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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살인 면허 (83/110)


83. 살인 면허
2022.11.16.



 
며칠 뒤 병원 로비의 카페. 혜수는 가은과 마주 보고 앉아 음료수를 마시고 있었다.

얼마 전 가은이 전화 왔을 때 힘이 다 빠진 목소리로 대답을 했더니 굳이 괜찮은지 보러 와야겠다 하여 만나게 되었다.

오랜만에 만난 가은은 여전히 활기차고 여전히 붉은 머리를 하고 있다.


“혜수 너 몸살 났다더니 얼굴이 반쪽이 됐네.”

염려가 가득 담긴 가은의 말에 혜수는 손을 내저었다.


“이젠 아무렇지 않아. 다이어트하고 좋지.”

“아니. 나이 들어 보여. 그래서 걱정인 건데? ”

“야.”

혜수가 눈을 부라리자 가은이가 배시시 웃는다.


“괜찮아, 다시 찌면 돼.”

“야! 김가은!”

이번엔 가은이 깔깔 웃는다.


“내가 말을 말아야지. 근데 너 얼마 전에 또 선봤다며. 그건 잘 됐어?”

“휴, 울 엄마 내 까만 머리는 포기해도 결혼은 포기 못 하겠나 봐.”

“그래서 이번에는 어떻게 됐는데?”

“그냥 뭐. 나가는 것에 의의를 뒀지.”

“보아하니 외모에서부터 탈락인가 보네. 네 의의가 그거라 해도 천하의 김가은은 잘생겼으면 들이댈 거 아냐.”

“평범했어.”

“그럼 거기서부터 아웃, 맞지?”

그 말에 가은이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뜬다.


“노우노우, 나 이제 한 살 더 먹었잖아. 이제는 얼굴 말고 내면을 보기로 했지.”

“정말? 진짜?”

“진짜야.”

“……그, 그래. 그럼 만나서 뭐 했는데? 내면을 어떻게 살펴봤는데?”

“뭘 할 것도 없었어. 첫 대화 주제부터 안 맞았어. 그래서 커피 원샷하고 나와버렸어.”

“그냥 나왔다고?”

“어. 5분도 안 걸렸어.”

“푸핫.”

너무나 가은 다운 행동이라 혜수는 어질한 머리를 흔들었다.


“첫 대화 주제가 뭐였길래?”

“네가 알려준 대로 취미가 뭐냐 물었거든.”

“응.”

“그런데 그 사람 취미가 로맨스 드라마 보기래.”

“진짜?”

“어. 온갖 드라마 제목을 줄줄이 읊더라. 주인공 이름에 PD, 작가 이름도 다 외우던데. 의사라더니 머리는 좋은가 보다 했지.”

“……그러면 많이 안 맞네.”

가은이는 시간이 나면 무조건 바깥으로 나돌아다닌다.

주말만 되면 대한민국 곳곳을 누비며 캠핑에 온갖 스포츠를 섭렵한다. 물 좋고 공기 좋은 곳에 있는 가족 별장만 여러 개다.


“드라마가 웬 말이냔 말이야. 난 돌아다녀야 한다고. 집에 박혀 있는 거 절대 못 해.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답답해서 그렇게는 못 있어.”

“어련하시겠어.”

“그리고 나 정말 이제 얼굴 안 봐. 나에 대한 오해는 더 이상 하지 말았으면 좋겠어.”

새침하게 말한 가은은 머리를 손으로 찰랑, 넘겼다. 잘 관리한 붉은 머리칼이 파도처럼 흔들린다.


“그래도 판단은 할 수 있었을 거 아냐. 어땠는데?”

“말했다시피 평범했어. 길에 지나다니는 사람 열 명 중에 세 명은 그 사람이랑 비슷하게 생겼을걸. 대한민국 표준 남성의 얼굴이라고나 할까.”

그때 가은의 등 너머에 재성이 보인다. 한 손에는 딸기 주스와 케이크가 담긴 트레이를 든 채 고개를 빼 들고 있다.

앉을 자리를 찾는 것 같은데 만석이라 아쉬워하는 눈치였다. 혜수는 손을 들어 재성을 불렀다.


“선생님, 여기 테이블이랑 의자 나눠 드릴게요.”

혜수와 가은이 앉은 자리가 작은 테이블 두 개가 붙여져 있던 터라 재성에게 떼어주면 되겠다 싶다.


“정말? 완전 땡큐지.”

재성은 히히 웃으며 다가왔고 가은도 뒤를 돌아보았다. 재성을 본 가은이 작게 탄성을 지른다.


“맞아! 딱 저 얼굴이야. 저렇게 평범한 얼굴. 저분도 되게 평범하게 생겼다.”

그런데, 가까워지는 재성을 보는 가은의 입이 점점 헤 벌어진다.


“아니, 저 남잔데? 내가 선 본 사람이 저 사람인데?”

“엥? 누구?”

“지금 여기로 가까이 오는 사람. 트레이 들고 있는.”

“설마 재성 선생님?”

“이름이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

테이블에 온 재성도 가은을 발견하고 눈을 키웠다.


“어? 김가은 씨? 여기엔 왜 오셨어요?”

정말 가은이 선 본 사람이 재성이었다.


“친구 만나러 온 거예요. 여기 신혜수, 제 친구거든요.”

그 말에 재성이 오오, 감탄을 한다.


“친구도 있으셨군요.”

“……그거 무슨 뜻이에요?”

“그날 저한테 한 것처럼 행동하면 친구는 없을 거라 생각했거든요.”

“와, 말이 좀 심하시네요?”

“음? 가은 씨가 저한테 하신 것보다 심할까요.”

“뭐라고요? 지금 시비 거는 거예요?”

가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재성을 노려보았고 재성도 그 시선을 그대로 받아쳤다. 둘 사이에 파지직 불꽃이 튀었다.

혜수는 사이로 끼어들어 손을 저었다.


“워워, 여러분, 싸우지 말아요. 여긴 병원이에요.”

“흥.”

재성의 얼굴에다 대놓고 콧방귀를 뀐 가은은 자리에 앉았다. 혜수는 재성에게 의자와 테이블 하나씩 내어줬다.


“선생님, 여기 앉으세요.”

그래도 워낙 좁은 공간이라 혜수의 테이블과 가깝기는 하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일행인 줄 알 것이다.


“고마워.”

재성은 의자에 앉아 케이크를 푹푹 떠먹기 시작했다.


“선생님, 식사 안 하셨어요?”

“수술이 방금 끝나서. 이것도 얼른 먹고 가 봐야 해. 곧 오후 외래 시작이거든.”

“천천히 드세요. 체할라.”

재성은 응응, 고개를 주억거리며 주스를 한 모금 마셨다.

가은과 이런저런 일상 이야기들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병원 입구가 소란스러워졌다.


“무슨 소리야?”

고개를 빼 들고 보니 활짝 열린 현관문 너머 노란 조끼를 입은 사람들이 열댓 명 서 있는 게 보인다.

머리에 노란 띠까지 두른 사람들은 저마다 피켓을 들고 있었고 제일 앞에 있는 사람은 확성기까지 들고 있었다.

확성기 남자가 확성기를 입에 대더니 가슴을 부풀린다.


“무자격 의사는 당장 물러나라!”

그 뒤에 주르륵 선 사람들이 똑같이 복창한다.


“무자격 의사는 당장 물러나라!”

“진료 거부 의사는 의사 자격이 없다!”

“진료 거부 의사는 의사 자격이 없다!”

문밖에서 외치는 소리였지만 안까지 다 들렸다. 로비뿐만 아니라 2층, 3층에 다니던 사람들까지 고개를 두리번거린다. 혜수와 재성도 예외는 아니었다.


“저 사람 무엇 때문에 저래?”

“저도 잘 모르겠어요.”

끊이지 않는 시끄러운 소리에 가은도 인상을 찌푸린다.


“저 정도면 수술실 안에도 들리겠는데? 말려야 하는 거 아니니?”

“그러게.”

경비원을 찾았지만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아우, 시끄러. 우리 다른 데 가서 이야기하자. 밖에 날씨 좋은데 산책로 걸을래?”

“그래, 그러자. 재성 선생님, 저희 먼저 갈게요.”

재성이 휘휘 손을 흔들어주고, 혜수와 가은은 카페를 벗어나 현관문으로 향했다.

그런데. 팔랑팔랑 먼저 뛰어가던 가은이 무슨 일인지 흠칫하더니 몸을 틀어 혜수에게 다시 달려온다.


“가은아, 왜?”

가은은 대답 없이 혜수의 팔짱을 꼈다. 그러더니 옆 건물로 끌고 간다.


“야, 왜 이래?”

“이쪽으로 나가자. 히히.”

“갑자기 왜?”

“그냥. 저기로 가고 싶어졌어.”

“왜? 산책로는 이쪽으로 가야 가까운……!”

순간 무언가 떠오른다.

뜬금없는 가은의 행동. 얼마 전 도영에게 닥쳤던 의료 사고. 그 환자를 응급실에서 직접 봤던 주치의는 바로 자신.


‘설마.’

혜수는 가은의 손을 힘껏 벗겨냈다.

그리고 현관으로 달려가 피켓을 본 혜수는 그대로 멈춰서고 말았다.

-진료 거부 의사 신혜수! 의사면허 박탈하라!

-살인 면허가 된 의사면허!

-의사 자격 없는 의사! 한대 병원의 수준이 이 정도인가?

확성기를 든 사람이 외치기 시작했다.


“한대 병원은 자격 없는 의사를 당장 해직하라!”

뒤에 선 사람들이 피켓으로 하늘을 찌르며 복창한다.


“해직하라!”

“사람 죽이는 의사는 나가라!”

“나가라!”

혜수는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이 상황이, 지금 저더러 의사 자격이 없다고 외치는 현실이 믿을 수가 없었다. 이 모든 게 선거를 위한 계략이라고 해도 혜수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버거웠다.


 


“아이씨, 저 사람들 정말!”

미동도 없이 서 있는 혜수 대신 가은이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저기요, 지금 여기서 뭐 하시는 거예요?”

“박탈하라!”

“이봐요! 이거 불법 시위인 거 아시죠?”

“살인 면허 반납하라!”

“저기요! 경찰 부르기 전에 그만두세요!”

“물러나라!”

“야!”

더 이상 들을 수 없었던 가은은 까치발을 들고 남자가 든 확성기를 뺏으려 했다. 하지만 남자의 키가 너무 크다.


“그거 내놓으라구요!”

“이건 또 뭐야?”

남자와 가은 사이에서 확성기를 뺏고 지키기 위한 실랑이가 일어났다.


“감히 누굴 그 입에 올려? 확성기나 내놓으라고!”

“상관없는 사람은 빠져.”

“내놔!”

“꺼지라고.”

“싫어. 내놔!”

순간 저를 방해하는 가은에게 화가 난 남자가 가은의 손목을 거세게 잡아챘다.


“아악!”

“너 뭐야? 왜 방해질이야?”

남자에게 잡힌 손목이 너무 아프다. 가은은 온 힘을 다해 남자의 손을 털어내려 했으나 쉽지 않았다.


“이거 놔! 놓지 못해?”

“그러게 왜 시비를 걸어!”

“놔, 놓으라고!”

남자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어디서 한주먹 거리도 안 되는 게 튀어나와 가지고는.”

“놔!”

가은의 얼굴이 점점 시뻘겋게 달아오르던 그때.

누군가 남자와 가은 사이에 끼어들며 굉장히 날렵한 동작으로 남자의 손을 잡아챘다. 확성기 남자의 손은 속절없이 가은의 손을 놓쳐버리고 뒤로 홱 꺾였다.


“으윽.”

“아저씨. 여기서 행패 부리면 안 되죠.”

“너, 넌 또 뭐야!”

가은의 앞을 막아선 사람은 재성이었다.


“저요? 전 이 여자가 일요일에 선본 남자이자 이 여자 여자 사람 친구의 선배인데요.”

재성은 이 긴 문장을 조금의 막힘도 없이 읊었다. 놀랍도록 정확한 자기소개에 가은의 입이 턱, 아래로 떨어졌다.

마찬가지로 당황한 확성기 남자가 되묻는다.


“뭐, 뭐라고? 누구라는 거야?”

“한 번 더 말해줘요?”

재성은 긴 문장을 읊기 위해 다시 숨을 들이쉬었고 남자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 아니!”

더는 잡혀 있을 수가 없다. 이젠 꺾인 손에서 참을 수 없는 통증이 느껴져 저 긴 문장을 들을 수가 없다.

대신 남자는 애원하기 시작했다.


“아니! 안 들을게요!”

“듣기 싫다고요?”

“네네! 안 들어도 되니 제발 손 좀 놔주세요, 네?”

재성이 가은을 쳐다보았다.


“놔 줄까요?”

“예?”

“이 사람 손 놔줄까요?”

“네, 네.”

가은이 위아래로 고개를 흔들고 나서야 재성이 남자의 손을 휙 놓았다. 그 반동에 남자가 뒤로 휘청 넘어갔다. 쿵, 묵직한 소리가 제법 요란하다.

앓는 소리를 내는 남자 위로 재성은 쿨하게 손을 두어 번 탁탁 털었다.


“이제 다시 말해줘요? 난 저 여자가 주말에 선을 본 남자이자 이 여자 여자 사람 친구의…….”

어기적거리며 일어난 남자가 뒷걸음질을 친다.


“이 미친놈 뭐야! 일단 철수해!”

“진짜 그냥 가요?”

“이놈 힘이 장사야.”

남자와 무리들은 여기저기로 흩어졌고 곧 주위는 조용해졌다.

그사이 다가온 혜수가 가은을 앞뒤로 살폈다.


“안 다쳤어? 괜찮아?”

“응.”

이번에는 목을 좌우로 늘리는 재성에게 물었다.


“선생님은요? 괜찮으세요?”

“어, 괜찮아. 이 정도야 껌이지.”

“호신술이라도 배우신 거예요? 어떻게 순식간에 제압을 하지?”

“나 유도했거든.”

“유도요?”

“어, 나 유도하잖아. 몰랐냐?”

“몰랐죠.”

둘의 대화에 가은이 끼어들었다.


“그쪽 취미가 드라마 보기라면서요? 그런데 유도도 하세요?”

“취미가 드라마 보기랬죠. 유도는 특기입니다.”

“아.”

정확한 설명에 가은의 턱이 또 툭, 떨어졌다.


“그럼 전 이만. 혜수 너도 괜히 직접 상대하지 말고 올라가. 괜히 엮여봐야 좋을 거 없어. 응급실에서 많이 겪었지?”

“……네.”

“보안요원 부르던가 아님 경찰을 불러.”

“그럴게요. 감사해요.”

“뭘.”

한 번 으쓱해 보인 재성은 구름같이 모인 인파를 헤치고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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