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혜수의 아버지
(89/110)
89. 혜수의 아버지
(89/110)
89. 혜수의 아버지
2022.12.07.
“이, 이, 이, 이!”
화면에는 한대 병원장 조병억의 딸 조유민과 최규택 후보자의 아들 최민우와의 결혼 소식이 띄워져 있었다.
헤드라인은 [이제야 되찾은 나의 진짜 사랑].
기사는 유민이 제보한 실제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되었다는 문장으로 시작되었다.
본문은 눈 뜨고는 못 볼 지경이었다.
간단히 요약하면 실제 유민이 어릴 적부터 마음에 품고 있던 사람은 집안 모임에서 만난 최민우였으며, 그동안은 아버지의 뜻대로 도영과의 결혼을 준비해왔다는 것.
하지만 파혼을 하게 된 지금, 더 늦기 전에 어릴 적 사랑을 찾고 싶다는 것.
원치 않는 결혼으로 멍들어 있던 유민의 마음을 보듬어 준 민우는 한 줄기 빛과 같은 사람이라는 내용이었다.
“네 이놈, 네가 감히!”
병억이 킬킬 웃는다.
-자아, 내가 친절히 설명해 줘볼까. 이렇게 되면 내 쪽 표가 최규택 후보자에게로 넘어갈 테지? 그러면 시장은 누가 된다?
“이, 이!”
-이건 일곱 살짜리도 계산할 줄 아는 거지?
“너, 너!”
-그러게 모든 일은 마무리를 잘 지어야지. 화장실 들어갈 때랑 나올 때 마음가짐이 그렇게 홱 달라져서야 쓰나, 쯧쯧.
“이, 이, 이!”
-난 이 씨가 아니고 조 씨요. 크하학학.
자신의 농담이 마음에 든 듯 병억이 또 킬킬 웃는다.
-그럼, 선거 때까지 잘 지내보시오. 발버둥 쳐도 해결이 될까 모르겠다만.
뚝, 전화는 끊겼다.
“이놈이! 감히!”
시뻘게진 얼굴로 숨을 몰아쉬던 기철이 순간 뒤로 휘청인다. 외마디 비명과 함께 가슴을 움켜쥔다.
“으윽!”
가슴을 쥐며 헉헉대던 기철은 바로 뒤에 있던 의자에도 앉지 못하고 바닥으로 쓰러졌다.
“후보자님, 후보자님? 괜찮으십니까?”
실장과 비서가 부축해 주었으나 기철은 제대로 다리에 힘을 주지 못했다.
“으, 윽.”
“후보자님, 정신 좀 차려보세요, 네?”
“으윽.”
“후보자님, 후보자님!”
“으…….”
“왜 이러시지? 안 되겠다. 119, 119 불러!”
시간이 흐르고 119가 도착했을 때. 기철에게서는 조금의 호흡도, 맥박도 느껴지지 않았다.
한대 병원의 응급실. 집중치료실은 도영의 지휘하에 환자를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제세동기 바로 쓸 수 있게 해주십시오.”
“네, 교수님.”
“환자 오면 제가 바로 인투베이션(intubation:기도내삽관) 합니다. 그동안 끊기지 않게 심폐소생술을 해주십시오.”
온갖 약물과 수액을 줄줄이 세팅해둔 그때, 응급실의 문이 활짝 열리고, 침대에 실린 기철이 들어온다.
“연락드렸던 급성심근경색 환자입니다!”
기철의 위에는 구조 대원이 달라붙어 심폐소생술을 하고 있었다.
여태 의연한 모습으로 준비를 하던 도영은 저도 모르게 살짝 비틀거렸다.
익숙한, 늘 하던 심폐소생술이지만 기철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낯선 광경이었기에.
“이쪽으로요!”
곧바로 집중치료실로 옮겨진 기철의 몸에 순식간에 온갖 장비들이 매달렸다.
“산소 연결했습니다.”
“심전도 붙였습니다.”
도영은 심전도를 읽었다.
“브이 핍(ventricular fibrillation:심실세동).”
예상했던 대로 심실세동이다. 심근경색, 즉 심장에 원활한 혈액의 공급이 되지 않으니 심장이 경련을 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제세동 하겠습니다.”
“네, 교수님!”
“200J 차지.”
곧 충전이 완료되었다는 초록빛 램프가 빛난다. 도영은 크게 외쳤다.
“모두 손 떼세요.”
동시에 힘없이 늘어져 있는 아버지의 가슴에 제세동기를 갖다 대었다.
덜컥, 온기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몸뚱이가 크게 요동친다. 하지만, 여전히 심실세동이다.
“비켜.”
도영은 인턴을 밀어내고 직접 기철에게 달라붙어 가슴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어느새 갈비뼈가 부러졌는지 덜그럭거리는 느낌이 고스란히 전달된다. 소름 끼치는 그 감각에 도영은 이를 악물고 외쳤다.
“다시 제세동 합니다. 300J 차지.”
그렇게 몇 번 더 제세동을 하고, 흉부 압박을 했다.
그제서야 기철의 심장은 다시 제대로 뛰기 시작했다.
“약물은 계속 유지합니다. 30분 이상 이 상태 유지되면 바로 심혈관 촬영실로 옮깁니다.”
각종 지시를 내린 도영은 가까스로 두 발을 옮겨 집중치료실을 빠져나갔다.
응급실 밖, 주저앉아 울던 은숙은 도영을 보고 몸을 일으켰다.
“도영아…….”
“평소 아버지가 가슴이 아프다고 하진 않으셨습니까?”
“아프다고는 안 했어. 가끔 소화가 안 된다고만 했지. 게다가 소화제를 먹으면 금세 가라앉기도 했고.”
“증상이 비슷한 경우가 있습니다.”
“난 정말 체한 건 줄로만 알았지 뭐니. 재작년에 검진할 때도 다 괜찮았었고. 내가 병원에 가자고 더 강력하게 말했어야 했는데.”
“…….”
“앞으로는 어떻게 되는 거니?”
“막힌 혈관 부위와 정도에 따라 다르겠지만 수술을 하거나 스텐트를 넣어 넓힐 겁니다.”
“수술? 그, 그럼 네 아버지 선거는 어쩌니?”
“중단해야 합니다.”
심정지 후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기철이다.
병억이 저쪽 편에 붙은 마당에 당선 가능성도 적지만 혹시 당선된다 하더라도 시장직을 원활히 수행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아니, 119가 도착하여 심폐소생술을 시작한 시간을 보면 후유증이 남을 가능성이 훨씬 크다.
“내일 아침 바로 사퇴를 발표하도록 하는 게 좋겠습니다.”
기철의 사퇴로 일어날 파장을 조금이라도 줄이려면 빨리 발표하는 것이 나았다.
“이를 어째, 그거 하나 바라보고 살아온 사람인데. 어쩌면 좋아.”
은숙이 자꾸 흐르는 눈물을 훔쳐냈다.
“내가 좀 더 잘 살폈어야 했는데. 어쩌면 좋아, 으흐흑.”
심혈관 조영술 결과, 기철의 응급 관상동맥 우회로 이식술이 결정되었다.
심장을 둘러싸는 가장 중요한 혈관 셋인 우관상 동맥과 좌전하행 동맥, 좌회선 동맥 모두가 80퍼센트 이상 막혀 있었다. 게다가 좌전하행동맥의 막힌 부위 위로는 동맥류가 존재해 스텐트를 넣을 수가 없었다.
급작스런 전개에 말을 잃고 서 있는 도영에게 흉부외과 레지던트가 다가온다.
“동의서에 서명은 교수님이 하십니까?”
도영은 말없이 동의서들을 받아들어 서명을 했다.
아버지의 수술 동의서, 전신마취 동의서뿐만 아니라 고위험 수술로 인한 수술 중 사망 가능성에 대해 인지했다는 것까지 모두 서명해야 했다.
이후 기철은 곧바로 수술실로 옮겨졌다.
수술실 7번 방.
개심술을 위해서는 환자의 몸에 장착해야 할 것이 많다. 덕분에 기철은 온갖 관을 몸에 꽂은 채 싸늘한 침대에 누워 있었다.
띠띠띠, 모니터에서 울리는 심박동 소리만이 기철의 숨이 붙어 있음을 알려주었다.
차가운 소독약이 상체를 모두 뒤덮고, 부직포로 된 파란 포들이 기철의 몸을 차례대로 덮었다.
머리맡에 서 있던 도영은 하얗게 새어버린 기철의 머리카락을 수술 모자 안에 집어넣어 주었다.
성북동 본가에서 기철과 싸우고 나오던 날, 아버지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제대로 쳐다봤던 날. 그때만 해도 흰머리는 없던 걸로 기억하는데.
복잡한 눈빛으로 기철을 보고 있는 도영에게 마취과 간호사가 조심스레 말을 건넨다.
“교수님, 눈에 테이프도 붙여야 해요.”
“저 주십시오. 제가 하겠습니다.”
“네, 여기.”
간호사가 거즈와 테이프를 건네준다. 도영은 눈물이 고여 있는 기철의 눈을 조심스레 닦아내고 눈을 보호하는 테이프를 붙여주었다.
“메스.”
수술이 시작되었다.
칼이 피부를 갈랐다. 붉은 핏자국을 전기 소작기가 지져나간다.
미처 빨아들이지 못한 살을 태우는 연기가 수술실 안에 퍼졌다. 도영은 그 매캐한 냄새를 고스란히 맡을 수밖에 없었다.
의사의 손은 분주히 기철의 가슴 위를 오갔다. 피하지방과 골막까지 갈라내니 복장뼈가 드러난다.
“쏘우(saw:톱) 주세요.”
흉부외과 교수가 톱을 받아들었다. 날카로운 톱날이 기철의 가슴 한가운데에 다가갔다.
지이이이잉. 톱날이 복장뼈를 가르기 시작하고 거친 소리가 귀를 긁는다. 격한 톱질에 기철의 가슴이 위아래로 들썩였다.
더 이상은 볼 수가 없다. 도영은 수술실을 박차고 나갔다.
보호자 대기실은 텅 비어 있었다. 탈진하기 직전까지 울어대는 은숙을 보다 못한 비서가 데리고 나갔을 것이다.
도영은 힘없이 의자에 등을 기댔다. 동시에 TV에서는 정각을 알리는 소리와 함께 뉴스가 시작되었다.
“안녕하십니까, 오늘의 뉴스…….”
아나운서의 인사말이 끝났다. 화면이 전환되면서 노래가 나오더니 본격적인 뉴스의 시작을 알린다. 제일 먼저 등장한 사람은 익숙한 얼굴이다.
‘아버지.’
기철이 심근경색으로 수술에 들어갔다는 속보였다. 기철의 현재 상황과 그에 대한 자료화면들이 이어진다.
도영은 아직은 검은 머리인 화면 속 기철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대체.’
허망하다. 덧없다. 기철은 저 높이 떠 있는 자신만의 태양을 향해 돌진하다가 결국 불타버렸다.
‘대체 왜 그랬습니까. 고작 이렇게 되어버릴 것을.’
화면 속 기철의 얼굴을 바라보는 사이 속보는 끝나버렸다. 다음으로 전해지는 뉴스는 며칠 뒤 있을 서울 시장 선거에 관한 내용이다.
“주기철 후보자에 이어 2위로 꼽히던 최규택 후보자가…….”
도영은 채널을 돌렸다. 하지만, 어떤 채널로 가도 또 기철의 얼굴만이 보인다.
각 방송사의 아나운서는 무표정한 얼굴로 쾌유를 빈다는 말을 전했다. 그들의 입에서 기철의 이름이 나올 때마다 속이 뒤집힌다.
도영은 그냥 TV를 꺼버리고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제길.’
지끈거리는 머리를 가까스로 참고 있는데, 어느 순간 앞에서 인기척이 느껴진다.
고개를 들어보니 유민이 앞에 서 있다.
“교수님, 괜찮으세요?”
도영은 기분이 좋지 않은 만큼 아무렇게나 대꾸했다.
“다신 내 주위에 얼씬도 말라 경고했을 텐데.”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소식은 벌써 들었지 않나. 내 아버지는 사퇴를 할 거다. 그러니 이젠 날 이렇게 찾아와도 네게는 득 될 것이 하나도 없어.”
“선거 때문이 아니에요.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어요.”
“그렇다면 더욱 들을 이유가 없군.”
도영은 의자에서 일어나 그대로 대기실을 나가려 했다. 하지만 유민이 따라와 옷자락을 잡는다.
“잠시만요, 잠시면 돼요. 이제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테니까, 다시는 말을 걸지도 않을 테니까 이 말만 들어주세요.”
유민이 절실하게 매달렸지만 도영은 매정하게 손을 쳐냈다.
“치워.”
그렇게 저를 지나가 버리는 도영을 보며 유민은 더욱 독하게 숨을 들이켰다.
“교수님의 사고에 대해 아는 게 있어요.”
“!”
그제야 도영은 유민을 돌아보았다.
“방금 뭐라고 했지?”
“배구 선수로 활동하실 때 교통사고가 크게 나서 어머니가 수술을 했다는 것, 그리고…….”
주위를 살핀 도영은 급히 대기실의 문을 닫았다. 머리칼이 곤두설 정도로 커다란 소리가 쾅 울렸다.
“너,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야?”
“그 사고로 교수님은 선수에서 물러났고, 어머님은 수술이 잘못되어 다리에 장애를 갖게 되신 거요. 그리고 교수님은 그 의사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되었었다는 것.”
“……그게 다야?”
“또 다른 게 있나요?”
“…….”
다행히 유민은 도영이 가진 팔의 문제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 같다.
“그런데? 지금 그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저, 그 의사, 신정섭. 알아요.”
“웃기지 마. 내가 그렇게 찾았는데 찾지 못했어. 애초에 그런 의사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사라졌었단 말이다. 그런데 네가 어떻게 안다는 거지?”
“찾기 힘드셨을 거예요. 그분은 지금 의사를 관뒀으니까요.”
크게 동요하는 도영을 보며 유민은 싱긋 웃었다.
“그 수술 이후, 그 의사는 스스로 가운을 벗었어요. 이후 회사를 돌아다니며 빌딩 경비원을 했죠.”
그 말과 동시에 유민은 가방에서 종이를 한 장 꺼내 읽기 시작했다.
“이름 신정섭. 정형외과 전문의. 한주 수도병원에서 마지막으로 근무. 현재 서울 종북구의 다나 빌딩 경비실에서 오 년째 근무 중.”
도영은 종이를 잡아채 바닥으로 던졌다. 아무렇게나 구겨진 종이가 바닥에서 나뒹군다.
“내가 그 사람을 못 찾은 이유를 알겠군. 병원만을 뒤졌으니 찾을 리가 있나. 그런데 조유민. 이걸 내게 내미는 이유가 뭐야.”
“알려드려야 해서요.”
“이 의사와의 일이라면 내가 알아서 해.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지.”
유민은 입술을 올려 웃으며 도영에게 한 발짝 더 다가갔다. 그 모습이 소름 끼쳐 도영은 저도 모르게 등을 곧추세웠다.
“아니요. 알아서 못하시니 알려드리는 거예요.”
“날 화나게 하는 게 목적이라면…….”
“이 사람. 신혜수 아버지예요.”
“뭐?”
“신정섭. 신혜수의 아버지라구요.”
“뭐라고?”
“신혜수가 신정섭의 딸이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