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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신혜수, 가지 마 (91/110)


91. 신혜수, 가지 마
2022.12.14.



 
다음 날 아침, 눈을 뜬 도영은 앞에 펼쳐진 광경에 인상을 구겼다.


‘여기가…….’

병원 특유의 천장이 시야 바깥까지 펼쳐져 있고 왼팔에는 수액이 달려 있다.


‘병실인가? 내가 왜?’

급히 몸을 일으켜 보니 병동이 아닌 응급실이다. 물론 그 또한 마음에 안 들기는 매한가지라 미간은 더욱 좁혀졌다.

도영의 움직임에 옆에 엎드려 있던 승원이 고개를 든다. 밤새 여기 있었던 건지 머리에는 까치집을 지었고 눈도 붉다.


“한승원, 여기서 뭐 하는 거지?”

“네 간호.”

“네가 왜? 아니, 내가 왜 여기 있지?”

금방이라도 한 대 칠 것처럼 흉흉한 기색의 도영을 보며 승원이 몸을 조금 뒤로 물린다.

“어젯밤에 네가 발작을 너무 심하게 해서 여기로 데려올 수밖에 없었어. 정신을 잃을 정도로 아파했었거든.”

“제기랄.”

도영은 작게 욕설을 뱉었다.

그토록 숨기려 했던 자신의 치부가 모두에게 드러나게 되었다. 그동안의 노력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늘 그랬지만 나약하기 짝이 없는 자신의 몸이 더더욱 한심스럽다.

도영이 뭘 생각하는지 짐작이 가는지 승원이 급히 이어 말한다.


“네 상태는 아무도 몰라. 옷으로 가린 데다가 진단명도 탈골로 넣어놨고. 마취제는 너무 아파해서 쓴 거니 별문제 없을 거고.”

의외의 호의에 도영의 눈이 커진다.


“다만 탈골 정도로 마취제를 요구한, 엄살이 심한 사람으로는 기억되겠지.”

“상관없어. 내 팔 상태만 숨길 수 있다면.”

삐딱한 도영의 대답에 아, 그러셔, 하고 승원은 어깨를 한 번 으쓱해 보였다.


“자, 여기.”

승원은 보고 있던 태블릿을 건넸다. 태블릿에는 기철의 현재 활력 징후와 들어가고 있는 약물이 표시되고 있었다.


“아버님 수술은 한 시간쯤 전에 끝났고 SICU(외과 중환자실)로 가셨어. 보다시피 상태는 안정적이고.”

“…….”

“어머니는 집에 가셨어. 조금 쉬시다가 다시 오시라 말씀드렸어.”

연이은 승원의 호의에 도영이 태블릿을 내던지며 코웃음을 친다.


“갑자기 왜 이래? 당장 이곳에서 꺼지라던 한승원은 어디로 가고?”

“…….”

“아, 알겠네.”

도영이 또 하, 웃는다.


“그깟 악몽에 벌벌 떠는 내가 불쌍해서 동정이라도 하는 건가?”

“악몽이라니?”

“통증을 못 이겨 마취제까지 맞아야 하는 내가 가엾기라도 해?”

말은 아무렇지 않게 했지만 도영은 절로 몸서리치는 몸을 억지로 눌러야 했다. 지금도 선명히 기억나서다.

어젯밤, 꿈속에 유민이 등장해 제 손을 이리 만든 것은 혜수의 아버지라고 말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그 말에 자신은 또 경련을 일으키고 만 것이다.


“사고 때의 꿈을 또 꾼 거야?”

“아니. 이번에는 말도 안 되는 꿈을 꿨지.”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 아무리 꿈이라 해도 어떻게 혜수의 아버지가 그 의사로 이어지게 되는지.

그러고 보니 앓던 와중 혜수의 목소리를 들었던 기억이 난다.


‘혜수가 내 옆에 있었는데 왜 응급실까지 왔지? 경련이 낫지 않았다는 건가? 아니면 혜수가 있어서 이 정도였다는 건가?’

도영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왜? 뭐 찾아?”

“혜수는 어디 있지?”

“혜수는 왜.”

“어제 내 옆에 있었던 것 같은데.”

“……나한테 혜수 찾지 말라 그랬지.”

“웬일로 고분고분한가 했더니.”

도영은 혜수를 찾으러 가려는 듯 침대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승원이 도영의 가슴팍을 밀치는 바람에 다시 뒤로 넘어갔다.


“혜수가 널 보러 온 건 어제가 마지막이야. 헤어졌으니 이제 잊어. 너희 둘은 어차피 안 돼.”

“건방지기 짝이 없군. 어차피 안 된다니. 네가 뭔데 그걸 정하는 거지?”

픽 입꼬리를 비틀던 도영은 다시 몸을 일으키며 낮게 읊조렸다.


“그 꿈처럼 혜수의 아버지가 내 손을 이렇게 만든 사람이면 또 몰라.”

순간, 승원이 흠칫 놀란다. 그 움직임이 너무나 커 도영이 모를 수가 없었다. 동시에 도영은 이상함을 느꼈다.


“한승원, 뭐야?”

“무, 무슨. 내가 뭐?”

“…….”

집요한 도영의 눈동자를 이리저리 피하던 승원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색한 몸짓으로 커튼을 걷고 나가려 한다.

여전히 의문이 가득한 시선의 도영이 승원의 팔을 덥석 잡았다.


“잠깐만. 뭔가 이상한데.”

“자꾸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네가 더 이상해.”

도영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야. 이상해.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무슨 소리야, 대체. 나 회진 가야 해. 이거 놔.”

승원은 도영의 손을 뿌리치고 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도영의 몸이 무너진다.


“주도영!”

땅으로 떨어지기 직전, 가까스로 승원이 도영을 부축했다.


“너 괜찮아?”

“설마…… 그게 꿈이 아니었던 건가?”

“자꾸 무슨 꿈 이야기를 하는 거야?”

“……그러게. 조금 전까지는 그게 꿈인 줄 알았는데. 현실……이었던 건가.”

도영의 음성은 쩍쩍 갈라져 있었다. 표정은 말하는 것조차 고통스러워 보인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

“어?”

“……어제 조유민이 내게 와 그러더군. 내 손을 이렇게 만든 의사가 혜수의 아버지라고.”

도영이 머리를 손으로 짚었다.


“그게 꿈이 아니었단 말인가?”

여전히 믿고 싶지 않은 사실이다. 그래서 처음엔 지독한 악몽을 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너무나 생생하다. 유민이 내밀던 종이의 촉감, 살을 에는 듯한 오른팔의 통증, 전신에 느껴지던 바닥의 찬 기운까지 모두.


“꿈이 아니라고?”

도영은 얼굴을 손에 묻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아니, 아니야, 그게 사실일 리가 없어. 그럴 리가 없어. 없다고. 제발 아니라고 해줘.”

“…….”

도영을 잡고 있던 승원의 손도 떨리기 시작한다. 숨기려고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온전히 전해지는 진동에 도영이 고개를 들어 승원을 쳐다본다.


“왜, 뭐, 뭘 노려봐.”

“너. 혹시!”

승원은 도영의 시선을 피했지만 도영은 끝까지 그를 따라왔다.


“알고 있었던 건가?”

“어?”

도영은 언제 흐느꼈냐는 듯 순식간에 승원의 멱살을 잡아 끌어올렸다.


“한승원! 너 알고 있었어?”

“뭐, 뭐가?”

“신정섭. 그 사람이 혜수의 아버지란 것!”

“…….”

“그래서 우리는 안 된다, 네가 뭐라도 된 것마냥 떠들어 댔던 것인가?”

“…….”

“사실대로 말해.”

“…….”

“어서!”

“……일부러 숨기려고 한 건 아니야. 네 팔을 생각했을 땐 충격을 주지 않는 게 나을 거라 생각했어.”

“닥쳐. 네가 뭔데 그걸…….”

무섭게 승원을 윽박지르던 도영에게 문득 한 가지 가정이 떠올랐다.

설마, 혹시.


“이것. 혜수도 아는 건가?”

“…….”

“이 사실을 아냐고!”

“…….”

“더는 숨길 생각하지 마!”

결국 승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도 혜수도 얼마 전에 알았어.”

“!”

“혜수가 너희 집에 갔던 날. 그날 처음 알게 됐어.”

“…….”

이제야 퍼즐의 마지막 조각이 맞춰지는 느낌이다.

알겠다. 요즘 혜수가 이상했던 이유.

뺨을 맞고서도 저를 보러 왔던 혜수가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들며 헤어지자고 한 이유.

비가 오던 날, 승원의 집 앞에서 저 대신 승원의 손을 잡았던 이유.

그런 슬퍼 어쩔 줄 모르겠다는, 미련이 잔뜩 남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끝까지 돌아보지 않았던 이유.

혜수도 알았던 것이다. 자신의 아버지가 도영의 손을 이리 만든 사람임을.

승원의 멱살을 잡은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간다.


“지금 신혜수 어디 있어?”

“…….”

“어디 있냐고!”

“…….”

대답하지 않는 승원을 노려보던 도영은 휴대폰을 꺼내 혜수의 번호를 눌렀다. 하지만 혜수의 전화는 묵묵부답이다. 아무리 걸어도 받지를 않는다.

나중에는 수신 거부를 누르는 듯 신호음이 가자마자 끊기고 만다. 이를 빠득 간 도영은 다시 승원을 노려보았다.


“신혜수 어딨냐고.”

마침 도영의 상태를 체크하러 온 간호사가 도영의 물음에 대신 대답했다.


“신 선생님이요? 강천 가신다던데요. 그런데 신 선생님이 뭐 잘못하셨어요? 왜 찾으세요.”

“강천?”

“네. 강천 분원에 파견 가신다고 며칠 전에 말씀하시던데요. 모르셨어요? 오늘부터 강천 근무랬는데.”

“……강천?”

승원을 잡은 도영의 손에 힘이 스륵 풀렸다.


“강천이라고?”

강천이 어떤 곳인가. 한 번 갔다 하면 다시 돌아오기 힘든, 서울 본원 사람들이 우스갯소리로 조선 시대의 유배지인 제주도라 말하는 곳 아닌가.


“거길…… 스스로 내려갔다고?”

“…….”

“설마 나 때문에 갔단 말인가?”

도영의 어깨가 사시나무 떨리듯 떨린다. 승원은 불안정해 보이는 도영을 강하게 잡아 눌렀다.


“주도영, 혜수 그냥 놔둬.”

하지만 도영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언제 갔지? 어젯밤까지만 해도 목소리를 들었는데.”

“……오늘 아침에.”

승원은 손목을 흘긋 쳐다보았다.


“곧 출발하겠네. 제발 그냥 놔둬. 너랑 같이 있으면 숨도 못 쉴 정도로 힘들대. 그러니 혜수를 제발 가만히 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도영이 팔에 꽂고 있던 주삿바늘을 뽑아냈다.


“어머, 선생님!”

바늘이 뽑힌 자리에서는 피가 그대로 흘러나와 팔을, 바닥을 붉게 적셨다.


“주도영!”

“헉, 교수님!”

간호사가 알코올 솜을 찾아 부산하게 움직였지만 도영은 그대로 몸을 돌려 응급실을 빠져나갔다. 저를 부르는 승원과 간호사의 외침을 뒤로 한 채.
 

혜수는 터미널의 의자에 앉아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도 알아. 지금 난 비겁하다는 것.’

이렇게 사라지는 것은 그냥 도망치는 것이다. 해결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 현실이 힘드니 그저 외면하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너무 힘들어. 견딜 수가 없어.’

게다가 자신은 더 이상 도영에게 쓸모가 없게 됐다. 그의 곁에 붙어 있을 조금의 이유조차 없어져 버렸다.


‘……이 정도라면 도망쳐도 되지 않을까?’

스스로의 행동을 합리화하며 슬그머니 떠오르는 도영에 대한 미련을 억눌렀다.


‘그래. 이게 최선이야. 어차피 우린 헤어졌어. 이렇게 그대로 끝내면 돼.’

정각이 되고 기다리던 강천행 버스가 도착했다.

혜수는 짐을 챙겨 느지막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평일 오전이라 버스가 널찍할 줄 알았는데 만석이란다. 덕분에 긴 줄의 제일 끝에 가서 서야 했다.

한 명씩 버스 위에 오르기 시작했다. 줄은 금세 줄어들어 혜수가 버스에 오를 차례가 되었다.

뒤를 돌아보니 아무도 없다. 자신이 마지막 손님인 것이다.


‘가자.’

하지만 선뜻 계단에 발을 올리지 못하고 망설이니 운전기사가 묻는다.


“아가씨 어디 가요? 이거 강천 가는 거예요.”

“네, 저도 강천에 가요.”

“그럼 어서 올라타요. 아가씨만 타면 출발이야. 우리 늦었어. 빨리 가야 해.”

“……네. 죄송합니다.”

혜수는 짐가방을 든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뭘 망설여. 신혜수, 빨리.’

혜수가 계단에 막 발을 올리자 정말로 급한 듯 운전기사가 안전벨트를 매고 시동을 켠다.

그때.


“신혜수!”

절규에 가까운 외침이 들렸다.

익숙한 목소리가 부르는 익숙한 이름.


“가지 마!”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니 승강장 입구에 도영이 우뚝 서 있다.

멀리서도 느껴지는 존재감이 엄청난 사람, 그의 도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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