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과거와의 만남 (2)
(97/110)
97. 과거와의 만남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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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과거와의 만남 (2)
2023.01.04.
‘정말 이 사람이었다니.’
말을 잇지 못하는 도영을 보고 정섭이 묻는다.
“왜 그러십니까? 혹시 어디 불편하신 데 있으세요?”
“……아닙니다.”
결제를 끝낸 정섭은 도영에게 카드와 영수증을 돌려주었다. 여전히 사람 좋은 웃음을 지은 채다.
“여기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정섭은 또 다른 일을 도와주려는 듯 카운터를 나섰고 도영은 저도 모르게 그를 붙잡았다.
“저기.”
“예?”
붙잡긴 했는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오늘 이곳에 정섭을 보러 온 것은 말 그대로 그를 보고 싶어서였을 뿐 말을 섞을 생각은 아니었다.
“그…….”
“예, 말씀하세요.”
“…….”
고민하던 도영은 그냥 궁금했던 것을 묻기로 했다.
“저, 여기 주인분과 아는 사이십니까?”
“예?”
정섭의 고개가 옆으로 기울어진다. 실내에서도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희한한 머리 스타일의 남자가 뜬금없이, 그것도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을 하니 의아했을 것이다.
“너무 열심히 도와주셔서 물어보는 겁니다.”
“아, 그게 그렇게 궁금하셨어요? 으하하하.”
정섭이 웃음을 터트렸다. 중년의 남성치고는 꽤 맑은, 순수한 웃음이다.
그리고 그 웃음에서 도영은 혜수를 떠올렸다. 웃는 입매가 무척 흡사했다. 그때 응급실에서 낯이 익다 느꼈는데 그게 혜수 때문이었던 것이다.
“이걸 아는 사이라고 해야 하나? 그냥 식당의 손님과 주인입니다.”
“그런데 왜 도와주십니까?”
그러자 정섭이 기우뚱하다가 대답한다.
“그냥요. 그러고 싶어서요. 마침 이곳에는 일손이 부족했고 저는 시간과 힘이 남으니 나선 것뿐입니다.”
“……간단한 이유군요.”
“아하하. 그럼요. 뭐 인류애나 나눔의 기쁨, 그런 거창한 것을 생각해서 한 행동은 아니에요.”
“…….”
“게다가 제가 그런 걸 논할 처지도 아니고요. 물론 자격도 없고요. 그냥 하고 싶어서 한 겁니다.”
“……그렇습니까.”
머리를 긁적이며 답하던 정섭은 식사를 마치고 오는 다른 경비원을 아는 체한다.
“형님, 카드 주세요.”
“자네 그냥 여기에 취직하지 그래?”
“아이고, 그러면 건물은 누가 지킵니까?”
“그럼 투잡 해, 투잡.”
“투잡하면 돈 많이 벌고 좋겠네요.”
흐흐, 웃은 정섭은 결제를 마친 뒤 사장 부부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했다. 그런 뒤에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식당을 나갔다.
다나 빌딩에서 돌아오는 내내 도영의 마음은 심란했다.
그곳에 가면 속이 조금이라도 트일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더 답답해졌다.
‘내가 지금 뭘 하는 건지.’
뭘 확인하고 싶어서 거기까질 간 건지 스스로도 잘 모르겠다.
하긴, 혜수를 떠올리면 그것이 실의인지 애정인지, 아니면 미련인지도 잘 모르겠는데 뭔들 알까.
한숨과 함께 주차장에 차를 주차한 도영은 병원 건물로 들어섰다.
의국으로 가는 엘리베이터에 기다리는데 옆이 소란스럽다. 옆을 쳐다보니 어디서 많이 보던 두툼한 등짝이 보인다.
‘황재성?’
재성은 어떤 여자를 달래주고 있었다. 특이하게도 그 여자의 머리칼은 빨간색이다.
‘강천에 자주 같이 간다던 여자친구인가.’
뭐 누구든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라 생각하며 서 있는데 재성과 여자의 말소리가 고스란히 전해진다. 듣고 싶지 않아도 그들의 목소리가 너무 커 귀에 꽂혔다.
“오빠, 어떡하지? 으흐흑.”
“……잘될 거야.”
“불쌍해서 어떡해…….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가지 말라고 말렸어야 했어.”
“자기야, 너무 걱정 마, 응?”
“그게 그렇게 위험한 수술이었어? 이렇게 헤어질 줄 알았으면 얼굴 한 번이라도 더 볼걸. 손 한 번 더 잡아 줄걸.”
아무래도 여자와 가까운 사람이 어디가 아파서 수술을 했는데 상태가 좋지 않나 보다. 여자의 남자 친구인 재성은 그것을 달래주고 있는 것이고.
이후로도 여자의 울음은 한참 지속되었다.
“너무 불쌍해, 더 잘해 줄걸. 어쩌면 좋아.”
‘딱하군.’
마침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여 도영은 그곳에 올라타려 했다. 그런데.
“혜수야, 으허허헝. 우리 혜수 보고 싶어. 으허허헝.”
‘혜수?’
도영은 우뚝 멈춰 섰다. 그러고 보니 빨간 머리의 여자가 낯설지는 않다.
혜수가 자신과 가장 친한 친구 가은을 대신해 선 자리에 나갔고, 그 가은이라는 여자는 빨간 머리가 트레이드 마크라고 했던 게 기억났다.
‘설마.’
재성의 여자친구가 가은이라는 사람이라면? 그래서 자주 강천에 가는 이유가 혜수를 만나기 위해서라면?
그럼 저들의 대화 속 혜수는 내가 아는 그 혜수란 말인가?
마침 엘리베이터가 도착했지만 도영은 올라타지 않았다. 전신을 타고 도는 불길한 기운에 그럴 수가 없었다.
‘그럼 지금 수술을 해서 사경을 헤맨다는 사람이 혜수인가?’
당장이라도 재성에게 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한 거냐고 물어야 했다.
그런데. 도영의 레이저 같은 시선을 재성이 먼저 눈치를 챘다. 도영의 매서운 눈매를 보고는 주춤주춤 뒤로 간다.
“교, 교수님.”
“황 선생.”
“그, 그럼 전 이만 먼저 가보겠습니다.”
“잠깐……!”
도영이 다가갔지만 재성은 더욱 뒷걸음질을 친다. 그러더니 결국 가은으로 추정되는 빨간 머리 여자를 끌고 사라졌다. 뭔가를 크게 숨기는 것이 있는 것 마냥.
재성의 반응에 더욱 위화감이 느껴졌다. 초조히 입술을 씹던 도영은 휴대폰을 꺼내 승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참의 신호음 끝에 승원의 불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도영 왜, 또? 컨설트 환자는 더 이상 없는 걸로 아는데.
“혜수가 지금 아픈 건가?”
-어?
“혜수 지금 아프냐고!”
-너 그거 어떻게 알았어?
승원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도영은 살짝 비틀거렸다.
‘불쌍해서 어떡해.’
‘그게 그렇게 위험한 수술이었어?’
울먹이던 가은의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혜수 어디 있지?”
-가, 강천에 있지.
“왜 서울에 오질 않고!”
-혜수가 거기에서 수술을 받겠다고 했어. 그런데 너…….
“제길!”
도영은 더는 듣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정신없이 달려 주차장으로 갔다.
‘어서, 빨리.’
차에 올라타 시동을 켜고 기어를 바꾸는 그 짧은 시간조차 아까웠다.
도영의 차는 강천까지 뻗은 고속도로를 질주했다.
얼마 전 응급실에서 처음 마주했던 기철의 모습이 자꾸 떠오른다.
죽은 듯 늘어져 있던 창백한 기철, 그리고 지금까지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기철. 그 모습 위로 혜수가 자꾸 겹쳐 보이는 것은 왜인지.
‘제기랄, 제기랄!’
도영은 운전하는 내내 후회했다. 그 아이를 그곳까지 쫓아낸 자신을 원망했다.
멀리서 지켜보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재성에게 카드 따위를 쥐여줄 게 아니라, 정섭을 찾아갈 게 아니라 제일 먼저 혜수를 찾아가야 했다. 혜수와 대화를 했어야 했다.
나는 지금 모든 걸 알고 있다 솔직히 밝히고, 그러니 도망치지 말라고 말했어야 했다.
일단 내 곁에 있으라고, 우리 같이 풀어나가자고 말했어야 했다.
혜수의 도망에 대해 배신감을 느낄 게 아니라 혜수를 곁에 두지 못한 것에 대해 투정을 부렸음을 인정해야 했다.
‘하필 강천에서 수술을 하다니.’
강천 한대 병원의 악명은 도영도 잘 알고 있다. 그곳에서 수술을 받은 사람들에게 자꾸 합병증이 생겨 한대 차원에서 조사를 한 적도 있다.
‘신혜수, 제발.’
후회가 또다시 온몸을 휘감는다. 혜수가 서울에 있었더라면, 이리 아무 손을 쓸 수 없지는 않았을 텐데.
한참을 달려 강천 한대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늦은 밤이었다. 하지만 아무런 상관은 없었다. 머릿속은 온통 혜수에 대한 생각뿐이었으니.
대충 차를 대어 놓은 도영은 병원으로 뛰어 들어갔다.
‘어서 빨리 혜수를 봐야 한다.’
중환자실로 가야 하나, 병동으로 가야 하나 고민 중이던 그때. 도영을 아는 체하며 누군가 다가온다.
“어이고, 이거 주 교수 아닌가.”
강천 한대 병원의 외과 과장이다. 학회나 합동 회식에서 종종 만난 적이 있어 얼굴을 아는 사이다.
“안녕하십니까, 교수님.”
“이 밤에 여긴 웬일인가? 난 당직이야. 과장이 돼서 당직을 하고 있으니 아이고, 내 팔자…….”
실없는 소리를 하려는 과장의 말을 도영은 그냥 끊었다. 한시가 급했다.
“1년 차 신혜수를 보러 왔습니다.”
“혜수?”
잠깐 고개를 기울이던 과장이 이내 아, 소리를 낸다.
“이번에 서울에서 온 그 1년 차?”
“네. 아프다고 들었습니다만.”
“맞아. 주말에 응급 수술하고 입원했댔지. 그런데 자네가 신 선생을 왜 보러 와? 여기까지 왜 왔어?”
도영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제가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뭐?”
“혜수 지금 어딨습니까?”
“그, 그런데 자네는 약혼녀가 있었지 않아?”
“파혼했습니다.”
“아, 그, 그랬지. 그런데 벌써 사랑하는 사람이…….”
놀라 입만 벙긋벙긋하는 과장에게 도영은 매섭게 또 물었다.
“혜수, 지금 어딨습니까?”
“그……. 우리 외과 병동이니까 83이랬던 것 같은데.”
83이면 일반 병동이다. 일단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 지금 혜수가 있는 곳이 중환자실이 아니어서.
아까 가은이 울면서 오늘내일 한다고 했는데, 지금은 그 정도는 아닌 건가.
“감사합니다.”
도영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꼭대기에 있는 엘리베이터 따위 기다릴 시간이 없었다.
83병동의 스테이션. 쉴 새 없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주위를 둘러보는 도영을 본 한 고참 간호사가 벌떡 일어난다.
“어? 주도영 교수님?”
옆에 앉아 모니터를 보고 있던 신참 간호사가 묻는다.
“그게 누군데요?”
“서울 본원 외과 교수님. 얼마 전에 파혼해서 기사 났던 사람 있잖아.”
“아! 맞네요. 얼굴 보니까 알겠어요.”
“그런데 왜 여기에 오셨지?”
“그러게요. 그런데 진짜 잘생겼다. 모델인 줄. 우리 외과 교수님들 보다가 저분 보니 눈이 번쩍 뜨이네.”
두 간호사가 도영을 넋을 놓고 보는 중, 잠깐 주위를 두리번거린 도영은 스테이션으로 다가왔다.
“어? 여기로 온다!”
신참 간호사마저 놀라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신혜수 어딨습니까?”
“예?”
“신혜수 환자 말입니다.”
“그게 누구더라…….”
차트를 훑으며 우왕좌왕하는 신참에게 고참 간호사가 쿡 찔러준다.
“그 이번에 수술하신 선생님 있잖아. 외과 1년 차. 3호실이던가? 그분 찾으시는 것 같은데.”
“아, 맞다. 맞아요. 신혜수 선생님은 3호실입니다, 교수님.”
“알겠습니다.”
도영은 3호실로 달려갔다. 남겨진 간호사 둘은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보았다.
“병문안 온 건가? 면회시간 끝났는데.”
“일 때문에 온 거 아닐까요?”
“그래도 이 시간에는 외부인 출입 금지인데.”
“외부인인가? 의료진으로 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것참 애매하네.”
3호실 앞. 문 손잡이를 잡으려던 도영은 멈춰 섰다.
어렵겠지만 이 안에 누워 있을 혜수의 모습을 온전히 받아들이기 위해 마음을 다잡았다.
‘어떤 모습으로 있든 의연하게 받아들이자.’
심호흡을 몇 번 한 뒤 손잡이를 밀었다.
끼이익, 소름 돋는 소리와 함께 병실의 모습이 조금씩 드러난다. 동시에 병원 특유의 소독약 냄새가 물씬 풍긴다. 이 냄새가 이토록 역하게 느껴졌던 것은 처음이다.
도영은 굳은 다리를 겨우 움직여 조금씩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신혜수.”
그런데. 내부는 비어 있었다. 대신 침대 위에는 흰 시트만이 남아 있다. 차디찬, 온기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싸늘한 시트가.
순간 거대한 불안감이 물밀듯 밀려 들어온다.
‘다시 중환자실로 간 건가? 아니면, 재수술을 들어갔나? 그 정도로 상태가 좋지 못하단 말인가?’
털썩 무릎이 절로 꿇린다. 단단한 바닥과 무릎뼈가 맞닿아 멍이 들 정도로 큰 충격이 가해졌지만 아무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설마, 익스파이어(expire:사망)는 아니겠지.’
도영은 도리질을 쳤다.
‘아니, 절대 그건 아니다. 아니어야 해.’
붉어진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맺혀 있다. 흐느끼던 가은의 울음소리가 자꾸 떠오른다.
‘그게 그렇게 위험한 수술이었어?’
‘이렇게 헤어질 줄 알았으면 얼굴 한 번이라도 더 볼걸.’
‘손 한 번 더 잡아 줄걸.’
‘우리 혜수 보고 싶어. 혜수야.’
절망감에 어쩔 줄을 몰라 하던 그때, 문이 열리며 바퀴 굴러가는 소리가 들린다.
번쩍 고개를 돌려보니 혜수가 서 있다.
혜수가, 나의 혜수가, 한 손에는 폴대를 돌돌 끌고 다른 손으로는 인스피로미터를 불며 서 있다.
여태 호흡 운동을 하느라 한껏 숨을 들이쉬었는지 얼굴은 빨갛고 볼은 햄스터처럼 잔뜩 부풀린 채.
도영을 발견한 혜수의 입에서 물고 있던 호스가 툭 떨어진다.
“교……수님?”
도영이 여기에 있는 것도, 그 도영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은 것도 충격적인데 눈시울까지 붉으니 그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교수님? 여긴 어떻게 오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