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의사에게 제일 중요한 것
(103/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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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 의사에게 제일 중요한 것
2023.01.25.
병억은 발버둥을 쳤다.
“의료법 위반이라니? 사문서 위조? 내가 뭘 했단 말이오!”
“환자의 자의 퇴원서를 삭제했잖아?”
“내가 언제? 난 그런 적 없어! 그런 일이라면 의무기록실장에게 물어봐. 난 결백해!”
병억은 조한수를 쳐다보았으나 조한수는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그 모습에 무언가 병억의 뇌리를 스친다.
“설마. 너, 네가 이렇게 만든 거냐? 어? 야! 조한수!”
조한수는 말없이 고개를 더 푹 숙여버렸다. 그 모습에 경찰이 푸핫, 웃는다.
“이미 자의 퇴원서가 지워진 전후로 두 분 사이 통화기록이 다 확보되어 있습니다. 무슨 할 말이 그렇게 많아 하루 사이에 서른 통이 넘게 전화를 하셨는지? 그리고 조금 전에 조한수에게 뭐라고 했더라?”
“!”
자세히 보니, 조한수의 옷깃에 소형 마이크가 붙여져 있다. 자신이 한 말은 그대로 경찰에게 전달되었을 거다.
병억의 얼굴이 빈틈없이 일그러졌다.
“곱게 가시면 더 이상의 망신은 없을 겁니다.”
결혼식장은 말 그대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단상 위에 얼어붙은 유민은 자신의 아버지가 그대로 경찰에 끌려가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그렇게 유민의 결혼식은 완전히 처참하게 끝이 났다.
유민의 청첩장이 도영과 혜수에게 배달되기 며칠 전.
갑작스레 의무기록실에 나타난 도영을 본 조한수는 엉거주춤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 교수님? 저, 절 왜 찾아오신 건지…….”
“할 이야기가 기니 일단 앉으시죠.”
“예, 예…….”
서늘한 목소리에 조한수는 아무런 대꾸 없이 도영이 시키는 대로 했다.
두 무릎을 가지런히 모으고 앉은 조한수에게 두터운 봉투 하나가 전해졌다.
“이게 뭡니까?”
“열어보십시오.”
봉투를 뒤집자 안에서는 온갖 서류와 사진들이 쏟아져 나왔다.
“꽤 다양한 일을 하셨더군요.”
봉투 안에는 조한수가 여태 저질렀던 죄들의 증거가 고스란히 들어있었다. 신호 위반이나 주차위반 같은 경범죄들부터 병억과 같이했던 뇌물수수, 진료기록 조작, 환자 유인 및 부당 청구와 같은 의료법 위반까지.
그것들을 확인한 조한수가 말을 하는 법을 잊은 것처럼 더듬는다.
“이, 이걸 어떻게.”
“진료 차트에 손을 댔던 것이 한두 번이 아니더군요. 그건 다 누굴 위한 것이었습니까?”
“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나는 잘…….”
도영은 주머니에서 또 다른 봉투를 꺼냈다.
“이건 또 뭡니까?”
“이곳에 오기 전까지 한주 수도 병원을 운영하셨죠.”
“!”
“일명 사무장 병원. 의료기관을 설립할 자격이 안 됨에도 불구하고 버젓이 병원을 운영하셨더군요.”
“이걸 어떻게…….”
“지금 그게 중요합니까? 이대로 가면 조한수 씨는 모든 걸 다 덮어쓰고 평생을 감옥에서 썩게 생겼는데.”
“그럴 리가 없어요!”
“수사기관에 자료 다 넘어갔습니다.”
“!”
순식간에 사색이 된 조한수는 앉아 있던 소파에서 내려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뭘 또 무릎까지 꿇습니까. 마음 약해지게.”
“저는 시키는 대로 한 것밖에 없습니다. 모든 건 조병억 원장이 사주한 겁니다!”
쉽게 뱉어지는 병억의 이름에 도영의 입에서 실소가 터져 나왔다.
애초부터 이들의 관계는 돈으로 쌓아 올려졌다. 닥쳐올 형벌 앞에서 지켜야 할 의리며 도의 따위는 없었다.
알고는 있었지만 고작 이따위 명분에 환자들이 이용되었다는 사실에 분노가 치밀어 올라 가까스로 참아내야 했다.
“제가 뭘 할까요? 뭐든 하겠습니다! 절 좀 봐주십시오.”
조한수는 두 손을 모아 싹싹 비볐다.
“뭐든 한다 하셨습니까?”
“예, 예!”
조한수의 고개가 필사적으로 위아래로 움직였다.
“뭐든 할게요! 제발, 용서해 주세요. 제가 뭘 하면 될까요?”
“할 일이야 많습니다.”
검지로 입술을 훑던 도영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흠칫 몸을 물리는 조한수를 보며 도영은 입술을 비틀었다.
“곧 다시 찾아뵙죠. 기다리고 계십시오.”
“예, 예, 교수님.”
조한수는 고장난 인형처럼 연신 고개를 주억거리기만 했다.
밖으로 나온 도영은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주도영입니다.”
-예, 교수님.
“더 크게 판을 좀 짜봅시다.”
-어떻게 말씀이십니까?
“조병억을 빼지도 박지도 못하게 잡아넣을 방법으로.”
도영의 바람대로 병억의 원대한 꿈이 이뤄지기 일보 직전, 병억은 구속되었다.
그 이후로 하루가 멀다 하고 병억과 한대 병원의 이름이 신문에 오르내렸다. 한대 병원은 발칵 뒤집혔다. 기자와 수사관들은 끊임없이 병원장실을 포함한 병원 곳곳을 들락날락했다.
그 과정에서 병억이 지금껏 한 여러 짓이 공개되었다.
죄목도 다양했다. 성매매 법 위반부터 제약 회사로부터의 리베이트, 정치인에게의 청탁 등.
심지어 사돈이 된 최규택에게도 그새 흘러 들어간 자금이 몇십억 단위가 됐다. 병억은 단순한 양 집안의 결혼을 위한 예물, 예단 교환이라고 변명했지만 지나치게 많은 액수라 경찰의 의심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관련 정치인들 또한 줄줄이 소환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한대 병원의 6층 병원장실.
조사는 막바지에 이르렀지만 혹시나 놓친 것이 없나 병억의 방을 조사하던 중이었다.
한 경찰이 구석진 곳에 끼워져 있던 얇은 파일을 발견했다.
“이건 또 뭐야? 뭘 숨겨놨어? 지가 양파야? 까도 까도 또 나오네.”
파일을 열자 프린트된 종이가 나타났다. 제일 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제83차 한대 외과 의국 입학시험.’
그 밑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온갖 의학 용어들이 난무하는 시험문제들이 줄줄 이어져 있었다. 각 문항의 아래에는 답으로 추정되는 것들이 자필로 적혀 있었다. 글씨는 병억의 필체였다.
“이게 뭐야? 외과 의국 입국 시험이 따로 있나 보네? 근데 그걸 내과 교수가 왜 풀어?”
잠시 고개를 갸웃한 경찰은 한 번 알아봐야겠다 생각하며 그 파일도 상자에 챙겨 넣었다.
그로부터 며칠 뒤, 응급실에서 환자를 본 경애는 다시 의국으로 가고 있었다. 늘 그랬듯 입에는 욕이 따라다닌다.
“XX, 누가 응급실 폭파 좀 안 해줘? 왜 온 동네 환자들 다 여기로 오는 거야?”
환자가 보기 싫어 죽을 맛이었다. 당장이라도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그럴 수는 없으니 날이 갈수록 욕만 늘어갔다.
“조금만 더 참자. 이 거지 같은 레지던트 생활만이라도 끝내자.”
유민이라는 동아줄이 떨어져 나가버렸다. 이제는 교수가 될 수 있을지도 잘 모르겠다.
아니, 자신의 능력을 봤을 때는 안 될 가능성이 더 크다. 그건 경애 스스로도 잘 알았다. 그러니 그동안 유민과 병억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애를 썼던 것이다.
‘이제 남은 건 한대 외과 출신 전문의라는 타이틀뿐이야. 그거라도 지켜야 해.’
거지 같은 날들이지만, 어쨌든 최선을 다해 붙어 있을 것이다. 이곳에 들어오기 위해 들인 돈이 얼만데 이제와서 포기할 수는 없다.
“XX, XX.”
욕으로 랩을 하며 응급실에서 이어지는 복도를 지나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때였다.
“이경애 씨?”
저를 부르는 말에 뒤를 돌아보니 사복을 입은 남자 둘이 서 있다. 날카로운 눈빛과 인상이 범상치 않았다. 길을 물어보는 환자나 보호자는 아님이 확실했다.
경애는 저도 모르게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누구…… 세요?”
“같이 좀 가셔야겠습니다.”
“어딜요?”
“당신을 업무방해 및 청탁금지법 위반 혐의로 체포합니다.”
경애의 눈이 사방으로 요동쳤다.
“무, 무슨 소리예요?”
“병원장 조병억에게 외과 입국 시험 유출을 대가로 1억 원에 달하는 금품을 제공하지 않았습니까?”
“!”
경찰은 경애의 팔을 붙잡았다.
“당신은 변호사를 선임할 권리가 있으며 변명할 기회가 있고…….”
“아니에요, 전 그러지 않았어요. 뭔가 잘못 아신 거예요!”
경애의 반응에 경찰이 헛웃음을 짓는다.
“어째 여기 병원 사람들은 하나같이 발뺌을 하지?”
“증거 있어요? 증거 있냐고요?”
“원장이 다 이야기했습니다. 당신이 그에게 건넸던 현찰과 금도 전부 확보한 상태입니다.”
“내가 줬다는 증거가 있어요?”
“어떻게, 금덩어리 지문 감식이라도 할까요? 순순히 따라오는 게 더 이상의 망신은 없을 거라 생각되는데.”
어느새 몰린 인파가 그들을 에워싸고 있었다. 경애는 더는 저항하지 못하고 그들을 따라나섰다.
***
서울 남부 구치소.
도주와 증거인멸의 우려로 구속수사를 받게 된 병억이 접견실에 나타났다. 그 사이 마음고생을 꽤 한 탓에 원형 탈모가 생겨 머리털이 듬성듬성 빠져 있고 얼굴도 부어 있다.
‘변호사를 핑계로 여기서 좀 쉬다 가야겠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변호사가 왔다길래 나왔더니 접견실에 나타난 사람은 도영과 도영의 변호사다.
“너, 여긴 어떻게!”
파르르 떠는 병억을 본 도영은 비웃듯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안은 좀 지내실 만한가 봅니다. 얼굴이 좋습니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재밌는 일을 많이 하셨더군요. 당신이 운영하는 병원만으로도 만족이 안 됐습니까?”
“무슨 소리야?”
얼빠진 표정으로 되묻는 병억을 보고 도영은 코웃음을 쳤다.
“경영학과를 나온 조한수가 병원을 전전한 이유가 있더군.”
“무, 무슨 말인지.”
“자격이 없는 자가 병원을 설립해 부당 진료비를 챙기는 걸 사무장 병원이라고 하는 것. 당신도 알 텐데.”
“오해야! 조한수는 일개 원무과 과장일 뿐이었어!”
“거기다가 당신과 조한수가 진료기록을 수시로 조작해 진료비를 허위 청구한 사실. 환자 유인을 위해 교통비나 차량을 제공한 사실도 있던데.”
“난 그런 적이 없다니까?”
도영은 손으로 괴고 있는 턱을 더 비뚜름하게 했다.
“그럼…… 조한수 혼자 했다?”
“그, 그건 나도 모르지…….”
“좋습니다. 그럼 제가 알려드리지요.”
한결 매서워진 눈매에 병억이 침을 꿀꺽 삼켰다.
“조한수는. 여러 병원을 운영하며 쌓은 경험으로 17년 전부터는 한주 수도 병원을 운영했습니다. 그 큰 병원을 법인화하지 않은 이유가 있나 했더니, 역시나 거기 또한 사무장 병원이었습니다.”
“그, 그래? 나는 몰랐어. 전혀 몰랐어.”
“그런데 말입니다.”
도영은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의 입에서 또 어떤 말이 나올지 이젠 두렵기까지 해, 병억이 지레 겁을 먹고 소리를 쳤다.
“왜? 뭐?”
“당신은 현역에서 물러난 당신 동창들에게 매달 일정 금액을 왜 이체했을까?”
“!”
“의사 면허를 빌려주는 것에 대한 대가를 제공한 것은 아니고?”
“모함이야!”
“이미 그 의사들도 조사 중인데.”
“그, 그럴 리가 없는데?”
“뭐, 자세한 건 당신 변호사에게 듣고.”
“모, 모든 건 조한수가 했어. 난 억울하단 말이야!”
여전히 조한수에게 모든 죄를 덮어씌우며 무고를 주장하는 병억이다. 도영은 당장이라도 병억을 바닥에 내리꽂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자백 대신 병억은 도영의 옷깃을 잡고 매달렸다.
“너 나한테 왜 그래? 나한테 원수라도 졌어? 내게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병억은 뭔가 떠오른 듯 아, 소리를 쳤다.
“네게 건 소송 때문에 그래? 내가 그랬던 이유는 네 아버지 때문이었어. 네 아버지가 날 너무 무시하니까……!”
“헛소리.”
도영은 병억의 손을 매섭게 쳐냈다.
“잘못했어. 내가 정말 잘못했어.”
“소송은 취하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디 끝까지 한번 가보십시오. 그리고.”
도영이 더는 참기 힘든 듯 주먹을 움켜쥐었다. 금방이라도 제게 달려들어 한 대 칠 것 같은 기세에 병억의 어깨가 찔끔 떨렸다.
“내가 듣고 싶던 사과는 그게 아닌데.”
“그, 그럼?”
“의사에게 가장 중요한 게 뭐라고 생각해?”
“…….”
“물론 당신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돈이라고 생각하겠지.”
자신의 머릿속을 훤히 들킨 병억이 흠칫한다. 코웃음을 한번 친 도영은 서늘하게 말을 이었다.
“영리를 좇으면 안 되는 곳이 병원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그러질 못했습니다. 덕분에 발생한 의료의 질 저하, 그로 인한 피해는 고스란히 환자의 몫이었고.”
“갑자기 무, 무슨 소리야.”
“어떤 의사는 자신이 준비하지도 않은 수술에 책임감을 느끼고 십 년이 넘도록 사죄의 마음으로 지내왔습니다.”
“누가?”
“그 무리한 수술이 병원의 홍보에 사용되기 위한 목적이었다는 것도 모르고. 수술을 준비한 사람이 의사 면허조차 없는 사람이었는지도 모르고.”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그의 잘못이라면 위에서 시키는 대로 수술실에 들어가 준비된 대로 수술을 했을 뿐이었는데.”
눈앞에 완전히 뒤집힌 삶을 살고 있는 정섭의 얼굴이 지나갔다. 그의 딸,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혜수의 얼굴도 연이어 나타났다.
“XX!”
더는 견딜 수 없었던 도영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책상을 힘껏 내리쳤다. 쩌렁쩌렁 울린 굉음에 병억의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도영은 연거푸 심호흡을 했다. 그렇지 않으면 병억에게 손을 대고야 말 것 같았다.
꽉 다문 잇새로 잔뜩 눌린 음성이 터져 나왔다.
“당신은. 의사가 될 자격이 없어. 할 수만 있다면. 나와 똑같이 만들어주고 싶지만.”
“뭐?”
“그럴 수 없는 게 한이군. 대신 이 안에서 모든 죗값을 치르기 바라.”
도영은 가까스로 발을 움직여 접견실을 나갔다. 쾅, 벽을 부술듯 울리는 문이 닫히는 소리에 병억의 팔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홀로 남은 변호사는 병억에게 도영에게 있었던 일을 설명해 주었다.
조한수가 운영하던 한주 수도 병원에서 어떤 일이 있었고, 그 일이 어떻게 도영과 연결이 되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