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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출생의 비밀 (86/110)


86. 출생의 비밀
2022.11.26.



 


“……그래요, 그랬죠.”

“그런데 어딜 간다는 거야.”

혜수는 저를 붙잡고 있는 도영의 손을 잡아 내렸다. 겨우 쥐어 짜내 목소리를 내었다.


“이젠 그것도 지쳤어요. 교수님이 아파하는 것도, 언제 아플지 전전긍긍하는 것도 지겨워요.”

“!”

“요사이 교수님이 아플 때마다 제가 옆에 있어 드렸죠. 저 덕분에 교수님은 좋으셨죠?”

“…….”

“그런데 제 입장은요? 만사 다 제쳐두고 달려가는 전 얼마나 불편할지 생각해 보셨어요?”

표독스럽게 제 처지를 찾는 혜수를 보며 도영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렇게 말하지 마. 진심 아닌 거 알아.”

“……진심이에요.”

“아니, 아니야.”

도영은 간절히 말했다. 말로 아니라고 하면 정말로 그렇게 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렇게 말씀하셔도 소용없어요. 진심이니까.”

“…….”

“참, 이거 돌려드릴게요.”

혜수는 여태 목에 걸려 있던 목걸이에 손을 가져갔다. 몇 번이나 손이 빗나갔지만 결국 빼내 도영에게 내밀었다.


“혜수야, 제발.”

“이렇게 되지 않았어도 받지 않았을 거예요. 너무 부담스러우니까.”

“아니, 그럴 필요 없어. 그건 널 주기 위해 산 거니 그렇게 생각하지 마.”

“아니요, 돌려 드려야 해요.”

“혜수야…….”

“교수님도 알고 계시죠? 그동안 제게 너무 많은 걸 바라셨고 감당하라고 하셨던 것.”

도영에게 모진 말들을 쏟아내고 있는 것을 혜수도 알았다.

하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도영을 끊어낼 수 없을 것 같아서. 금방이라도 진심이 아니었다 말하며 울고 매달릴 것 같아서.


“혜수야.”

도영이 더욱 일그러진다. 온통 뿌연 시야에 도영의 얼굴이 맺힌다.

혜수가 특히 좋아했던 짙은 눈썹도, 오뚝한 콧대도, 모양 좋게 자리 잡은 붉은 입술도, 나지막한 음성도 모두 비틀린 채다.

아, 그러고 보니 내가 좋아하지 않은 게 없구나.

난 교수님의 모든 걸 좋아했었구나. 저 얼굴도, 목소리도, 아름다운 손도, 따뜻한 저 마음도 모두 좋아했어.


‘그리고 지금도 그건 마찬가지야…….’

혜수는 메인 목을 억지로 삼켰다.

고통스럽다. 매달리는 도영의 모습을 더 이상 보지 못하겠다.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파 견딜 수가 없다.

결국 눈물이 넘쳐흘러, 혜수는 고개를 숙여야 했다.

그렇게 마지막으로 남은 힘으로 목을 쥐어짰다.


“그러니 제발 절 그냥 좀 내버려 두세요!”

혜수는 회의실 문을 박차고 나왔다.

뒤에서 조금만 더 시간을 갖자는 도영의 흐느낌이 들려와 귀를 틀어막아야 했다.

***

며칠 뒤 승원의 집.

혜수는 승원과 거실 바닥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크, 맛있다. 맛있어!”

연거푸 맥주를 들이켜는 혜수를 보며 승원이 닭다리를 하나 쥐여준다.


“속 버려. 치킨도 먹으면서 마셔. 너 여기 양념치킨 좋아하잖아.”

“흐흐, 오빠 최고. 그럼 나 남은 닭다리도 먹어도 돼?”

“뭐라? 감히? 두 개 다 먹겠다고?”

잠시 눈을 부라리던 승원은 곧 선심 쓰듯 말했다.


“그래. 대신 오늘만이다.”

“오예.”

승원과 혜수는 즐겁게 술을 마셨다.

대화도 끊이지를 않는다. 주제는 다양했다. 병원 이야기, 가은의 근황, 최근에 방영 중인 드라마 이야기, 마지막으로 봤던 영화 이야기 등.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 아무것도 아닌, 시시콜콜한 이야기에도 꺄르륵 웃는 혜수다.


“캬아, 오늘따라 술이 왜 이렇게 맛있지?”

“나랑 먹어서 그래.”

“크하하. 그런가? 나 또 줘!”

혜수가 평소보다 더 많이 마시자 승원이 넌지시 묻는다.


“혜수야, 너 괜찮은 거야?”

“응? 뭐가?”

“그날 이후로 또 다른 일 생긴 건 아니고?”

“그날?”

“도영이 집에 다녀온 날.”

승원의 눈에는 훤히 보였다. 지금 혜수가 억지웃음을 짓고 있는 것이.


“……있긴 있었지.”

“무슨 일?”

“사실은 나 교수님이랑 헤어졌어.”

“어?”

“며칠 전에 헤어지자고 말했어.”

“진짜로?”

“응. 진짜지. 내가 그걸로 거짓말해서 뭐해.”

픽 한 번 웃은 혜수는 반쯤 남은 맥주를 쭉 들이켰다.


“크아. 오빠 거기 새 거 또 줘.”

“……천천히 마셔.”

“알았다, 뭐. 하여간 잔소리는.”

승원은 새 캔을 하나 혜수에게 건네줬다.


“기분은 어때. 괜찮은 거야?”

혜수는 또 픽 웃었다.


“괜찮지 않을 게 뭐가 있어. 내가 결정을 내린 거고 행동에 옮긴 건데.”

“……혜수야.”

“진짜야. 나 정말 괜찮아 오빠. 많이 고민했었어. 그런데 이렇게 되니까 오히려 홀가분해져서 훨씬 나은 것 같아.”

물론 마음은 많이, 아주 많이 아프지만 말하지 않았다. 이 아픔은 온전히 내가 견뎌야 할 몫이니까.


“혹시 도영이가 알게 된 거야? 이모부가 한주에 계셨던 것?”

“아니. 말 안 했어. 그냥 헤어지자고만 했어.”

“알리기 싫은 거지?”

“응. 숨길 수만 있다면 평생 숨기고 싶어.”

잔을 만지작거리던 혜수가 하,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 되게 이기적인 것 같아.”

“어째서 그렇게 생각해?”

“이런 마음이 들더라. 아빠가 저지른 일인데, 나는 상관없는 일인데. 왜 내가 아파해야 하지. 왜 교수님이랑 헤어져야 하지.”

“…….”

“아빠를 한동안 원망했어.”

“…….”

“혹시나 교수님이 아빠와 나는 별개니까, 다른 사람이니까 아빠를 미워하더라도 나는 괜찮다 하지 않을까 상상을 해보기도 했어.”

“…….”

“그런데 웃긴 게 뭔지 알아?”

“뭔데?”

“내가 전에 교수님한테 그랬거든. 교수님을 만난다는 건 교수님의 배경까지 다 끌어안는 거라고. 그러니까 파혼하지 말라고.”

“응.”

“그런데…… 상황이 이렇게 되니까 아빠와 나는 따로 봐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건 너뿐만이 아니라 누구든 그렇게 생각할 거야. 이기적인 게 아니야.”

“그리고 또 있어.”

“응.”

“헤어지는 마당에 교수님께 미움은 받기 싫어서 아빠 이야기는 끝까지 비밀로 하고 있잖아. 교수님한테 숨기는 것 없게 하겠다고 약속해놓고는.”

“…….”

“하아.”

저도 모르게 또 한숨을 내쉬던 혜수는 파드득 고개를 흔들고 맥주 캔을 따 순식간에 다 마셨다.


“크으, 이제 교수님 생각 그만하기로 했는데!”

“…….”

“술이나 더 줘 봐. 오늘 비뚤어지게 한 번 마셔보자.”

“내일 당직이잖아.”

“맥주는 물이다, 뭐.”

“그만 마셔.”

“하나만 더. 응?”

맥주를 승원에게서 가져오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중.


“어?”

혜수가 소리를 치며 옆에 놓여 있던 책장으로 다가갔다.


“이게 왜 여기 있지?”

“혜수야, 왜?”

혜수는 구석에 끼어 있던 열쇠를 집어 들었다.


“이거 나 예전 원룸 창고 열쇠인데. 이게 왜 여기 있어?”

“!”

승원은 가까스로 대답했다.


“우, 우연히 같은 거겠지.”

“아니야. 여기 달린 바나나 던지는 원숭이 모양 키 링. 내가 태국에서 사 온 거잖아. 오빠 기억 안 나? 전에 오빠가 보고 바나나가 왜 빨간색이냐 그랬잖아. 내가 다 노란 건데 얘만 빨개서 사 온 거라고 대답했었고.”

“모, 모르겠는데.”

“나 그 집에서 이사 나올 때 키 링 떼고 열쇠 주는 걸 잊었지 뭐야. 키 링까지 줘버려서 얼마나 아쉬웠다고. 다시 찾으러 갈까 하다가 괜히 얼굴 붉히기 싫어서 안 갔는데.”

“닮은 거겠지.”

“아니야. 게다가 열쇠도 똑같이 생겼는걸.”

혜수는 한참을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그게 왜 여기 있지? 이상하다, 이상해.”

키 링을 만지작거리던 혜수는 무언가 떠올린 듯 움직임을 멈췄다.


“설마.”

“…….”

“설마!”

“혜수야, 내 말 좀…….”

“그게 오빠였어? 내 방 뺏은 그놈이 오빠였던 거야?”

“그, 어, 혜수야, 이, 일단 앉아 봐. 응?”

“세상에! 그래놓고 아무것도 모르는 척 이 집에 들어오라고 했던 거야?”

쏘아대는 혜수의 앞에서 승원은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찾고 있었다.


“나 참! 어이가 없네?”

그러고 보니, 새로 오는 세입자는 월세를 제가 주던 것의 세배를 주기로 했다는 말이 기억난다. 보증금은 무려 두 배였던가.

혜수는 입을 딱 벌렸다.


“오빠 정신 나갔어? 그 많은 돈을 쓰고 왜 날 여기로 데려와?”

생각할수록 이상하다.

대체 승원은 왜 돈을 써가면서 저를 그 집에서 내쫓았을까. 그러고는 여기로 데려왔을까. 그것도 전혀 모르는 척을 하며.


“무슨 생각이야, 오빠?”

“그게…….”

말을 잇지 못하는 승원을 쏘아보던 혜수는 양손을 허리에 척, 올렸다.


 


“좋은 말로 할 때 빨리 불지?”

“혜수야 일단 진정하고 좀 앉자. 응?”

승원은 혜수의 손을 당겨 소파에 앉혔다.


“여기 있어 봐.”

“오빤 어디 가는데?”

“나 방에서 가져올 게 있어.”

“그게 뭔데?”

“보면 알아. 그거 보여주고 설명해야 해서.”

“알았어. 빨리 와.”

방으로 들어가는 승원의 등을 노려보며 혜수가 소리쳤다.


“내가 그때 방 구하려고 얼마나 고생한 줄 알아? 우이씨! 합당한 이유가 아니기만 해 봐! 오빠 가만 안 둬!”

“……응.”

안에서 무얼 하는지 승원은 한참 방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냈다.

승원을 기다리며 혜수도 온갖 가정을 해봤다.


‘오빠가 집을 뺏은 이유가 뭐지? 그 집이 그렇게 맘에 들었나?’

아니다. 그건 아닌 것 같다. 승원은 원룸에 올 때마다 변기 물도 잘 안 내려간다고 싫어했으니까.


‘그 집 보증금 두 배에 월세 세 배 줄 돈이면 다른데 더 좋은데 구할 텐데. 대체 왜?’

문득 또 하나의 가정이 떠오른다.


‘설마 점을 봤는데 꼭 그 집에 들어 가랬다던가?’

하지만 그것도 아니다. 승원은 지금 여기에 살고 있으니까.


‘아오, 대체 이유가 뭐야!’

혜수로서는 당연히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저 도끼 눈을 뜨고 방을 노려보고 있을 뿐.

시간이 흐르고 드디어 승원이 방에서 나온다. 손에는 서류 뭉텅이가 들려 있다.


“받아.”

승원은 혜수에게 서류를 쥐여주고 옆에 앉았다.


“이게 뭐야?”

접힌 서류를 펴려는 혜수의 손을 승원이 막았다.


“우선 내 말 좀 먼저 들어줘.”

“그래, 뭔데?”

“……일단 먼저 사과할게. 이렇게 밝힐 생각은 아니었어. 지금 넌 도영이 때문에 힘들 테니까 나까지 고민거리로 삼게 하긴 싫었는데.”

“사과? 방 뺏었던 걸 사과한다는 거지?”

“아니, 그건 사과하지 않을 거야. 앞으로도 쭉.”

“뭐?”

“난 그렇게 행동한 것 지금도 전혀 후회하지 않거든.”

“…….”

“사과할 건 앞으로 할 이야기들을 지금껏 네게 말하지 못한 것들에 대해서야.”

승원의 표정이 심각하다. 혜수의 미간도 덩달아 찌푸려져 승원이 혜수의 미간을 꾹 눌러 펴주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차근히 시간을 두고 이야기할 생각이었어. 이렇게 갑작스레 말할 생각은 아니었어.”

“어우, 숨넘어가겠네. 알겠어, 알겠으니까 빨리 얘기 좀 해 봐.”

깊게 숨을 한 번 들이쉰 승원은 차분히 말을 이었다.


“전에 내 방에 있던 앨범 봤을 때 사진이 왜 이것밖에 없냐고 한 적 있었지?”

“응. 그때 난 이모 집에 더 있을 거라 얘기해 줬지.”

“아니야. 내 어릴 적 사진은 그게 전부야.”

“엥, 어째서?”

“찍어 줄 사람이 없었거든.”

“이모랑 이모부 있잖아.”

“실은…….”

승원이 또 뜸을 들인다. 평소와 다르게 진지한 모습의 승원을 보며 혜수도 덩달아 침을 삼켰다.

이 오빠가 무슨 얘기를 하려고 이렇게 뜸을 들여?

잠깐의 정적을 깨고 드디어 승원이 말을 잇는다.


“실은 나 어머니 친아들 아니야.”

“뭐?”

내가 지금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술에 취해서 잘못 들은 건가?

혜수는 고개를 흔들고 다시 물었다.


“오빠, 나 잘못 들은 것 같아. 다시 말해줘.”

승원은 다시 숨을 들이켰다.


“나 친아들 아니라고. 양자야. 6살에 입양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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