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내가 선택한 길
(95/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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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내가 선택한 길
2022.12.28.
병억의 집.
문이 열리며 굳은 표정의 병억과 그의 아내 경실, 그리고 유민이 들어온다. 그들은 중요한 모임에라도 참석했던 듯 저마다 한껏 꾸미고 있었다.
하지만 모임이 썩 유쾌하지는 않았나 보다. 하나같이 얼굴이 일그러져 있는 걸 보면.
가장 먼저 경실이 소파에 가방을 집어던지고 자신도 털썩 주저앉았다. 열이 받는지 가슴을 툭툭 친다.
“지가 차기 시장이면 다야? 어쩜 그리 목이 뻣뻣한지!”
쩌렁쩌렁 울리는 날카로운 말에 병억이 가사도우미의 눈치를 본다.
“어허, 말 조심해.”
경실은 아차 싶었는지 도우미를 부엌으로 들여보내고는 목소리를 낮췄다.
“툭 까놓고 말해서 우리 집안이 뭐가 부족해요? 정치적으로 끈 없는 거 그거 하난데. 우리가 뭐가 꿀려서 이렇게 납작 엎드려야 하냐고요. 오늘 하는 거 봐요. 우리를 무시해도 유분수지!”
하아, 한숨을 한 번 내쉰 병억이 힘없이 말한다.
“정치적인 끈. 그게 제일 중요하지. 그래서 이 난리를 치는 것 아냐. 그리고 우리 병원이 서울에 있는 이상 그쪽이 갑인 것 맞아. 그리고 최규택이랑 연결된 사람들이 좀 쟁쟁해야지.”
경실은 답답한지 연신 가슴을 쳐댔다.
“그 집 아들 최민우. 이혼을 두 번이나 했다잖아요. 한 번인 줄 알았더니 두 번이었어. 성격 차이라고 말은 하지만, 뭐 다른 하자라도 있으면 어쩌냐고요? 게다가 그 얼굴!”
경실이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또 가슴을 퍽퍽 친다.
오늘 그들은 차기 시장 최규택의 가족과 상견례를 했다.
어쩌다 보니 결혼 발표를 먼저 한, 뒤늦은 상견례였다. 그리고 결혼 전 유민과 규태의 아들 최민우가 처음으로 만나는 날이기도 했다.
경실은 꼭두새벽부터 유민을 깨웠다.
“유민아, 일어나.”
“더 잘래요.”
“자기는! 메이크업 숍에 가야지.”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 있나요.”
“얘는! 시장 며느리가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그리고 첫 만남인데 잘 보여야지. 네 남편 될 사람이잖니.”
풀 세팅을 한 유민은 경실이 굳이 우겨서 산 명품 원피스를 입고 새 구두까지 신고 나갔다.
그러나. 만반의 준비를 하고 나간 병억의 가족과 달리 규택의 가족은 집 앞 슈퍼라도 가는 듯한 복장이었다.
심지어 늦기까지 한 규택은 오자마자 말했다.
“상견례가 세 번째다 보니 편하게 나왔습니다. 이해 좀 부탁드립니다.”
뜬금없는 말에 경실이 되물었다.
“세 번째요? 자녀분이 더 있으세요?”
“아니요. 우리 민우는 외동입니다. 결혼이 세 번째니 상견례도 세 번째지요.”
“세, 세 번이요?”
경실의 빨간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걸 보며 규택이 남 이야기하듯 묻는다.
“왜요, 모르셨습니까?”
“아, 그…….”
“그런데. 그게 문제가 됩니까? 설마 결혼을 못 시키겠다거나?”
“아, 아니, 그건 아닙니다.”
“그렇지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자, 민우야, 인사드려라. 장인, 장모 될 분이시다.”
그러자 여태 규택의 뒤에 가려 있던 민우가 앞으로 나선다.
‘!’
경실은 비명을 지를 뻔한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30대 후반이라는 최민우는 언뜻 보면 50대라고 해도 될 정도의 외모였다.
관리를 전혀 하지 않는지 출렁이는 뱃살과 입가의 불독 살이 눈에 띄었다. 가까이 가면 쿰쿰한 냄새가 풍겼고, 머리는 언제 감았는지 떡이 져 있다.
서, 설마. 군데군데 보이는 하얀 것들은 비듬인가?
“안녕하세요.”
민우는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는 다시 제 아버지 뒤로 쏙 들어갔다.
인터넷에 떠도는 민우의 사진들은 모두 포토샵이었던 건지, 아예 다른 사람이 나타났다.
그 몰골에 병억과 경실, 유민 모두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이후 이어진 식사 분위기 또한 좋지 않은 건 당연했다.
규택은 음식이 나오기도 전에 병억에게 여러 가지를 요구했다.
“우리 민우가 곧 정치에 데뷔를 할 겁니다.”
“그렇습니까.”
“지금은 그를 위한 준비 중인데, 조만간 많이 바빠질 겁니다.”
“네, 기대가 됩니다.”
애써 웃는 병억에게 규택은 쉼 없이 말했다.
“그러니 며느리가 우리 민우를 잘 도와줬으면 좋겠습니다.”
“그건 걱정 마십시오. 제 자식 자랑 같지만, 유민이가 워낙 능력도 뛰어나고 처신을 잘합니다.”
“그래 주면 좋겠네요. 그럼, 병원 일은 언제 관둘 겁니까?”
“예?”
“레지던트 일을 하면서 어떻게 정치인 내조를 합니까. 일찌감치 정리하게 하시죠.”
“하지만 시장님.”
“또 임신도 해야 할 텐데 어떻게 레지던트 생활을 합니까.”
“!”
“그깟 레지던트 한답시고 가정에 소홀한 건 좌시하지 않을 겁니다.”
파르르 떠는 유민을 잠깐 쳐다본 병억이 힘겹게 말을 꺼냈다.
“우리 유민이 나이가 한창일 때라 임신은 그리 급하지 않다 생각됩니다.”
“부모의 나이가 많을수록 아이에게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높다면서요. 특히 엄마의 나이가 중요하지 않습니까? 아, 의사이니 더 잘 아시겠네요.”
“그렇기는 하지만…….”
“민우와 우리 손자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없습니다.”
단호한 규택의 말에 병억은 더는 안 된다 하지 못했다.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을 뿐.
규택 쪽의 조건은 그게 다가 아니었다.
필수 조건으로는 1년 내에 임신을 할 것, 정치적 감을 익혀야 하니 시부모님과 같이 살 것, 남편이 될 민우에게 늘 존경심을 가지고 그의 속옷은 매일 손빨래를 할 것.
이유 또한 기가 막혔는데 장차 큰 인물이 될 사람의 속옷은 아무에게나 맡길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 외 고려해 보면 좋을 조건으로는 민우를 위한 백일 기도 등이 있었다.
그렇게 상견례는 끝이 났다.
그 긴 시간 동안 맛깔난 음식들이 끝없이 서빙되었지만, 유민과 경실은 음식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병억만이 가까스로 술을 몇 잔 마셨을 뿐.
“아이고, 아이고.”
그 당시를 떠올리기만 해도 목이 타는지 경실이 도우미를 부른다.
“아주머니, 여기 냉수 좀요.”
곧 도우미가 물컵을 가지고 나왔다.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켠 경실이 유민에게 묻는다.
“너 그쪽 말대로 할거니?”
“…….”
“의사 관둘 거야? 응?”
“……제가 얼마나 힘들게 의대에 갔는지 아시잖아요.”
“…….”
유민은 고3 시절 음대에 가라는 병억의 말을 듣지 않고 몰래 의대에 지원서를 냈다. 도영이 다니던 한대 의대로.
나중에 유민의 의대 합격 사실을 안 병억이 노발대발했지만, 유민은 의대에 가지 못하면 살 이유가 없다고 단식까지 했다. 결국 병억은 유민의 의대 입학을 허락해 주고 말았다.
물론 이후로는 할 수 있는 모든 지원을 해주었다. 자신의 딸은 어디서든 최고가 되어야 했으니까.
쉽게 관두겠다고 말하지 않는 유민을 보고 병억이 소리를 친다.
“레지던트 수련 안 한다고 의사가 아니라더냐.”
“아버지!”
“그쪽 원하는 대로 당장 관두고 GP(전문의가 아닌 일반 의사)에 만족해.”
“…….”
“쯧. 그것 봐라. 애초에 넌 의대에 가면 안 됐어. 어차피 이리될 것을 뭐 하러 그때 밥까지 굶고 난리를 쳐서는.”
“전 의사 된 것, 전혀 후회 안 해요.”
“그래. 그러니까 GP로 끝내.”
“…….”
말이 없자 병억이 또 다그친다.
“어쩔 테냐?”
유민은 마침내 결심을 내렸다.
“아버지.”
“그래. 그만 둘 거지?”
“다른 건 틀림없이 다 할게요. 거기에 더해 아까 해주면 좋겠다고 한 것들도 다 할게요.”
여태 구겨져 있던 병억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비록 다음으로 이어진 말에 금세 사그라들었지만.
“대신 레지던트는 끝내게 해주세요.”
“뭐?”
“이제 일 년 조금 더 하면 끝이에요. 당직, 전문의 시험 준비 다 하면서 임신도 할 테니까 레지던트 과정만은 제발 끝내게 해주세요.”
“너 정말 이럴 거냐? 이왕 결혼하는 것, 그쪽 조건 다 맞춰주면 좀 좋니?”
“아니요. 제 조건 안 들어 주시면 저도 결혼 안 합니다.”
“뭐라?”
“여기까지 와서 그만둘 수는 없어요.”
외과 의사라는 타이틀은 그만큼 유민에게 절실했다.
이제는 도영 때문이 아니다. 이유는 유민의 인생에 남은 것이 그것뿐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인생에서 스스로 계획하여 이룬 것은 그것 하나뿐이니 끝까지 매달릴 수밖에. 그게 아니라면 자신의 인생에서 도저히 의미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쪽에 그렇게 말해주세요. 제 조건은 그거라고. 그럼.”
단호히 말한 유민은 제 방으로 들어갔다. 쾅, 거세게 문이 닫혔다.
거실에 남은 병억은 아이고 두야, 하며 머리를 짚었다.
***
요즘 재성은 주말에 오프가 생기기만 하면 강천으로 갔다. 데이트도 데이트인데 혜수 꼴이 말이 아니라며 가서 먹을 거라도 챙겨주고 오자는 가은의 바람 때문이었다.
-오빠아~ 이번 주 일요일에도 강천 가는 거지? 혜수 밥 좀 먹여야 해.
-그래. 가자.
메시지를 보낸 뒤엔 회의실 컴퓨터 앞에 앉았다. 이번에는 강천에 가면 또 뭘 먹나, 인터넷을 검색했다.
‘물회? 아니야. 날씨가 추워졌으니 이번엔 짬뽕부터 먹자. 마침 가은이가 매운 걸 좋아한 댔으니까 딱이네.’
검색창에 ‘강천 짬뽕 맛집 오빠랑’을 검색한 재성은 미소를 지었다.
‘훗, 나 꽤 연애의 고수 같은데? 역시, 드라마를 본 시간은 헛되지 않았어.’
그렇게 스스로의 연애력에 심취하고 있을 즈음, 뒤에서 헛기침 소리가 난다. 고개를 돌려보니 도영이 서 있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강천에 가나 보군?”
“네, 교수님.”
“자주 가나 봐.”
“어떻게 아셨어요?”
도영이 재성의 지갑 옆에 높인 영수증들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강천 한대 병원 로비에 있는 카페에서 사 먹은 카드 영수증에 병원 주위 식당에서 사 먹은 영수증들이 줄줄이 놓여 있었다. 지갑 정리를 하다가 버리려고 꺼내놓은 건데 도영이 봤나 보다.
“어쩌다 보니 자주 가게 되었네요. 제 여자친구가 혜…….”
저도 모르게 ‘혜수’를 말하려던 재성은 그대로 꿀꺽 삼켰다. 안도의 식은땀이 주륵 흘러내렸다.
‘휴, 대형사고 칠 뻔했네.’
“아니, 여자친구가 자주 가서 따라가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여자친구가 있었던가?”
“예에. 있습죠.”
잠깐 생각하던 도영은 지갑을 꺼내 카드를 한 장 꺼냈다.
“받아.”
재성은 엉겁결에 까만 카드를 받아 쥐었다.
그런데, 카드가 범상치 않게 생겼다. 자세히 보니 아무나 발급받지 못한다는 블랙카드다.
돈만 있다고 다 가질 수 없는, 사회적인 명예를 더 따지면서 발급해 준다는 카드. 집안이 꽤 큰 사업를 하는 재성인데도 이 카드를 실제로 가진 사람은 처음 봤다.
정작 도영은 별거 아니란 듯한 시선으로 카드를 내밀었지만.
“이건…….”
“카드.”
“네, 네. 카드네요. 하하.”
그건 재성도 안다. 그런데 왜 제게 주느냔 말이다.
“가서 맛있는 것 사 먹어.”
“네?”
“먹고 싶은 거 다 사 먹고 오라고. 가고 싶은데도 가고.”
“왜, 왜요?”
“왜냐고?”
잠깐 뜸을 들이던 도영은 곧 정답을 찾은 듯 명료하게 말했다.
“레지던트 복지 차원에서다.”
“보, 복지요?”
도영의 입에서 결코 나올 수 없는 말이라 재성은 제 귀를 의심했다.
“왜? 불만인가?”
“아, 그, 네? 아니요. 저어언혀 불만 없습니다.”
당황한 얼굴로 벙긋거리는 재성에게 도영이 말한다.
“갖고 있다가 강천 갈 때마다 써. 사고 싶은 게 있으면 사도 좋고. 한도 없으니 금액은 신경 쓰지 말고.”
“진짜요?”
“요즘 자꾸 두말하게 하는데.”
“죄, 죄송, 하, 하지만 제가 감히 어떻게 교수님의 카드 님을 감히…….”
공손하게 두 손으로 카드를 붙잡고 횡설수설하는 재성에게 도영은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
“쓰지 않으면 각오하는 게 좋을 거다.”
“!”
말을 마친 도영은 휙, 회의실을 나가버렸다. 재성은 고상한 윤기를 내는 카드를 보며 흐르는 식은땀을 훔쳐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