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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 결혼해 주세요 (107/110)


107. 결혼해 주세요
2023.02.08.



 
뜬금없는 프러포즈에 혜수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도영은 계속해서 힘주어 말했다.


“몸 관리 더 철저하게 하겠습니다. 물론 지금은 증상이 전혀 없지만, 앞으로도 생길 일 없게 더욱 관리하겠습니다.”

“그게 말이 쉽지…….”

“혜수를 위해서라면 못할 것, 없습니다. 혜수는 제 전부입니다.”

“어머나.”

이번엔 지영의 얼굴도 같이 불그레해졌다.

혜수를 위해 못할 게 없다니, 이 얼마나 로맨틱한 말인가.

정섭은 다시 생각에 잠겼다. 하아, 크흠, 과 같은 한숨과 헛기침이 연달아 나왔다.

긴 시간이 지나고 지영이 이렇게 예쁜 애들을 왜 반대하냐고, 말 좀 해보라고 다시 타박을 하려고 할 때.

정섭은 마침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한번 만나보든가…….”

“아빠!”

혜수가 와락 정섭의 목을 껴안았다.


“고마워요!”

“나한테 고마워할 게 뭐가 있어. 너희 둘, 진심으로 서로를 위하는 게 보여서 더는 반대하지 않는 거야.”

“그래도 고맙지.”

“애초에 난 네가 어떤 남자를 데려와도 반대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어. 그만큼 너를 믿었거든.”

전적으로 혜수를 믿는다는 말에 혜수의 심장이 지잉 울렸다.


“아빠아…….”

“그때 그 환자를 데려온 건 조금, 조금 많이 의외였다만.”

“진짜 진짜 아빠 최고예요!”

엉겨 붙는 혜수를 떼어낸 정섭은 도영을 바라보았다.


“주 교수, 당신이 좋지 않은 사람이라 반대했던 게 아니에요. 난 그저 내 과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게 이유의 전부이니 오해는 하지 말아요.”

“압니다. 아버님이 신경 쓰실 일 없게 제가 더 잘하겠습니다.”

지영이 도영에게 다가가 그를 일으켰다.


“이러지 말고 소파에 앉아요. 배고프지요? 내가 금방 갈비찜 해줄게요. 고기는 다 재어놔서 익히기만 하면 돼.”

지영과 정섭은 상다리가 부러지게 저녁을 차려냈다. 정섭이 반대했던 것이 무색하게 식사시간은 화기애애했다.

도영은 무려 밥을 세 그릇이나 먹었다. 도영이 잘 먹는다며 좋아하는 지영의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졌다.

맛있게 식사를 한 혜수와 도영은 정섭의 배웅을 받으며 집에서 나왔다.

그런데, 도영이 혜수의 손에 차 키를 쥐여 준다.


“차에 먼저 가 있을래?”

“저 혼자요?”

“아버님께 말씀드릴 게 있어. 추우니 차 안에 들어가 있지.”

“알겠어요.”

혜수는 잠자코 차 키를 받아 나왔다. 아무래도 도영이 정섭과 단둘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것 같았다.


“아버님, 지금 시간 괜찮으십니까?”

“어…… 할 말이 남았어요?”

“예, 조금만 시간을 내주십시오.”

“그래요.”

도영은 정섭을 보고 마주 섰다.


“무슨 얘기예요?”

“제게 남은 후유증, 혹시 또 생긴다 하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안 됩니다.”

“어째서? 아무리 관리를 한다 해도 완치될지는 모르는 일인데.”

이 말을 하는 정섭의 표정은 순식간에 어두워져 있었다. 도영을 받아들이는 것과 죄책감을 완전히 씻어내는 것은 여전히 정섭에게는 별개의 문제였다.


“아프더라도 혜수가 절 낫게 해줍니다.”

이게 무슨 소리야? 사람이 사람을 낫게 한다고?

말도 안 되는 말에 정섭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도 그럴 것이 정섭 스스로가 정형외과 전문의이다. 그런데 혜수가 경련을 어떻게 낫게 한단 건지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게 무슨 소린지 자세히 좀 얘기해 봐요.”

“저도 처음에는 믿기지 않았습니다. 근육이 수축을 하다가도 혜수가 옆에 있는 것을 인지한 뒤 혜수와 접촉하게 되면 저절로 멈춥니다.”

“정말이에요?”

“실제로 여러 번 일어난 일입니다.”

정섭은 생각에 잠겼다.


“흐음. 억제성 신경 전달 물질이 나오도록 자극하는 건가.”

“그렇게 추측하고 있습니다.”

“혜수가 주 교수에게 그 정도의 의미란 말인가요?”

“네. 맞습니다. 혜수는 제게 그 정도로 소중한 존재입니다.”

“이럴 수가.”

“어떤 진통제나 근이완제도 해주지 못한 걸 혜수가 해줄 수 있습니다.”

정섭은 잠시 할 말을 잊었다.

아까 도영이 아무리 혜수를 사랑한다 말해도 가슴에 와닿지는 않았었다. 세월이 가다 보면 언제든 뒤집힐 수 있는 감정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혜수가 자신이 도영에게 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정도의 의미라니.


“이럴 수가.”

놀라워하던 정섭의 눈가에 갑자기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정섭은 황급히 손을 들어 눈을 비볐다.


“아이고, 이거 주책이네.”

도영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정섭에게 건넸다. 물끄러미 그걸 바라보던 정섭은 이내 손에 쥐었다.


“그러니 아버님도 더는 절 보기 힘들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고마워요.”

도영을 배웅한 정섭은 자꾸 흐르는 눈물을 도영이 준 손수건으로 훔쳐냈다.

그동안 느껴왔던 미안함뿐만 아니라 죄책감, 부끄러움 등 온갖 감정이 눈물과 함께 흘러내려 손수건을 적셨다.
 

집 밖으로 나가자 혜수가 담벼락에 기대서 있었다. 도영을 본 혜수가 손을 흔들며 웃어주었다.

추우니 차 안에서 기다리라고 했더니 굳이 밖에 서 있다.

도영은 긴 다리로 성큼 걸어가 혜수를 품에 안았다.


“하여간 말은 안 듣지.”

“그래야 신혜수죠.”

“그렇지.”

“단독 면담은 잘하셨어요?”

“보고 싶었어.”

“조금 전까지 계속 같이 있었잖아요.”

“한시도 떨어지고 싶지 않아. 아니, 보고 있어도 보고 싶어.”

혜수는 도영을 살짝 밀어냈다. 가늘게 떨리고 있는 도영의 손을 붙잡아 주었다.


“이제 다 끝났어요.”

“드디어 다 털어내게 됐지.”

“응, 너무너무 고생 많았어요. 교수님 정말 대단해요.”

혜수는 도영의 몸을 힘껏 마주 안아주었다.


“네가 함께라 가능했지.”

도영의 팔에도 더욱 힘이 들어갔다.

***

요즘 혜수는 고민에 빠졌다.


‘프러포즈는 내가 꼭 먼저 해주고 싶은데. 그런데 어떻게 해야 하지?’

머리에 쥐가 나도록 고민 중인데 회의실 문이 열리며 재성이 휘적휘적 들어왔다. 심각한 표정의 혜수를 보고 묻는다.


“뭐 하냐? 고민이 심하게 있는 얼굴인데.”

“아닌데요.”

“아니긴. 왜? 또 주 교수님 생각이야?”

“헉, 어떻게 아셨어요?”

“네 고민이면 뻔하지. 주 교수님 일밖에 더 있어?”

“너무해요. 저도 나름 고민 많은 인간이거든요?”

“퍽이나.”

“우잇.”

“뭔데? 뭐가 고민인데?”

“교수님한테 프러포즈를 하고 싶은데요. 제가 해도 될까요?”

“주 교수님이랑 결혼하게?”

혜수는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 근데 네가 먼저 해?”

“네. 매번 받기만 해서 이번엔 먼저 해주고 싶어요.”

“멋지다.”

“멋져요?”

“응. 난 여자가 먼저 프러포즈하면 그게 그렇게 멋있게 보이더라.”

“그래요?”

“그리고 요즘 같은 세상에 누가 먼저 프러포즈를 하든 무슨 상관이야. 마음만 전하면 되지.”

재성의 말에 틀린 게 없다. 혜수는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덕분에 우쭐해진 재성의 목소리가 더욱 커졌다.


“아이디어 부족하면 나한테 물어봐. 내가 또 연애 해결사잖니.”

“그럴게요.”

재성을 내보낸 혜수는 인터넷을 뒤지기 시작했다.
 

화창한 일요일, 혜수는 새벽같이 눈을 떴다. 오늘은 혜수의 프러포즈 디 데이.

오늘을 위해 혜수는 어제 백만 년 만에 미용실에 가 커트에 퍼머도 했고 피부관리실에서 마사지도 받았다.


“교수님 집에 1시까지 가기로 했으니까. 넉넉하게 12시쯤 택시를 타면 되겠네.”

오늘 혜수는 도영을 데리고 놀이공원에 갈 생각이었다. 예전에 어릴 적 이야기를 하다가 도영이 자신은 운동을 하느라 친구들과 놀이공원에 한 번도 가보지를 못했다고 말했던 게 기억나서다.

도영은 딱히 그곳에 너무 가고 싶다거나, 가보지 못해 아쉽다, 하지는 않았으나 혜수가 데리고 가고 싶었다. 그의 기억 속에 최초로 같이 놀이공원에 간 사람으로 남고 싶었다.


‘교수님이 좋아하실까? 좋아하실 거야, 분명.’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혜수가 뭘 하든 다 좋다하는 사람인 데다가 재성도 그러지 않았나. 여자가 먼저 해주면 남자가 엄청 좋아한다고.


“케이크도 챙겨야지.”

인절미를 좋아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떡 케이크도 준비했다.

그리고 케이크 안에는 오늘의 화룡점정, 반지가 들어있다. 케이크 속 반지라니, 조금 올드한가 싶었지만 다들 그러던데, 뭐.

들키지 않게 도영의 반지 치수를 알기 위해 그의 손을 만져본 게 몇 번인가.

오늘 혜수는 완벽한 프러포즈를 하여 도영의 마음을 쏙 빼놓을 것이다.

만반의 준비를 끝낸 혜수는 예쁜 원피스와 구두에 폭 싸여 집을 나섰다.

지금 시간은 11시 57분. 콜택시가 12시에 오기로 했으니 모든 게 완벽했다.

하지만 12시 5분, 10분, 15분. 시간이 지나도 택시가 오지를 않는다.


“왜 안 와?”

예약한 택시는 포기하고 다른 택시라도 잡으려 했지만 일요일의 병원이 으레 그랬듯 택시는 코빼기도 안 보였다.


‘더 늦으면 안 되는데.’

2시에 놀이공원 퍼레이드가 있다. 여기서부터 늦으면 퍼레이드도 놓치게 된다.


“어쩔 수 없다. 지하철이라도 타자.”

도영의 집이 있는 곳에 가려면 두 번이나 환승해야 했지만 지금은 다른 수가 없었다. 지하철은 막히지 않으니 잘만 하면 한 시 안에 도착할 수 있다.

혜수는 급히 지하철역으로 달렸다.


‘빨리, 빨리.’

“으악.”

혜수는 바닥에 뿌려져 있던 물을 잘못 밟고 그대로 주륵 미끄러졌다. 바닥으로 넘어가는 와중에도 본능적으로 손을 올려 케이크 상자를 보호했다.


“아야야. 아프다.”

엉거주춤 일어나 케이크를 보니, 상자 귀퉁이가 손에 눌려 제대로 구겨져 있다.


“어떡해.”

혜수는 상자를 똑바로 폈지만 구겨진 자국까지는 어찌할 수 없었다.


‘내가 못 살아.’

일단 지하철을 향해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자꾸 불길함이 느껴진다.

분명 아까 숙소를 나설 때만 해도 완벽한 하루의 시작이었는데 왜 이렇게 꼬이지?

그리고 정말로 꼬임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오늘 어딜 가길래 알려주지를 않아?”

“저만 믿고 따라오시라구요.”

여전히 멋진 도영을 만난 뒤 도영의 차에 막 올라타려 할 때.

빡 소리와 함께 구두 굽이 부러졌다. 익숙하지 않은 높은 구두를 신은 게 화근이었다. 높이를 제대로 가늠하지 못한 탓에 차에 걸려 그대로 부러졌다.


“이런. 어딜 가려 했는진 몰라도 다음에 가야겠는데.”

“안 되는데.”

프러포즈는 꼭 퍼레이드를 봐야 했다. 퍼레이드의 마지막 하이라이트 때 뿌려주는 꽃잎을 모아 프러포즈에 활용할 계획이었다.

멘트도 이랬다.


‘제가 교수님의 요정이 될게요. 매일을 빛나게 해줄게요. 저랑 결혼해 주세요.’

 
그렇기 때문에 퍼레이드는 필수였다.


“거기는 다음에 가고 오늘은 백화점에 가. 신발 사야지.”

“안 돼요. 놀이공원 가요.”

“놀이공원? 놀이공원을 가려 했던 건가?”

“퍼레이드 보고 싶단 말이에요.”

“퍼레이드를 보는 건 보는 건데……. 그 신발을 신고 간다고?”

“옙.”

혜수는 부러진 반대쪽 신발도 벗은 뒤 손에 쥐고 힘을 주었다.

뽀각, 남은 굽마저 날아가고 순식간에 플랫 슈즈가 됐다.
 


“이렇게 가죠. 저 퍼레이드 꼭 보고 싶단 말이에요.”

“괜찮겠어? 아니면 내 신발이라도 신어. 금방 가서 가져올 테니.”

“너무 커서 넘어질 거예요. 그냥 이거 신을래요.”

“불안한데.”

“괜찮아요. 출발, 출바아알! 얼른, 얼른요!”

그렇게 둘은 놀이공원으로 향했다.

혜수는 자꾸 올라오는 불길함을 억지로 가라앉혔다.


‘여기까지는 험난했지만 그건 다 지난 일이야. 지금부터 완벽하면 돼. 지금 가면 퍼레이드를 늦지 않게 볼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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