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단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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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단교
2022.12.03.
가을로 접어들며 밤공기가 차갑다. 비까지 맞으면 순식간에 체온을 뺏길 텐데. 그럼 팔이 또 아파질 텐데. 어쩌자고 저러고 있느냔 말이야.
발을 동동 구르던 혜수는 고민 끝에 승원의 집 문을 두드렸다.
“혜수야, 불렀어?”
“오빠.”
“응?”
“부탁이 있는데.”
“뭔데?”
“주 교수님한테 우산 좀 갖다 드려 줄 수 있어?”
승원의 표정이 굳는다.
“……도영이한테? 왜?”
“교수님 비 맞으면 안 돼. 팔 때문에. 그런데 계속 골목에 서 계셔.”
“…….”
“이젠 내가 손 못 잡아 주니까. 아프면 안 되잖아. 이렇게 비 맞으면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
“…….”
“부탁 좀 할게, 오빠. 응?”
반복되는 간절한 말에 승원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내가 가져다주라고 했다 하지 말고.”
“…….”
“부탁해.”
다시 집에 들어가 우산과 새 수건을 챙겨 나온 승원은 밑으로 내려갔다.
혜수는 바깥을 내다보았다.
곧 우산을 든 승원이 골목에 나타났다. 승원은 도영에게 다가가 우산을 씌워줬고 수건도 건네줬다.
도영은 기가 차다는 표정을 지으며 승원의 손을 뿌리쳤지만, 승원은 끝까지 도영의 손에 우산과 수건을 쥐여줬다.
도영은 다시 안으로 들어가는 승원에게 무어라 소리를 거세게 질렀고 승원도 무어라 대꾸한다.
하지만 혜수가 있는 곳까지는 들리지 않는다. 도영의 말, 음성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게 없는데 들을 수가 없다.
‘아아.’
혜수는 계단에 주저앉고 말았다. 시리고 아픈 한기가 심장을 쥐어짜 견딜 수가 없었다.
***
L 호텔.
그곳의 7층에는 VVIP인 회원들을 위한 은밀한 라운지가 있다. 삼중으로 된 보안 장치를 지나서야 접근할 수 있는 곳이다.
라운지 제일 안쪽에 있는 어두컴컴한 방 안, 병억과 기철은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올해 봄, 아름다운 꽃이 피던 날. 공동의 목표를 향하던 때의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온데간데없다. 지금은 서로를 향한 날 선 탐색으로 방 안의 분위기가 한계까지 얼어붙어 있을 뿐이다.
병억이 먼저 큰소리를 땅땅 친다. 이렇게 된 마당에 목소리를 높여야 조금이라도 남는 게 많을 거란 계산에서다.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우리 딸은 지금 일방적인 파혼으로 이미지가 바닥까지 떨어졌습니다!”
더불어 내 장관 자리도 물 건너갔다! 라는 말이 목 끝까지 나왔지만 간신히 꿀꺽 삼켰다.
“이런, 원장님. 그게 무슨 소립니까. 도영이가 모든 책임을 진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파혼의 이유 또한 의료 사고의 피의자라는 입장에서 상대방에게 예의를 지키기 위함입니다. 그러니 이미지가 떨어질 일은 없을 텐데요. 그리고.”
기철이 던지듯 물컵을 내려놨다.
“누가 그 여자애를 그렇게 궁지에 몰라고 했습니까?”
“무슨 소립니까?”
“모를 줄 알았습니까? 얼마 전 병원 로비에서 피켓 시위한 것. 그쪽이 주도한 일 아닙니까?”
지금껏 당당하게 소리치던 병억이 눈을 이리저리 굴린다.
“나, 난 모르는 일입니다.”
“분명 도영이가 반드시 결혼을 해야 할 정도로만, 딱 그 정도로만 겁을 줘야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크흠.”
“일을 이리 만든 분이 그리 당당하면 안 되지요.”
“큼. 아, 글쎄. 난 모르는 일이라 하지 않습니까.”
머리를 긁적이던 병억이 인심 쓰듯 말한다.
“거 이미 지나간 일은 잊어드릴 테니,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기철은 말을 마저 듣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각자 갈 길 갑시다.”
전혀 생각지 못한 말에 병억이 새된 소리를 냈다.
“후보자님!”
“선거를 포기하지는 않을 겁니다. 다행히 내 이미지가 그리 나쁘진 않아 박빙이기는 하니.”
결혼을 전제로 단단히 얽던 것이 무색하게 손쉽게 저를 내치는 기철을 보며 병억이 가까스로 목소리를 내었다.
“자, 잘 생각하십시오. 이렇게 저와 헤어지면…….”
“뭘 생각해? 이미 다 끝난 것을.”
“저, 절 놓치면 후보자님은 무사할 것 같습니까!”
병억의 목에 핏대가 선다. 하지만 기철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지금 누가 누굴 협박해!”
쾅, 기철이 내려치는 주먹에 룸 전체가 진동을 한다.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우리 둘 사이에 결혼 이야기 말고 오간 게 또 있나? 아, 그쪽은 내 미래를 기대 삼아 한 게 많겠지만. 그동안 해 처먹느라 수고 많았습니다.”
“!”
그렇게 단교를 선언한 기철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룸을 떠났다.
홀로 남은 병억은 담배를 잘근잘근 씹었다.
‘저놈이 감히 날 배신해. 내 오늘의 치욕은 절대 잊지 않는다. 너랑 주도영, 가만히 안 둬.’
어떻게 하면 주 씨 집안을 구렁텅이로 넣어줄까 고민하던 병억은 순간 담배를 집어 던졌다. 지금은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걸 깨달아서다.
‘주기철에 대한 복수는 차차 생각하고.’
시장 선거가 이제 이 주 뒤다. 빨리 결정을 내려야 한다.
‘우리 유민이를 누구에게 보내야 하나.’
늙고 능력 없는 자신이 장관이 될 방법은 여전히 유민뿐이다.
병억은 일단 휴대폰 속 인맥 별로 정리된 연락처를 검색했다. 누가 좋을까. 이번에는 어떤 줄을 잡아야 할까.
“보자……. 여당 쪽엔……. 김 의원? 아니야. 이 사람은 집안에 돈이 너무 없어.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니지. 그럼 박 의원? 흠, 아들이 결혼을 했던 것 같은데. 정 의원은 힘이 너무 약하고.”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나 고르던 병억의 눈에 한 사람의 이름이 눈에 띄었다.
“최규택 후보자!”
이번 선거에서 기철의 반대쪽 당, 야당에서 출마한 사람으로 두 번째로 지지율이 높은 사람이었다. 물론 기철이 이리된 지금은 기철과 박빙의 지지율을 보이고 있다.
병억은 머릿속으로 급히 계산기를 두드렸다.
‘그럼 내가 최규택과 연을 맺게 된다면 최규택이 가볍게 당선되겠지?’
마침 그에게는 이혼한 아들이 있다.
‘딱이군.’
병억은 망설임 없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
시간은 빠르게 흘러 선거를 일주일 앞둔 날. 가은이 운영하는 청담동의 고급 클럽에서는 작은 파티가 열리고 있었다.
“혜수야, 생일 축하해.”
화려한 장식 아래 생일 축하 문구가 적힌 모자를 쓰고 있는 혜수에게 가은이 선물을 건넸다.
“고마워. 그런데 나 파티 안 해줘도 된다니까.”
“왜? 매년 했잖아. 이렇게 꿀꿀할 때일수록 더 잘 챙겨야 하는 거라고. 그렇지, 오빠?”
가은이 옆에 앉은 재성에게 묻는다.
“그건 그래.”
단박에 고개를 끄덕이는 재성을 보며 가은이 환히 웃는다.
“거봐! 우리 오빠가 그렇다잖아.”
“아, 뉘에 뉘에. 그러시겠죠.”
그날, 피켓시위 현장에서 재성이 가은을 구해준 날. 가은은 콩깍지가 제대로 쓰였는지 엄마를 통해 재성과 다시 만남을 가졌다.
그 이후로 사귀기로 한 재성과 가은은 지금처럼 닭털을 뿌리며 솔로의 마음에 불을 지피는 중이다.
“오빠, 우리 이번 주 토요일엔 뭐 하지?”
“나 <그들이 없는 세상> 정주행해야 하는데.”
“가평에 별장 있는데. 거기 갈까?”
“가평? 가평이라고?”
“응.”
“3년 전에 HBC에서 한 드라마 알아? 제목이 <가평에서 생긴 일>이던가. 그거 봐도 되고.”
“거기 가면 바비큐도 할 수 있고 수상 스포츠도 할 수 있어. 바나나 보트 같은 거.”
“아! 이번에 새로 나온 드라마도 있는데. 그 드라마 제목이 <바나나는 왜 복숭아가 될 수 없을까> 이건데.”
“제목 되게 특이하다?”
둘의 대화를 보고 있는 혜수의 표정이 점점 요상해진다.
지금 이분들 서로 대화를 하고 있는 건가? 자기 할 말만 하는 것 같은데.
아닌가, 내용을 보면 묘하게 연결이 되는 것 같기도 한데……. 통하는 건가, 그럼?
혼란한 와중 가은이 꺄르륵 웃으며 박수를 친다. 드디어 재성과의 대화에서 결론을 내렸나 보다.
“좋아! 그럼 가평에서 낮에는 바나나 보트를 타고 저녁엔 바비큐, 그다음엔 <그들이 없는 세상> 정주행 나랑 같이하기로 결정.”
그럼 가은을 보며 재성은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가은이 네가 나랑 같이 드라마를 봐줄 줄은 몰랐어.”
“무슨 소리야. 난 원래 예술에 조예가 깊다고.”
“역시, 우리 가은이.”
혜수는 보이지는 않지만 존재함이 분명한, 허공에 떠다니는 하트를 손으로 휘저었다.
“저기요, 여러분. 내 생일 축하하러 만나자고 한 거 아니었어요?”
“맞아, 정말 축하해.”
가은이 배시시 웃는다.
“……그래. 너라도 웃어라. 웃으니까 보기는 좋네.”
그 말에 가은이 재성을 향해 윙크를 한다. 그 윙크를 받은 재성은 헤벌쭉 웃었고 혜수는 마셨던 술이 올라오는 느낌에 몇 번 구역질을 했다.
“근데 네 생일 다음 달이잖아. 왜 오늘 만나자고 했어?”
“아, 그거? 나 이제 서울에 없어.”
남 얘기하듯 가벼운 말투에 가은은 귀를 의심했다.
“어?”
“강천 가려고. 강천으로 파견 근무 신청했어. 다음 주부터 서울에 없어.”
“강천을 간다고? 혜수 네가 왜?”
가은에 이어 재성도 눈을 번쩍 뜬다.
“진짜? 본원 레지던트가 굳이 거길 왜 가? 설마 네가 신청한 거냐?”
“네.”
“왜?”
“그냥요. 서울에 있기 싫어서요. 강천 가서 바다도 보고, 회도 먹고. 좀 쉬다 올게요.”
“주 교수님 때문이야?”
“…….”
“둘 얘기는 들었는데. 꼭 거길 가야 할 필요까지 있어? 강천은 쉴 수 있는 곳이 아니야. 생지옥이래. 사람은 없지 환자는 미어터지지 수술방은 부족하지, 마취과 의사는 방 안 주겠다고 난리지. 스텝들 실력은 어후, 말도 못 해. 거긴 안 갈 수 있으면 안 가는 게 낫다고.”
“…….”
“그리고 가는 건 쉬워도 오는 건 어렵다? 한 번 가면 서울엔 다시 못 올지도 몰라.”
“거기 가면 수술은 많이 할 수 있다던데요.”
“그건 그렇지. 치프만 돼도 수술 집도를 메인으로 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너 이제 일 년 차야. 지금 거기 가봤자 시다바리밖에 더 하겠냐? 게다가 스텝들 수준이 많이 떨어진다고. 배울 게 없어.”
강천 분원은 일종의 귀양지였다.
서울에서 사고를 친 의사들을 내려보내는 곳. 수련 커리큘럼도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은, 한대 외과의 명성과는 동떨어진 곳.
이름은 한대지만 질적으로도 양적으로도 많이 떨어지는 곳이었다.
“괜찮아요.”
혜수는 단단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그 빗속에서 도영을 그렇게 내버려 둔 날.
혜수는 모든 걸 내려놓기로 결심했다. 자꾸 치밀어오르는 미련도 모두 빗속에 흘려보냈다.
‘나만 없어지면 교수님은 다시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어. 선거도, 약속도,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이야.’
게다가 어차피 자신은 도영 앞에 당당히 나설 수 없는, 아니 나서서는 안 되는 사람이지 않나.
“정말 거길 간다고?”
“네.”
“언제 가는데?”
“돌아오는 월요일부터요.”
“야, 뭘 그리 급하게 얘기해?”
“과장님께는 미리 말씀드렸어요. 강천 가겠다고.”
“과장님은 뭐라셔?”
“좋아하시죠. 강천 의사는 늘 부족했으니까요.”
“…….”
“저 강천 시민 돼요. 가은이랑 주말에 강천에 놀러 오세요. 같이 회 먹어요. 오징어 물회 맛있다던데.”
빙긋 웃는 혜수를 보며 재성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
며칠 뒤 기철의 선거 사무실.
요즘 기철은 유세 일정이 없으면 늘 참모진들과 함께 회의실에 틀어박혀 있었다.
“파혼 기사가 난 뒤로 최규택 후보자와 오차 범위 내에서 접전입니다.”
“대책은 뭐가 있지?”
“남은 기간 동안 전통시장 유세를 강화할 계획입니다. 원래 후보자님께 지지율이 높았던 서민들 위주로 결속력을 다질 생각입니다. 표 차가 거의 없기 때문에 더 돌아서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전략기획실장의 의견에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기철은 굳은 얼굴로 모니터만 노려보고 있었다.
“흐음.”
한동안 탄식만 내뱉던 기철이 묻는다.
“최규택의 표를 가져올 방법은 없나?”
“시간이 너무 촉박합니다. 시뮬레이션 해본 결과 지금은 표를 잃지 않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가는 패할…….”
“뭐라!”
더는 들을 수 없었던 기철은 책상을 내려쳤다.
“……죄송합니다.”
기철이 가까스로 화를 삭이던 그때, 비서가 문을 벌컥 열고 요란하게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후보자님, 후보자님!”
손에는 휴대폰을 쥐고 흔들고 있었다.
“이, 이 기사 좀 보십시오!”
“또 뭐야? 내가 호들갑 좀 떨지 말라고 했을 텐데.”
비서가 주는 걸 건네받으려는데 기철의 휴대폰이 울렸다. 전화를 건 사람은 병억이었다.
기철은 비서에게 잠깐 기다리라는 손짓을 한 후 전화를 먼저 받았다.
“무슨 일이오. 우리가 연락할 일은 이제 없는 줄 알았는데.”
-기사는 보셨습니까?
“무슨 기사 말이오?”
-허허, 이렇게 소식이 늦어서야. 이래 가지고 선거에서 이길 수 있겠습니까?
빈정대는 병억의 말에 기철은 비서가 내밀던 휴대폰을 받아들었다.
화면을 훑어내리는 기철의 얼굴이 순식간에 구겨졌다.
그렇지 않아도 흥분하여 들썩거리던 가슴이 이제 터질 듯 오르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