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 나의 치유제
(99/110)
99. 나의 치유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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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나의 치유제
2023.01.11.
혜수는 답지 않게 눈치를 보는 가은과 도영을 서로 소개해 줬다.
“이쪽은 우리 과 주도영 교수님이시고 얘는 제 친구, 김가은이에요.”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세요, 교수님.”
그 인사를 끝으로 말소리가 끊겼다. 매사에 명랑한 가은이지만 도영과 혜수 사이에 있던 일을 아는 입장에서는 평소처럼 나불댈 수 없었나 보다.
싸한 분위기가 한참 이어지고, 결국 도영은 벗어두었던 재킷을 챙겼다.
“난 갈 테니 친구랑 이야기해.”
고개를 끄덕이는 혜수를 두고 도영은 병실을 나왔다.
실제로 올해 아직 쓰지 않은 휴가를 열흘 냈다.
앞으로 시간은 많다. 그렇게 천천히, 조금씩 풀어갈 생각이다.
도영이 나가자 가은의 눈이 다시 반짝인다.
“주 교수님이 여기엔 왜 왔어?”
“회의 때문에 왔다가 나 아픈 거 알고 병문안도 온 거래.”
“그건 또 어떻게 알았대?”
“네 남친이 말했다던데?”
“으엑, 정말?”
재성이 또 대견한 일을 했다며 가은은 헤벌쭉 웃었다.
“그럼 너네 화해한 거야? 다시 사귀어?”
“……아니.”
“병문안도 온 거면 아직 마음 있다는 거잖아. 너도 좋아하는데 왜 안 사귀어?”
혜수는 하,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잘 모르겠어. 교수님이 어떤 생각인지.”
도영은 모든 걸 다 안다고 했다. 그런데도 자신을 만나러 와주었다.
어젯밤, 행여나 혜수가 잘못되었을까 걱정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의 행동은, 말투는 예전과 같았다.
하지만 불안하다. 언제든 아빠의 일이 우리의 성을 허물어뜨릴 것 같아서.
“혼자 고민하지 말고 교수님이랑 대화해 봐.”
“……응. 그럴게. 그런데 두두는 어떻게 됐어? 폐부종 때문에 중환자실 갔다며.”
두두는 재성이 키우는 강아지다. 얼마 전 선천적으로 앓고 있던 슬개골 탈구 수술을 했다. 이후 합병증이 생겨 동물 병원에 입원 중이다.
“다행히 점점 좋아지고 있어.”
두두만 생각하면 또 슬픈지 가은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한다.
“뭘 또 울고 그래.”
“나 정말 두두 이대로 보내는 줄 알았단 말이야.”
“그새 정이 많이 들었구나.”
“그럼. 고게 내가 가면 얼마나 날 반겼다고. 3년 같이 살았던 재성 오빠보다 날 더 따랐다구.”
“아무 일 없을 거야.”
“그래야지.”
고개를 끄덕이던 가은이 줄줄이 놓인 죽 그릇을 가리킨다.
“이건 뭐야? 웬 죽이 이렇게 많아?”
가은은 죽을 한 입 떠먹었다. 그러더니 웩 소리와 함께 그대로 뱉어낸다.
그걸 보며 혜수는 웃음을 터뜨렸다. 도영이 이 모습을 보지 않아 천만다행이었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도영은 종이 백과 함께 나타났다. 그 안에는 갖가지 음식이 들어있었다. 장의 회복 속도에 맞춘 음식은 참으로 다양했다.
첫날은 죽의 향연이었으면, 그 다음날은 소화가 잘 되는 각종 반찬을 곁들인 밥이었다.
“병원 밥도 잘 나와요. 이러지 마세요.”
“내가 해주고 싶어서.”
“…….”
“오늘 건 먹을만 한가? 달지 않지?”
“맛있어요.”
첫날 이후 소금과 설탕을 헷갈리는 일은 없었나 보다. 혜수의 입맛을 훤히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모든 게 간이 딱 맞았다.
“다행이군. 오늘도 맛있게 먹길 바라.”
거창한 대화를 나누거나 시간을 보내고 가는 건 아니었다. 그냥 해 온 요리를 전해주고 맛있게 먹으라는 말과 함께 도영은 다시 사라졌다.
혜수는 점점 이러한 도영과의 만남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아홉 시만 다가오면 자꾸 문을 흘깃거리는 저를 발견하고는 스스로 꾸중을 했다.
혜수가 퇴원을 하는 날, 그날도 어김없이 아홉시가 되자 문이 열린다.
“왜 자꾸 오세요.”
“퇴원하잖아. 퇴원 수속 내가 해줄게.”
“제가 할 수 있어요.”
“내가 해주고 싶어서 그래.”
도영은 혜수의 침대 주변을 치우기 시작했다. 그러지 말라 해도 이불을 개고 먹었던 음식들을 정리한다. 자연스럽게 혜수의 짐도 가방에 챙겨 넣는다.
부산스럽게 움직이던 도영은 결국 숙소 앞까지 따라왔다.
그만 돌아가라 해도 무겁게 쌓인 과일 바구니를 가리키기만 한다. 입원을 하는 동안 그사이 친해진 간호사며 환자들이 가져온 선물이었다.
혼자서는 한 번에 옮기지 못할 양들이라 결국 도영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혜수의 방 앞. 문 앞에서 혜수가 문을 열기를 망설이자 도영이 턱짓을 한다.
“여기야?”
“네.”
“문 열어.”
“하지만.”
방 안이 더러워서 보여주기 싫다거나 한 이유는 아니었다. 그냥 자신의 작은 공간에 도영과 같이 있는 것에 이래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을 뿐.
“걱정하지 마. 짐만 들여다 주고 갈 테니.”
“……네.”
천천히 문을 열자 작은 내부가 드러났다.
“들어오세요.”
방을 한번 둘러본 도영은 스스로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사과나 주스는 냉장고에 바나나며 쿠키는 냉장고 위에.
도영이 자신의 방에서 스스럼없이 움직이는 모습이 조화롭지 않아 자꾸 눈길이 간다. 동시에 심장 한구석이 또 슬금슬금 가렵다.
짐을 거의 다 정리했을 즈음, 익숙한 벨 소리가 울렸다. 도영에게 온 전화였다.
잠깐 화면을 노려본 도영이 전화를 받는다.
“네, 주도영입니다.”
대화하기 싫은 상대에게서 온 전화인지 도영은 미간을 찌푸린 채 통화를 하기 시작했다.
“당장 내일부터 말입니까?”
전화를 건 사람은 서울 외과 과장 박상훈이었다. 휴가를 끝내고 빨리 병원에 복귀를 해달라 요청하는 내용이었다.
“제가 해외에라도 갔으면 어쩌려고 이러십니까?”
도영은 시종일관 무감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통화를 했다.
그래, 원래 도영은 저런 사람이었다. 혜수에게만 한정으로 다정한 모습들을 보여줬을 뿐.
그걸 깨닫자 또 혜수의 마음 한구석이 견디기 어렵게 간지럽다.
“알겠습니다.”
남은 휴가를 주장해 봤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교수 한 명이 부친상을 당해 당장 오후부터 당직에 펑크가 났단다. 결국 도영은 저녁부터 복귀를 하겠노라 하고 전화를 끊었다.
“가보셔야 해요?”
도영이 시계를 쳐다본다.
“그래. 신 교수의 아버님이 돌아가셨다는군.”
장례식장에 들렀다가 당직 시간에 맞추어 병원에 복귀를 하려면 고작 한 두 시간의 여유밖에 없다.
그걸 아는 혜수는 갑자기 초조해졌다. 이렇게 도영이 가버리면 또 만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스스로가 우습다. 도영에게서 도망쳐 올 때는 언제고 이제는 헤어지는 게 싫다니.
그 며칠 동안 매일같이 도영과 만났던 것에 제대로 길들여졌나 보다.
‘어쩌지. 어떡해.’
도영을 붙잡자니 정섭의 일이 걸리고, 그냥 보내자니 이렇게 보내기 싫고.
초조하게 손가락을 지근거리던 혜수는 더는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저, 교수님.”
“응.”
“궁금한 게 있는데요.”
홧김에 말은 걸었지만 막상 대화를 하려니 두렵다. 그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무서웠다.
“그…….”
도영을 올려다보니 다정한 눈빛으로 저를 보고 있다. 예전과 똑같은 혜수 한정의 따뜻함과 상냥함.
그에 혜수는 조금 더 용기를 얻었다.
“교수님.”
“응.”
“저 원망스럽지 않으세요?”
“전혀.”
도영은 곧바로 대답했다.
“어떻게…… 그래요?”
도영은 혜수에게 다가갔다. 손을 들어 홀쭉해져 버린 볼을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네가 너무 보고 싶었어.”
“…….”
“널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지. 그거면 안 될까?”
그건 혜수도 마찬가지다. 의사 가운을 입고 강천에서 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마음 한구석에는 도영의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도영이 없다는 생각만으로도 환자와 대화하고 진료를 보는 익숙해야 할 그 과정이 제 것 같지 않았다.
“그럼 저희 아빠는요. 전 아빠 딸인걸요.”
여전히 내가 그를 바라고, 그 또한 나를 바라는 걸 알겠다.
하지만 불안하다. 아빠와 그 사이에 있었던 일 또한 여전하니까.
“아버님……. 좋은 분이시더군.”
“아빠 만나보셨어요?”
“그래.”
“언제요?”
“전에 응급실에 오셨을 때. 그리고 얼마 전에.”
“아.”
“네가 누굴 닮았는지 알겠더군.”
정말 여자친구의 아버지를 이야기하는 듯한 쉬운 말투에 혜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게 가벼이 말할 일은 아니잖아요. 교수님이 저희 아빠 미워한다 해도 전 충분히 이해해요.”
잠깐 할 말을 고른 도영은 다시 혜수의 볼을 쓸어주었다.
“모든 걸 잊었다는 말을 내게 들려주고 싶었지만. 그건……. 잘 안되더군.”
“…….”
“하지만 너와 같이 풀어나가고 싶어. 그래서 왔어.”
“같이……?”
“널 도저히 잊을 수가 없었어. 아니 잊으려 해 본 적도 없어. 네가 없는 동안 난.”
도영은 제 오른팔을 흘깃 쳐다보았다.
“팔, 이 팔 따위가 아픈 것보다 그 이상으로 힘들었어. 1분 1초가 고역이었어. 무얼 해도 시간이 가질 않더군.”
도영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전부 믿기 힘들었다.
어떻게 모든 걸 알고도 저런 말을 할 수가 있지?
도영의 말을 한참 곱씹던 혜수는 가까스로 그를 불렀다.
“교수님.”
도영은 무릎을 구부려 혜수와 얼굴의 높이를 맞추었다.
떨리는 혜수의 눈을 보며 더욱 굳게 말해준다. 혜수의 머릿속은 훤히 들여다보는 듯 단호한 말투였다.
“불안해하지 마.”
“…….”
“날 환자가 아닌 주도영으로만 봐줬으면 좋겠어.”
지금 도영은 정섭과의 관계에서 저를 분리하라는 말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 말은 혜수에게 위안이 되었다.
실제로는 안 될 걸 알지만, 그런 말을 도영이 직접 해준 것만으로도 크게 홀가분해졌다.
“내게 미안함도 가지지 마. 네가 그럴 필요도 없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던 혜수가 고개를 들어 도영을 보았다. 내내 마주치지 못하던 도영의 눈동자를 눈에 담았다.
그의 눈은 평소의 그것보다 더 진중하고 깊었으며 진실을 말하고 있었다.
“정말…… 그래도 돼요?”
“응.”
“저 교수님 옆에 있어도 돼요?”
“그래.”
“진짜요?”
연거푸 묻는 혜수를 보고 도영은 작게 미소 지었다.
“애원할 사람은 나야. 네 곁에 있고 싶은 사람은, 네가 꼭 필요한 사람은 나거든.”
“세상에.”
“제발 날 떠나지 마. 나와 같이 있어 줘.”
“이거 꿈 아니죠?”
“아니야.”
“이 장면, 꿈속에서 본 것 같은데. 또 꿈이면 어쩌지요?”
“아니래도.”
혜수가 볼을 꼬집는다.
“아얏! ……진짜잖아?”
도영은 참지 못하고 쿡, 웃고 말았다.
“교수님!”
혜수는 도영의 목을 와락 껴안았다.
“그럼 있을래요. 저도 너무 힘들었어요. 일이 손에 안 잡혔어요. 교수님 생각만 하느라.”
“……신혜수.”
“죄책감이 들더라도 교수님 옆에 있을래. 욕심부릴래.”
앞으로의 일은 앞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계속 과거의 일에 붙잡혀 초조해하고 있기에는 도영을 사랑하고 바라는 마음이 너무 컸다.
다행히 도영도 그러라고 해줬다.
같이 풀어나가자고. 같이 해결하자고.
“말했잖아. 그런 생각 할 필요 없다고.”
“교수님.”
“그래.”
“너무 보고 싶었어요. 맨날 교수님 꿈꿨어요.”
“아, 신혜수.”
저를 보고 싶었다 말하며 파고드는 혜수가 사랑스러워 미칠 것 같다.
도영은 혜수를 쑥 안아들었다. 놀란 혜수가 발을 동동댄다.
“교수님, 내려줘요. 팔에 힘주면 어떡해요.”
“가만히 있어. 떨어지겠어.”
한동안 혜수를 꽉 안고 있던 도영은 혜수를 침대 위에 사뿐히 내려놓았다.
“그리고 네가 내 옆에 있는데 무슨 상관이야. 나의 치유제.”
그 말과 함께 도영은 혜수의 입술을 덮쳤다.
호흡이 달리도록 진한 키스였다.
그리고 혜수도 열렬히 그에 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