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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기분이 반짝반짝 (104/110)


104. 기분이 반짝반짝
2023.01.28.


느지막한 오후, 강천 한대의 82병동.

혜수는 승찬이라는 이름의 꼬마 환자와 나란히 앉아 있었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던 중 들리는 벨 소리에 휴대폰을 보니 엄마 지영에게서 온 전화다.


“승찬이 잠깐만, 선생님 전화 좀 받을게.”

“네.”

혜수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엄마. 무슨 일이에요?”

-무슨 일이기는. 우리 딸 목소리 듣고 싶어서 전화했지.

“목소리는 아까 들었잖아.”

불과 몇 시간 전 지영에게 안부 전화를 했다. 그러니 지금 온 전화는 뭔가 목적이 있는 거다.


“할 말 있는 거지? 누굴 속이려고요.”

그러자 멋쩍은 웃음 소리가 들려온다.


-우리 딸 귀신이네.

“뭔데요?”

-실은 내가 지금 은행에 다녀왔는데. 그게 왜 간 거냐면, 5년 동안 적금 넣었던 거 만기 됐거든. 만기는 그저께 됐는데 오늘 마침 시간이 났지 뭐니. 그래서 오늘 갔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밑밥을 길게 까는 지영이다.


“응. 그런데?”

-은행 창구 직원 아가씨가 싹싹해서 친해졌는데, 그 아가씨한테 남동생이 있다네.

“응.”

-그 남동생이 지금 L전자 팀장이래. 아직 서른셋밖에 안 됐는데 벌써 팀장이래. 능력도 좋고 키도 훤칠하고…….

“엄마.”

-응?

“돌려 말하지 말고 바로 말 해줘요.”

-오호호호. 얘, 너 언제까지 그렇게 있을 거야. 엄마가 그 총각 전화번호 가져왔거든. 한번 만나봐.

“……나 지금 생각 없어.”

-얘는! 이러다 금방 나이 들어. 연애도 좀 해봐야 결혼을 하지. 지금부터…….

“엇, 네! 교수님. 바로 가겠습니다! 엄마, 나 끊어. 수술실 가야 해.”

-얘, 혜수야, 혜수야!

있지도 않은 교수 핑계를 대며 전화를 끊었다.

선은 무슨. 가뜩이나 교수님을 어떻게 소개해야 하나 고민인데, 엄마까지 왜 이래.


“에휴. 에휴우우.”

“선생님, 왜 자꾸 숨을 그렇게 쉬어요?”

“응? 내가 그랬어?”

“네. 방금 푸우우우, 했잖아요.”

저도 모르게 밖으로 한숨을 내쉬었나 보다. 혜수는 웃으며 승찬이를 쓰다듬었다.


“선생님이 너무너무 하고 싶은 게 있는데 못해서 그래요.”

“그게 뭔데요?”

“음…….”

다른 말을 찾아야 했다. 고작 일곱 살짜리 꼬마애한테 남자친구를 부모님에게 소개할 방법을 모르겠다, 라고 말을 할 수는 없으니.


“선생님이 같이 있으면 기분이 반짝반짝 해지는 사람이 있거든요? 그 사람이랑 너무 하고 싶은 게 있는데 그걸 못해서 그래요.”

“우와, 선생님도 기분이 반짝반짝 해지는 게 있어요? 나도 있는데.”

“그럼요. 선생님도 있지요. 그런데 우리 승찬이는 누가 그런데요?”

“우리 엄마요! 특히 음…….”

잠시 생각하던 승찬이 박수를 짝 친다.


“엄마랑 고고마이노 볼 때 제일 반짝반짝 빛나요.”

고고마이노라면 요즘 병원에 입원한 아이들 사이에서 가장 핫한 캐릭터 만화다.

병원 생활을 오래 한 승찬이답게 때마다 좋아하는 만화가 다른데, 지금은 대세인 고고마이노에 빠졌나 보다. 그걸 제일 좋아하는 엄마와 함께 보니 더 좋은 거겠지.


“푸핫. 그렇구나. 선생님도 고고마이노 봤는데 재밌더라.”

“선생님은요? 누구랑 뭘 하면 그런데요?”

“선생님은.”

‘누구’라는 것에 답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당연히 도영이다.

무표정한 얼굴로 지시를 내리는 입술, 날카로운 눈빛으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혈관을 꿰매는 손, 진중하면서도 무심하지 않은 환자를 보는 눈빛, 모두 보기만 해도 좋다.


“선생님은. 주도…….”

이름을 말하려다 그냥 삼켰다. 암, 개인 정보는 지켜줘야지.


“선생님이 아는 사람 중에 키가 크고 잘생긴 사람이 있거든요?”

“키 크고 잘생긴 사람이요? 그게 누군데요?”

“그런 사람이 있어요. 세상에서 제일 잘생기고 멋진 사람.”

“우와. 승찬이도 그 사람 보고 싶어요. 궁금해요.”

“선생님도 맨날 보고 싶어요. 그 사람이랑 매일 같이 있으면 좋아요. 기분이 사탕처럼 반짝반짝해요. 그러니까 매일매일 보고 싶어요.”

“그럼 매일 같이 있으면 되잖아요?”

“선생님도 그러고 싶은데. 그 사람은 너무 바빠요. 일단 서울에 있거든요.”

“아하. 안 됐다. 승찬이는 매일 엄마랑 같이 있는데.”

“그렇죠? 선생님 너무 슬프다.”

어떻게 정섭과 도영을 만나게 하나, 에서 시작된 한숨은 도영이 바쁘다는 이야기로 변해버렸다.

그때, 승찬이 혜수 너머를 보더니 우와, 한다.


“저 아저씨 진짜 멋져요. 저 아저씨한테 반짝반짝 빛이 나요!”

“정말? 그게 누군데?”

뒤를 돌아보던 혜수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평일인 오늘 여기 있을 리가 없는 사람이 눈에 보여서다.


“교수님?”

놀란 혜수를 본 도영이 걸어온다. 부드러운 미소가 입에 걸려 있었다. 그 모습에 승찬이 더욱 입을 헤, 벌린다.


“저 빛나는 아저씨가 여기로 와요.”

“저 아저씨 선생님이 아는 분이야.”

“진짜요?”

멀리서도 빛이 나는 사람이 둘에게 다가왔다.


“여기서 뭐해.”

도영이 말을 걸어주니 신이 났는지 승찬이 냉큼 대답한다.


“전 7살 김승찬인데요, 선생님이랑 이야기하고 있었어요.”

“무슨 이야기?”

“선생님이 한숨을 쉬었는데 슬퍼서 그랬대요.”

화자의 상황과 심정을 아주 잘 요약한 똘똘한 승찬이다.


“저런.”

혜수가 기분이 안 좋다는 말에 도영이 짓던 미소가 단박에 사라지고 심각한 표정이 된다.


“우리 신 선생님은 기분이 왜 안 좋다는데?”

도영의 맞장구에 신이 난 승찬이 더 크게 떠들었다.


“키가 크고 잘생긴 사람이랑 하고 싶은 게 있는데. 그러면 기분이 반짝반짝해진다는데. 그걸 못해서 그렇대요. 너무너무너무너무 하고 싶은데 못했대요.”

승찬의 대답을 가만 듣고 있던 혜수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정확한 전달이기는 한데…… 뭔가 다른 이 느낌은 뭐지?


“그랬대?”

“네.”

승찬이 고개를 끄덕끄덕하고, 뭘 생각하는지 도영이 눈매를 갸름하게 한다. 그러더니 픽 웃는다.


“그건 내가 해결해 줄 수 있겠는데.”

“아저씨가요?”

“그래.”

눈알을 굴리던 승찬이가 입을 헤 벌린다.


“혹시 아저씨가 그 세상에서 제일 잘생기고 멋진 사람이에요?”

“세상에서 제일 잘생기고 멋지대?”

“네. 그리고 매일매일 보고 싶대요.”

혜수는 소리 없는 절규를 했다.


‘제발, 그만해, 승찬아. 제발.’

당장이라도 승찬의 입을 막고 이곳에서 데리고 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도영이 앞을 떡하니 막고 있어 그럴 수가 없다.

아니면 어디 쥐구멍이라도 없나. 아무리 작아도 들어갈 자신이 있는데.


‘아이, 정말.’

슬쩍 도영을 올려다보니 콧잔등이 움찔한다. 웃음을 참기 위해 애를 쓰고 있는 게 분명하다.

혜수는 애써 입꼬리를 올리며 승찬을 일으켰다.


“자, 승찬아. 이제 곧 저녁 먹을 시간이잖아? 가서 손 씻자.”

“조금 전에 선생님이랑 씻었잖아요?”

“……먹기 전에 또 씻어야지. 그래야 나쁜 벌레들이 죽어요.”

“음. 네.”

뭔가 이상하긴 했지만 맞다 수긍이 됐는지 승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씻으러 갈게요.”

“그래, 착하다.”

승찬이 뽈뽈 사라지고 혜수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교수님, 평일인데 어떻게 오셨어요.”

“오늘은 진짜 회의.”

“네, 그럼 회의하세요. 저도 이만 가볼게요. 바빠서.”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다만 픽, 바람 빠지는 소리만 날 뿐.


“안녕히 계세요.”

대충 고개를 숙이고 복도를 걸어 나가는데 발자국 소리가 계속 따라온다. 발걸음을 빠르게 하면 같이 빨라지고, 느리게 걸으면 같이 느려진다.


‘뒤돌아보지 마. 돌아보면 끝이야.’

하지만 도영의 목소리가 끝내 뒷덜미를 잡아채고 말았다.


“어딜 도망가?”

“도망 아닌데요.”

“왜 내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잘못 보셨습니다.”

 

 
걸음아 날 살려라 바삐 걸었다. 하지만 정신없이 걷다 보니 막다른 길이다. 보이는 거라고는 비상계단으로 향하는 문뿐.


‘못 살아.’

혜수는 고개를 휙 돌려 도영을 흘겨보았다.


“왜 자꾸 따라오세요?”

“궁금한 게 있어서.”

“뭔데요? 빨리 여쭤보세요. 저 시간 없거든요. 교수님도 의국에 가셔야죠.”

할 일은 없었지만 바쁜 척했다. 빨리 이곳을 벗어나지 않으면 조만간 귓바퀴가 활활 불에 타서 없어질 것이다.


“세상에서 제일 잘생기고 멋진 사람이 누구지?”

“……있어요. 그런 사람.”

“궁금한데.”

“그게 왜 궁금해요? 신경 끄시죠.”

“그럼 이것만 대답해 줘. 그 사람, 나보다 더 잘생겼나?”

“…….”

“나보다 더 멋져?”

“…….”

“그런 사람은 드물 텐데.”

그러더니 또 빙글빙글 웃는다. 자신 있게 말하는 도영은 오만해 보이기까지 했다.

딱히 반박할 말은 없어 혜수는 답하기를 포기하고 다시 앞으로 더 걸어갔다.

이젠 문이 코앞이다. 하지만 도영은 또 그걸 바짝 따라왔다.


“대답 안 할 건가?”

“아, 정말!”

“그 세상에서 제일 잘생긴 사람이 얼마나 보고 싶었으면 환자에게까지 푸념을 해?”

심지어 그 환자는 아직 초등학생도 되어 보이지 않았다.


“그런 거 아니거든요!”

홱 도영을 쳐다보았는데.


“으앗.”

도영이 혜수의 팔을 끌어당겨 바로 앞에 있던 계단실로 데리고 들어갔다.

쾅, 문이 닫히고 순식간에 사방이 조용해졌다.

돌돌거리는 폴대 소리도, 환자들의 말소리도 모두 사라지고 작은 공간에는 도영과 혜수 둘만 남았다.

도영이 고개를 숙여 혜수의 귓가에 속삭인다.


“말을 하지 그랬어. 원하는 게 있다고.”

귓가에 닿는 숨결에 절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심장이 콩콩 달음박질쳤다.

하지만 눈을 치켜뜨고 최대한 아닌 척했다.


“그, 그 사람 교수님 아닌데요?”

“흐음?”

“진짜 아닌데요? 맹세코 아닌데요?”

혜수는 침을 한번 꿀꺽 삼켰다.


“걔는 사실 제 초등학교 동창이자 엄마 친구의 아들인데 나이는 동갑이지만 빠른년생이라 실제로는 한 학년 위에 학교를 다녔고요.”

디테일을 위해 급히 진짜 친구 한 명을 생각해냈다.

미안하다, 친구야. 오늘 너의 이름을 좀 팔게.


“지금은 저어기 뭐냐 한전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벌써 결혼을 해서 애가 둘인데, 첫째는 다섯 살이고 둘째는 18개월인데 애가 벌써 문장형 말을 할 줄 알고…….”

속사포 같은 혜수의 랩을 도영이 끊는다.


“오해하는 게 있는가 본데. 난 내가 그 사람이라 말한 적 없는데.”

“!”

“그냥 네가 바라는 게 있다길래 도와주고 싶었을 뿐.”

……낭패다. 입술을 질끈 깨무는 혜수를 보며 도영이 또 빙글빙글 웃는다.


“서운한데.”

“뭐가요?”

“내가 그 사람이 아니라니.”

말은 서운하다는데 하나도 서운한 표정이 아니다. 오히려 좋아죽겠다는 표정이다.


“그래도 괜찮아.”

도영은 혜수의 허리를 바짝 끌어당겼다. 다시 고개를 숙여 귓가에 속삭인다. 나직한 목소리가 부드럽게 귀를 간질였다.


“난 그 사람이 할 수 없는 걸 할 수 있으니.”

도영은 혜수가 물고 있는 아랫입술을 손으로 당겨 빼냈다. 분명한 의도가 담긴 손짓이었다.


“그게…… 뭔데요?”

“이런 짓.”

촉, 입술에 말캉한 것이 닿았다 떨어졌다.

혜수는 요동치는 심장을 숨기기 위해 더욱 큰 소리를 냈다.


“아, 진짜! 누가 오면 어쩌려구요.”

“오면 어때. 난 그 사람이 아니니 이런 거라도 해야지.”

그러더니 또 촉, 입술에 도장을 찍는다.


“자꾸 놀릴래요?”

“놀리는 거라니, 오해하지 마. 그럼 이제는 널 반짝반짝하게 하려면 또 뭘 해야 하나.”

그러더니 또 촉, 입맞춤을 한다.


“너무해요, 다 알면서……!”

순간 도영의 입이 완전히 혜수를 삼켰다. 부드러운 입맞춤은 한참이나 더 이어졌다.

혜수는 도영과의 시간에 완전히 빠져들었다.

도영을 정섭과 어떻게 만나게 하나, 하던 고민은 일단 집어넣어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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