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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보고 싶다 (94/110)


94. 보고 싶다
2022.12.24.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날이었다.

늦은 밤, 수술실을 나서던 승원은 울리는 벨소리에 휴대폰을 쳐다보았다. 도영에게서 온 전화다.


‘컨설트 환자 때문인가.’

요즘 도영과의 대화는 환자 이야기가 전부다. 그러니 또 그것 때문인가 생각하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주도영, 왜.”

하지만 들려오는 목소리는 낯선 남자의 것이다.


-안녕하세요, 혹시 이 폰 주인분과 아는 사이세요?

“그렇습니다. 전화 주신 분은 어디시죠?”

승원은 도영이 웬일로 휴대폰을 잃어버렸나 했다. 그런데.


-여기 문라이트 바인데요.

“아, 네.”

그곳은 한대 병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고급 바이다. 승원도 몇 번 가본 적이 있는, 도영과는 거리가 먼, 술을 파는 곳이다.


-폰 주인분이 지금 많이 취하셨어요. 몸을 못 가누셔서요.

“네? 취했다고요?”

승원은 소리를 치다시피 했다.

술은 입에도 대지 않는 도영이 술을 마셨단다. 심지어 만취 상태라니.


-연락처에 가까워 보이는 분이 없으셔서요.

“네.”

아마 직원은 아내, 여자친구, 어머니, 아버지나 애칭 등이 적혀 있으면 그곳으로 전화를 했을 것이다.

하지만 도영은 연락처를 늘 직급과 이름으로 저장을 하니 직원으로서는 누구에게 전화를 해야 할지 애매했겠지.


-가장 마지막에 통화하신 분께 전화하니 이리로 연결되었어요.

“그런가요.”

-저희가 곧 마감을 해야 해서요. 혹시 지금 이분 데리러 오실 수 있으세요?

“알겠습니다. 제가 지금 갈게요.”

승원은 다시 탈의실로 가 옷을 갈아입고 연구실 대신 바로 향했다.

바에 들어가자 어렵지 않게 도영을 찾을 수 있었다. 커다란 덩치의 사람이 높은 카운터 석에 앉아 엎드려 있으니 멀리서도 눈에 띈다.

승원은 도영에게 다가가 그를 흔들어 깨웠다.


“주도영. 주도영, 정신 차려.”

대답 없는 도영의 옆에는 빈 위스키 병이 널브러져 있었다. 안주도 없이 술만 마셔댔는지 과일을 종류별로 담아놓은 안주 접시는 거의 새것이다.

한숨을 한 번 내쉰 승원은 카드를 꺼내 직원에게 건넸다.


“얼마나 마신 겁니까?”

“지난번에 드시다 보관해두신 것 반 병이랑 오늘 새로 깐 것 해서 총 한 병 반 드셨습니다.”

승원은 제 귀를 의심했다.


“한 병 반이요?”

이 독한 술을 한 병 반이나 마셨단다. 게다가 보관해뒀던 것이라니. 술을 마신 게 오늘이 처음이 아니라는 거다.


“얘 여기 자주 옵니까?”

“요즘은 종종 뵙네요. 그래도 오늘처럼 많이 드신 날은 드물어요.”

“…….”

드물다니. 그렇다면 만취한 게 또 오늘 처음은 아니라는 거다.


“알겠습니다.”

승원은 계산을 하고 도영을 어깨에 둘러멘 뒤 바를 빠져나왔다.

도영을 그의 집으로 데려가야 하나, 아니면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야 하나 고민하던 승원은 결국 자신의 연구실로 향했다.

혹시나 컨디션이 안 좋아져 경련이 생기면 봐주어야 한다. 그러니 병원에 있는 게 나을 것이란 생각이었다.

마침 연구실을 같이 쓰는 교수는 주말을 맞아 오늘은 집에 간다고 했으니 잘 되었다.

승원은 낑낑대며 도영을 끌고 겨우 계단을 올라 연구실로 들어갔다.


“무거워. 덩치는 산만 한 게 어쩌자고 그렇게 마셔대서는.”

침대에 던지듯 내려놓자 도영에게서 작게 앓는 소리가 들려온다.


“가지가지 하네.”

타박을 했지만 도영에게서는 당연히 답이 없다. 한동안 도영을 노려보던 승원은 한숨을 쉬며 욕실로 들어갔다.

잠시 뒤, 샤워를 하고 나오자 도영이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있다.

술이 좀 깼는지 눈은 이제 깜빡인다. 다만 미간을 있는 대로 찌푸린 걸 보아하니 기분이 좋지 않음이 확실하다.


“깼냐?”

“내가 왜 여기 있지.”

“네가 술 퍼먹고 쓰러져 있대서 데려온 거 아냐. 네 연구실은 비밀번호를 모르고.”

“네가 왜?”

“바 직원이 나한테 전화를 했더라. 마지막 통화기록이 나래.”

“……쯧.”

도영은 낮게 욕설을 하며 침대에서 일어섰다.

기다란 몸이 앞뒤로 휘청인다. 도영이 움직일 때마다 몸의 모든 땀구멍에서 술이 기화하는 듯 알코올 냄새가 진동을 한다.

승원은 도영의 손을 붙잡았다.


“그냥 더 누워 있어.”

“손 치워.”

도영은 승원의 손을 거세게 쳐냈다. 마치 혐오하는 게 닿기라도 한 것처럼. 그렇게 승원을 한 번 노려본 뒤에는 비틀거리며 문으로 향했다.

여전히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면서 나가려고 기를 쓰는 도영을 보며 승원이 코웃음을 쳤다.


“주도영. 네 기분이 어느 정도로 끔찍할지 나는 모르지. 하지만 한 가지는 알겠는데.”

“…….”

“네가 애꿎은 몸을 혹사시키는 바보 같은 짓을 하고 있다는 것. 그건 알겠네.”

“뭐?”

“그렇게 술만 마셔대면 뭐가 해결이 되는데? 있던 게 없던 일이 되기라도 해?”

도영은 승원을 다시 홱 노려보았다. 몸은 휘청이지만 눈매만은 맨정신인 것처럼 매섭고 날카롭다.


“한승원. 주제넘는 짓은 그만하라고 했을 텐데.”

“뭐?”

“주제넘다고.”

“지금 뭐라 그랬어?”

승원의 언성이 조금 더 높아진다.

기껏 생각해 줘서 충고를 해줬더니 주제넘단다. 화가 안 나고 배기냔 말이다.


“주도영. 나도 너랑 더 이상 엮이기 싫어. 너만 보면 혜수가 떠오르거든. 나도 힘들어지거든.”

갑자기 등장한 이름에 도영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그 이름 입에 올리지 마.”

“주제넘다고? 나랑 이러고 있기 싫다면 오늘 같은 일을 만들지 말았어야지. 애초에 그 직원이 내게 전화를 하게 만들지 말았어야지. 안 그래?”

이제는 소리를 지르고 있는 승원을 보는 도영의 눈매가 점점 험악해졌다.


“요새 병원 사람들이 너 보고 뭐라는 줄 알아? 너 세상 다 산 것처럼 막 나간대. 저렇게 기분 내키는 대로 다니다가 조만간 뒤에서 칼 맞을 거라더라. 아니면 네가 먼저 병원 옥상에서 뛰어내리거나. 오죽하면 정형외과에서 이식혈관 컨설트 필요하면 다 나한테 맡기겠어?”

“내 뒤치다꺼리 하기 귀찮으니 그만하라는 말처럼 들리는데.”

“그게 그렇게 들려?”

“아닌가?”

도영이 코웃음을 치며 비아냥거린다.

승원은 도영에게 다가가 멱살을 쥐고 코앞까지 끌어당겼다. 서늘한 도영의 시선을 힘주어 마주 보았다.


 


“어리광도 작작 부리라고, X끼야. 지금 너만 힘든 줄 알아? 아빠가 그 의사란 걸 알게 된 혜수는.”

“……그 입 닥쳐.”

“사랑하는 아빠가 의료 사고를 일으켰대. 그 후로 실의와 죄책감에 빠져 의사를 관두고 건물 경비원을 하고 있지. 적성, 재능 다 집어던지고 평생 사죄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단 말이야. 그 사정을 이제야 알게 된 혜수의 속은 어떨 것 같아?”

“닥쳐.”

“마찬가지로 존경하는 이모부가 내 친구의 손을 그렇게 만든 그 의사라는 걸 알게 된 나는 어떨 것 같은데?”

“닥치라고 했지!”

도영은 주먹을 쥐고 휘둘렀다. 하지만 승원은 술에 흔들리는 주먹 따윈 가볍게 제압했다.


“물론 네 아픔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 그건 충분히 알아. 이해 못 하는 것 아니라고.”

승원에게 잡힌 손목이 아픈지 도영의 턱이 불끈거린다.


“하지만 널 생각해 주는 사람에게 그렇게 날을 세울 필요는 없잖아. 세상 사람을 다 적으로 돌리고 싶어?”

“…….”

한동안 도영을 더 노려보던 승원은 도영의 손을 놔주었다. 붉어진 손목을 매만지는 도영을 연구실 밖으로 밀어냈다.


“나가. 이제 멀쩡한 것 같으니 네 연구실 문은 충분히 열고 들어갈 수 있겠지. 그리고 다시는 내게 이런 일로 전화 오게 하지 마.”

여전히 말없이 눈에 힘을 주고만 있는 도영을 세워두고 승원은 문을 쾅 닫았다.

들썩이는 숨을 가라앉힌 뒤에는 침대에 털썩 주저앉아 머리를 싸맸다.


“그리고 지금 혜수를 보고 싶어 미치겠는 게 너만은 아니란 말이다…….”

 

승원의 방에서 나온 도영은 비틀대며 자신의 연구실로 갔다.

문이 닫히자 주위가 조용해진다.

똑딱이는 시곗바늘 소리를 세던 도영은 속절없이 또다시 그날의 그 모진 밤으로 빨려 들어갔다.


‘신정섭. 신혜수의 아버지라구요.’


‘신혜수가 신정섭의 딸이라구요.’

 
도영은 손을 들어 귀를 에워쌌다.


“그만해, 제발. 그만하라고!”

저 목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술을 마셨다. 그러면 잠시간은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술이 깬 뒤 찾아오는 더 큰 절망감은 어찌할 수가 없다.


‘제발 그만해…….’

혜수의 아버지가 손을 이리 만든 의사라는 것.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만 해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이제는 그것이 실체가 되어 저를 괴롭힌다. 밥을 먹을 때도, 잠을 잘 때도 어김없이 나타나 말을 건다.

그럴 때마다 도영은 이를 악물고 귀를 닫기 위해 애썼다.


‘그 의사는 의사고 혜수는 혜수다. 둘은 연결 지으면 안 된다.’

이 생각은 혜수와 헤어져서는 안 된다는 결론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그건 순간일 뿐, 또 다른 생각이 연이어 든다.

혜수와 똑 닮았을 그 의사의 얼굴을 보고도 증오를 잊을 수 있을까? 이름만 떠올려도 치미는 울분은 어디다 해소하지?

십 년이 넘는 시간을 발작에 시달렸다. 고통을 참으며 그 의사를 저주하고 원망했다. 그 의사를 찾게 되면 그의 똑같이 대갚음해 주리라 생각해왔다.

그랬던 내가 정말 잊을 수 있을까?

행여 복수고 뭐고 다 필요 없다 생각하다가도 통증이 오면, 죽을 만큼 또 아프게 되면, 다시 그를 원망하게 되면 어떡하지?

그의 팔을 똑같이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어떡하지? 그는 혜수가 사랑하는 아버지인데!


‘제기랄!’

도영은 강하게 침대를 내려쳤다.


‘혜수, 나의 신혜수가 그 의사의 딸이면 난 어떡하란 말인가.’

물론 다르게 생각해 본 적도 있다. 그 의사 덕분에 생긴 후유증으로 혜수와의 인연이 더 엮였으니 어찌 보면 감사하다고. 그러니 그냥 잊어보자고.

또 말없이 사라진 혜수의 행동을 이해해 보려 노력했다.


‘얼마나 두려웠으면.’

혜수는 자신이 손을 이리 만든 의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평소에도 봐 왔다. 그 의사에 대한 분노를 그대로 느꼈을 것이다.

그러니 다가올 현실이 무서웠겠지. 더는 내 옆에 있을 수 없겠다 생각했겠지. 죄책감에 내 얼굴을 보기 힘들었겠지.


‘그래도 나와 해결을 했어야지. 나에게 말을 했어야지.’

혜수가 강천으로 떠난다는 사실을 알고 쫓아갔을 때. 안전벨트를 매고, 시동을 거는 그 시간조차 아깝고 초조해 몸이 절로 덜덜 떨리던 그때.

가장 먼저 느낀 감정은 절망이었다.

이 엄청난 문제를 또 숨길 생각이었다니. 또 내게 알리지 않고 혼자만 껴안으려 했다니.

어찌 보면 배신감이라고 하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날 그렇게 믿지 못했단 말인가? 내가 그렇게 못 미더웠어? 난 네게 어떤 존재지?’

자조적인 비난은 점점 극단으로 치달으며 정신을 좀먹었다.


‘넌 날 너 하나 보듬지 못하는 무능력한 사람으로 만들었어.’

입술 점막을 꾹꾹 씹어낸 탓에 찝찌름한 맛이 느껴진다. 몸을 휩쓰는 무력감에 도영은 한동안 죽은 듯 가만히 있었다.

문제는 그렇게 가만히 있으면 비소하던 조유민의 말이 귓가에 또 파고든다는 것.


‘이런 일로 깨질 거라면 애초부터 딱 그만큼의 사랑이었다는 것 아닐까요?’


‘애초부터 딱 그만큼의 사랑이었다는 것.’


‘딱 그만큼의 사랑.’

 
머릿속을 파고드는 말을 흩트리기 위해 애를 썼다.

하지만. 절망과 분노에 절여진 도영의 뇌는 평소의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생각을 하지 못한 지 오래다.


‘신혜수든, 교수님이든 누가 먼저 헤어지자고 할지 궁금하네요.’


‘혜수의 마음은 얼마나 깊을까요?’


‘누가 먼저 헤어지자고 할지.’


‘혜수의 마음은 깊을까.’

 


“제기랄! 닥치라고!”

침대 프레임을 강하게 내려친 탓에 멀쩡한 왼손마저 발갛게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아픈 줄도 모르고 주먹을 휘두르던 도영은 풀썩 침대 위로 쓰러졌다. 붉게 부푼 손으로 어지러운 이마를 짚었다.


“……신혜수.”

희한한 것은 애증과 같은 간단한 단어로 지칭할 수 없는 혼탁한 감정 속에서도 혜수의 얼굴이 자꾸 떠오른다는 것, 그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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