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동생 아니라, 여자로
(87/110)
87. 동생 아니라, 여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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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동생 아니라, 여자로
2022.11.30.
이건 대체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양자라는 말은 조금이라도, 아니 전혀 예상했던 바가 아니다.
아니, 지금 오빠가 양자라고 한 게 맞나? 혹시 양성자 중성자 이야기를 한 걸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닐까?
“그, 그게 무슨…….”
할 말을 잃고 눈만 깜빡이는 혜수를 승원이 달래준다.
“많이 놀랐지. 그래서 내가 도영이 일이 정리되고 말하려 했는데. 미안해.”
“허…….”
들고 있던 서류가 바닥에 떨어졌다. 그것도 모르고 멍하게 입만 벌리고 있는 혜수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끅. 히끅.”
놀라서 딸꾹질까지 하는 혜수에게 승원은 물을 갖다 주었다.
“혜수야, 사실이야.”
“…….”
“믿기지 않는다는 것 알아. 그래도 천천히 생각해줘 볼래? 궁금한 건 어떤 거라도 물어보고.”
“…….”
거실은 침묵에 잠겼다. 긴 시간 동안 입술만 씹어대던 혜수가 벌떡 일어난다.
“나 방에 좀 들어갔다 올게. 혼자 있고 싶어.”
“……그래.”
혜수는 문을 쾅 닫고 제 방으로 들어갔다.
“하아.”
혼자 남은 승원은 연거푸 마른 세수를 했다.
한참 뒤, 방문이 열리며 혜수가 다시 나온다.
방 안에서 머리를 헝클기라도 했는지 머리에 까치집을 지어놨다. 주춤거리며 소파로 다가오더니 떨어트렸던 서류 뭉치를 집으려 한다.
승원은 서류를 대신 집어 혜수에게 전해주었다.
“볼래? 펼쳐 봐.”
혜수는 떨리는 손으로 종이를 펴고 위에서부터 읽어 나갔다.
“법원…… 판결…… 파양한다…….”
내용은 이랬다. 승원이 수개월 전 파양 소송을 제기했고 조정 기간도 이미 거쳤다. 최종적으로 승원은 승소를 했다.
“세, 세상에.”
혜수는 입을 틀어막았다. 방금 본 내용을 믿을 수 없었기에 다시 한번 위에서부터 읽어내렸다. 하지만 잘못 본 게 아니다.
‘승원 오빠가 양자였다는 것도 충격인데 파양 소송에서 이겼다고? 우리 집안과 더 이상 관련이 없다고?’
히끅, 히끅, 멈췄던 딸꾹질이 다시 시작된다.
‘이모의 아들이 아니라고? 그럼 오빠는 내 사촌 오빠가 아니란 거야?’
혜수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오빠가 그럼 이제 남……이 된 거야?”
“그렇지.”
“이거 우리 엄마랑 아빠는 알아?”
승원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나만 몰랐던 거야?”
“실은 이전에 말하려고 했는데.”
진작에 하려고 했다. 판결은 난지 이미 한참이다.
판결이 나자마자 양자임을 말하고 너를 좋아한다 고백하려 했는데. 혜수가 도영과 만난다 하기에, 그게 행복하다기에 미뤘다.
“자꾸 네가 신경 쓸 일들이 생겨서 미루다 보니 이렇게 됐어.”
“진작 말해줬으면 좋았잖아.”
“……미안.”
손끝을 한참 만지작거리던 혜수가 작게 말한다.
“이모랑 지내는 게 많이 힘들었구나. 그래서 파양 소송을 건 거지?”
승원의 전화를 대신 받았을 때, 이모 지선이 빽 소리를 질렀던 게 기억난다.
“이모와 함께하는 생활이 행복하지 않았던 거구나.”
“…….”
“난 이모가 오빠한테 자꾸 화내는 게 이상하다 생각은 했었는데. 이런 사연이 있는 줄은 몰랐어.”
“…….”
“혼자서 소송까지 하느라 힘들었겠다. 공감해주지 못해 미안해.”
“아니야! 네가 미안할 필요 전혀 없어. 이렇게 밝히게 돼서 내가 더 미안하지.”
“그럼 혹시 그때 우리가 봉사 활동하러 갔던 보육원. 거기랑 오빠랑 관련이 있어?”
“맞아. 내가 그 보육원에서 자랐거든.”
“아.”
“보육원에 2살 무렵 들어갔고 4년을 거기서 지냈대. 어릴 적 이야기는 자세히 기억 안 나고.”
“그랬구나.”
여전히 멍한 표정으로 삐걱삐걱 고개를 끄덕이는 혜수에게 승원이 달래듯 말한다.
“혜수야, 이렇게 됐어도 우리 사이는 변함없어. 난 네 오빠고, 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야.”
“……응.”
혜수가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다 갸웃한다.
“근데 그거랑 내 방을 계약한 거랑 무슨 상관이야? 소송할 때 내 방이 필요했어?”
“그건…… 그게 아니라.”
“또 뭐가 다른 게 있어? 뭔데?”
“혜수야.”
“응?”
승원은 한 걸음 더 혜수에게 다가갔다. 갈색 눈동자가 곧게 혜수를 바라본다.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건지 파양 이야기를 할 때보다 더 진지한 분위기다.
“내가 방을 계약했던 이유는.”
한 템포 쉰 승원이 말을 이었다.
“너랑 같이 있고 싶어서였어. 우리 집에 들어오게 할 계기가 필요했어.”
“나랑 왜 같이 있고 싶었는데?”
“그건.”
승원의 연한 갈색 눈동자에 혜수가 가득 담겼다.
“……내가 너. 좋아해.”
갑작스러운 고백에 눈을 깜빡이던 혜수는 푸하하, 입을 벌리고 웃었다.
“나도 오빠 좋아해. 새삼스럽게 뭘.”
그 대답에 승원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동생 아니라. 여자로.”
“!”
“난 네게 남자이고 싶어. 사촌 오빠가 아니라.”
“어?”
“너 좋아한다고. 이성으로.”
“…….”
귀에서 삐, 소리가 났다. 진공 상태의 막이 귀에 한 겹 덧씌워진 것 같다.
동시에 딸꾹질이 사라졌다. 딸꾹질을 할 땐 놀라게 하면 없어진다더니 제대로 먹혔다.
“뭐, 뭐라고?”
승원의 말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좋아한다’는 단어에 내가 모르는 단어가 추가되었나? 아님 신조어인가? 좋아한다는 게 요즘은 너 엄청 못생겼다, 이런 뜻은 아닐까?
“너 좋아한다고. 네가 좋다고.”
혜수는 정신없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나는 모, 모르겠어. 오빠가 무슨 말을 하는지.”
손을 들어 머리를 또 헝클었다. 덕분에 까치집이 더 커졌다.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지? 아니, 제대로 들은 게 맞나?”
“……혜수야.”
승원이 혜수에게 다가갔다. 손을 뻗어 엉망이 된 머리를 쓸어주려 한다.
혜수는 저도 모르게 흠칫 목을 웅크려 피했다. 승원은 갈 곳 잃은 손을 다시 내릴 수밖에 없었다.
“급작스러운 거 알아. 그래서 천천히 말하려 했는데. 네가 열쇠를 오늘 봐 버려서…….”
“모, 몰라, 난 모른다고, 정말 모르겠어.”
분명 승원이 입을 움직이는데 무어라 말을 하는데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머릿속엔 그저 몰라, 모른다고, 모르겠어, 뿐이다.
내가 좋아하던 사촌 오빠가 날 좋아한대. 그런데, 그 좋다는 의미가 내가 좋아한다는 거랑 다르대.
내가 여자로 보인대. 대체 언제부터? 아니, 이게 말이 돼?
혜수는 뒷걸음질을 쳤다.
“나, 난 그만 가봐야겠다. 병원에 해야 할 일이 있는 걸 까먹었어. 갈게.”
현관으로 달려가 신발에 발을 구겨 넣었다.
“혜수야! 혜수야! 잠시만!”
들려오는 소리는 무시하고 문을 박차고 나갔다. 계단이 나타나자 여러 칸을 한 번에 뛰어내렸다. 발이 끌리고 서로 부딪히는 게 느껴졌지만 아랑곳없이 달렸다.
그렇게 순식간에 1층에 도착했다. 해가 진지 오래라 바깥은 온통 어둠이다. 저녁에 소나기가 온다더니 습한 기운이 훅 끼친다.
골목길로 나가던 혜수는 단차를 인지하지 못하고 헛딛고 말았다.
“악!”
그대로 중심을 잃고 앞으로 넘어졌다.
“아야. 아으…….”
반바지를 입은 덕에 무릎을 제대로 쓸렸나 보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콕콕 쑤시는 통증이 느껴지는 걸 보니.
“으. 아프다.”
무릎을 살피는데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소리는 점점 크게 울려 고개를 들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스무 걸음쯤 떨어진 골목 어귀에 어슴푸레한 인영이 보인다. 굉장히 익숙한 인영이.
‘어?’
조금씩 가까워지는 사람은 도영이다.
‘교수님!’
도영도 혜수를 발견했나 보다. 혜수가 넘어진 걸 보고는 무척 빠른 걸음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동시에. 빌라의 문이 벌컥 열리며 승원이 뛰쳐나온다. 엎어져 있는 혜수를 보며 헉, 소리를 낸다.
“혜수야! 넘어졌어? 괜찮아?”
혜수에게 먼저 도착한 사람은 승원이었다. 승원은 혜수의 무릎을 살폈다.
“조금 까졌네. 일어설 수 있겠어?”
그러더니 손을 내민다.
“내 손 잡아.”
그사이 도영도 다가왔다. 승원이 부축하고 있는 걸 보고 미간을 굳히더니 혜수에게 손을 내민다.
“아니, 내 손을 잡아.”
두 남자가 동시에 손을 내밀었다.
한 명은 내가 좋아하던, 그렇지만 이제는 끊어내야 하는 사람.
다른 한 명은 한때는 사촌 오빠였지만 이제는 남자로 봐달라는 사람.
‘…….’
낭떠러지 끝에 선 기분이었다.
그 누구의 손도 잡고 싶지 않았다. 그 누구도 선택하고 싶지 않았다.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되면 두고두고 후회할 일이 생길 것 같아서.
‘……그냥 이렇게 땅속으로 꺼져버리면 안 되나?’
모두에게 잊혀 애초에 존재하지 않던 사람이 되고 싶다는 소망만이 들었다.
문득 이마에 차가운 게 닿는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다. 일기예보가 웬일로 참 정확하다. 소나기가 진짜 오다니.
혜수는 둘 모두의 손을 피해 몸을 뒤로 물렸다.
“저 혼자 일어설게요.”
그러자 승원이 허리를 숙여 귓가에 속삭인다.
“주도영이랑 완전히 끝낼 거지?”
“…….”
“아니면 이모부 일을 다 말할 거야?”
혜수가 작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래. 밝히지 못할 거면 잘 선택해야지.”
“…….”
“제대로 끝내고 싶다면 날 이용해. 도와줄게.”
승원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다.
도영을 쳐다보니 여전히 손을 내밀고 있다. 빗줄기가 점점 거세져 그의 셔츠가 젖기 시작했다.
“혜수야.”
빗소리를 뚫고 저를 선택해 달라는 간절한 음성이 들린다.
“혜수야, 신혜수. 내 손 잡아. 제발.”
그 목소리에 또 속이 아릿해진다.
저 예쁜 입술을 만져보고 싶은데, 당장이라도 일어서서 안기고 싶은데, 저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불러주기만 해도 이렇게 떨리는데.
억눌러야 한다. 참아야 한다.
‘나 너무 힘들어…….’
혜수가 눈을 질끈 감고 어쩔 줄을 몰라 하자 승원이 또 속삭였다.
“혜수야, 얼른. 다 밝힐 생각 아니라면 내 손 잡아.”
“…….”
결국 혜수는 승원의 손을 잡았다.
“잘한 선택이야.”
승원은 보란 듯 혜수를 부축했다. 혜수를 일으키고 난 뒤에는 무릎에 붙은 흙도 털어준다. 한 손은 여전히 혜수의 허리에 감은 채다.
“오빠, 그건 나중에 내가 할게.”
“다 해가, 잠시만.”
혜수가 슬쩍 승원을 밀어냈지만 아랑곳 않는다. 끝까지 무릎의 흙을 다 털어낸 승원은 혜수의 어깨를 다정히 감싸 안았다.
“비 오네. 얼른 들어가자.”
“……응.”
혜수는 그렇게 승원의 품에 안겨 빌라로 들어갔다.
“신혜수!”
등 뒤로 도영의 애탄 부름이 연신 들려온다. 세찬 빗소리 사이에서도 선명하게 들린다.
혜수는 승원에게 재촉했다.
“오빠, 더 빨리 가자.”
“그래.”
차라리 비가 더 세게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게.
혜수는 승원의 집 앞에 도착해서야 그를 밀어냈다.
“이제 안 안아줘도 돼.”
“……응.”
승원은 알고 있는 사실이라는 듯 힘없이 물러났다.
“오빠는 집에 들어가. 난 여기에 조금만 있다가 갈게.”
“비 맞았잖아. 같이 들어가자.”
“아니, 안 들어갈래. 지금은 들어가기 싫어.”
“……그럼 네가 들어가. 내가 여기 있을 테니.”
“아니. 싫어. 오빠 집인데 내가 왜 들어가.”
“…….”
그래도 승원이 가만히 서 있자 혜수가 더 강하게 말했다.
“들어가. 나 지금 혼자 있고 싶어.”
“……알았어. 대신 수건 좀 가져다줄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승원은 집 안으로 들어가 수건을 내왔다. 감기에 걸릴까 걱정된다며 담요도 둘러준다.
“고마워. 이제 들어가 줘, 응?”
“……집에 갈 때 말해. 우산 가져가.”
“금방 그칠 거야. 내가 알아서 할게.”
물기를 대충 닦아낸 혜수는 복도에 기대섰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빗소리가 그칠 생각을 않는다. 그치기는커녕 점점 더 거세진다.
혜수는 한숨을 내쉬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
어두운 골목길에 도영이 그대로 서 있다. 그 많은 비를 다 맞아가며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