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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 이렇게만 있어 주세요 (105/110)


105. 이렇게만 있어 주세요
2023.02.01.


새파란 하늘이 높게 떠 있는 일요일 오전, 혜수는 서울 한대 병원의 정문 앞에 서 있었다. 양손에는 짐 가방을 든 채다.


‘내가 다시 이곳에 오게 될 줄이야.’

감회가 새롭다. 어쩌면 다시는 올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곳이었는데 예상외로 굉장히 빨리 복귀를 하게 되었으니.

병억이 구치소에 수감된 후 유민은 사직서를 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레지던트 과정만은 마치겠다 결심한 유민이었지만 병억마저 그리되자 더는 버틸 수가 없었다.

또 경애가 입국 무효 처리를 받게 되었다.

서울 외과 의국 입장으로서는 두 명의 레지던트가 사라져버리는 바람에 인력이 모자라게 되었으니 더는 혜수를 강천에 둘 수가 없었다.

서울 외과 과장은 강천 외과 과장에게 전화를 해 이렇게 말했다.


“지금 내 코가 석 자인데 누가 누굴 도와줘! 당장 신혜수 돌려보내!”

그 결과 혜수는 다시 도영의 곁으로 오게 되었다.

병원 안으로 들어가자 모든 게 그대로였다. 자주 가던 카페, 로비를 오가는 수많은 의료진과 환자들 모두 북적북적하다.

바로 숙소로 간 혜수는 도영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저 지금 숙소에 막 왔어요. 터미널에 너무 일찍 가버려서 더 빠른 버스로 바꿔 타고 왔어요. 오늘 의국에 계신다고 하셨죠? 거기로 갈게요.

옷을 갈아입고 짐을 정리한 뒤엔 숙소를 나섰다.

의국으로 가자 아는 얼굴들이 혜수를 반겼다. 먼저 말을 건 사람은 혜수와 가장 가까이 지냈던 펠로우였다.


“이야, 껌, 다시 보니 반갑네?”

“저 이제 껌 아니거든요.”

“아, 맞다. 껌은 이경애랬지?”

혜수가 껌 사건의 주인공을 경애라고 밝힌 것은 아니었다. 다들 어떻게 알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강천에 가 있는 사이 사건의 범인이 모두에게 밝혀져 있었다.


“근데 너 벌써 수술복으로 갈아입었네? 오늘부터 바로 당직할래? LT(간 이식) 두 개나 있어.”

“넵! 시켜만 주시면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러자 옆을 지나가던 다른 교수가 끼어든다.


“야, 조심해. 얘 이제 막 굴리면 안 돼. 주 교수가 얼마나 무서워?”

“아, 맞네요. 너 이제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되는 사람이지?”

“둘이 언제부터 그렇고 그런 사이였던 거야?”

“그러게 말이야. 언제부터 사귀었어?”

이런 질문을 예상하기는 했다. 하지만 혜수는 전과 다름없이 열심히 의국 생활을 하고 싶었다.


“아닙니다! 이전처럼 막 굴려주세요. 그러려고 온 거예요.”

그러자 교수가 흐응, 과연 그럴까? 하며 웃는다.


“주 교수는 만났어?”

“아니요, 아직요.”

“방에 가봐. 아침에 방에 들어가는 것 봤어.”

“넵.”

그런데. 교수가 덧붙인 말에 혜수는 불길한 기운을 느꼈다.


“그런데 몸이 안 좋은가 봐. 식은땀을 막 흘리고 있더라?”

“식은땀이요?”

“어. 얼굴이며 목에 땀이 뚝뚝. 초조해 보이기도 하고. 어디 아프대?”

“……딱히 들은 건 없어요. 제가 가볼게요.”

“수고해.”

혜수는 그들을 뒤로하고 급히 도영의 방으로 갔다.

도영의 방 문 앞에 서서 똑똑, 노크를 하니 아무런 대답이 없다.


‘안 계시나?’

다시 한번 똑똑,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여전히 답이 없다.


‘이상하다, 어디 가셨지.’

오늘은 일요일이라 있을 곳이라고는 여기랑 연구실뿐인데. 게다가 이미 도영이 하루 종일 의국에 있을 거라 말을 해준 상태다.

슬쩍 문고리를 잡고 돌렸다. 그러자 잠겨 있지 않았던지 문이 열린다. 조금 더 불안해졌다.

도영은 누군가 방에 들어오는 것을 끔찍이 싫어하는 사람이니까. 자신의 상태를 남에게 알리기 싫어했기 때문에 문을 철저하게 단속했다. 운동기구를 남에게 내보이는 것도 싫어했고.


‘설마 진짜 아프신 건 아니겠지?’

혜수는 문을 열고 완전히 안으로 들어갔다.


“교수님?”

하지만 내부는 텅 비어 있었다. 넓은 방 안에 놓인 운동기구들 만이 혜수를 반겼다. 요즘도 운동을 게을리하지 않는지 모든 기구들이 번쩍하게 잘 관리가 되어 있었다.


“그냥 어디 가신 건가?”

그런데, 책상 위에 널려 있는 약통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도 종류별로 다 나와 있다. 분명 전에는 서랍 안에 들어 있던 걸로 기억하는데.

덜컥 겁이 났다.


‘약을 드신 거야? 그럼 정말 아프신 거야?’

초조하게 내부를 둘러보던 혜수는 휴대폰을 들었다.


‘교수님께 전화를 해봐야겠어.’

떨리는 손으로 연락처를 검색해 통화 버튼을 누르려던 그때, 문이 열리며 재성이 나타났다.


“재성 선생님?”

“시, 신혜수?”

재성은 혜수를 보고 깜짝 놀랐다. 못 볼 것이라도 본 것처럼 히익 소리까지 냈다.


“왜 그렇게 놀라세요? 저 여기 오는 줄 모르셨어요? 저 내일부터 다시 여기에서 근무하게 되었어요.”

“그, 그렇지. 들었어.”

“선생님은 이 방에 왜 오셨어요? 아니, 혹시 교수님 못 보셨어요?”

재성은 어색하게 웃으며 뒤로 물러났다.


“모르겠는데.”

뒤로 돌아 다시 문을 열고 나가려는 재성의 손에 얼핏 뭐가 보였다.

자세히 보니 주사기다. 커다란 20cc 주사기 속에는 하얀 것이 가득 차 있었다.

순간, 하얀 액체와 주사기 조합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얼마 전 도영이 응급실에 실려 갔던 것 또한.

그때 도영은 통증을 견디지 못하고 프로포폴과 같은 마취제를 맞고 나서야 진정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 프로포폴이 바로 하얀색이다.

혜수는 정신없이 재성에게 다가갔다.


“그거 뭐예요, 선생님?”

“어? 이거? 아, 아무것도 아닌데.”

재성이 주사기를 등 뒤로 황급히 숨겼다. 덕분에 더욱 불안해졌다.


“왜 숨기시는 거예요? 그게 뭔데요? 혹시…… 그거 프로포폴이에요?”

“아니…….”

“주사기 줘봐요. 그거 프로포폴 맞는 거죠?”

“어?”

“지금 교수님 어디 계세요? 아프신 거예요?”

“그, 그게…….”

재성은 제대로 말을 하지 못했다. 뭔가 숨기는 게 정말 있는 것처럼.

혜수는 확신했다.

교수님이 아프신 게 맞구나. 지난번처럼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아파하고 있구나.

강천에 내려가기 전날 밤, 지하주차장에서 도영이 얼마나 고통스러워했는지 혜수는 안다. 그때의 그 절망감을 생각하면 지금도 온몸이 저릿하게 아파진다.


“아프신 것 맞죠? 네? 말 좀 해주세요!”

“아니, 그게…….”

“빨리 제가 가야 해요. 어디예요? 교수님 계신 곳 어디냐구요.”

눈시울이 울컥 뜨거워졌다.

이제는 도영이 자신과 다시 만나고 있으니 손을 잡아주면 경련이 나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어서 도영이 있는 곳으로 가야 했다.


“응급실에 계신 거예요? 아니면 병동?”

혜수의 머릿속엔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이 순간에도 교수님은 고통스러워하고 있어. 어서 빨리 교수님을 낫게 해줘야 해.


“빨리 말 좀 해줘요, 네?”

발을 동동대며 입을 꾹 닫은 재성에게 매달리고 있던 때였다. 띠릭 소리와 함께 또다시 문이 열렸다.

문을 쳐다본 혜수의 눈이 커다래졌다.

들어온 사람은 여태 애타게 찾던 도영이었으니까. 심지어 도영은 한 손에는 케이크를, 다른 손에는 꽃다발을 들고 있었다.


 


“신혜수?”

“교……수님?”

혜수를 본 도영은 케이크며 꽃다발을 던지다시피 내려놓고 급히 혜수에게 다가갔다. 예정 시간보다 훨씬 빨리 병원에 나타난 혜수도 놀라운데 심지어 눈가까지 붉은 채라 더욱 놀랐다.


“왜 울지? 마음 쓸 일이라도 있었던 건가?”

“교수님…….”

도영의 도끼 눈은 순식간에 재성에게로 향했다.


“황재성. 무슨 짓을 한 거지.”

서릿발 같은 시선에 재성이 파드득 떤다.


“그런 게 아니고요.”

“아니면 뭐?”

“교수님 전 억울해요. 혜수가 갑자기 이러는데 저는 이유를 잘…….”

재성은 정말 억울했다. 난 진짜 아무것도 안 했단 말이야.

도영은 재성에게 바짝 다가가 으르렁거렸다.


“네가 깜짝 파티를 해주면 좋아할 거라며. 그런데 왜 울고 있냔 말이다.”

그랬다. 도영은 혜수의 복귀 기념으로 혜수가 기뻐할 만한 일을 해주고 싶었다.

무얼 할까 몇 날 며칠을 고민하던 중, 때마침 연애에 아주 자신이 있다는 재성이 옆을 지나가는 게 아닌가.


“황 선생, 잠깐만.”

“예? 저 부르셨어요?”

“조언을 구할 게 있는데.”

“제, 제게요?”

“그래.”

“어떤 건데요?”

“일단 들어와.”

도영은 그렇게 재성을 방으로 데리고 간 뒤엔 소파에 앉혔다.


“혜수가 오는 날 기쁘게 해주고 싶다.”

재성은 입을 앙 말아 물어야 했다. 도영에게서 도저히 나올 것 같지 않은 말이었으니까.

심지어 도영의 귓불은 조금 붉어지기까지 해 돈 주고도 못 볼 진귀한 구경을 한 셈이 됐다.


‘흐읍. 태연하게, 웃지 말자. 웃으면 오늘이 제삿날이야.’

“그러니 내게 뭘 해주면 좋을지 알려줘.”

재성은 가까스로 입술을 일직선으로 유지했다.


“네, 이건 제가 전문입죠. 제게 맡겨만 주세요.”

그렇게 혜수를 위한 깜짝파티가 준비되었다. 그들이 준비한 것은 레터링 케이크와 꽃다발이었다.

혜수가 올 시간에 맞춰 혜수가 예전에 맛있게 먹었던 케이크를 주문했고, 그 위에 글씨를 직접 쓸 계획까지 세웠다.

도영은 일요일이지만 새벽같이 출근해 20cc 주사기에 크림을 담아 글씨를 쓰는 연습까지 했다.

어찌나 열심히 했는지 땀을 뻘뻘 흘렸다. 손재주가 좋은 도영이 주사기를 도구로 선택했으니 레터링은 곧 전문가가 한 수준이 되었다.

그러던 중 케이크가 도착했다는 연락이 왔다.


“선생은 방에 가 있어. 케이크 받아서 갈 테니.”

“옙.”

그런데, 재성에게 주사기를 맡기고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이 사달이 난 것이다.


“전 교수님이 또……. 재성 선생님이 주사기를 들고 있으니까…….”

뭐가 그리 서러운지 혜수의 빨개진 눈이 점점 더 빨개졌다. 그에 맞춰 도영의 눈도 날카로운 세모꼴이 되어갔다.


“황재성. 자꾸 네 이름이 나오는데. 무슨 짓을 한 거지?”

“저 정말 억울해요, 교수님.”

생명의 위협을 느낀 재성은 주사기를 급히 혜수에게 쥐여 주었다.


“이거 포폴 아니고 생크림이야, 생. 크. 림.”

“생……크림이요?”

“어, 생크림. 케이크 장식할 거.”

“케이크요?”

재성이 케이크를 가리켰다.


“네가 저기 케이크 좋아한다고 교수님이 그러시던데.”

“아.”

그러고 보니 저 케이크는 낯이 익다. 하얀 크림이 심플하게 발려진 케이크는 오래전 병동에서 분식 파티를 할 때 먹은 것과 같았다.

그때는 승원이 산 걸로만 알았는데 도영이 샀던 거였을 줄이야.

당시엔 도영이 저런 걸 샀을 거라 생각할 틈이 전혀 없었다. 혜수에겐 그저 무시무시한, 매사 정확하고 확실한 교수님이었을 뿐이었으니까.

멍한 혜수와 도끼 눈 도영을 번갈아 바라보던 재성은 뒷걸음질을 쳤다.


“그럼, 두 분 좋은 시간 보내세요. 전 이만 가볼게요.”

그렇게 걸음아 날 살려라 도영의 방에서 도망쳤다.

도영은 혜수에게 다가가 허리를 굽혀 눈높이를 맞추었다.


“많이 놀랐나?”

“전 교수님이 또 아픈 줄로만 알았어요. 주사기를 보고 프로포폴을 맞으신 줄 알았어요. 전에도 맞으셨잖아요.”

“그랬지.”

“요즘엔 괜찮았으니까 다 나은 건 아닐까 기대했거든요. 그래서 더 놀랐나 봐요.”

“아프면 네가 손잡아 주면 되잖아. 그러니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마. 난 괜찮으니까.”

그래도 여전히 환한 미소를 보여주지 않는 혜수다.


“정말 괜찮아.”

“전…… 교수님이 아픈 게 정말 싫단 말이에요.”

도영은 발개진 눈매를 비비는 혜수의 손을 잡아내려 당겼다. 작은 몸을 품에 꽉 껴안고 토닥여 주었다.


“내가 어떻게 해주면 좋을까.”

잠시 뒤, 가슴에 파묻힌 혜수의 얼굴에서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냥, 이렇게만 있어 주세요. 다시는 아프지 말고.”

“그러지.”

“진짜요?”

“널 위해서라면 어떤 것이든 못할까.”

“……고마워요.”

혜수는 도영의 옷에 더욱 얼굴을 깊게 파묻었다.

실제로는 노력한다 하여 통증이 생기지 않는다는 건 불가능함을 잘 안다.

하지만 망설임 없이 그러겠다 튀어나온 도영의 대답은 가슴을 뛰게 하기에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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