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목걸이와 이별
(85/110)
85. 목걸이와 이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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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목걸이와 이별
2022.11.23.
“후보자님, 후보자님!”
침실 문을 쾅쾅 두드리는 소리에 기철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찌푸린 눈 틈으로 시계를 보니 겨우 6시가 채 되지 않았다.
옆자리는 이미 비어 있다. 아마 은숙은 새벽 기도를 나갔을 것이다.
도영이 아프다는 것을 안 뒤부터 은숙은 다시 새벽 기도를 다니기 시작했다. 도영의 빠른 쾌유와 기철의 당선을 바란다는 것이 기도의 목적이었다.
“내가 스스로 일어나기 전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나 깨우지 말랬잖아.”
단잠을 방해받았다는 생각에 짜증이 난다. 그도 그럴 것이 요즘 기철은 제대로 자지 못해 송곳처럼 예민해져 있었다.
불면증은 정치에 뛰어들고 나서부터 생겼다.
사람들의 시선을 견뎌야 했다. 늘 긴장하고 언행을 사려야 했다.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커다란 IT 기업를 운영하는 것보다 더 신경 쓸 것이 많았다.
시장 선거가 코앞인 지금은 불면증이 더 심해져 새벽이 깊어지고 나서야 겨우 한두 시간 잘 뿐이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정말 급합니다. 이것 좀 보십시오!”
비서는 태블릿을 내밀었다.
“뭐길래 그래?”
기철은 안경을 끼고 기사를 읽어내렸다. 오래 지나지 않아 기철의 미간이, 광대가, 입이 점점 일그러진다.
“어떡하죠, 후보자님?”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기철이 벌떡 일어선 덕분에 쾅, 쨍그랑. 침대 옆에 있던 테이블이 바닥으로 넘어갔다. 테이블 위에 올려뒀던 도자기가 산산조각 났다. 파편이 요란하게 튀어 다닌다.
수억이 순식간에 날아갔지만 그걸 살필 여유는 없었다.
“당장 주도영 불러, 당장!”
“예, 알겠습니다.”
비서가 다급히 문밖으로 나가고 기철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었다.
‘대책부터, 어서.’
이를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부터 생각해야 했다.
‘어쩔까? 그냥 오보라고 할까? 그래, 그게 제일 낫겠지. 빨리 정정기사를 내라고 시켜야겠군.’
그때, 벨소리가 울린다. 기철은 짜증 가득한 손짓으로 휴대폰을 귀에 대충 갖다 댔다.
“누구십니까. 바쁘니 용건만 빨리…….”
-일어나셨습니까, 의원님.
낮은 저음, 애정이라고는 없는 서늘한 목소리. 아들 도영이다.
“주, 주도영!”
-기사 보셨습니까?
“이, 이 자식!”
-다행히 보셨나 보군요.
“감히 이게 무슨 짓이야!”
-저만 괴롭히는 걸로 끝내셨어야죠. 그럼 어머니를 봐서라도 선거일까지는 얌전히 있었을 텐데.
“뭐라고?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게냐?”
-시치미 떼지 마십시오. 누구의 지시로 의료사고 건이 진행되고 있는지는 다 아니까.
“!”
-길들이기는 이제 그만하시죠. 실패하셨으니.
“…….”
-그 아이는 건드리지 마셨어야죠. 어제 병원에서 있었던 소란은 만들면 안 됐습니다.
‘그 아이? 신혜수라는 여자애를 말하는 건가?’
기철이 도영의 말을 급하게 잘랐다.
“아니야!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만 어제 건 내가 한 게 아니야. 난 너에 관한 것만 지시했을 뿐이다!”
-……아, 그런가요? 뭐, 어쨌든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유감입니다.
도영의 말투는 남의 이야기를 하는 듯 가벼웠다.
“빨리 정정기사 내보내! 아니라고, 네가 한 게 아니라고 하란 말이야!”
-글쎄요. 왜 그래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덕분에 파혼을 하게 됐으니.
기철의 말문이 턱 막혔다.
그저 조금만, 결혼의 명분을 위해 조금만 도영에게 겁을 줄 생각이었다. 그 칼끝이 돌아와 저를 향하게 될 줄이야.
-참. 정정한답시고 다시 기사를 내보낸다면. 제가 뭘 더 할 수 있는지 보여드리죠. 그럼.
할 말을 끝낸 도영은 미련 없이 전화를 끊어버렸다.
“으아악!”
콰득, 휴대폰이 바닥에 처박히며 흉하게 일그러졌다.
“으아, 으아아악!”
소리를 지르며 아무렇게나 팔을 휘젓던 기철은 순간 가슴을 움켜쥐었다.
속이 아려왔다. 요사이 체한 것처럼 속이 불편하던 게 점점 잦아졌는데 또 그 증상이 생겼다.
“으윽.”
예사롭지 않은 신음을 듣고 비서가 뛰어 들어온다.
“후보자님, 괜찮으십니까?”
“소화제랑 진통제 좀 가져와, 빨리!”
“네, 네!”
그 시각, 외과 병동.
“선생님, 선생님! 이제 일어나셔야 해요. 회진 준비하셔야죠.”
몸을 흔드는 손길에 혜수는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눈을 몇 번 깜빡이니 시야가 조금씩 또렷해진다.
‘여기가 어디야?’
눈앞에 보이는 것은 푸른 들판이 아닌 하얀 병원의 천장이다.
‘내가 왜 여기에 있지?’
의아해하는 혜수를 보고 간호사가 알려준다. 어제 병동에서 쓰러져서 빈 병실로 옮겼다고.
팔을 보니 바늘이 꽂혀 있다. 쓰러진 자신에게 수액을 맞혀주고 잠을 자게 해주었나 보다.
‘으, 일해야 하는데. 지금 몇 시나 됐지?’
시계를 찾던 혜수는 저도 모르게 목에 손을 가져갔다. 꿈속에서 도영이 목걸이를 걸어줬던 자리를 더듬었다.
그런데.
‘이게 뭐지?’
손에 무언가가 만져졌다. 금속 재질의 무언가는 체온에 데워져 따뜻했다. 마침 옆에 거울이 있어 혜수는 얼굴을 비춰보았다.
그리고.
‘!’
목걸이를 발견했다. 꿈에서 봤던 그 목걸이와 똑같이 생긴 목걸이가 걸려 있다.
‘이, 이게 왜 여기 있어?’
아직도 꿈인가 싶어 볼을 꼬집었다.
“아얏!”
눈물이 핑 돌 정도로 아프다.
‘지금 이건 현실인데?’
혼란스럽다. 목걸이는 분명 꿈속에 등장했는데. 꿈에서 도영이 목걸이를 걸어주고 키스를 해주었는데.
도영이 닿았던 입술을 만져보던 혜수는 무언가를 깨닫고 그대로 멈춰 섰다.
‘그게 꿈이 아니란 거야?’
혜수는 급히 병실을 빠져나가 스테이션으로 갔다. 누가 옆에 왔었는지 물어봐야 했다.
그런데, 병동이 불이라도 난 것처럼 소란스럽다. 일과가 시작되기 전인 새벽이라 조용해야 할 병동인데.
“야, 야, 뉴스 봐, 대박이야.”
“헉, 세상에!”
“이거 사실이야?”
“진짜겠지. 당사자가 직접 인터뷰했다잖아.”
“와. 충격이다.”
“이제 다 끝났네. 이러면 선거도 끝이지?”
“그러겠지?”
선거라는 이야기에 혜수도 모여 있는 사람들 틈을 기웃거렸다.
“왜요, 무슨 일인데요?”
“주도영 교수님이 파혼 발표하셨어요.”
“예에?”
“이것 좀 보세요.”
순식간에 간호사가 내민 기사를 모두 읽어내린 혜수는 저도 모르게 안 돼! 소리를 쳤다.
“왜요, 선생님? 왜 안 돼요?”
“저, 저 잠시만 나갔다 올게요. 급한 일 있으면 전화 주세요.”
가운에 팔을 꿴 혜수는 정신없이 병동을 달려나갔다.
‘이 바보 같은 사람이 무슨 짓을 한 거야? 모든 걸 버리겠다는 거야? 아버지의 선거, 사랑하는 어머니와의 약속, 지금껏 일궈놓았던 의사로서의 명성까지 모두?’
출근 준비를 끝낸 도영은 연구실을 나왔다.
구름다리 중간 즈음 갔을 때, 낯익은 얼굴이 나타났다. 상기된 얼굴로 숨을 몰아쉬는 이는 혜수다.
“신혜수?”
“교수님!”
혜수는 헉헉대며 도영에게 뛰어오더니 덥석 팔을 잡았다.
“급한 일이라도 있나? 몸은 좀 어때.”
“저랑 얘기 좀 해요.”
혜수는 도영을 끌고 그대로 빈 회의실로 들어갔다. 마침 경애에게 뺨을 맞았던 그 회의실이다.
회의실의 문을 단단히 걸어 잠근 뒤에는 여전히 의아한 얼굴로 서 있는 도영에게 기사를 내밀었다.
“이거 어떻게 된 거예요?”
“아. 봤군.”
고개를 끄덕이는 도영은 사건의 주인공인 것 치고는 평온하기만 해 보였다.
“지금 온 병동이 난리예요.”
“본 그대로야. 의료사고는 모두 내 지시하에 일어난 일이니 내가 모두 책임지는 게 맞는 것이고. 또 그로 인해 난 자격이 없으니 파혼을 하겠다 말한 거고.”
“그럼 선거는요? 파혼을 하시게 되면, 아버님 선거는요?”
“어쩔 수 없지.”
아무렇지 않은 듯 말하는 도영을 보며 혜수는 깊은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깨달았다. 모든 걸 제자리로 돌려놔야 하는 사람은 자신이란 것을.
“이것 때문에 이렇게 달려온 건가? 얼굴이 많이 붉어. 몸도 안 좋을 텐데, 괜찮아?”
도영은 혜수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주려 했다. 하지만 혜수가 몸을 뒤로 빼버려 손은 허공에 멈추고 말았다.
“왜 그래?”
어두운 회의실에 적막이 내려앉았다.
도영과 혜수의 시선이 잠시 맞부딪혔지만 혜수는 곧 고개를 돌려버렸다.
이상함을 감지한 도영이 한 걸음 더 다가갔지만 혜수는 그만큼 뒤로, 아니 조금 더 거리를 벌렸다.
“혜수야.”
숨을 한 번 삼킨 혜수는 결국 말했다.
“헤어져요, 우리.”
잘못 들은 줄 안 도영이 그대로 서 있기만 하자 혜수가 한 번 더 말한다.
“그만 하자구요.”
“방금 뭐라고 그랬지?”
분명 뭐라 들은 것 같은데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귓바퀴에 맴돌던 말은 흡수되지 못하고 튕겨 나가버렸다.
혜수가 또 말한다. 한마디 한마디 힘주어.
“헤어져요.”
이번에는 내이도 언저리까지는 들어왔다. 하지만 도영은 여전히 잘못 들은 줄 알고 되물었다.
“뭐?”
하지만, 돌아오는 답은 똑같다. 또박또박한 네 글자.
“헤어져요.”
“…….”
이는 전혀 예상했던 바가 아니다. 요 며칠 혜수가 저를 피하기는 했지만 서로의 마음을 나누던 것이 불과 얼마 전이다.
그런데 헤어지자고? 전혀 납득이 가지 않는 상황이다.
“잠깐만. 그러니까.”
머리를 한 번 쓸어올린 도영은 말을 이었다.
“이러는 것이 내가 어제 낸 기사 때문이라면, 너와 아무런 상의 없이 일방적으로 기사를 낸 것이 문제라면 내가 다 이야기해줄게. 그 소송은 사실…….”
“그것 때문이 아니에요. 교수님이 그 기사를 냈든 안 냈든, 파혼을 했든 안 했든, 의료사고를 모두 책임지시든 안 지시든 전 교수님과 헤어졌을 거예요.”
마치 미리 연습이라도 한 듯 혜수는 숨도 쉬지 않고 매끄럽게 말했다.
“그럼 갑자기 이러는 이유가 뭐지?”
“갑자기가 아니에요. 요즘 계속 생각했어요. 교수님과 제 관계에 대해.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걸 지속하는 건 싫어요.”
“싫다니, 왜?”
“다른 건 없어요. 그냥 지겨워서요.”
“…….”
“이런 제 처지가 싫어졌어요. 원치도 않는데 누군가에게 휘둘리는 것. 싫어졌어요. 그러니 헤어져요.”
적막이 또다시 회의실을 휘감았다. 지금 도영과 혜수는 조그마한 숨소리도 낼 수 없었다.
“지금 이러는 것. 다른 이유가 있지?”
“아니요. 없어요.”
“거짓말을 하는군.”
“진짜예요. 지금까지는 이런 상황 자체를 견디지 못했을 뿐이지만 이제는 이런 상황을 만든 교수님이 지겨워졌어요.”
“…….”
말은 또박또박 하지만 혜수가 눈을 마주치지 못한다.
그 눈을 직접 보고 진심을 전해 듣고 싶어 도영은 손을 가져갔다. 하지만 턱에 손이 닿기 직전, 혜수는 고개를 돌려 피해버렸다
“그거 알아? 넌 말을 꾸미는 데는 소질이 없어. 눈을 못 마주치거든.”
그때도 그랬다. 맨 처음 맞선 자리에서 혜수를 만났던 날.
말도 되지 않는 질문에 이리저리 능구렁이처럼 대답은 했지만 혜수는 도영의 눈을 제대로 쳐다보지를 못했다.
그래서 도영도 알아차렸다. 이 여자가 대신 나와서 거짓말을 하고 있구나.
“아니에요.”
혜수의 얼굴이 점점 달아오르고 눈매가 일그러진다. 뜨끈한 것이 치밀어오른다.
‘안 돼.’
혜수는 다시 목에 힘을 주었다.
“아니에요, 정말로.”
“거짓말.”
도영은 손을 다시 혜수에게 가져갔다. 어느새 붉어진 혜수의 눈가를 쓸어주고 싶었다.
혜수는 도영의 손을 힘껏 떨쳐냈다.
“이러지 마세요. 정말 아니라구요.”
떨리는 이를 악물고 눈에 힘을 꽉 주었다. 눈물이 흘러내리면 안 된다.
‘흔들리면 안 돼. 교수님이 자꾸 잘못된 판단을 하는 건 다 나 때문이야. 나 때문에 너무 많은 걸 잃고 있어. 그러니 내가 물러나는 게 맞아.’
게다가 자신은 어차피 교수님 옆에 설 수 없는 사람이지 않나.
“다른 말씀 하셔도 소용없어요. 전 오늘 교수님과 헤어질 거예요.”
“난 동의하지 않아.”
“아니요. 교수님이 동의하지 않으셔도 전 그만둘래요. 일방적인 관계는 지속될 수 없잖아요.”
혜수는 고개를 저으며 조금씩 뒤로 물러났다.
“이제부터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닌 거예요. 그러니 저 때문에 모든 걸 책임지려 하실 필요는 없어요.”
혜수는 문손잡이를 잡았다.
“저 먼저 가볼게요.”
끼익 소리와 함께 손잡이가 돌아간다.
순간, 뒤에서 도영이 다가가 혜수를 잡았다. 혜수가 가지 못하게 품에 안고 얼굴을 파묻었다.
내내 그리워했던 혜수의 향이, 온기가 도영에게 깊이 스며들었지만 언제든 사라질 것처럼 위태롭다.
“가지 마. 내 팔은 네가 있어야만 하는 것 알잖아. 넌 내 유일한 치료제잖아. 내 안식처, 내 위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