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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저 혜수와 반드시 결혼합니다 (106/110)


106. 저 혜수와 반드시 결혼합니다
2023.02.04.



 
그로부터 몇 주 뒤 주말 오전, 도영과 혜수가 탄 차가 쭉 뻗은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오늘은 혜수의 부모님께 도영이 인사를 드리는 날이다.

사실 혜수는 이렇게 빨리 도영과 정섭을 만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다른 원인 제공자가 있다 해도 도영의 팔에 자신의 아버지가 관여된 사실이 변하지는 않으니까.

하지만 며칠 전. 갑작스러운 호출에 도영의 방으로 갔을 때였다.

도영이 멋지게 미소를 지으며 종이 한 장을 내민다.


“이게 뭐예요?”

“어제 검사했거든.”

“근전도네요.”

종이에는 어제 진행한 도영의 근전도 검사 결과가 나와 있었다.


“할 때가 되어서. 요즘 증상이 없어져서 궁금하기도 했고.”

“좋아졌으면 좋겠어요.”

“읽어 봐.”

혜수는 별 기대 없이 종이를 읽어내렸다. 도영이 검사를 할 때마다 결과는 계속 비슷하게 좋지 않다고 나왔었으니까.

그런데, 종이를 잡은 혜수의 손이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이거…….”

도영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세상에!”

혜수는 도영을 와락 끌어안았다.

검사 결과 신경의 전도속도, 자극에 대한 반응 정도 등 모든 게 정상 범위로 들어와 있었다.


“그럼 이제 안 아프신 거예요?”

“맞아.”

“잘 됐어요, 너무 잘 됐어요!”

기뻐하는 혜수를 한동안 같이 안아준 도영은 혜수를 다시 바라보았다.


“그럼 이제 용인 가야지.”

“용인이요?”

“인사드리러 가자.”

“……그건.”

선뜻 대답하지 못하는 혜수에게 도영은 다시 말했다. 너무나도 당연하단 듯한 말투였다.


“가도 돼. 네가 그동안 무엇을 고민해왔는지 알아.”

“알고…… 계셨어요?”

“어떻게 모를까.”

도영이 인사를 가겠다 할 때마다 혜수는 갖가지 핑계를 대며 미뤄왔다. 도영을 정섭과 만나게 할 자신이 없어서였다.

딴에는 잘 둘러댄다고 했는데 도영이 빤히 알고 있을 줄이야.


“이 결과지라면 어때? 날 데려갈 텐가?”

검사 결과를 뚫어지게 쳐다보던 혜수는 위아래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요.”

“기쁜데.”

“저도요. 너무 기뻐요.”

어찌 보면 이상한 상황이다. 오히려 사고를 당한 도영이 부모님께 인사를 가겠다 조르고 있다니.

하지만 기쁘다고 말하는 도영은 정말로 다 털어낸 듯 홀가분해 보였다.
 

용인으로 가는 날, 혜수를 픽업하러 온 도영은 평소보다 훨씬 차림새에 신경을 쓴 모양새였다. 옷에는 구김 하나 없었고 헤어스타일 또한 완벽했다.

차에 올라타던 혜수가 입을 떡 벌렸다. 차의 뒷좌석에는 빈틈없이 갖가지 과일과 술, 육포 등이 꽉꽉 들어차 있었다.


“이게 다 뭐예요?”

“어머님, 아버님 드리려고. 트렁크에도 더 있어.”

“헉.”

당황한 표정의 혜수를 보고 도영이 심각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부족하지? 더 살 것을. 아니면 백화점에 들렀…….”

“아니요! 절대요! 충분합니다. 어서 출발해요.”

그런데, 운전을 하는 도중 도영이 자꾸만 핸들을 잡았던 손을 바지에 닦는다.


“어디 불편하세요?”

“아니. 땀이 나서.”

“……긴장돼요?”

도영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뒤 덧붙였다.


“오해는 하지 마. 아버님이 사고와 관련이 없어도 긴장은 똑같이 했을 테니까.”

혜수는 웃으며 도영의 손을 잡아주었다.

매사에 당당하고 무서울 것 하나 없어 보이는 교수님이 부모님께 인사드리는 걸로 긴장을 하다니.


“우리 엄마 아빠, 인정 많고 좋은 분들이세요. 잘 대해주실 거예요.”

“내가 부족함이 없어야 할 텐데.”

“엄마 아빠 공략법을 알려드리면요. 엄마는 요 얼굴. 얼굴에 껌뻑 죽고요, 아빠는 술이면 끝나요. 교수님은 둘 다 가지셨으니 무사통과이실 거예요.”

 

하지만 잠시 뒤.


“난 둘 사이 허락 못 해요.”

나란히 앉은 혜수와 도영을 바라보던 정섭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이런 말밖에 못 해서 미안해요. 내가 지금 너무 충격을 받아서.”

“아빠!”

“혜수 넌 미리 내게 말을 해줬어야지. 주 교수가 그 환자였다는걸.”

“그건…….”

“둘 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요. 우리 아내 장 보고 오기 전에 가는 게 좋겠어. 아내는 나보다 더 반대할 거야.”

그 말과 함께 정섭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아빠, 가지 마요. 조금 더 이야기해요, 네?”

혜수가 붙잡았지만 뿌리치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연거푸 저를 부르는 혜수의 말이 들렸지만 모른 체했다.

방에 들어간 정섭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미안하다, 혜수야.’

딸이 집에 소개할 사람을 데리고 온 건 오늘이 처음이다. 처음에는 기쁜 마음으로 도영을 맞았다. 의대 교수라는 직업에 반듯한 태도도, 그림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외모도 훌륭해 모두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도영이 그 환자란다. 자신이 사죄의 마음으로 살아오게 했던 그 환자.

더는 도영의 얼굴을 똑바로 볼 자신이 없었다. 자신이 저지른 과거를 이렇게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다.

눈앞이 깜깜해지며 모든 게 혼란스러웠다. 그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어떻게 사과를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정섭은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왜 하필 그 애란 말인가?’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해가 졌다. 밝았던 방 안은 어느새 어두컴컴해졌다.

그 자세 그대로 앉아 있던 정섭은 거실로 나갔다. 조금 있으면 아내 지영이 집에 올 시간이다.

아내가 알기 전에 도영이 왔었다는 흔적을 치워야 했다. 지영에게는 혜수에게 갑자기 일이 생겨 오늘 오지 않았다 둘러댈 생각이었다.

하지만 거실엔 여전히 도영과 혜수가 있었다. 울기라도 했는지 혜수의 눈시울이 붉다.

정섭은 애써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신혜수, 너 왜 아직 안 갔어?”

“아빠, 우리 말 좀 들어줘요. 응?”

혜수가 정섭에게 가려 하자 도영이 막아서더니 대신 나선다.


“저를 보시는 것, 거북하시다는 것 압니다. 그래서 더욱 오자 말했습니다. 오늘 여기 온 것도 제가 혜수에게 보채서 온 겁니다.”

“……주 교수가 이렇게 한다 해서 내 과거가 바뀔 것이라 생각했나요?”

“그건 아닙니다. 하지만 오늘로 인해 아버님의 마음 또한 가벼워진다면 더 바랄 것은 없겠습니다.”

“오늘 온 게 단순히 혜수와의 교제를 허락받기 위한 게 아니란 건가?”

“그렇습니다.”

“후…….”

“잠시만 시간을 내주십시오.”

아무리 봐도 도영이 쉽게 물러서지 않을 기세다. 결국 정섭은 다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주 교수가 새로이 알게 된 이야기가 있다 했죠. 어디 한번 해봐요.”

“당시 제가 사고를 당하고…….”

도영은 한주 수도 병원에서 조병억과 조한수가 어떤 일을 저질렀고, 그게 어떻게 여기까지 이어지게 되었는지 찬찬히 말해주었다.

긴 이야기가 다 끝나고, 묵묵히 듣고 있던 정섭이 입을 다시 열었다.


“주 교수는 그 수술을 준비한 게 내가 아니니 상관이 없다고 말했죠? 수술의 순서를 정한 게 내가 아니니 상관이 없다?”

“……네.”

“만약 주 교수의 수술이라면 주 교수는 그렇게 했겠어요? TA(자동차사고)를, 그것도 덤프트럭 때문에 전복 사고를 당한 환자의 수술 순서를 남이 정해준 대로 한다?”

“…….”

“의사로서 나는 환자의 상태를 미리 파악하고 수술을 들어가야 할 의무가 있어요. 그건 주 교수도 마찬가지이고, 혜수 너도. 하지만 난 그러지 못했지.”

드러난 진실에도 정섭이 느끼는 죄책감에 달라진 것은 없어 보였다.


“아빠, 그렇지만 아무런 준비 없이 수술실에 들어간 건 병원의 명령 때문이었잖아요.”

“내가 왜 아무런 준비 없이 수술실에 들어갔는지 알아? 그건 내가 그 병원에 제대로 고용된 의사가 아니었기 때문이었어.”

“!”

“그때 난 그깟 돈 몇 푼 더 받자고 정식으로 등록을 하지 않고 수술을 했어.”

“!”

“그날도 다른 병원에서 수술을 하던 도중에 한주 수도병원에 수술이 있다는 연락을 받았지. 그래서 직접 준비하지 못한 것이고.”

“하, 하지만, 수술할 형편이 안 되는데도 강행한 건 조한수잖아요. 그것도 병원 홍보라는 영리적인 목적으로요. 그 사람이 돈만 보고 저지른 일이잖아요, 네?”

정섭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찌 됐든, 제대로 확인을 못 한 건 나고. 결과를 이렇게 만든 것도 나야.”

“아빠!”

“그날 왼팔 수술을 다 끝내고 오른팔을 봤을 때. 난 이 환자가, 아니 주 교수가 평생 장애를 갖고 살아갈 것을 예감했어요.”

마치 눈앞에 그때의 그 상황이 보이는 것처럼 정섭은 눈을 감고 미간을 찌푸렸다.


“……주 교수.”

“네, 아버님.”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이제야 사과를 하게 돼서 정말 미안합니다.”

정섭이 고개를 푹 숙였다.


“사과가 너무 늦었네요. 그땐 내가 너무 철이 없었어. 후유증이 남게 될 거라 예상했을 때, 사과를 했어야 했는데. 무서워서 그냥 도망치고 말았어.”

“이러지 마십시오. 아버님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진심입니다.”

“어떻게 원망을 안 해. 그 오랜 기간 동안 아팠는데.”

“이젠 괜찮습니다. 이번 근전도 검사에서는 정상 판정이 나왔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 주 교수도 알다시피 신경과 관련된 근 질환은 언제 재발할지 몰라요.”

“…….”

“나중에 또 증상이 생기면? 그때 다시 나와 혜수를 원망하게 된다면? 지금은 둘이 죽고 못 사는 사이일지는 몰라도 사람의 마음이란 건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잖아요?”

“그렇지 않습니다.”

“난 조금이라도 그런 가능성이 있는 곳에는 내 딸 보내고 싶지 않아요.”

말을 마친 정섭은 다시 방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때.


“저 혜수 없이는 못 삽니다.”

도영이 바닥에 무릎을 털썩 꿇었다. 정섭이 놀라 도영에게 달려갔다.


“아니, 왜 이래요? 얼른 일어나요.”

“지금껏 살면서 제게 행복을 느끼게 해준 사람은 혜수가 처음입니다.”

“아이고, 어서 일어나요, 어?”

정섭이 도영을 일으키려 끙끙댔지만 바윗돌 같은 도영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저 혜수,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사랑을 외치는 도영의 목소리는 지금껏 들어본 그 어떤 말보다 묵직했다.


 


‘사랑한다고?’

초조하게 정섭과 도영을 지켜보던 혜수의 얼굴이 슬쩍 붉어졌다.

사랑한다는 단어가 도영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처음이다.

물론 넌 내 치유제다, 가장 깊은 안정제다 등등 비슷한 말은 많이 들어봤다.

그때는 굳이 사랑한다는 단어가 없어도 충분히 마음이 전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또 이것대로 느낌이 달랐다. 역시, 단어가 존재하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는 거다.

혜수는 이런 심각한 상황에서도 눈치 없게 나대는 심장을 꾹꾹 내리눌렀다.


“주 교수, 사람의 마음이란 게 붕대 자르듯이 딱딱 맞출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지금은 혜수가 그렇게 커다란 의미라 해도 나중에 또 어떤 일이…….”

“일단 만나라고 해 봐요.”

갑자기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뒤를 돌아보니 언제 들어왔는지 혜수의 엄마 지영이 양손에 까만 봉지를 들고 서 있었다. 혜수의 남자친구에게 저녁으로 맛있는 걸 해주겠다더니 바리바리 장을 봐왔다.


“자기들이 서로 좋다잖아. 그럼 됐지, 뭘 우리가 이래라저래라해.”

혜수 엄마의 의견에 정섭의 목소리가 조금 작아졌다.


“나는 나중이 걱정되어서 그러지.”

“우리 혜수가 어련히 알아서 하겠어? 똑 부러지는 애잖아. 당신보다 더 믿을 수 있는 애라면서.”

“믿기는 하는데…….”

“그리고 당장 결혼하겠다는 것도 아닌데 뭘 벌써부터 반대해. 만나는 것부터 반대할 이유가 있어? 언제 무슨 일로 헤어질지 어떻게 알아.”

그 말에 도영이 크게 외쳤다.


“절대 헤어지지 않습니다. 저 혜수와 반드시 결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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