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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다람쥐와 곰 (92/110)


92. 다람쥐와 곰
2022.12.17.



 


“신혜수, 가지 마!”

‘교수님? 여긴 어떻게!’

“신혜수!”

도영의 목소리가 점점 커져갔다. 이제는 버스에 탄 사람들까지 밖을 내다본다.


“무슨 일이야?”

“누구 찾는 것 같은데?”

“신혜수가 누구지?”

혜수는 지금까지 망설였던 게 무색하게 빠른 속도로 차에 올라탔다.


“가지 마!”

한발 한발 내디딜 때마다 도영의 목소리가 조금씩 가까워졌다. 애절한 그의 목소리가 자꾸 발목을 붙잡는다.


“혜수야, 이리 와!”

자리에 앉지 않고 안절부절못하는 혜수를 보고 운전 기사가 퉁명스레 묻는다.


“저 사람 아가씨 찾는 거요? 내리려면 빨리 내리고. 말했다시피 나 바빠.”

혜수는 거세게 도리질을 쳤다.


“아니요. 저 아니에요. 어서 가주세요.”

자리에 앉은 혜수는 무릎 위에 올려둔 배낭에 얼굴을 깊게 파묻었다.


“신혜수!”

그래도 도영의 목소리는 바로 앞에 서 있는 것처럼 선명하게 들렸다. 혜수는 손으로 귀를 억지로 틀어막아야 했다.


“그래요, 그럼.”

마뜩잖게 도영과 혜수를 번갈아 쳐다보던 기사는 무심히 문을 닫았다.

***

혜수가 강천으로 내려온 지 딱 이주 째 주말.

가은과 재성이 혜수를 보러 오기로 했다. 혜수는 병원 로비로 내려가 그들을 기다렸다.

곧 저 멀리 주차장에서 빨간 털 뭉텅이가 펄쩍펄쩍 뛰며 다가온다.


“혜수야!”

“가은아.”

“혜수야아아아, 잘 지냈어?”

그새 펌을 했는지 더 복슬해진 가은이 다가와 혜수의 품에 폭 안긴다.


“그럼. 난 잘 지냈지. 가은이, 넌?”

“잘 지냈다고?”

혜수의 얼굴을 요리조리 뜯어보던 가은이 걱정스레 묻는다.


“너 잘 지낸 게 아닌데? 얼굴이 말이 아니야. 밥은 잘 먹고 있는 거야?”

“응. 그럼.”

“그런데 얼굴이 왜 이래. 반쪽, 아니 반의 반쪽이야.”

“요새 바빠서 먹을 시간이 없을 때가 많아. 여기 환자 수가 장난이 아니거든. 그럴 땐 거르다 보니 이렇게 됐어.”

“거짓말. 너 주도영 교수님 때문에 힘든 거지?”

“……아니야, 그런 거.”

“아니긴 뭐가 아니야. 넌 아무리 바빠도 먹을 건 챙겨 먹는 애였잖아!”

혜수는 가은을 번쩍 밀어냈다.


“야, 넌 나를 뭘로 보고.”

“내가 너 먹을 거 얼마나 좋아하는지 아는데!”

가은은 혜수가 한자리에서 떡볶이를 몇 인분까지 해치울 수 있는지 떠들기 시작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혜수를 힐끔 거린다.


“저 배에 그게 들어가나 봐.”

“인체의 신비네.”

“먹방 유튜버인가?”

역시, 김가은. 가끔 적인지 아군인지 헷갈리는 애다.

가은을 보며 푸스스 웃던 혜수는 재성을 찾았다.


“재성 선생님은? 왜 혼자 와?”

“주차하러. 나 먼저 내렸어.”

“둘은 잘 지내고 있어?”

그 말에 가은이 두 손을 모으며 눈을 초롱초롱 빛낸다.


“응. 혜수야, 나 이제야 진짜 사랑을 찾은 것 같다.”

얼씨구. 난리 났네.


“재성 오빠는 내 마지막 사랑이야.”

평범한 얼굴을 가진 재성과 더더욱 취미가 맞지 않아 커피를 원샷하고 나왔다더니, 어느새 둘이서 꽁냥거리고 있다. 인생은 참 모를 일이다.


‘하긴, 나도 내가 강천에 오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

그 사이 재성이 휘적휘적 다가온다. 오랜만에 만난 재성은 여전히 곰 같다. 두툼한 덩치의 곰.

그리고 가은은 다람쥐 같으니 겉모습만 봐서는 그리 어울린다 할 수는 없는데…….

순간, 가은이 재성에게 다가가 턱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자 재성은 그 손에 턱을 비빈다.


 
아, 곰을 조련하는 다람쥐인가? 전에 서커스 영상에서 본 것 같기도 하고.


‘그렇게 생각하면 잘 어울리는 것도 같네.’

떨떠름한 표정의 혜수를 본 재성이 손을 흔든다.


“야, 신혜수, 잘 지냈어?”

“네. 그럼요.”

여기서 이러지 말고 뭐라도 마시자는 가은의 말에 셋은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이야기의 시작은 가은과 재성의 근황이었다. 보기에 잘 어울리는 만큼 역시나 알콩달콩 잘 지내고 있단다.


“난 정말 한대 병원이랑 인연이 있나 봐. 혜수 너도 여기에 있고 울 오빠도 여기에 있고.”

“그, 그래.”

요란한 대화가 한바탕 지나갔다. 혜수는 재성에게 슬며시 물었다.


“주 교수님은 잘 계세요?”

“걱정은 되냐?”

대답 없이 눈을 굴리는 혜수를 보며 재성이 한숨을 내쉰다.


“일단 의료 사고, 그거 문제가 좀 커졌어. 소송에서 질 것 같다던데. 자의 퇴원서가 없다며.”

“예? 소송을 계속한다구요?”

혜수는 깜짝 놀라 커피를 놓칠 뻔했다.

소송이라니. 선거 때문에 소송 건 게 아니었어? 그쪽이 이겼는데 왜 계속해?

기철이 수술을 받고 중환자실에 누워 있는 사이, 서울 시장 선거는 끝났다.

결과는 예상했던 대로 야당 최규택 후보자의 당선.

마지막에 기철의 사퇴와 유민과의 결혼 소식이 발표되면서 지지율은 급등하여 과반수가 훌쩍 넘게 당선이 되었다.

지금 서울에는 인수위원회가 꾸려져 최규택의 다음 임기 준비가 한창이다.


“그럼 CCTV는요? 그걸 증거로 제출하면 안 돼요?”

“녹화는 되어 있는데 말소리는 안 들린대. 화면만 봐서는 나가라고 하는 건지 기다리라고 하는 건지 모르겠다더라.”

“그럼 주변 사람들의 증언은요? 그건 못 써요?”

“그것보다는 자의퇴원서가 없다는 것 자체가 더 중요한 사실이니까. 빼도 박도 못하는 팩트잖아. 그리고 원래 의혹을 제기하는 건 쉽지만 반박을 하는 데는 온갖 자료가 다 필요한 법이잖아?”

그건 혜수도 잘 아는 사실이다.

자신에 대한 추문이 쏟아지던 때, 그걸 해결하기 위해 승원은 온갖 증거를 모으려 애썼다고 했다.


“그리고 그쪽. 부장검사까지 나섰대. 아주 제대로 보내버리려나 봐.”

순식간에 어두워지진 표정의 혜수를 보며 재성이 망설이다 말을 잇는다.


“주 교수님 아버지 수술하신 건 알지?”

“네. 알아요.”

“이쪽은 아버님 그렇게 되시고 나서 끈 떨어진 뒤웅박 신세고. 집안에 재산이 아무리 많으면 뭐 해. 소송도 다 정치 싸움이 되어버렸는걸.”

“……수술은 잘 됐어요?”

“수술은 잘 끝났어. 그런데 아직 의식 상태가 스투퍼(stupor:혼미함)야.”

“아직도요?”

“아무래도 뇌에 손상이 왔겠지.”

“그랬겠죠.”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푹푹 쉬던 혜수는 다시 재성에게 물었다.


“그래서 주 교수님은 괜찮으신 거예요?”

“야. 너 정말 주 교수님이 궁금한가 보구나?”

“…….”

“네 생각엔 어때? 괜찮을 것 같아?”

혜수가 묵묵히 손만 만지작거리고 있자 이번엔 재성이 한숨을 내쉰다.


“걸어 다니는 시한폭탄이랄까. 주 교수님 화나면 엄청 무서운 거 알지?”

“…….”

“너도 초반에 많이 혼나봤으니 알 거 아니야.”

“……네.”

“그래도 최근엔 많이 부드러워졌잖아? 난 그게 다 네 덕분이라 생각했거든. 그런데 지금은 다시 되돌아 갔, 아니 더더더 심해졌어. 모두들 조마조마해 하고 있지. 병동도 수술실도 살얼음 판이야. 찍소리도 못 해.”

“그 정도예요?”

“오죽하면 레지던트들도 말을 못 걸어서 환자한테 부탁해서 말 걸어달라고 하겠니. 그나마 환자랑은 대화를 하시거든.”

“……교수님 몸은 괜찮으세요?”

“무슨 몸?”

“음……. 전처럼 식은땀을 흘리신다거나.”

“모르지. 내가 늘 붙어 있는 게 아니니.”

“그럼 병가를 내신 적은요?”

“그런 적은 없어. 그런데 요새.”

다행이다, 하며 안도하던 혜수의 고개가 번쩍 들린다.


“아슬아슬해 보여.”

“아슬아슬하다구요?”

“많이 무리하셔. 쉬지도 않고 환자만 미친 듯이 보고 있어. 뭘 제때 챙겨 먹는 것 같지도 않고.”

“……많이 속상하신 모양이네요. 소송에다가 아버님 일이 겹쳐서.”

그 말을 듣자마자 재성이 코웃음을 헝, 친다.


“그것 때문일 것 같아?”

“…….”

“다들 그렇게 말하긴 하지.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 그런데 내가 보기엔 그게 아닌데.”

“그럼요.”

“넌 정말 모르겠어? 주 교수님이 왜 그러는지?”

재성이 가슴을 퍽퍽 쳤다.


“답답하다, 답답해.”

“…….”

“너랑 주 교수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난 모르겠지만, 그래도 둘이 서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잘 알겠어. 그런데 넌 왜 여기에 와 있는 거야?”

“저희 정리 끝났어요.”

“정리는 무슨. 너 나 보자마자 물은 게 주 교수님 이야기야.”

“…….”

“뭘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해서 그래? 그렇게 머리만 굴리다가는 병난다.”

반박할 말이 없다. 꿀 먹은 벙어리가 된 혜수를 보며 재성이 혜수의 흉내를 냈다. 눈을 새초롬하게 깔고 목소리를 가늘게 한다.


“주 교수님 잘 계세요?”

그 모습에 가은이 아하하학, 숨이 넘어갈 듯 웃는다. 혜수도 걱정과 고민은 일단 잊고 푸핫, 웃고 말았다.

그런데. 배에 힘이 들어가는 순간.


“읏.”

배를 쥐어짜는 느낌에 혜수는 저도 모르게 배를 움켜쥐었다. 얼마 전 쓰러질 때 느낀 감각과 비슷하다.

재성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가은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동동거리기 시작했다.


“야, 뭐야? 진짜 아파? 병난 거야?”

“엥, 아니야.”

하지만 가은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것 같다.


“교수님 보고 싶은 거 참아서? 오빠, 혜수 좀 봐줘, 응?”

혜수는 가은의 명을 받잡아 당장이라도 제 배를 진찰할 것처럼 포즈를 잡는 재성을 향해 손을 내저었다.


“아니에요, 선생님. 이제 안 아파요. 빈속에 커피가 들어가서 잠깐 그랬나 봐요.”

“정말이야?”

“그럼요. 저 의사잖아요. 1년 차지만 이 정도 진단은 가능해요.”

“흐음.”

“진짜예요. 지금은 아무렇지 않아요.”

의심의 눈초리로 보는 재성에게 혜수는 격하게 괜찮음을 알렸다.


“게다가 아프면 응급실이 3분 거리잖아요. 바로 거기로 가면 돼요.”

“야. 넌 여기 사람들을 믿니?”

“하하…….”

“혹시 수술 필요하다 그러면 병가 내고 서울로 와. 괜히 여기서 배 열었다가 나중에 크게 후회하지 말고.”

“그럴 일 없을 거라니까요.”

혜수는 손을 휘저었다.


“이제 서울 병원 얘기 좀 해줘요. 과장님은 여전해요?”

그 후로도 한참을 더 떠든 가은과 재성은 저녁으로 막국수를 먹고 서울에 올라가 봐야겠다 하며 병원을 나섰다.
 

그들을 배웅한 혜수는 사택으로 갔다.

2인 1실로 배정된 곳이지만 외과 레지던트, 특히 여자 외과 레지던트의 수가 적은 탓에 지금은 혼자 쓰고 있다.

벽을 더듬어 스위치를 누르자 적막한 내부가 드러난다. 안에는 덩그러니 놓인 침대 두 개와 책상 두 개, 옷장, 간신히 샤워만 가능한 좁은 욕실이 전부다. 그들마저 오래되어 곳곳의 페인트칠이 떨어져 있다.

아기자기하게 꾸며놓았던 서울의 숙소와는 다르게 짐만 대충 풀어놓고 살던 걸 그대로 보여준다.

문득 느껴지는 한기에 혜수는 몸을 웅크려 양 팔을 쓰다듬었다.


‘춥다.’

요즘 기온이 떨어져 그런지, 조잘대던 가은이 사라져서 그런지 더욱 서늘한 느낌이다.

가은이 간식으로 먹으라며 사준 빵을 덜덜거리는 냉장고에 대충 집어넣은 뒤 침대에 가 누웠다.

혼자 남게 되자 또 재성의 말이 떠오른다.


‘걸어 다니는 시한폭탄 같아.’


‘아슬아슬해 보여.’


‘많이 무리하셔.’

 


‘바보같이. 왜 그러고 있어요.’

도영을 위해 이곳으로 왔다. 그의 행복만을 바라며 사라졌다.

그런데 정작 그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단다. 위태롭기 그지없어 보인단다.

이제 난 뭘 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정말 모르겠어.’

혜수는 손으로 눈을 덮어버렸다. 하도 생각을 했더니 머리가 지끈거린다. 게다가 또 아랫배가 살살 아프다.


‘왜 자꾸 아프지? 요새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그런가.’

배와 머리를 번갈아 가며 문지르던 혜수는 진통제를 한 알 삼키고 방 불을 껐다. 내일은 당직이기도 하니 빨리 자서 컨디션을 회복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었다.
 

강천 분원의 사택 앞에는 넓고 한적한 주차장이 있다. 사택과 대각선으로 위치해, 각도를 잘 맞추면 특정 방의 창이 보인다.

혜수의 방 불이 꺼지고, 오래 지나지 않아 주차장에 대어져 있던 까만 차 한 대가 미끄러지듯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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