 표정이 왜 그래.”
“비 금방 그치겠죠?”
“먹구름이 많이 몰렸는데.”
“…….”
혜수는 간절히 빌었다.
제발 멈추게 해주세요, 제발요.
하지만 바람과는 다르게 점점 빗방울은 굵어졌다. 혜수의 얼굴도 점점 울상이 되어갔다.
“아, 안 돼…….”
갑자기 내린 비에 관광객들도 뛰어다니며 비를 피하려 난리다. 지붕이 없는 놀이 기구는 움직임을 멈췄다. 꿈과 희망으로 가득 찼던 놀이공원은 순식간에 황량해졌다.
곳곳에 달린 스피커에서 안내가 나오기 시작했다.
“우천으로 인해 오늘 퍼레이드는 취소되었습니다. 다시 한번 알려드립니다. 우천으로 인해 퍼레이드는 취소되었습니다.”
“안 돼에…….”
세상을 다 잃은 표정으로 비틀거리는 혜수를 도영이 부축했다.
“뭘 그렇게 실망해?”
“……퍼레이드를 꼭 보고 싶었단 말이에요.”
“다음에 보면 되지.”
“오늘이어야 한단 말이에요.”
“왜 꼭 오늘이어야 하는데?”
“그게…….”
“?”
“그런 게 있어요.”
울먹이는 혜수가 귀여워 이마에 뽀뽀를 한 번 해준 도영은 혜수의 손을 잡아끌었다.
“비 계속 맞다간 감기 걸려. 우리도 나가자.”
그렇게 혜수는 다시 도영의 차로 돌아가야 했다.
“망했어, 다 망했어…….”
“뭘 또 그렇게 망했다는 건지.”
“……몰라요.”
넋이 나간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혜수를 본 도영이 또 피식 웃는다.
“일단 백화점으로 가지. 신발 사야지.”
“그냥 숙소에 갈래요. 병원에 가요.”
“그럼 같이 저녁이라도 먹어.”
하지만 혜수는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야심 차게 준비한 프러포즈가 완전히 망했다는 생각에 밥도 생각나지 않았다.
“어쩌나. 그럼 우리 집으로 갈까?”
“교수님 집이요?”
“떡볶이 해줄게. 이 정도 기분이면 떡볶이는 먹어야겠는데.”
“떡……볶이?”
“솔깃하지?”
끄덕 끄떡. 절로 고개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좋아. 내 집으로 가. 재료는 다 있어.”
혜수는 다시 도영의 집으로 향했다. 속으로는 열심히 계획을 짰다.
‘케이크 속의 반지를 일단 꺼내고 숨겨야 해. 프러포즈는 다음에 다시 하자. 다음 주? 다다음 주?’
그렇게 프러포즈 완벽하게 실패로 끝이 나는 줄 알았으나.
끝은 끝이 아니었다.
도영의 집에 간 혜수는 욕실에서 젖은 머리를 드라이기로 말리고 밖으로 나갔다.
“다 말렸나?”
“네.”
식탁 위에는 도영이 그사이 만들어 놓은 떡볶이가 곱게 차려져 있었다. 매콤 달콤한 향을 맡으니 침울하던 기분이 순식간에 되살아난다.
“앉아, 먹어.”
“넵! 잘 먹겠습니다!”
그런데, 한 입 뜨려던 순간. 자신이 가져온 케이크 상자가 열려 있는 게 보인다.
혜수는 벌떡 일어났다.
“교수님 설마 케이크 드셨어요?”
“배고파서 먼저 조금 떼어먹었어. 아까 물어봤더니 그러라며.”
욕실 안에 있을 때 도영이 뭐라고 소리쳐 네, 대답을 하기는 했다.
정신이 없는 데다가 드라이어 소리 때문에 제대로 듣지 못했는데, 그게 케이크를 먹어도 되냐는 소리였을 줄이야. 제대로 알아들었다면 절대 안 된다고 했을 거다.
“그런데 갑자기 웬 케이크지? 오늘 무슨 날인가?”
“그건 아닌데…….”
사색이 된 혜수가 상자 안을 들여다봤다. 케이크는 반 정도가 사라져 있었다.
문제는 저 케이크 안에 반지가 들어있다는 것. 도영이 반지가 있는 부분을 먹었더라면 큰일인데.
흘긋 도영의 눈치를 보았으나 아무런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마, 맛은 어땠어요? 괜찮았어요?”
“맛있더군.”
도영이 아무렇지 않게 대답해 다행이다, 안도하려던 순간.
“참. 만든 지 좀 된 건가? 딱딱한 게 씹혀서 그냥 삼켜버렸는데.”
‘!’
혜수는 도영에게 달려갔다.
“아, 해봐요. 네? 아, 해봐요!”
맹수처럼 달려드는 혜수의 기세에 도영이 뒷걸음질을 쳤다.
“왜 이래?”
“어서요, 빨리!”
최악도 이런 최악이 없다. 지금쯤이면 몽글한 분위기가 최고로 고조된 틈을 타 프러포즈를 했어야 했는데, 교수님의 입속이나 뒤지고 있다니.
“아, 아 해요, 얼른!”
잠시 혜수를 의아하게 보던 도영은 입을 벌렸다.
하지만 당연히 도영의 입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흰 치아만 가지런히 놓여 있을 뿐.
“안돼에에에!”
혜수의 절규에 도영이 점점 이상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왜 그러는 거지?”
혜수는 다시 케이크로 가 남은 케이크 절반을 포크로 으깨며 간절히 빌었다.
‘그걸 삼키면 어떡해. 내시경 각이라고. 제발 안에 있어라. 안에 있어.’
하지만, 케이크의 어디에서도 반지는 나오지 않았다.
혜수는 포크를 쥔 채 철푸덕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망했다…….’
망해도 이렇게 망할 수가 없다.
제대로 된 게 하나도 없으니 다른 날 다시 하자, 생각까지 했는데 반지가 아예 뱃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어떻게 이 모든 걸 밝히고 도영을 내시경실로 데려간담.
“흐잉.”
“왜 그래?”
“흐엉.”
붉어진 얼굴로 혜수가 울먹이자 도영이 다가와 달래준다.
“아까부터 이상한데. 무슨 일이야?”
“교수니이임…….”
“응. 말해.”
“교수니이이임…….”
도영을 보니 말이 더 안 나온다.
저 얼굴에다 대고 어떻게 프러포즈와 반지를 준비했는데 다 망했고, 심지어 그 반지를 교수님이 방금 먹었어요, 한단 말인가.
말도 꺼내지 못하고 서러워서 입술만 씰룩이고 있으니 도영이 시원하게 웃는다.
“퍼레이드 못 본 게 그렇게 섭섭했나?”
“그게 아니고요…….”
“말해봐. 내가 뭘 하면 네 기분이 좋아질지.”
그 말과 함께 도영은 손을 들어 혜수의 눈가에 살짝 맺힌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 순간.
“어? 어? 어!”
혜수는 도영의 왼손을 잡아챘다. 그리고 그의 약지에 끼워진 반지를 발견했다. 자신이 케이크 속에 숨겨뒀던 그 반지를.
“어어?”
“더 놀리다가는 정말 울 것 같아서.”
그리고 깨달았다. 도영의 환상적인 연기에 제대로 속았음을.
“이거 케이크 안에 있던데. 요즘 케이크는 반지를 속 재료로 쓰나 봐.”
능글맞게 웃는 도영을 노려보다 참지 못하고 한 대 때리고 말았다.
“진짜 미워요! 어떻게 그렇게 감쪽같이 속여요? 너무해요.”
속상함에 어쩔 줄을 몰라 하자 도영이 혜수의 볼을 부드럽게 쓸어준다.
“난 기분이 너무 좋은데. 어떻게 이런 깜찍한 생각을 다 했을까.”
“…….”
“나한테 이거 끼워주려고 놀이공원에 가자고 한 건가?”
“……네.”
한동안 무척 귀한 것을 보는 듯 반지를 눈에 담던 도영은 혜수를 일으켜 다시 의자에 앉혔다.
만지작거리던 반지를 빼 혜수에게 건네줬다.
“원래 하려던 것 해봐.”
“……지금요?”
“네가 끼워줘야지.”
“하지만.”
“어서.”
머뭇대던 혜수는 도영의 왼손 약지에 반지를 끼워주었다. 반지는 몇 주나 고민하고 고른 것답게 도영의 손에 완벽히 어울렸다.
“멘트는?”
“그……런 거 없는데요.”
“거짓말.”
“진짠데.”
눈을 맞추지 못하고 요리조리 고개를 돌리자 도영이 픽 웃었다.
한동안 혜수를 내려다보던 도영은 한쪽 무릎을 꿇고 혜수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동작이었다.
“그럼 내가 하지.”
“네?”
무슨 소리인가 싶어 눈만 깜빡이고 있는데, 곧 도영이 주머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도영의 손은 리본을 우아하게 풀어냈고 상자 속에 들어있던 것이 실체를 드러냈다.
상자 안에는 반지가 들어 있었다. 혜수의 손가락에 맞게 주문 제작한 다이아몬드 반지였다.
“이건.”
도영은 상자를 혜수에게 내밀었다.
“나와 결혼해 줘, 혜수야.”
혜수의 입이 떡 벌어졌다.
오늘 프러포즈를 준비한 게 나 혼자만이 아니었어?
감격스러운 마음도 잠시, 이러면 모든 계획이 물거품이 되어버린단 생각이 든다.
“이, 이건 무효예요. 제가 먼저 말하려고 했단 말이에요.”
“괜찮아. 네 마음이 내 마음과 같은 게 중요하니까.”
“그렇긴 한데…….”
“그러니 손 줘.”
잠자코 반지를 바라보던 혜수는 손을 내밀었다.
도영은 반지를 꺼내 끼워주었다. 이 또한 혜수와 완벽하게 어울렸다.
“마음에 들어?”
혜수는 반지 낀 손을 조금씩 움직였다. 잘 커팅 된 다이아몬드는 조명 아래 영롱하게 빛이 났다.
“너무 예뻐요. 반할 만큼 예뻐요.”
“반한 건 난데.”
“제가 산 반지 마음에 드세요?”
“말고 너.”
“…….”
도영은 혜수의 눈가를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우리 처음 만났을 때 기억하나?”
“맞선 자리에서요?”
“그래. 김가은 양을 대신해서 나왔던 그 자리.”
“네, 기억해요.”
“돌이켜보니 그때 이미 난 네게 반했더군. 네 손짓, 목소리, 말투 모든 게 매혹적이었지. 심지어 매 순간 또다시 반해.”
“…….”
“앞으로는 그 모든 순간에 내가 곁에 있고 싶어. 그래 줄 텐가?”
혜수는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교수님이 저랑 결혼해 주세요. 제가 행복하게 해줄게요. 너무 좋아해요. 아니, 사랑해요.”
오늘을 위해 여러 번이나 연습했던 바로 그 멘트는 아니었다. 즉흥적으로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했다.
말하고 나서는 살짝 걱정도 되었다. 너무 유치하고 뻔한 말인가?
걱정하던 것도 잠시. 도영이 눈을 접어가며 환하게 미소 짓는다.
그의 웃음이 너무 아름다워 혜수는 사람의 넋을 뺀다는 게 이런 것이구나, 깨달았다.
“저도 반했어요. 교수님한테.”
혜수는 저도 모르게 도영의 목을 끌어당겨 달콤한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뭐가 그리 급한지 도영은 프러포즈를 주고받은 다음 날 바로 호텔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가을이 가기 전에 하지.”
혜수의 눈이 동그래졌다.
가을이라고? 곧 겨울인데?
“그건 너무 급박하지 않아요?”
“전혀. 식만 올리면 되는데 급할 게 뭐가 있어.”
“결혼 준비할 때 필요한 게 많다던데요. 일단 상견례도 해야 하고 예물에 예단도 알아봐야 하고요. 게다가 저 앞으로 주말마다 계속 당직이라 나갈 시간도 없는걸요.”
병원에서 제일 바쁜 1년 차에게 결혼 준비는 그림의 떡이었다.
주워들은 말로는 예식장도 1년 전부터 계약을 해야 한다던데. 당장 어떻게 식을 올려?
“넌 병원에 있어. 내가 알아서 해줄게. 그리고 예단 같은 건 필요 없어.”
“하지만.”
“아, 한 가지 필요한 게 있긴 하네. 그건 꼭 있어야 하지.”
“그게 뭔데요? 갖고 싶은 것 있으세요? 말씀만 해주세요. 제가 다 사드릴게요!”
남자들이 결혼할 때 받고 싶어 한다는 시계나 서류 가방 등을 생각하며 물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너. 너만 있으면 돼, 내 결혼에는.”
그다음 주에 바로 상견례가 잡혔다. 그것도 병원에 살다시피 하는 혜수를 배려해 병원 바로 앞에 있는 한정식집에서.
혹시나 저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면 어떡하나 걱정했던 것이 무색하게 기철과 은숙은 혜수를 몹시 예뻐했다.
겉으로는 부드럽게 보이나 속으로는 강단 있는 똑 부러지는 성격을 마음에 들어 했으며, 무엇보다 도영이 전적으로 신뢰하고 믿는 사람이라는 것에 감사해했다.
이후 과정도 물 흐르듯 원만했다.
정말로 도영은 떡하니 여자들이 가장 결혼하고 싶은 장소로 뽑혔던 최상급 호텔의 야외정원을 구해왔고, 혜수를 병원 밖으로 데리고 나가지 않고도 모든 결혼 준비를 해냈다. 대신 온갖 숍의 직원들이 병원을 오갔다.
도영은 늘 입에 이 말을 달고 살았다.
“네가 못 나가면 그들이 오면 되지. 어떻게든 결혼부터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