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다시, 시작
(10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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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다시, 시작
2023.01.14.
끈질긴, 어찌 보면 집착마저 느껴지는 긴 키스였다.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작은 공간, 도영과 혜수가 뱉어내는 더운 숨만이 그곳을 가득 채웠다.
도영이 이끄는 대로 정신없이 따라가다 보니 야릇한 감각이 혜수의 온몸을 지배한다.
그러던 중 덜컥 걱정이 들었다.
‘지금 이거 진도 나가는 건가?’
보통 오랜만에 재회한 연인들은 그러기는 하던데. 그게 싫은 건 아니다. 하지만.
‘나 안 씻었는데?’
수술을 하고 제대로 씻지 못한 지 며칠째인가.
수술 후 팔에는 계속 수액이 연결되어 있던 데다가 상처에 물이 들어가면 안 돼서 샤워장 근처에도 못 갔다.
오늘 아침 도영이 오기 전 머리를 감고 양치를 한 게 전부다. 더 씻고 싶었지만 씻을 수가 없었다.
‘냄새나면 어쩌지?’
도영에게서 느껴지는 열기가 점점 격렬해지는 것과는 다르게 속으로는 노심초사하던 중.
도영이 여태 붙어 있던 입술을 떼고 혜수를 바라본다. 그의 짙은 눈은 혜수만을 담고 있었으며, 혼탁했다.
금방이라도 도영의 입술이 더 아래로 내려갈 것 같다.
‘어떡해.’
뜨거운 시선이 한참 맞물리고, 드디어 도영의 얼굴이 아래로 숙여진다. 목적지로 예상되는 곳은 혜수의 목덜미.
‘안 돼.’
혜수는 저도 모르게 외쳤다.
“교, 교수님, 잠시만요. 저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어요.”
도영을 밀어내려 했지만 어림도 없다. 그 육중한 몸을 밀어내기엔 힘이 모자랐다. 수술을 한 자리 때문에 힘을 제대로 줄 수 없으니 더욱 그랬다.
결국 도영의 얼굴은 그대로 아래로 향했고 혜수의 목덜미에 안착했다.
혜수는 냄새가 나지 않기를 바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읏.’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혜수의 위에 엎어져 있는 도영이 가만히 있는다. 더는 아무런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았다.
“교수님?”
돌아오는 답이 없다. 대신 도영이 가진 커다란 몸의 무게가 점점 버거워졌다.
“교수님?”
“…….”
“무거워요.”
“…….”
어쩔 수 없이 몸을 옆으로 비틀며 겨우 그의 밑에서 탈출했다. 한참이나 끙끙대야 했다.
그리고 도영을 보니, 이럴 수가. 그는 곤히 잠들어 있었다.
“……주무시는 거예요?”
대답 대신 고른 숨소리만 들려온다. 볼을 검지로 쿡 찔러도 약간 움찔하더니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든다.
헛웃음이 나왔다. 대체 뭘 기대했던 거야.
혜수는 세상모르고 잠에 든 도영의 머리 밑에 베개를 받쳐주고 이불을 덮어주었다.
‘많이 피곤하셨나 보다.’
잠든 도영을 가만 보고 있자니 재성이 했던 말이 기억난다.
‘많이 무리하셔.’
‘쉬지도 않고 환자만 미친 듯이 보고 있어.’
‘뭘 제때 챙겨 먹는 것 같지도 않고.’
이제서야 겨우 숙면을 취하는 도영이 안쓰러웠다.
혜수는 고개를 들어 도영의 핼쑥해진 볼에 조용히 입을 맞추었다.
***
며칠 뒤, 서울 한대 병원.
도영은 응급 수술을 끝내고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던 중이었다.
벨 소리가 울려 휴대폰을 쳐다보니 흉부외과 레지던트에게서 온 전화다. 아마 오늘의 기철의 상태에 대해 알리기 위해 전화를 한 것일 거다.
하루 한 번, 오전 중으로 매일같이 전화가 왔지만 이 전화가 반갑지 않은지는 오래됐다.
차라리 오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다. 전화를 받을 때마다 기철의 상태가 악화되고 있다는 소리만 들렸으니까.
“주도영입니다.”
-교수님, 아버님이 깨어나셨습니다.
“!”
-지금 오시겠습니까?
“그래. 바로 가지.”
도영은 정신없이 복도를 내달려 중환자실로 갔다. 몇 번이나 발을 헛디뎠지만 넘어지지는 않았다.
중환자실의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니 그를 알아본 의료진들이 인사를 한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안녕하십니까.”
대충 대꾸를 해주고 기철이 있는 침대로 가니 기철이 눈을 깜빡이며 도영을 보고 있다.
도영은 안도감에 주저앉을 뻔한 것을 가까스로 참아냈다.
느리게 움직이는 눈꺼풀에 힘은 다 빠져 있었지만, 그 안 눈동자의 기세는 여전했다. 도영을 발견한 기철이 입을 달싹인다.
“도……영아.”
기철의 목소리에 도영의 움직임이 멈췄다.
‘목소리가.’
쉰 목소리가 작기도 작았지만 매우 어눌하게 들렸다.
심장이 멈췄던 시간만큼 뇌에 허혈이 생긴 탓이다. 이 후유증은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계속 남아 기철에게 고통을 줄 것이다.
기철이 도영에게 손을 뻗는다.
“도영아. 가까이 오렴.”
도영은 조금 더 침대로 다가갔다. 기철은 도영의 손을 잡고 싶은 듯 허공에 손을 저었지만 힘에 부치는지 손은 그냥 털썩 아래로 떨어졌다.
“날 보러 와준 거니? 고맙구나.”
도영은 언제 그를 걱정했냐는 듯 표정을 굳혔다.
“아니요. 여쭤볼 것이 있어 온 겁니다.”
“……그러니? 그게 뭐냐?”
“자의퇴원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
“모른다는 말씀은 하지 마시죠.”
“그걸 왜…… 찾는 거냐. 이미 다 끝난 얘기인 것을.”
기철은 또박또박 발음하려 노력하여 말을 하고 있었지만 알아듣기 쉽지 않았다. 발음이 자꾸 뭉개지고 단어가 명확하지 않았다.
“필요한 곳이 있습니다.”
환자 측에서 소송을 취하하지 않았고, 현재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이야기는 일부러 하지 않았다.
사활을 걸었던 정치에서 물러나게 된 아버지이다. 그렇지 않아도 충격을 받은 아버지에게,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하는 사람에게 또 다른 문제를 안겨 줄 수는 없었다.
“조 원장이 알아서 한다고 했다. 서버에 접속해서 지울 수 있다 그랬어. 자세한 방법은 모르겠구나.”
“알겠습니다.”
짧은 대화를 끝낸 도영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침대에서 벗어나려는데 기철이 드디어 도영의 손을 잡는다.
이 역시 도영이 기억하는 것과는 다른, 힘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손길이다.
“도영아. 할 말이 있다.”
“뭡니까?”
“…….”
기철은 한동안 도영을 올려다보았다.
도영이 많이 야위었다. 자신이 수술을 받느라 누워 있던 그 짧은 사이 어떤 시간을 보냈던 건지 도영의 꼴이 말이 아니다.
“……미안하다.”
“…….”
“미안해. 내가 너무 욕심을 냈구나.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정말 미안하다, 미안해.”
“……왜 이러십니까. 어울리지 않게.”
도영은 기철의 손을 내려두고 등을 돌렸다.
“도영아…….”
기철은 멀어지는 도영의 뒤를 그냥 두고 볼 수밖에 없었다. 주름진 눈가를 따라 후회의 눈물이 타고 내렸다.
중환자실을 나온 도영은 의무기록실로 향했다. 그곳은 환자의 전자 차트를 관리하는 곳이다. 마침 직원들이 출근할 시간이 되었으니 무언가를 알아보기에는 딱이다.
그동안 제대로 반격을 하지 못한 이유는 기철 때문이었다. 기철이 정신을 차리지 못한 상태에서 병억을 건드리는 것은 역공을 당할 위험이 컸다.
‘원장이 차트를 직접 지웠을 리는 없을 테고.’
병원장의 위치에 있는 병억이 차트에 직접 손을 댔다는 것은 교수인 자신이 환자의 피를 직접 뽑는 것, 아니 그 이상으로 자연스럽지 못한 일이다.
게다가 능구렁이 같은 조병억이 그런 대놓고 불법인 일을 직접 했을 리는 더더욱 없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의무기록실 실장이 바뀌지 않았던가.’
얼마 전 병원을 휩쓴 이야기가 있었다.
10년이 넘게 근무한 실장이 근무 태만, 특히 서버 관리 소홀의 이유로 잘렸다는 것. 그리고 그 실장은 매우 억울해했다는 내용이었다. 도영이 알 정도면 일이 꽤 크게 벌어졌었다는 거다.
‘새로 온 실장 이름이 조한수였던가. 조한수를 조사해 봐야겠군.’
이제야 제대로 된 반격을 할 수 있겠다는 기쁨도 잠시. 웃기게도 앞으로 바빠지겠다는 생각에 유감스럽다.
‘혜수를 봐야 하는데.’
그렇지 않아도 서울과 강천을 오가느라 바쁜 날들이다.
요즘 도영은 대한민국의 땅덩이가 이렇게 넓은 것이 한스러울 지경이었다.
게다가 왜 강천과 김포 사이에는 비행 노선조차 없느냔 말이다. 강천까지 운전하는 그 세 시간이 어찌나 긴지, 할 수만 있다면 순간 이동이라도 하고 싶었다.
도영은 어떻게 하면 시간을 낼 수 있을지 머리를 굴리며 의무기록실 문을 열었다.
***
강천 한대 병원은 이 지역의 거점병원이다. 시설은 낙후되어 있고 의료진의 실력도 미덥지만 워낙 근처에 큰 병원이 없다 보니 환자가 전부 이리로 몰린다.
환자는 미어터지는데 병실도 수술실도 부족해 응급실 바닥에 박스를 깔고 누워 순서를 기다리는 곳이 이곳이었다. 덕분에 혜수는 조금의 쉴 틈도 없이 병원을 오가야 했다.
금요일 저녁, 응급실에서 몰려드는 환자를 처리한 혜수는 서둘러 병동으로 올라갔다. 조금 있으면 도영이 올 시간이니 병동 일도 빨리 해치워야 했다.
하지만 병동으로 가니 간호사가 또 산더미같이 쌓인 일을 건네준다.
“흐억. 이걸 다 하라구요?”
“선생님, 요즘 일이 많네요. 어떡해요.”
“흐아……. 어쩔 수 없죠.”
시계를 보니 벌써 일곱시다. 도영과 만나기로 한 게 아홉 시이니 더 서둘러야겠다.
발에 불이 나도록 병동을 오가며 쌓인 일들을 해냈다. 이제 남은 일은 내일 오더를 내는 것과 환자들을 면담하는 것.
하지만 아무리 빨리한다 해도 남은 시간이 너무 부족하다.
‘못 만날 수도 있겠다. 흐잉.’
바쁘게 병실과 스테이션을 오가며 정신없이 일하던 중이었다. 저 멀리 이상한 차림새의 남자가 보인다.
눈에 띄게 키가 커다랗고 어깨가 드넓은 남자는 가운 없이 수술복 만을 입고 있었다. 게다가 커다란 마스크로 얼굴의 반 이상을 가리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작은 얼굴은 마스크에 가려져 눈만 간신히 보였다.
수술복을 입고 있는 걸로 봐서는 의료인이라는 건데, 아무리 봐도 차림새가 희한하다.
‘저 사람 뭐야? 인턴인가?’
수상한 남자는 이곳으로 오려는 듯 점점 가까워졌다.
그리고 그의 눈이 정확히 보였을 때 혜수는 깜짝 놀랐다. 그 수상한 차림새의 사람은 혜수도 아는 사람이었기에.
“교수님?”
그는 도영이었다.
“여기에서 뭐 하세요?”
놀란 혜수와는 다르게 도영은 여상하게 대답했다.
“도와주려고.”
“뭘요?”
“네 일.”
“예에? 1년 차 일을요?”
“그래. 빨리하고 나가자. 일은 뭐뭐 남았지?”
“면담이랑 오더만 내면 되는데. 진짜 교수님이 하신다구요?”
혜수가 소리를 치니 도영이 검지를 입술에 갖다 댄다.
“쉿. 조용히 해. 들키기 싫잖아.”
그건 그렇다. 혜수는 자신의 일을 남자친구에게 떠넘기는 여자로 보이는 게 싫다.
“그렇다고 교수로 와서 정식으로 일을 해주면 더욱 거절할 거고.”
그것도 그렇다. 신혜수의 남친이 서울 한대 병원의 교수인데 그가 직접 와서 신혜수의 일을 해주었다, 라는 소문이 돈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혜수는 민망함에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할 것이다.
도영 또한 혜수의 독립적인 성격을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니 비밀로 해.”
“그럼 지금은 누구라고 하시게요?”
도영은 그 또한 미리 생각해둔 듯 간단명료하게 대답했다.
“서울에서 온 인턴이라고 하지.”
인턴들도 강천에 자주 오갔기 때문에 강천의 인턴들은 늘 뉴페이스다. 그 많은 인턴들 중 하나라 해도 이상할 건 없다.
도영은 여전히 입을 떡 벌리고 서 있는 혜수를 스테이션으로 밀어 넣었다.
“환자를 면담하는 건 조금 위험하니 내가 오더를 내지. 아이디랑 비밀번호 알려줘.”
“주치의 일을 진짜 하시게요? 기억나세요?”
혜수의 도발 아닌 도발에 도영이 서늘하게 웃는다.
“날 뭘로 보고. 얼른 내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