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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목걸이와 파혼 (84/110)


84. 목걸이와 파혼
2022.11.19.



 
가은은 재성의 꽁무니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를 쫓았다. 그러더니 초롱초롱한 눈으로 말한다.


“와, 완전 내 취향.”

“뭐?”

“취미가 드라마 보긴데 특기는 유도래. 진짜 로맨틱하다.”

“아까는 싫다며.”

“그건 특기를 몰랐을 때 이야기지.”

“…….”

“아까 보니 음료도 딸기 주스 먹던데. 이것도 나랑 취향 똑같지 않니?”

“그, 그래.”

“내가 아는 저런 얼굴 가진 사람 중에 제일 멋진 듯.”

“……그거 칭찬 맞는 거지?”

내면을 본다더니 금사빠 김가은 역시 어디로 안 갔다.

푸스스 웃는 혜수에게 가은은 팔짱을 꼈다.


“경찰 부를 거야? 아빠한테 얘기해 줘?”

잠깐 생각하던 혜수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머릿속이 복잡한 요즘이다. 새로운 문제에 또 직면하기보다는 외면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좀 지켜볼게. 또 그러면 증거 모아서 신고할래. 그리고 난 떳떳하니 꿀릴 것도 없어. 진료 거부를 한 적이 절대 없거든.”

“저거, 전에 말했던 그 혈전 환자 이야기 맞지?”

“응. 짐작 가는 사람은 그 사람뿐이야.”

“나도 그 기사 봤는데. 다리 못 쓰게 됐다는 거 진짜야?”

“모르겠어. 우리 병원에서 수술을 안 해가지고. 그 이후로 어떻게 됐는지는 몰라.”

“근데 정말 혈전 때문에 다리를 못 쓰게 되기도 해?”

“동맥이 막힌 경우에 특정 상황이 맞물리면 그럴 수 있지. 그런데 그 사람은 정맥이었어. 물론 정맥염이 심해져서 괴사까지 간 경우에는 그럴 수도 있긴 한데.”

하지만 가능성은 드물 것이다. 그 사람은 자기 몸을 매우 생각하는 듯 보였고 당장 다른 병원에 찾아가겠다 하고 나갔으니까.


“무슨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다. 어쨌든 다리를 못 쓰게 됐다는 것도 불확실한 거고. 진료 거부를 한 건 더더욱 아닌 거고. 맞지?”

“응. 절대 아니야.”

“그런데 왜 저래? 거지 같은 인간. 합의금 좀 빵빵하게 뜯어내고 싶어 하나?”

“하하…….”

떫게 웃는 혜수를 보며 가은은 명랑하게 말했다.


“혹시 협박이라도 하면 나한테 말해. 울 아빠한테 바로 말해줄게.”

“오올, 든든한데.”

“나 김가은이야.”

가은은 역시 나뿐이지? 하며 혜수에게 더욱 달라붙었다.


“혜수야, 우리 산책로 말고 다시 카페 가자. 그 사람들 때문에 나가기 좀 그래.”

“그러자.”

혜수는 가은과 병원 안으로 돌아갔다.

병원 밖에서는 확성기 남자가 일행을 끌고 버스에 올라타고 있었다. 누구에게 전화를 하는 건지 휴대폰을 귀에 대고.
 

가은은 한참을 더 떠들다가 돌아갔다. 가은을 배웅하고 걸어가는데 몸에 힘이 쭉 빠진다.


‘조금 전까지는 그래도 가은이가 조잘조잘 떠들어대서 괜찮았는데.’

혜수의 기분을 풀리게 해주겠다 장담하던 가은은 정작 재성에 대한 질문으로 시간을 반 이상을 채웠다.


“너 나 즐겁게 해주겠다며?”

“이게 안 즐거워? 이상하네. 헤헤.”

“참나.”

실속 없고 어이없는 대화가 오갔지만 혜수는 내심 그게 더 반가웠다. 가은이 의료사고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었더라면 혜수는 스트레스로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 제일 걱정인 건 이 소란이 인터넷을 타고 멀리 퍼지는 거야.’

누군가가 아까 그 로비의 소란을 찍어 인터넷에 올리기라도 하면 사람들이 개떼처럼 몰려들어 저를 물어뜯을 것이다.

자극적인 기사 덕에 도영도 이미 대역 죄인이 되지 않았나.


‘나도 충분히 그럴 수 있지.’

소문이 어떻게 와전이 되는지, 없던 일도 있던 일이 되는 것이 가능하다는 걸 이미 겪어 잘 안다.

생각 끝에 혜수는 다시 병동으로 올라갔다. 그 환자의 차트를 확인해야 했다.


‘그 VIP 환자 자의 퇴원서는 조유민 선생님이 받았었지.’

그때 유민이 수술실에 들어간 저 대신 받았다고 했다. 하지만…… 괜스레 불안하다.


‘내가 받은 게 아니니까 한번 더 찾아보자.’

병동으로 간 혜수는 혈전 환자의 전자 차트를 다시 켰다. 환자에게 받은 동의서를 모아둔 카테고리에 가 자의 퇴원서를 찾았다.

그런데, 이럴 수가.


‘정말 없잖아? 아, 아니야. 다시 잘 찾아보자.’

혹시나 다른 곳으로 업로드되었나 해 다른 카테고리를 모두 뒤졌다.

하지만…… 없다. 아무리 뒤져도 없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초조하게 마우스를 한참 움직였다.

하지만 정말로 없었다. 동명이인의 다른 차트에 잘못 올라갔나 싶어 다 뒤졌지만 없었다.


‘조유민 선생님한테 물어봐야 해.’

벌떡 일어선 혜수는 순간 느껴지는 아찔함에 다시 주저앉았다.


‘으, 어지러워. 갑자기 왜 이러지.’

그동안 쭉 굶다가 가은을 만나 커피를 마신 게 원인이었을까. 아니면 그렇지 않아도 말이 아니던 속이 피켓 시위를 보고 나서 더 상한 탓일까.

머리가 핑핑 돌고 뱃속이 아프다 못해 뒤집히는 것 같다.


“으, 정신 차려.”

겨우 고개를 들고 몸을 다시 일으켰다. 하지만 두 발을 딛고 서 있으니 증상이 더 심해진다.

이젠 견디지 못하겠다 생각이 들 때.


“으윽.”

혜수는 결국 쓰러지고 말았다.


“어머, 신 선생님, 선생님!”

저를 부르는 간호사들의 소리가 희미하게 멀어졌다.
 

혜수는 널따란 들판의 한 가운데에 서 있었다.

푸른 하늘에는 만화에서나 볼 수 있던 동글동글한 하얀색 구름이 떠 있고, 초록빛 들판 곳곳엔 노란 들꽃이 피어 있다.


“여기가 어디지?”

사방을 두리번거리는데 어디서 온 건지 강아지 한 마리가 서 있다.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더니 혜수에게 따라오라는 듯 앞장선다.


“너 어디 가는 거야?”

그러자 알아들은 것처럼 멍, 짖은 뒤 꼬리를 또 흔든다.


“아이, 귀여워라. 너 이름이 뭐야?”

“멍!”

“아니다. 내가 지어줄게. 음……. 흰둥이 하자. 좋지?”

“멍!”

좋아! 하는 말이 들린 것 같다. 흰둥이는 귀여운 엉덩이를 둥실둥실 흔들며 앞으로 힘차게 걸어 나갔다.


“으악, 너무 귀엽잖아.”

혜수는 흐뭇하게 웃으며 흰둥이의 뒤를 따랐다.

그러고 보니 무언가를 보고 좋다는 마음을 가진 것이 오랜만이다.

한동안 혜수의 마음은 걱정에 한숨투성이였으니까. 과거 한주에서 있었던 일을 들은 이후 도영에게 말도 못 하고 끙끙 앓았다. 그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으로 견딜 수가 없었다.


“하아…….”

한숨을 길게 내쉬자 흰둥이가 왜 그러냐는 듯 걸음을 멈춘다. 혜수도 멈춰 서 흰둥이를 쓰다듬었다.


“흰둥아, 사실 나 고민이 있어. 알려줄까?”

흰둥이가 어서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흔든다.


“사실은 말이야. 내가 너무너무 좋아하는 사람이 우리 아빠 때문에 크게 아파.”

그러자 흰둥이의 귀가 아래로 축 처진다.


“끼잉.”

“푸핫, 너 되게 웃긴다? 꼭 알아듣는 것처럼 낑낑거리네?”

“낑낑.”

“그런데 난 그 사람에게 그걸 사실대로 말 못 하겠어. 다 털어놓고 용서를 구하고 싶다는 마음은 있는데……. 자꾸 망설여져.”

“끼잉.”

“모든 걸 알게 되면 날 미워하게 될까 봐. 용서하지 못한다 할까 봐.”

“끼잉.”

“나 진짜 이기적이지? 알리고는 싶은데 미움받기는 싫다니.”

한숨을 또 푹푹 내쉬자 흰둥이가 혜수의 손을 핥아준다. 순수한 눈망울 또한 위로가 된다.

혜수는 한참을 더 도영과 자신의 만남과 현재 상태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흰둥이는 그 긴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그래도 흰둥아, 네가 들어주니 좀 속이 나아진 것 같아. 고마워.”

흰둥이는 꼬리를 더욱 흔들어댔다.


“우리 이제 저기로 가볼래?”

흰둥이와 앞으로 나아가던 혜수는 나무로 된 집을 발견했다. 들판 한가운데 덩그러니 있는 집이 도드라져 호기심이 인다.


“엇, 웬 집이지? 흰둥아, 혹시 너희 집이야?”

순간 흰둥이가 우다다 집으로 달려간다.


“흰둥아! 흰둥아! 같이 가!”

혜수도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흰둥이가 없다. 남의 집일지도 모르니 함부로 들어가면 안 되는데.


“흰둥아, 어디 갔어?”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2층으로 이어진 계단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난다.


“혹시 누구 계세요?”

잠시 뒤, 한 사람이 완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어? 교수님?”

집 안에 있던 사람은 도영이었다.


“교수님, 여기서 뭐 하세요?”

도영이 그 특유의 코웃음을 친다.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오랜만에 청소나 하쟀더니 어딜 갔다 온 거야?”

“청소요?”

그러고 보니 도영이 손에 커다란 막대 걸레를 들고 있었다.

그런데, 꽤 무거워 보이는데 그걸 들고 있는 그 손이 오른손이다. 웬만해서는 잘 쓰지 않는 오른손 말이다.


“교수님, 오른손 쓰셔도 되는 거예요? 안 아파요?”

도영은 빙긋 웃으며 손을 앞뒤로 뒤집어 보았다.


“다 나았잖아. 잊었어?”

그러더니 혜수의 볼을 살짝 꼬집는다.


“그사이 까먹었다니. 서운한데.”

“그랬나요?”

“잘 떠올려 봐.”

“음…….”

그제야 혜수는 기억을 해냈다. 얼마 전 도영이 근전도 검사에서 완전한 정상 판정을 받았던 것을.


“맞다, 그랬었죠. 제가 까먹었네요.”

“까먹을 게 따로 있지.”

“그럼 그 소송 건 아저씨는요? 자의 퇴원서가 사라졌잖아요?”

“내가 해결했어. 기사 정정 보도도 났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 또한 기억난다.


“아! 맞다. 이제 기억나요. 헤헤.”

“얼른 들어와. 손 씻고 간식 좀 먹자.”

“그런데 여기 하얀 강아지 한 마리 안 왔어요?”

도영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안 왔는데. 들어와 어서.”

조금 있다가 찾으러 가야겠다 생각하며 혜수는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는 예상보다 더 아늑했다. 원목의 향이 물씬 나는 그곳에는 마찬가지로 원목으로 된 조그만 식탁과 의자 한 쌍이 마주 보고 놓여 있었다.

투명한 창밖으로는 초록빛 들판과 푸른 하늘이 고스란히 보였다. 식탁 위 화병에는 들판에 지천으로 있던 꽃이 꽂혀 있었고 향긋한 향이 났다.


“예쁘다.”

의자에 앉아 꽃잎을 하나하나 만져보는데 도영이 손을 허리 뒤에 숨긴 채 다가온다.


“교수님?”

“줄 게 있어.”

“뭔데요?”

도영은 그대로 멈춰 선 채 웃기만 했다.


“빨리요. 너무 궁금해요.”

혜수가 조르자 도영이 손을 쓱 내민다.


“이게 뭐예요?”

도영이 꺼낸 것은 벨벳으로 싸인 작은 케이스였다. 도영은 리본을 풀고 상자를 열었다.


“!”

혜수의 입이 떡 벌어진다.

상자 안에는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들어 있었다.

인공적인 조명이 없이 창으로 들어오는 햇빛 속에서도 다이아몬드는 영롱하게 빛이 나고 있었다.

거창한 장식 하나 없는, 다이아몬드 자체를 돋보이게 하는 깔끔한 디자인이었다. 지난 회식 때 유민이 걸고 있던 화려하기 그지없는 목걸이와는 정반대의 생김새다.


“저 주시는 거예요?”

“그래. 진작 주고 싶었는데 타이밍이 안 맞았어.”

혜수는 반짝이는 보석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보고 도영이 쿡쿡댄다.


“그렇게 마음에 들어? 앞으로 더 사줄게.”

“그, 그런 것 아니거든요!”

도영은 혜수 뒤로 다가갔다. 긴 두 팔을 뻗어 혜수의 목에 목걸이를 걸어주었다.


 
목이 훤히 드러나는 진녹색 원피스에 목걸이가 걸렸다. 원피스도, 목걸이도 혜수의 하얀 피부를 더욱 돋보이게 해준다.


“잘 어울려. 예뻐.”

“정말요?”

“목걸이 말고 너.”

아이 정말, 저런 말은 어디서 배워오는 거야.

얼굴을 붉히는 혜수를 보던 도영은 홀린 듯 혜수를 끌어당겼다.


“이리 와.”

혜수도 도영을 마주 안았다. 곧 따뜻한 도영의 입술과 맞닿았다.

감미롭고 달콤하다. 행복하다.

도영과의 시간은 늘 그래왔지만 오늘은 특히 더 그렇다.

잠도 못 이룰 정도로 고민하던 문제가 다 해결됐기 때문인 걸까.


‘교수님이 모든 걸 이해해 주셨어.’

온몸이 빛으로 가득 차오르는 것 같다.


‘우린 이제 계속 같이할 수 있구나. 정말 다행이다.’

 

그렇게 혜수가 오랜만에 행복한 밤을 보내고, 다음 날.

신문사들은 일제히 기사를 쏟아냈다. 시장 후보자 주기철의 아들 주도영에 관한 내용이었다.

주제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도영이 의료사고에 대한 시인을 했으며, 모든 책임은 제게 있다고 말을 한 것.

또 하나는 바로 조유민과의 파혼이었다. 파혼의 이유로 도영은 자신이 이렇게 자격이 없는 사람이니 약혼을 지속할 수 없음을 들었다.

구구절절 도영의 죄를 읊은 기사의 말미에는 도영의 말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도 있었다.

[못난 사람이 되어 송구합니다. 두 분 모두에게 죄송함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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