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 재회
(98/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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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재회
2023.01.07.
“신……혜수?”
아파서 금방이라도 어떻게 될 것 같다던 혜수가 너무나 멀쩡히 서 있다.
‘혹시 지금 보고 있는 게 환상인가?’
눈을 몇 번 비벼도 혜수는 그 자리에 있다. 도영은 벌떡 일어나 혜수에게 다가갔다.
“교수님?”
여전히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혜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찬찬히 뜯어보니 중환자와는 한참 거리가 멀게 보인다. 살이 쏙 빠지긴 했지만 의식 상태도, 호흡 상태도 모두 멀쩡해 보인다.
“혜수야……!”
저도 모르게 혜수의 팔을 끌어당겨 와락 품에 안았다. 그리웠던 혜수의 호흡과 온기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아, 현실이구나. 혜수가 무사하구나.
안도감에 저도 모르게 깊은숨을 연거푸 내쉬었다. 할 수만 있다면 이렇게 평생 안고 있고 싶다.
“교수님?”
혜수의 부름이 몇 번 더 이어지고 나서야 도영은 정신을 차렸다. 혜수를 한 바퀴 빙 둘러보며 샅샅이 살핀다.
“수술했다더니. 무슨 수술을 했어?”
“아뻬(appendectomy:맹장수술)했어요.”
“아.”
여기까지 오는 동안 위궤양 천공이나 장 천공으로 인한 범복막염, 최악의 경우 자신의 전문 분야인 대동맥류 파열까지 온갖 케이스를 상상했다.
그런데 맹장 수술이라니, 천만다행이다.
하지만 맹장이라고 만만하게 봐서는 안 된다. 일이 꼬이려면 장을 잘라내고 장루를 내는 경우도 있다.
“심플한 케이스인가? 합병증으로 복막염이 왔다거나 대장염이 왔다거나…….”
“아니요. 염증이 주위로 좀 있긴 했지만 딱 아뻬만 떼냈어요.”
안도의 숨을 다시 내쉰 도영은 다시 혜수를 와락 안았다. 다행이다, 중얼거리는 소리가 끝도 없이 나왔다.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혜수가 품에서 꼼지락댄다.
“교수님, 답답해요.”
아차 싶어 손을 뗐다.
“아픈가?”
“아니, 그건 아닌데요.”
괜찮다고 하지만 안심할 수 없다. 혜수는 늘 아파도 괜찮은 척했으니까.
서둘러 혜수가 달고 있는 수액 백을 살펴보았다. 진통제가 섞여 있는 걸 보고는 인상을 조금 찌푸렸다.
“지금 통증은 몇 점이지?”
“움직일 때 1점 정도요. 가만히 있으면 하나도 안 아파요.”
이 정도면 통증 조절은 아주 잘되고 있는 셈이다. 이 또한 다행이다.
“다른 불편한 건 없고?”
“배가 고픈 거랑 목이 마른 거?”
“배가 고파? 가스 아웃이 아직인가?”
“예?”
“가스 아웃 아직이냐고.”
“그게…….”
민감한 질문에 혜수의 얼굴이 절로 붉어진다. 도영과 가스의 안부를 묻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지만 도영의 태도는 환자를 대하는 교수 그 자체다.
“가스 상태 어떻냐고.”
결국 혜수는 더듬으면서도 대답은 해줬다.
“조, 조금 전에 걸어 다니면서 했어요.”
그러자 그 말을 들은 도영이 침대 머리맡에 붙은 벨을 눌러 스테이션을 호출했다. 간호사의 목소리가 스피커 너머에서 들려왔다.
-무슨 일이세요?
“여기 3호실 신혜수 환자 유동식 허용해 주십시오. 방금 방귀가 배출되었습니다.”
도영이 표현하는 적나라한 단어에 혜수는 어질한 머리를 짚었다.
‘오 마이 갓. 전 남자친구가 친히 방귀 상태를 확인해 준 사람은 나뿐일 거야.’
-그러세요? 알겠습니다. 내일 오전에 죽부터 제공될 겁니다.
“감사합니다.”
간호사와의 짧은 대화를 끝내고 혜수를 돌아보니, 얼굴을 붉힌 채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다.
“왜?”
“그게요.”
“배고파서 그래? 내일부터 죽이 나온다는데.”
“그게 아니라.”
“아니면 지금 뭐 먹으러 갈까?”
도영은 마음이 꽤나 급한 듯 손과 발을 가만두지 못했다.
“병원 식당은 문을 닫았을 테고. 외출이 될까? 아니, 그냥 내가 과장님에게 전화를 하지.”
뭐가 그리 급한지 한 손으로는 휴대폰의 연락처를 검색하고 다른 한 손으로는 차 키를 찾아 주머니를 뒤적인다.
“교수님, 그게 아니라요!”
“그럼?”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단 도영의 얼굴을 보며 혜수는 그냥 말을 삼켰다. 괜히 또 그 단어를 써서 상기시키나 싶어서다.
그냥 이 사람은 정말 그 단어에 아무런 의미를 두고 있지 않구나, 그냥 내 상태만 걱정을 하는구나 생각하기로 했다.
“저 지금 안 먹을래요. 먹고 싶지 않아요.”
“배고프다며.”
“지금은 괜찮아요. 그런데 여기엔 어떻게 알고 오셨어요.”
“재성 선생이 얘기하는 것을 들었어.”
“저 괜찮은데 굳이 오실 필요까지는.”
“네가 아프다고 하니 걱정이 되어 견딜 수가 없었어.”
“……교수님이 절 왜 걱정해요. 이제 그럴 사이 아니잖아요.”
“그건.”
“이제 가주세요.”
당장이라도 도영을 내보내려 하는 혜수다.
“잠깐만, 할 말이 있어.”
그 말을 끝으로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서로를 신경 쓰며 어색함을 견뎌내는 묘한 침묵.
도영은 속으로 말을 고르고 있었다.
잘 표현해야 했다. 네 아버지의 일을 이미 다 알고 왔다고 말했을 때, 혜수는 그 사실만으로 또 저를 멀리할지 모른다.
‘미리 할 말을 생각해둘 것을.’
미처 전할 말을 생각해두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혜수가 아프다는 생각에 앞뒤 가리지 않고 쫓아와 버렸다.
“하실 말씀 없으시면 가주세요.“
혜수가 도영을 문밖으로 내몬다.
“저 이제 자야 해요. 그리고 우리 이렇게 대화할 사이는 아니잖아요.”
“혜수야.”
“면회시간도 끝나서 여기 이렇게 계시다 들키면 안 돼요.”
“할 말이 있어.”
“전 없어요. 그러니 그만 가요.”
문밖으로 쫓겨나기 직전, 도영은 가까스로 말했다.
“나 알아.”
“네?”
“다 알고 있어.”
도영은 가능한 자극적이지 않게 말을 전달하기 위해 애를 썼다.
“네 아버지 뵌 적 있어.”
“우리 아빠요?”
갑작스레 꺼내진 아빠의 이야기에 혜수의 얼굴이 어리둥절해졌다.
“언제요?”
“전에 응급실에 오셨을 때 뵈었지. 응급처치를 훌륭하게 하셨더군. 물론 그때는 아버님인 줄 몰랐지만.”
“그랬어요? 그런데 아빠는 갑자기 왜……!”
혜수의 얼굴에 핏기가 가신다.
“서, 설마…….”
“정형외과 의사셨다며.”
“교수님…….”
“왜 일을 그만두신 지도 알고. 한주 수도병원에서 있었던 일 때문이지.”
“!”
혜수의 얼굴은 삽시간에 하얗게 질려버렸다.
“나도 다 알게 되었으니까. 그러니 피하지 마.”
“어, 어떻게 그걸…….”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찾지 못하고 더듬대던 그때, 병실의 문이 열리며 한 간호사가 들어온다. 그 사이 교대가 바뀌었는지 아까 도영에게 이곳을 안내해 주던 간호사와는 또 다른 사람이다.
도영을 본 간호사가 눈을 키우며 호들갑을 떤다.
“어? 보호자가 있네요?”
간호사가 혜수더러 눈을 흘긴다.
“신 선생님. 지금 면회시간은 끝났어요. 요즘 감염관리 때문에 면회는 10시까지만 되는 거 아시잖아요.”
“그, 그렇죠.”
“잘 아시는 분이 왜 그러세요. 이거 수 쌤한테 걸리면 저 혼난단 말이에요.”
“미안해요.”
“그렇지 않아도 곧 병원 인증평가 있어서 더 눈에 불을 켜고 있고만! 누가 보기 전에 보호자 분은 얼른 나가시는 게 좋겠어요.”
당황하여 주춤대는 도영을 간호사가 문 쪽으로 밀어낸다. 도영에 대한 소문을 모르는 신참 간호사인가 보다. 서울 병원에 있는 간호사라면 사탄 도영을 이렇게 대할 생각은 꿈에도 못 할 테니.
“얼른 가시고 내일 다시 오세요. 네?”
“아직 전할 이야기가 있습니다만.”
“전화로 하시면 되잖아요? 저희 면회는 9시부터 가능해요. 그때 다시 오세요.”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간호사는 결국 도영을 문밖으로 밀어냈다.
그날 밤, 혜수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도영이 모든 걸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
하아, 한숨이 절로 나온다.
‘아빠의 일을 다 알았는데도 어떻게 날 그렇게 걱정해 줄 수가 있어? 대체 무슨 생각이신 거지?’
아침으로 제공되는 죽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남겼다. 행여나 도영이 다시 오지는 않을까, 오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고민이 되어 배도 고프지 않았다.
9시가 땡 되자마자 병실의 문이 슬그머니 열린다. 끼익 소리와 함께 조심스레 들어오는 사람은 도영이다.
혜수는 급히 몸을 일으켰다.
“교수님.”
“잘 잤어?”
혜수가 침대에서 내려오려 하자 도영이 앉아 있으라 손짓한다.
“그냥 있어. 몸도 안 좋은데.”
“예에…….”
“밥은 먹었나? 죽 먹었어?”
도영의 눈이 옆에 둔 식판으로 향한다. 밥그릇의 뚜껑을 열어보더니 인상을 살짝 쓴다. 아침으로 나온 흰죽이 한 수저 정도 덜어진 뒤엔 그대로 남아 있어서다.
“왜 다 남겼어.”
“별로 고프지가 않아서요.”
“…….”
배가 고프지 않기는. 분명 어제 자신이 찾아왔던 일로 고민을 하느라 밥맛이 떨어진 것일 거다.
“이거.”
도영은 종이 백에서 그릇을 줄줄이 꺼냈다.
“이게 뭐예요?”
“죽.”
뚜껑을 열어보니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훅 퍼진다. 종류도 다양하다. 흰죽부터 계란죽, 야채죽, 소고기죽, 전복죽까지.
“아침 먹지 않은 거면 지금 먹어.”
“이런 거 안 갖고 오셔도 되는데.”
“너 먹이고 싶어서.”
“……감사합니다. 두고 가시면 조금 이따가 먹을게요.”
먹지 않을 게 뻔하다. 그동안 제대로 챙겨 먹지 않아 비쩍 마른 게 지금도 눈에 훤히 보인다.
몇 번 더 실랑이가 왔다 갔다 하고, 도영은 결국 엄한 목소리를 냈다.
“입을 통한 식사가 얼마나 장운동의 회복에 도움이 되는지 너도 알 텐데.”
“…….”
“그러니 한 술만이라도 먹어.”
묵묵부답인 혜수에게 도영이 숟가락을 쥐여준다.
“한 번만 먹자. 그럼 갈 테니.”
“진짜요?”
“그래.”
그제야 혜수는 숟가락질을 했다. 흰죽을 떠 천천히 입에 가져간다.
“잘 먹겠습니다.”
그런데. 한 입 먹은 혜수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곧바로 또 한 술을 뜬다. 그러더니 또 한 술. 그리고 또 한 술.
그걸 지켜보는 도영의 얼굴의 입꼬리가 슬금슬금 올라간다. 이렇게 연달아 먹다니, 맛이 좋다는 뜻이 아닌가.
또 한 번 더 떠먹은 혜수가 중얼거린다.
“이상하다. 수술하면 미각이 일시적으로 변하기도 하나요?”
“왜?”
그렇게 맛있어?란 말은 겨우 삼켰다.
“죽이 왜 이렇게 달지요?”
도영은 속으로 환호를 질렀다. 보통 달다는 말은 맛있다는 뜻으로도 쓰이니까.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혜수를 보고 있는데 혜수가 또 한입 먹더니 고개를 갸우뚱한다.
“달아요. 내 입이 이상한가?”
연신 나오는 ‘달다’라는 말에 이상함을 느낀 도영은 숟가락을 들고 한 입 먹었다. 그런데.
“윽. 이거 왜 이렇게 달아?”
“소금 대신 설탕을 넣었나 봐요.”
“…….”
“어디서 사신 거예요?”
“…….”
“네?”
“그.”
잠깐 망설이던 도영은 이내 대답을 했다.
“내가 만들었어.”
“예?”
“아침에, 그러니까. 일찍 잠이 깨서 할 일이 없어서.”
“출근 안 하세요? 오늘 수요일인데.”
“연차 냈어.”
“저 때문에 그러실 필요까지는.”
“오늘 여기에서 학생 실습 과정 회의가 있어. 겸사겸사 온 거야. 주말까진 여기 있을 예정이고.”
실제로는 없었지만 둘러댔다. 그렇지 않으면 혜수가 부담스러워할 것 같아서.
어젯밤, 혜수를 보고 나서 병원 근처 식당을 뒤졌다.
죽이라도 해주고 싶어 돈을 주고 주방을 빌렸다. 인터넷에서 레시피를 찾아 몇 번을 태워가며 다양한 죽을 끓여 냈다.
간을 해야 하니 소금이 어딨냐는 물음에 주인은 분명 노란 통 안에 있다 그랬다.
그래서 그 노란 통 안에 있는 걸로 간을 했는데! 그게 소금이 아니라 설탕이었다니! 맛을 좀 보고 올 것을!
도영은 혜수가 쥐고 있는 숟가락을 가져오려 했다.
“그만 먹어. 다시 가져갈 테니.”
“아니에요. 떡 같고 맛있어요.”
도영이 민망해하지 말라고 그리 말했다. 쌀가루에 설탕을 더해 먹는 백설기를 떠올린 말이었다.
하지만 실패다. 도영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으니.
‘아차. 떡이 됐다는 말에는 부정적인 뜻도 있지.’
“저, 정말 맛은 있어요. 두고 가시면 제가 다 먹을게요.”
대놓고 시무룩해 하는 도영을 보며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애를 쓰던 그때, 병실의 문이 열리며 또 한 사람이 등장한다.
빨간 파마머리의 여자, 가은이다.
“혜수야아아아, 일어났어? 우리 두두가 드디어 중환자실에서……!”
요란을 떨며 들어오던 가은은 도영을 보고 흠칫 놀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