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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로맨스 드라마 (82/110)


82. 로맨스 드라마
2022.11.12.



 
유민을 쫓아낸 도영은 다시 잠에 들지 못했다. 이미 밤은 깊었지만 더는 잠이 오지 않는다.

휴대폰을 꺼내 혜수의 이름을 찾은 도영은 통화 버튼을 누르려다 말았다. 시간이 이러니 당직이 아닌 혜수는 자고 있을 것이다.

다만 넘치는 걱정은 어찌하지 못하고 연달아 메시지를 보냈다.

-집에는 잘 들어갔나?

-얼굴은 좀 어때?

-난 지금 아무렇지 않아. 네가 걱정이야.

-보고 싶어, 늘.

다음 날, 날이 밝기만을 기다렸던 도영은 시간이 되자마자 의국의 회의실에 들어갔다. 제 자리를 찾아가면서 눈으로는 혜수를 찾았다.

메시지를 여럿 보냈지만 아침이 될 때까지도 혜수에게는 답이 없었다. 혜수가 괜찮은지 확인을 해야 했다.


‘어디 있지?……저기 있군.’

혜수는 저 멀리 레지던트들 틈에 끼어 앉아 있었다. 이번에도 황재성의 앞자리다.

그런데, 그 얼굴이 이상하다.

안색이 파리하고 눈이 퉁퉁 부어 있는 것이 심상찮다.

게다가 평소라면 도영이 들어오면 남들이 보는 눈이 있으니 크게 반기지는 않더라도 고개라도 까닥여 주는데 오늘은 책상만 보고 있다.

과장 상훈이 도영에게 푹 쉬었냐, 감기는 이제 다 나았냐, 여름 감기는 개도 안 걸린다던데, 그런데 얼굴은 왜 그러냐, 드디어 누구랑 시비라도 붙은 거냐, 누가 이겼냐, 크하하 크게 떠들었으니 제가 온 줄 모를 리가 없는데.

브리핑이 시작하기 전까지 혜수를 계속 보았으나 혜수는 책상에 뭐라도 붙여놓은 것처럼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렇게 브리핑은 시작되었고 높은 연차 레지던트부터 자리에서 일어나 발표를 했다.

곧 혜수의 발표 순서가 되었다.

그런데, 혜수가 또 이상하다. 평소의 총기는 어디로 가고 힘없이, 영혼이라고는 없이 읊조린다.

‘또 무슨 일이 생겼나? 아니면 뺨을 맞았던 일로 기분이 좋지 않은 건가?’

충분히 그럴 만하다. 어제 본 혜수의 얼굴은 말이 아니었으니까. 말다툼도 크게 했었다 하니 몸은 물론이고 마음도 크게 상처 입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넌 내게 아무 거리낌 없이 와 주었지. 신혜수…… 난 어떻게 해야 이 모든 걸 갚을 수 있을까.’

도영의 고민과 걱정 속에서 혜수의 발표가 끝났다.

하지만 발표를 하면서 실수한 곳이 서너 군데 있어 담당 교수에게 그만큼의 꾸중을 들었다.

이제 혜수가 주치의가 된 지는 반년이 넘어 브리핑은 완전히 익숙한 일이다. 최근에는 실수 한 번 없던 아이가 오늘 연달아 실수를 했다.

이 또한 많이 이상한 일이라 도영의 고민은 점점 깊어졌다.

브리핑이 모두 끝났다. 여전히 도영은 혜수와 눈 한 번 마주치지 못했다.

더는 그냥 둘 수가 없었다. 논문을 핑계로 말을 붙여봐야겠단 생각으로 혜수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제가 다가가는 것을 분명 눈치챘을 텐데, 이 큰 덩치가 움직이는 것을 못 봤을 리가 없을 텐데 혜수는 그대로 짐을 챙겨 나가버렸다.

아, 정말로 확실해졌다.

혜수는 저를 피하는 것이다. 저 때문에 불편한 게 분명하다.

순식간에 사라진 혜수를 보며 도영은 탄식을 흘렸다.
 

마침 이날은 도영과 혜수가 나란히 당직인 날이었다. 저녁 시간이 한참 지난 시각, 혜수에게서 드디어 전화가 왔다.

도영은 기쁘게 전화를 받았다.


“신혜수. 지금 어디야? 저녁은 먹었나?”

하지만, 들려오는 말은 환자에 대한 보고일 뿐이다. 감정이라고는 조금도 섞이지 않은 단어들이 줄줄 늘어졌다.


-1년 차 신혜수입니다. 응급실 내원 환자 노티 드립니다. 2번 베드 환자, 32세 남자 환자로 아랫배 통증 주소로 내원하였고 내원 후 진행한 CT에서…….

“신혜수.”

-네, 교수님.

“괜찮아?”

-환자 말씀이세요? 환자라면 지금 파라세타몰(paracetamol:해열진통제의 일종)을 달고 37.2도로…….

“아니, 너.”

-……괜찮습니다. 환자 노티 계속하겠습니다. CT에서 어펜디사이티스(appendicitis:충수돌기염) 소견 보입니다. CT, 바이탈(vital sign:활력징후), 랩(lab:피검사) 모두 응급 기준은 아니라 피버(fever:발열) 컨트롤하고 내일 정규수술 진행하도록 계획했습니다. 이러면 될까요?

“……그래.”

-네, 교수님. 감사합니다.

말을 마친 혜수는 전화를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

도영은 충격에 한동안 가만히 서 있었다.

지금 혜수의 행동은 걱정을 넘어설 정도로 이상하다.

자신에게 화가 난 것이라면 이렇게 행동하지는 않을 텐데. 혜수라면, 못마땅하고 섭섭한 것에 대해서는 솔직히 말을 하고 풀려고 할 텐데.

결정적으로 브리핑 때. 그 힘없던 모습은 더더욱 화가 난 것과는 거리가 멀지 않나.


‘무슨 일이지?’

아무리 고민해 봐도 답이 나오지 않는다.

결국 도영은 방을 나왔다. 혜수는 지금 응급실에 있을 테니 직접 부딪히겠다 생각하며.

문을 열고 나간 도영은 복도에서 떠들고 있던 무리와 마주쳤다.

3년 차 재성과 펠로우 한 명, 2년 차 한 명이다. 셋은 입국한 해는 다르지만 말이 잘 통하는지 평소 친하게 지내는 사이이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도영에게 인사를 한 그들은 다시 복도를 걸어갔다. 도영도 밖으로 나가던 참이니 그들 뒤를 따라가는데, 어쩔 수 없이 그들의 대화 소리가 다 들린다.

그들의 대화 주제는 바로 여자친구였다. 결혼 적령기의 남자 셋이 모였으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펠로우가 2년 차에게 묻는다.


“네 여친은 잘 있냐?”

2년 차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쉰다.


“잘 있기는요. 헤어졌어요. 아니, 차였어요.”

“왜? 무슨 잘못을 했길래?”

“말도 마요. 완전 망했어요. 만나기로 한 날 갑자기 빤뻬(panperitonitis:범복막염) 떠서 수술방 불려가는 바람에 세 시간 늦었는데요. 약속 장소에 나갔더니 가버리고 없더라고요. 그러더니 저녁에 전화 와서는 헤어지자고. 흑.”

2년 차는 속이 상하는지 어깨를 한껏 끌어내렸다.


“저런. 다시 연락은 해 봤어?”

“아니요. 헤어지자는데 뭐라 더 그래요. 제가 싫다는 거 아니겠어요? 그냥 이렇게 끝난 거겠죠. 전 결혼정보 회사나 가입할까 봐요. 아니, 결혼은 할 수 있을까요?”

“으이고.”

“그런데 샘은 저번에 소개팅한 사람은 어떻게 됐어요?”

“훗. 나는 잘 돼가고 있지. 애프터 신청해서 이번 주에 데이트하기로 했지.”

“……휴. 부럽습니다.”

기운 없는 2년 차의 등을 펠로우가 툭툭 두드렸다.


“얼마 전에 후배가 로펌 변호사들이랑 단체 미팅할 거냐 물어보던데. 너 갈래? 끼워줄까?”

“진짜요? 그런데…… 헤어진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미팅을 해요. 저 아직 걔 못 잊었어요.”

펠로우와 2년 차의 대화를 듣던 재성이 쯧쯧 혀를 찬다.


“여자의 마음을 그렇게 몰라서야.”

“샘은 잘 아시는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그럼. 그렇게 쉽게 포기하면 어떡해. 너는 그 여자가 좋다며.”

“그럼 어떡하라고요? 제가 싫다는데.”

“그럴 땐 말이야.”

재성이 2년 차의 어깨에 팔을 척, 얹었다.


“이 형님 말대로 해.”

“어떻게요?”

“집 주소 알지?”

“네.”

“그 여자 퇴근 시간 맞춰서 앞에서 기다리고 있어야지. 꽃이랑 초콜릿이라도 사 들고.”

“꽃이랑 초콜릿? 그딴 걸 좋아할까요? 이게 대체 뭐냐고 화만 더 낼 거 같은데.”

“내가 여태 본 여자들은 꽃이랑 초콜릿 다 좋아하던데?”

“정말요? 여자 좀 만나보셨나 봐요.”

“그리고 그날 왜 늦은 건지 설명은 했어?”

“아니요. 너무 화를 내서 말도 못 붙였어요.”

“바보냐? 놀다 늦은 것도 아니고 그런 사정이 있어서 늦은 거면 누가 안 이해해 주냐? 말을 좀 해, 말을!”

“정말 이해해 줄까요?”

“만약 이해를 못 해주면 그 여자는 아닌 거야. 그런 여자는 네가 차야지.”

“아.”

잠자코 듣던 펠로우도 재성을 거든다.


“재성이 말이 맞아. 네 일이 이런 건데 이해를 못 하면 안 되지.”

순식간에 솔로몬이 된 재성이 더욱 자신 있게 말한다.


“가만있지 말고 말을 좀 해, 말을. 넌 참 여자의 마음을 모른다.”

“정말 다시 연락해도 될까요?”

“그래, 임마. 빨리 찾아가 봐. 마침 오늘 너 당직 아니잖아.”

“네. 맞아요.”

명쾌한 재성의 대답에 2년 차의 고개가 위아래로 왔다 갔다 한다.

연신 나오는 ‘여자의 마음’이라는 단어에 도영의 귀가 솔깃해졌다.

지금 저도 혜수가 왜 저러는지 알지 못해 애를 태우고 있으니 무언가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가 나올까 해서다.

게다가 꽃과 초콜릿이라니. 혜수가 달달한 걸 좋아하는데 마침 재성이 초콜릿을 이야기하니 더욱 그럴듯해 보였다.

그렇게 도영이 귀를 쫑긋 세운 와중 셋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주로 주제는 연애, 여자의 마음, 어떻게 하면 여자로부터 호감을 얻을 수 있을까, 토라진 걸 풀어줄 수 있을까 등등.

잠시 뒤, 대화가 잠깐 끊긴 틈을 타 도영은 말을 붙였다.


“잠깐만.”

도영이 따라오는 걸 몰랐던지 뒤돌아본 재성이 화들짝 놀란다.


“아, 저희가 너무 시끄러웠죠.”

도영이 이렇게 말을 건 걸 보면 분명 혼내기 위한 것일 테고, 되짚어 보니 의국에서 너무 소란스러웠던 것 같다.


“죄송합…….”

“아니. 물어볼 게 있는데.”

“네?”

도영은 가장 당당하게 여자의 마음을 운운하며 특정 선물을 하라 콕 집어 말한 재성에게 턱짓했다.


“네가 그렇게 잘 알아?”

“예? 뭐를요?”

“지금까지 떠들어 대던 것.”

“아, 여, 여자요?”

뜬금없는 도영의 말에 재성의 눈의 휘둥그레진다.


“대답해. 잘 아냐고.”

“예, 뭐……. 어느 정도는 알고 있습죠.”

재성이 머리를 긁으며 헤헤 웃었다.


“어떻게 알게 됐는데?”

도영은 지금 혜수의 생각을 짐작할 수 있게 도와주는 책이라도 있으면, 아니 논문이라도 있으면 그것을 읽는데 기꺼이 시간을 할애할 용의가 있었다.

그러니 재성이 약간의 힌트만 주면 된다. 어디서 어떻게 그것에 대해 배웠는지. 그럼 혜수가 저렇게 저를 피하는 이유를 알 수 있을 텐데.


“어, 그, 저.”

재성이 눈만 깜빡인다. 이는 전혀 예상했던 질문이 아니었으니까.


“황재성 선생의 여자친구에게서 배웠나? 지금 연인이 있는 건가?”

“예? 아니, 그, 그건 아닌데요.”

지금 재성에게는 여자친구가 없다.

실은…… 솔로가 된지 꽤 오래됐다. 의대 시절 캠퍼스 커플을 한 번 해 본 것이 전부다.


“그럼.”

도영의 눈썹이 슬슬 하늘로 올라가자 재성이 침을 꿀꺽 삼켰다. 도영의 앞이니 헛소리를 하면 큰일이 날 텐데.

한동안 머리를 벅벅 긁던 재성은 드디어 말을 하려는 듯 입술을 벌렸고 도영은 침을 꿀꺽 삼켰다.

이제 저 입에서 귀중한 정보가 나올 테니 글자 하나라도 놓치면 안 되었다.


 


“로맨스 드라마요.”

“뭐?”

“로맨스 드라마에서 배웠습니다.”

“……그럼 선생이 봤던 여자들은 꽃이랑 초콜릿을 모두 좋아했다는 건?”

“드라마에서 본 거죠.”

“……”

“제가 매일 밤 10시에 하는 드라마는 당직이 아니고서야 꼭 본방사수했거든요.”

“……”

“정말입니다. 드라마예요.”

도영은 이번에는 펠로우에게 턱짓을 했다.

저 펠로우도 지금껏 2년 차에게 꽤 연애 고수 같은 면모를 보였지 않았나. 게다가 재성보다 나이가 많으니 더 지혜가 있을지도 모른다.


“선생도 꽤 잘 아는 것 같던데. 어디서 배웠지?”

이번엔 펠로우가 머리를 긁적이며 뜸을 들인다.


“시간 없어. 빨리 말해.”

“저도 드라마요.”

“…….”

“저희 매일 같이 보거든요.”

“…….”

슬슬 도영의 미간이 좁아지는 걸 보며 재성이 손을 내저었다.


“교수님, 그런 드라마는 여성층을 타깃으로 만든 거라 드라마만 잘 봐도 연애 감성은 얼마든지 배울 수 있다고요.”

“…….”

“진짜예요!”

“……하던 얘기마저 해.”

도영이 그대로 몸을 돌려 가버리고 셋은 서로를 쳐다보며 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도영은 다시 제 방으로 가 책상 앞에 앉았다.


‘…….’

고민 끝에 인터넷 창을 띄웠다. 요즘 가장 동영상 플랫폼으로 유명한 너튜브로 들어가서 검색 창에 마우스를 찍었다.

그런 뒤에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키보드를 두드렸다.

[로맨스 드라마 베스트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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