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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인턴 주도영 (101/110)


101. 인턴 주도영
2023.01.18.



 
도영은 말 그대로 병동을 날아다녔다.

순식간에 혜수가 담당하는 환자 서른여 명의 상태를 다 파악한 뒤에는 알맞은 오더를 냈다. 그것도 혜수가 고작 세 명의 환자 면담을 하고 오는 짧은 시간 만에.

마지막 환자의 면담 전, 잠깐 스테이션에 들른 혜수에게 도영은 환자들에 대해 완벽히 정리된 종이를 내밀었다.


“우와…… 멋져요, 교수님. 진심이에요.”

혜수의 반짝이는 눈에 도영이 눈을 접으며 웃는다. 뿌듯함이 느껴지는 환한 미소였다.


“저 마지막 환자 면담만 하고 올게요. 다 하면 영화 보러 가요.”

“그래.”

그렇게 데이트는 순탄하게 흘러가는 줄 알았다.

하지만, 모든 일을 끝낸 둘이 엘리베이터에 탔을 때였다.


“40분 뒤에 하는 이 영화가 마지막이네요. 이거 볼까요? 로맨틱 코미디 괜찮아요?”

“좋아.”

“그럼 이걸로 예매할게요. 지금 출발하면 딱 도착하겠네요.”

예매 버튼을 누르려 하자마자 전화벨이 울렸다. 발신지는 중환자실.

퇴근 직전 불길하기 짝이 없는 소리를 내는 휴대폰이 밉다. 휴대폰을 한동안 노려보던 혜수는 한숨을 하아, 내쉬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예에에, 외과 1년 차 신혜수 입니다아아.”

축축 늘어지는 혜수의 목소리를 듣고 도영이 옆에서 피식 웃는다.


-선생님, 여기 SICU(외과중환자실) 인데요.

“네. 그런데 저 오늘 당직 아닌데에요. 2년 차 쌤한테 전화하셔야 하는데에…….”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침울 그 자체였다.


-2년 차 쌤이 지금 수술 중이시라고 샘한테 연락하시래요. 1번 환자 C 라인(중심정맥관) 좀 잡아주세요.

“제가요?”

-어차피 지금 병원 아니면 숙소이실 거라고 부탁 좀 한 대요.

그래, 그동안 숙소와 병원에만 있기는 했다. 그래서 가끔 부르면 가서 일을 도와줬다. 그런데 오늘 또 부르다니!

혜수는 작게 항변했다.


“그런데 저 지금 약속이 있어서 나가던 길이라서요.”

-어머, 그러세요? 어떡해. 이 사람 지금 혈압이 너무 낮은데. 수술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두 시간은 더 걸린댔는데.

간호사는 별 의미 없이 한 푸념이었다. 하지만 혜수를 움직이기에는 충분한 말이었다.


‘환자 상태가 안 좋다니. 그런 환자를 두고 어떻게 영화를 보러 가?’

결국 혜수는 가겠노라 말을 했다.


“1번 환자라고 하셨죠? 제가 지금 갈게요.”

-정말요? 언제 오세요?

“지금 엘리베이터 탔어요. 바로 갑니다.”

-감사해요, 선생님. 글러브 5번이죠? 준비해둘게요.

전화를 끊은 혜수는 도영을 쳐다봤다. 양 눈썹을 축 늘어뜨리고 울상을 짓는 모습에 도영이 또 픽 웃는다.


“저 중환자실에 가야 해요. 영화는 어쩌죠?”

“괜찮아. 다음에 보면 되지.”

“금방 하고 올게요. 차에 가 계실래요?”

“그러지.”

중환자실이 있는 층에 엘리베이터가 서고, 혜수는 내리려 했다.

그때, 문에 반쯤 발이 걸쳐져 있는 혜수를 도영이 잡아당겼다.

당황한 표정의 혜수가 도영을 쳐다보자 도영은 순식간에 마스크를 내려 혜수의 입술에 촉, 제 입술을 맞댔다 뗀다. 그러더니 씩 웃는다.


“충전.”

혜수는 급히 도영을 밀어냈다.


“교수님! 누가 보면 어떡해요?”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으니 도영이 팔을 잡고 당긴다. 혜수는 아예 다시 엘리베이터 안으로 빨려 들어갔고 엘리베이터의 문은 쿵 닫혔다.

혜수를 품에 안은 도영이 중얼거린다.


“이걸 어떻게 보내.”

“아이, 정말.”

“중환자실에 같이 갈까? 옆에서 내가 어시스트 해주지.”

“안 돼요. 옆에서 보고 계시면 더 못한다고요.”

“잘하잖아.”

“안 돼요. 손 떨린단 말이에요.”

“그 손도 잡아주면 되지.”

“아, 진짜! 그러다 들킨다고요.”

 

 
그때,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린다.


“!”

혜수는 잽싸게 도영에게서 떨어졌다. 도영도 마스크를 올려 썼다.

엘리베이터를 누른 사람은 외과중환자실의 간호사였다. 조금 전 혜수와 통화를 했던 간호사와 같은 구역에서 일하는 간호사다.

혜수를 알아본 간호사가 인사한다.


“어머, 선생님! 정말 금방 오셨네요. 지금 준비 다 됐어요. 하고 나오는 길이에요.”

“네. 가요, 갑니다.”

혜수가 밖으로 사라지고, 버튼을 누르려던 간호사는 멀뚱히 선 도영을 올려다봤다. 마스크를 쓰고 있음에도 오똑한 코와 날렵한 턱선이 그대로 느껴졌다.

간호사는 고개를 갸웃했다.

눈매가 서늘한 이 남자는 처음 보는 사람인데. 수술복을 입고 있는 걸 보니 인턴인가? 아니면 레지던트?


“누구시더라?”

“……외과 인턴입니다.”

“아, 또 바뀌었나 보네요. 처음 뵙는 걸 보니 수술실 근무세요?”

도영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예.”

“지금 어디 가시던 길이세요?”

“숙소에 갑니다.”

그러자 간호사가 박수를 짝 친다.


“잘 됐다!”

환호하는 간호사를 보며 도영은 알 수 없는 긴장감을 느꼈다. 반대로 신이 난 간호사는 주절주절 말하기 시작했다. 바로 중환자실에 쌓인 일들을.


“지금 SICU에 샘플 할 게 좀 많거든요? 심전도도 찍어야 하고 폴리(foley catheter:도뇨관거치)에 엘튜브(L-tube:비위관거치)에…….”

긴 업무 내용을 읊은 뒤에는 도영을 휙 쳐다본다.


“인턴 샘, 지금 해주실 수 있어요?”

“저 말씀이십니까?”

“그럼 누가 해요? 인턴 샘이 해야죠.”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엘리베이터의 열림 버튼을 누르고 입을 벌린 엘리베이터 사이로 도영을 끌고 나갔다.


“지금 안 좋은 환자가 좀 많아가지고요. 오더가 한 번에 많이 내려왔어요. 그런데 병동 인턴 샘이 오려면 한참 걸린대요. 대신 좀 해주세요, 네?”

“아니, 그…….”

“데스크에 가시면 스티커 쌓여 있을 거예요. 그거 하시면 돼요. 좀 부탁드릴게요.”

결국 도영도 외과 중환자실로 끌려갔다.

외과 중환자실.

혜수는 1번 환자의 옆에 붙어 서서 준비된 대로 중심정맥관을 넣는 중이었다.

그런데, 어디서 많이 보던 희한한 차림새의 남자가 들어오는 게 아닌가. 순간 놀라서 손을 헛짚을 뻔했다.


‘교수님이 여긴 왜?’

더 놀라운 것은, 도영이 스테이션으로 가더니 쌓인 일들을 하나씩 처리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허억.’

재빨리 손을 놀려 관을 다 넣은 혜수는 급히 도영에게로 갔다. 도영은 정신이 온전치 못한 환자에게 달린 소변줄을 소독하고 있었다.


“아, 나 좀 그만 괴롭혀!”

“어르신, 금방 끝내드릴게요.”

“뭐여, 이놈아! 날 지금 끝내버리겠다는 거여?”

“그런 뜻이 아닙니다만.”

능숙함을 떠나서 그 모습 자체가 매우 조화롭지 못했다. 소변줄 소독은 아마 수년 전 인턴 생활을 한 이후로 처음 하는 것이지 않을까.

때마침 소독을 다 끝낸 도영도 굽혔던 허리를 일으켰다.


“다 했나?”

혜수는 웃음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씨근대는 할아버지를 뒤로하고 걸어 나온 도영은 손을 들어 스테이션을 가리켰다. 인턴이 해야 할 일거리들이 쌓여 있는 곳이다.


“저걸 다 끝내야겠는데. 급하대. 지금 병동 인턴이 많이 바쁘다는군.”

“그럼 저도 같이할게요. 빨리 해치워버려요.”

“내가 아니었어도 결국 네가 다 하지 않았을까.”

충분히 그럴법하다.

중심정맥관을 다 넣은 혜수에게 간호사들은 쌓인 일들이 너무 많다며 또 부탁했을 것이고, 혜수는 나섰을 것이다. 그 일들을 그냥 내버려 둘 자신이 아님을 혜수 스스로도 잘 안다.

그렇게 둘은 중환자실을 누비기 시작했다.
 

몇 시간 뒤. 강천 한대 병원의 옥상.

몰아치는 일들을 끝낸 외과 1년 차와 임시 인턴은 옥상의 난간에 기대서서 야경을 보고 있었다.

혜수는 자판기에서 빼 온 캔 음료를 도영에게 내밀었다.


“인턴 잡일 힘들죠.”

도영이 어찌나 바쁘게 돌아다녔는지 머리카락 곳곳이 삐져나와 있고 목덜미에는 땀도 흘러내려 있다.


“별로.”

말은 그렇게 하는데 음료수를 따서 한 번에 다 마신다.


“오히려 좋았어.”

도영은 정말로 오늘 밤이 마음에 들었다.

서울에서처럼 레지던트에게 명령을 내리고 검수하는 교수의 입장이 아니라 인턴이 되어 레지던트를 어시스트하는 역할을 했다.

혜수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도 좋았고 중환자실을 오가며 혜수와 새끼손가락을 슬쩍슬쩍 스치는 것도 좋았다.


“매주 내려올까?”

“예에? 그러다 들키면요?”

“인턴이라고 하지.”

“알아볼 거예요. 주말마다 나타나는 인턴이 얼마나 이상하겠어요.”

“하루로 끝내기에는 너무 아쉬운데.”

“꼬리가 길면 밟힌다구요.”

“다른 방법을 찾아보지.”

“안 돼요!”

어떻게 해서든 같이 일을 하고 싶다는 의지가 보이던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변호사에게서 온 전화였다.

지금껏 도영에게 법적인 일이 있으면 모든 일을 맡아준 믿을 만한, 유능한 사람이다. 물론 도영이 사사로이 부탁하는 일들을 처리해 주기도 했다.

늦은 금요일 밤에 온 전화로 혜수와의 시간을 방해받았다는 생각에 언짢았지만 이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이 시간에 온 거면 뭔가 급한 게 있다는 것이다.


“주도영입니다.”

-교수님, 새로 온 의무기록실장, 조한수에 대한 조사 끝났습니다. 그런데 특이한 게 있어 연락드렸습니다.

“건질 것이 있습니까?”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겠지만 조병억 원장과 먼 친척이더군요. 육촌 관계입니다.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도영에게서 실소가 터져 나왔다.


“전 우연이 아니라 생각됩니다만.”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신나게 맞장구를 친 변호사는 말을 이었다.


-조한수, 43세, 전공은 경영학입니다. 근무지는 거의 병원이고 대학 졸업 후엔 작은 병원의 원무과 위주로 근무를 하다가 경력이 쌓인 이후에는 큰 병원으로 옮겨 다녔습니다.

“병원에서 뭘 했습니까?”

-대부분 심사실이나 경영지원실에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특이한 게 여기 있는데요.

“네, 뭡니까.”

-17년 전 한주 수도병원으로 갔습니다.

“잠시만, 방금 뭐라고 했습니까?”

-한주 수도 병원에 갔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사람이 한주 수도 병원에서 일을 했습니까?”

-예. 그곳에서 심사과 과장으로 있었습니다. 이번에 한대로 옮기기 전까지 17년 동안 그곳에 있었습니다.

옆에서 가만히 통화 내용을 듣던 혜수의 눈도 커진다. 한주 수도 병원이 여기서 튀어나올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계속 말씀하세요.”

-그런데 심사와 관련된 일뿐만 아니라 병원의 홍보나 재정에도 관여를 했더군요. 일명 브로커라고 하죠. 유명인의 수술을 알선한 뒤 그 사실을 병원의 홍보에 이용하는 사람들요.

“……흥미롭군요.”

-이쪽으로 좀 더 파볼까요?

잠깐 생각을 하던 도영은 긍정의 대답을 했다.


“그럽시다. 특히 제 사고가 일어났던 해, 응급구조대와 조한수 사이에 어떤 연결이 있는지 보면 좋겠군요.”

-알겠습니다. 바빠지겠네요.

변호사는 피로가 섞인 웃음을 지어 보인 뒤에 전화를 끊었다.

휴대폰을 집어넣은 도영은 서늘하게 웃었다.


“이거 생각보다 일이 재밌게 돌아가는데. 조만간 아버님을 뵈러 갈 수 있겠어.”

“우리 아빠요? ……하지만.”

혜수도 언젠가는 정섭에게 도영을 소개해 줄 생각이었다. 너무나도 자랑스럽고 소중한 남자친구를 당당히 보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다.

하지만 당장은 자신이 없었다.

치명적인 사고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만나는 일이다. 도영의 인생을 바꿀 만큼 충격이 컸고 지금껏 영향을 주고 있는 일이다. 더더욱 시간을 갖고 천천히 접근하려 했다.

그런데 이렇게 빨리?

하지만 도영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난 가능한 한 빨리 네 부모님께 정식으로 허락을 받고 교제를 할 생각이야.”

그리고 그 바탕에는 최대한 많은 사람에게 혜수를 내 여자다, 알리고 싶다는 마음도 깔려 있었다.

다시는 어디로 날아가지 못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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