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 몰락
(102/110)
102.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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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몰락
2023.01.21.
을씨년스러운 가을날, 유민의 결혼식이 열렸다.
덕분에 혜수도 도영의 차를 같이 타고 오랜만에 서울로 가고 있었다.
얼마 전, 도영에게도, 혜수에게도 유민의 청첩장이 배달되었다. 무려 유민의 자필로 ‘귀하의 참석을 꼭 바랍니다.’라는 문구가 쓰인 청첩장이었다.
혜수는 가지 않으려 했다. 유민의 결혼식을 보고 싶은 마음도 없었고 축하해 주고 싶은 마음은 더더욱 없었다.
그리고 유민의 결혼식이라면 분명 엄청난 사람들이 몰려올 텐데 도영과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을 보여도 될까 걱정도 됐다.
하지만 도영이 자꾸 가자 한다.
“저는 왜 가자고 하시는 거예요?”
“보여줄 게 있어. 같이 꼭 가줬으면 좋겠어.”
그러면서 새 원피스와 구두까지 보내주는 게 아닌가.
사이즈는 어떻게 알았는지 귀신같이 딱 맞았고 디자인 또한 완벽한 제 취향이었다. 몸에 감기는 천의 느낌 또한 예사롭지 않다.
‘그래. 오랜만에 서울 구경이나 하자. 난 호텔 식당에 요리를 먹으러 가는 거야. 최대한 교수님이랑 떨어져 있으면 되겠지.’
그렇게 혜수는 예쁘게 차려입고 그를 따라나섰다.
둘은 결혼식이 열리는 호텔에 도착했다.
비공개로 열린 결혼식이었지만 입구부터 북적거리고 있었다. 혼주들이 각 분야의 유명인인 것답게 초청된 사람들이 워낙 많은 탓이다.
연예인들도 심심찮게 보인다. 각 집안에서 부른 기자들도 곳곳에 커다란 카메라를 들고 포진해 있었다.
입구부터 결혼식장 안까지 아름다운 생화 장식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사람들이 떠드는 말에 의하면 억 소리가 났다 한다.
“들어갈까.”
“네.”
그렇게 도영과 뚝 떨어져 들어가려던 참이었다. 커다란 손이 혜수의 손을 감싸 끌어당긴다.
“이렇게 가지.”
“하지만.”
유민의 결혼식이니 서울 한대 병원 사람들이 많이 왔을 거다. 또 도영은 꽤나 오랫동안 신문에 등장한 사람이다.
분명 누군가가 그를 알아볼 테고, 그럼 둘의 사이도 알려질 텐데.
얼마 전까지 약혼을 유지하던 도영에게 이렇게 빨리 새로운 여자가 생겼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도영에게 더한 비난의 화살이 날아올지도 모르는데.
하지만 머뭇대는 혜수와는 다르게 도영은 더욱 손에 힘을 주었다.
그동안 혜수와의 만남을 숨기는 문제로 혜수가 얼마나 속앓이를 했었는지 잘 안다.
“더는 숨기고 싶지 않아. 마음 같아서는 기사라도 내고 싶은데.”
“헉, 그건 절대 안 돼요.”
방방 뛰는 혜수를 미소 지으며 쳐다보던 도영이 혜수의 손을 다시 끌어당겼다.
“그럼 갈까.”
“진짜 괜찮아요? 사람들이 다 알게 될 텐데.”
“바라던 바야.”
그렇게 혜수는 도영과 나란히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혜수와 도영이 나타나자, 호텔 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그들을 쳐다보았다. 반응은 두 부류였다.
우선 도영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의 외모를 보고 소곤댔다.
“개 잘생겼다.”
“저 사람도 연예인? 패션쇼에서 본 것 같아.”
“오늘 온 연예인 중 제일 낫네.”
객관적으로도, 주관적으로도 도영이 제일이었다.
조각 같은 얼굴에 좋은 비율로 요즘 인기를 끌고 있다는 남자 연예인도 도영의 옆을 스치는 순간 주눅이 드는 게 눈에 훤히 보인다.
도영을 아는 사람들은, 특히 병원 사람들은 또 다르게 소곤거린다.
“저 여자 외과 레지던트 아니야? 신혜수 선생님이던가? 그런데 주 교수님이랑 사귀어?”
“이전에 둘이 그렇다는 소문 돌더니, 진짜 사귀는 거야?”
“소문이 씨가 됐네. 신기하다.”
“신 선생님 대단한데? 주 교수님을 누가 데려가나 했더니.”
“은근히 둘이 잘 어울린다.”
혜수는 도영과 맞닿은 손에 땀이 맺히는 걸 느꼈다.
분명 결혼식의 주인공은 신부 유민과 혼주들인데 어째 우리들에게 더 시선이 모이느냐 말이다.
오늘 여기서 결혼식이 있는 줄 모르는 사람들은 도영과 혜수가 이 인파의 주인공인 줄 알 정도였다.
난처한 표정으로 얼굴을 자꾸 숙이는 혜수를 본 도영은 혜수의 손을 놓고 어깨를 끌어당겼다.
혜수의 어깨가 도영의 가슴에 포개지자 꺄악, 거리는 환호성이 곳곳에서 울렸다. 도영은 혜수를 품에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그 손짓 하나하나에서 무척 소중한 것을 대한다는 것이 느껴져, 부러워하는 사람들의 시선이 끊이질 않았다.
“잠시 지나가겠습니다.”
도영은 커다란 손으로 혜수의 어깨를 굳게 감싼 채 사람들을 헤치며 걸어갔다. 마치 귀족 영애를 보살피는 호위 기사 같았다.
혜수와 도영이 식장 안으로 들어가고 나서야 홀은 조금 잠잠해졌다. 그래도 사람들은 일행들끼리 조금 전 본 장면에 대해 넋이 나간 표정으로 의견을 나눴다.
“멋지다.”
“저 여자는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봐. 저 여자의 매력이 대체 뭘까?”
곧, 홀에 안내방송이 울려 퍼졌다.
“신랑 최민우 군과 신부 조유민 양의 결혼식이 곧 시작됩니다. 하객 여러분들은 모두 자리에 앉아주십시오. 다시 한번 알려드립니다. 신랑 최민우 군과…….”
결혼식이 시작되었다.
사극에나 나올 법한 우아한 음악이 울리더니 최민우의 엄마와 머리를 한껏 틀어 올려 반짝이는 보석으로 고정한 유민의 엄마 경실이 등장했다.
그들은 붉은 카펫을 밟고 나와 단상 위의 촛불에 불을 붙였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딸을 그토록 바라던 정치가의 집안에 시집을 보내게 된 경사스러운 날임에도 경실의 표정은 그다지 밝지는 않았다.
다음 순서는 최민우의 입장이었다. 민우의 등장에 신부 측 하객 사이에서 술렁임이 인다.
“저 사람이 신랑이야? 띠동갑은 돼 보이는데?”
“외모만 봤을 때는 여자가 너무 아깝다.”
“남자는 재혼이래.”
“그런데도 결혼을 하다니, 천년의 사랑인가.”
“둘이 벌써 혼인 신고도 했대.”
“그럼 지금 같이 사는 거야?”
“그건 아니래. 결혼식 하고 합칠 거래. 집이 아직 덜 꾸며졌다나.”
“뭐, 이 정도 집안이면 웬만한 집에서 살지는 않겠지.”
쑥덕임 속에 신랑 최민우의 입장까지 끝났다.
“오늘의 주인공, 신부 입장이 있겠습니다. 모두 뒤를 봐주십시오.”
붉은 카펫의 끝에 스포트라이트가 비쳤다. 감미로운 선율과 함께 흰 드레스를 입은 유민과 그녀의 손을 잡은 병억이 나타났다.
우아하면서도 기품 있는 유민의 모습에 이번엔 신랑 측 하객 사이에서 술렁임이 인다.
“신부 너무 이쁘다.”
“신랑보다 키가 더 커.”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을 반주 삼아 유민과 병억은 천천히 카펫을 밟아나갔다.
마침내 꿈을 이루게 된 병억의 입꼬리는 유민의 티아라만큼이나 높이 높이 올라가 있었다.
카펫의 끝에서 병억은 민우의 손에 유민의 손을 건네주었다. 민우는 히죽 웃으며 유민의 손을 잡아챘고 민우와 유민은 손을 맞잡은 채 단상 위로 올라갔다.
서로에게 맞절을 한 둘은 몸을 틀어 하객을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신랑 신부가 하객 여러분께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사회자의 소개에 맞춰 인사를 한 뒤 다시 주례를 향해 몸을 돌리려던 순간이었다.
“아빠아!”
하객 사이에서 퉁퉁한 어린애 하나가 튀어나왔다. 정면을 향했던 하객들의 시선은 아이에게로 휙 돌아갔다.
“아빠아, 나도 올라갈래!”
다섯 살쯤이나 됐을까. 단 걸 좋아하는지 이가 군데군데 까만 아이였다.
아이는 저를 잡으려는 직원의 손을 요리조리 피한 뒤 끝내 민우에게 다가갔다.
“아빠!”
민우의 앞에서 크게 외친 아이는 민우에게 폭 안겼다. 모든 건 순식간에 이뤄졌다.
“야, 야…… 너 이러면 안 돼.”
당황한 민우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자 신랑 측 혼주석에 앉아 있던 최규택이 벌떡 일어나 호통을 친다.
“누가 쟬 여기 데려왔어?”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는 규택을 보고 손을 흔든 뒤 혀 짧은 목소리로 말했다.
“할아버지.”
“너 이리 내려오지 못해?”
“아빠랑 있을 건데요. 근데 아빠 오늘 왜 이렇게 멋있게 입었어?”
식장은 경악에 빠졌다.
“이게 무슨 일이야?”
“신랑 보고 아빠라는데?”
“재혼이라고는 들었는데, 애도 있었어? 그건 몰랐네.”
경실은 뒤로 넘어가기 일보 직전이었다.
“여, 여보 이게 무슨 일이에요?”
“잠깐만 있어 봐.”
병억은 카펫을 순식간에 건너 반대편에 있는 규택에게 갔다.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그러나, 돌아오는 반응은 오히려 적반하장이다.
“결혼을 한 과거가 있으니 당연히 아이도 있죠. 모르셨소?”
“시장님이 말을 해줘야 알지요! 우리가 그걸 어떻게 압니까?”
“아, 그래요? 그럼 지금 알려드리리다. 보시다시피 손자가 한 명 있습니다. 아주 귀여운 아이지요. 인사해라, 이제 네 외할아버지 되실 분이다.”
아이가 쪼르르 다가와 병억에게 배꼽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할아버지.”
병억은 목청이 터져라 소리를 쳤다.
“이건 사기입니다!”
“지금 사기라고 하셨나?”
“사, 사기 결혼…….”
“다 필요 없으니 아이들 혼인 신고부터 하게 하자, 모든 조건은 다 우리에게 맞추겠다 하신 분이 누구셨소?”
“하지만 이건 말도 안 되지 않습니까!”
“말이 안 되긴 뭐가 안 돼. 결혼을 지금 무르자고 하는 거요?”
“아니, 그, 그건 이렇게 급작스럽게 결정할 게 아니고…….”
이렇게 된 마당에도 결혼을 없던 일로 하자고 말하지 못하는 병억을 보며 유민은 코웃음을 흘렸다.
“그럼 빨리 상황 정리하고 다시 시작하던가.”
“…….”
한편의 막장 드라마 같은 상황에 하객들의 웅성거림은 더욱 커져 갔다.
놀란 건 혜수도 마찬가지였다. 유민과 민우 사이에 사랑이 없을 거란 예상은 했었다.
혜수가 보기에 유민은 정말 도영에게 진심처럼 보였었으니 이렇게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하는 결혼은 정략결혼이라 생각했다.
도영을 보니 놀랍긴 마찬가지인가 보다.
“이거 내 예상보다 재밌게 돌아가는데.”
제일 앞에 서서 모든 이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유민은 이런 소란에도 의연하게 서 있었다. 하지만 표정은 우는 것도, 웃는 것도 아니었다.
사회자는 가까스로 다시 마이크를 잡고 외쳤다.
“결혼식이 재개될 예정입니다. 모두 자리에 착석하여 주십시오.”
몇 번의 외침 끝에 상황은 일단락되었고 결혼식은 재개되었다.
어찌어찌 주례의 축사와 축가까지 끝나고 신랑 신부 행진만을 남겨놓고 있던 때였다.
닫혀 있던 예식홀의 문이 벌컥 열리며 한 사람이 뛰어 들어온다. 그는 그대로 카펫을 밟고 앞으로 뛰어갔다.
난데없는 남자의 등장에 사람들의 시선이 또 한데 모였다.
“저 사람은 누구야?”
“또 신랑 측 사람인 건가?”
“이번엔 누군데? 신랑의 사돈의 팔촌?”
모두의 예측은 틀렸다. 남자는 이번에 병억에게 달려갔다. 그를 본 병억이 소스라치게 놀란다.
“무슨 일이야? 여기 네가 왜 있어?”
“저 좀 살려주십시오.”
“뭐? 왜?”
조한수는 병억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
“다 들켰습니다! 진료 차트 삭제한 거요!”
“뭐? 어쩌다가?”
병억의 손님들 중 일부는 그가 누구인지 알아챘다.
“저 사람 이번에 새로 온 의무기록실장 아니야?”
“맞네. 조한수 실장.”
“저기서 뭐 하는 거야.”
“오늘 결혼식은 완전히 개판이네.”
유민의 입술은 가까스로 일직선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혈관의 운동성마저는 조절하지 못하나 보다. 붉은색을 지나 이제는 하얗게 질려가는 얼굴색을 보면.
하지만, 결혼식의 불청객은 그가 끝이 아니었다.
열린 문 사이로 공무원증을 목에 맨 사람들이 우르르 홀 안으로 들어온다. 그들은 그대로 병억에게 다가가 병억과 의무기록실장 조한수의 양팔을 얽어맸다.
병억은 팔을 뿌리치려 노력했지만 제 팔을 옭아맨 힘은 끄떡도 하지 않는다.
“이게 무슨 짓이오!”
“한대 병원장 조병억. 의무기록실장 조한수. 당신들을 의료법 위반 및 사문서 위조, 사기 혐의로 체포합니다. 변호인을 선임할 권리가 있으며 변명의 기회가 있고 체포구속적부심을 법원에 청구할 권리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