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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당신을 가지고 싶어 (81/110)


81. 당신을 가지고 싶어
2022.11.09.



 
유민은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도영의 집은 암막 커튼이라도 쳐둔 건지 무척 어두웠다.


“교수님?”

여러 번 불렀지만 들려오는 답은 없다. 유민은 과일 봉지는 아무렇게나 치워두고 도영의 방을 찾아 나섰다. 넓은 집만큼이나 방도 많았다.


‘어디 계신 거야?’

마침내 네 번째 방에서 죽은 듯 잠들어 있는 도영을 발견했다. 도영의 방 또한 암막 커튼을 쳐 놓아 어두웠다.


“교수님.”

도영은 정말로 깊게 잠이 든 듯 반응이 없었다. 유민은 도영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고른 숨소리가 들린다. 늘 날 선 모습만 보여주던 사람이 지금은 순하게 잠들어 있는 모습이 이질적이다.

도영의 얼굴에 손을 가까이 가져갔다. 늘 만져보고 싶었던 짙은 눈썹을 만져보았다.

손은 곧 눈으로 내려갔다. 속눈썹을 간질이는 느낌에 도영이 뒤척인다.

감겨 있던 눈꺼풀이 조금씩 들썩여 유민은 급히 손을 거뒀다.


“혜……수?”

“…….”

“신혜수. 왜 또 왔어. 가서 쉬어야지.”

처음 들어보는 염려가 섞인 도영의 음성. 이것 또한 이질적이라 유민은 잠시 할 말을 잊었다.

교수님이 이런 감정을 표현할 줄도 아는구나, 이런 다정한 말도 할 줄 아는구나.

이 모든 것이 나를 향한 말이면 얼마나 좋을까? 내 마음을 당신은 알까?


“……교수님.”

“응, 혜수야.”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오는 이름은 제가 아닌 다른 이의 것이다.

심지어 낮은 목소리로 웃기까지 한다.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앞으로도 들을 수 있을지 모르겠는 웃음소리.


“미안해, 신혜수. 그래도 난 네가 오니 좋아.”

유민은 더 이상 듣지 못하고 방문을 닫고 나와버렸다. 쾅 소리가 아프게 울렸다.

비참한 기분으로 벽을 더듬어 식탁 등을 밝혔다.

밝아진 식탁 위,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온갖 약들이다. 약국이라고 해도 될 만큼 온갖 약통들이 널려 있었다.

도영은 매사에 철저한 사람이니 다양한 약들을 준비해 놓아도 이상할 것이 없다.

약 이름을 하나하나 살피던 유민은 수면유도제도 발견했다.


‘이 약은.’

여러 수면유도제 중 가장 작용시간이 빨리, 강하게 나타난다는 약도 있다.


‘호텔로 데려가던가.’


‘사내새끼 다 똑같지 뭐.’


‘아무리 천하의 주도영이라도 그건 통할 게다. 안 그래?’

 
아무렇지 않게 던지던 병억의 말이 귓가에서 맴돈다.


‘혜수야.’


‘네가 좋아.’

 
나직이 속삭이던 도영의 말도 슬프게 섞여든다.


‘…….’

떨리는 손을 쥐었다 폈다 하던 유민은 마침내 결심을 내렸다.


‘지금이 기회야.’

유민은 약을 한 알 꺼냈다. 컵에 물까지 따른 뒤 도영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

문소리에 도영이 몸을 또 뒤척인다.


“신혜수.”

유민은 도영을 부축했고 도영은 스스럼없이 몸을 일으켰다.


“약 좀 드세요.”

“무슨?”

“소염진통제예요.”

“…….”

약을 든 손을 가만 쳐다보던 도영은 곧 약을 받아 입에 넣었다.


“고마워.”

도영의 울대가 위아래로 출렁인다.

잠시 뒤, 유민은 빈 물컵을 받아 몸을 일으켰다.


“더 쉬세요.”

문을 닫고 나와 수면유도제가 충분히 작용할 때까지 거실에서 기다렸다.

째깍째깍, 사방이 고요한 가운데 시곗바늘이 움직이는 소리만 초조하다. 유민은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했다.

한 시간쯤 지나, 유민은 방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교수님?”

불렀으나 아무런 대답이 없다.

도영이 먹은 약은 꽤 강한 약이니 아프기까지 한 도영은 버틸 수 없었을 것이다.


“교수님.”

여전히 대답이 없다.

안도의 숨을 내쉰 유민은 먼저 도영의 옷을 벗겼다. 단추로 여미는 형태의 셔츠는 쉽게 떨어져 나갔다.

도영의 옷을 모두 벗긴 뒤에는 저를 감싸고 있던 재킷도 벗었다. 그다음엔 치마를 벗었다.

물론 쉽지는 않았다. 마음은 먹었으나 손이 자꾸 떨린다.

도영을 처음 만났던 중학교 3학년 때를 떠올렸다. 도영에게 마음을 주었던 그날을.
 

그때는 한창 아버지 병억과 다투던 때였다.

병억은 유민이 예술고등학교로 가 음악을 전공해 좋은 집안의 며느리로 살아가길 원했다. 물론 그 좋은 집안은 병억을 높은 자리에 올려줄 수 있는 집안이다.

하지만 유민은 음악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시키는 대로 곧잘 하기는 했지만 관심사는 늘 수학이었다.


‘짜증 나. 내가 왜 이해하지도 못하는 악보를 들여다봐야 해?’

하루는 병억과 고등학교 진학 문제로 크게 다투었다. 대문 앞에서 주저앉아 엉엉 울고 있는데 발을 누가 툭툭 건드린다.


“야, 비켜.”

고개를 들어보니 만화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비현실적으로 생긴 한 남자가 저를 내려보고 있다. 그런데, 잘생긴 얼굴이 잔뜩 찌푸려져 있다.


“누구세요?”

“이 집 손님 아들.”

그날은 병억의 집에서 정재계 인사들이 모여 다과회를 하기로 한 날이었다. 그들 중 한 명이 데려온 것이리라.

유민은 눈물을 닦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냥 뒤로 지나가면 될 걸 왜 시비예요?”

“내 몸이 지나가기엔 좁아 보이는데. 그리고 네 못생긴 얼굴이 더 못생겨지니 보기가 싫어서.”

“뭐라고요?”

남자는 씩씩대는 유민 옆에 어질러져 있던 악보를 집어 들었다. 악보에는 연습을 더 해야 하는 곳을 표시해 놓은 붉은 색연필 자국이 온통 뒤덮여 있었다.


“너 되게 못 하나 보다. 처음 하는 사람도 이것보단 잘하겠는데?”

“……재미없으니까요.”

“근데 왜 해?”

“아빠가 시키니까요. 좋은 데 시집가서 도움이 되라고.”

이 말을 들은 남자가 미간을 찌푸린다.


“그게 네 꿈이야? 좋은데 시집가는 거?”

“……아니요. 절대요.”

남자는 악보를 펄럭거리다 뒷면에 적힌 작은 글씨들을 발견했다. 유민이 증명해 놓은 수학 공식들이었다.

그걸 훑어보던 남자가 묻는다.


“이거 네 생각만으로 한 거야?”

“네.”

“베낀 거 아니고?”

“아닌데요.”

한동안 종이를 살핀 남자가 유민에게 종이를 돌려주었다.


“네 인생인데 하고 싶은 거 해.”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아빠한테 도움이 될 걸 해야 할 텐데.”

“그걸 모르겠다면 일단 하기 싫은 것부터 하지 마. 넌 너대로도 충분히 괜찮잖아. 수학도 잘하고.”

콩콩,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수학을 잘하는 건 아무짝에도 쓸모없다고 생각했는데,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인정을 받았다.


“저 잘하는 거예요?”

“똑같은 말 하게 하지 마.”

퉁명스레 대답한 남자는 옆에 맸던 가방을 추스른 뒤 유민을 지나쳐 안으로 들어갔다.

언뜻 보이는 그의 가방 안에는 두꺼운 해부학 책이 들어 있었다.

책에 적힌 이름은 주도영, 앞으로 절대 잊지 못할 이름이었다.


  
툭, 툭, 발치에 옷더미가 하나둘 쌓이고 마침내 스륵 소리와 함께 스타킹까지 바닥으로 떨어졌다.

빛 하나 스며들지 않는 방 안에는 옷을 벗은 도영과 유민, 둘만이 있게 되었다.

유민은 이불을 걷고 침대 속으로 들어갔다. 미동도 없이 누워 있는 도영의 옆에 몸을 붙였다.

숨소리에 맞춰 두꺼운 근육이 오르락내리락한다. 그 가슴에 조심스레 손을 얹었다. 두근대던 심장이 조금씩 더 박차를 가한다.


‘당신을 가지고 싶어.’

도영의 뜨거운 호흡이 손끝에서 느껴진다. 이젠 심장이 멀리서도 들릴 만큼 박동한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순간 도영이 유민에게 손을 뻗어왔다.


‘!’

온기를 찾기라도 하는 건지, 유민에게 다가옴과 동시에 제게로 끌어당긴다.

도영과의 거리가 점차 가까워지고. 이건 됐다, 성공이구나, 생각하던 그때.


“악!”

도영이 순식간에 몸을 일으켜 유민의 양손을 한 번에 잡아챘다.


“으윽.”

남은 한 손으로는 빈틈없이 목을 압박한다. 커다란 손은 가느다란 목을 한 손에 움켜쥐고도 남았다.


“뭘 하려나 했더니.”

“교, 교수님.”

“노력이 부족해. 날 재울 생각이었으면 적어도 프로포폴 정도는 가져왔어야지.”

“어째서 약이 듣지 않…….”

“말했잖아. 저걸로는 부족하다고. 하도 많이 먹어서 내성이 생긴 지 오래거든.”

점점 숨이 달려 헐떡이는 유민을 보고도 도영은 손을 떼지 않았다. 오히려 손등에는 핏발이 더 불거졌다.


“빌어먹을 진통제도, 근이완제도 아무런 소용이 없지.”

“으윽.”

“혜수라면, 신혜수라면 내게 약을 건네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았을 거야.”

“으윽, 교, 교수님. 숨…… 막혀요.”

“날 재워서 어떤 짓을 할 셈이었지? 지문을 채취해 증명서 위조라도 할 셈이었나?”

“아니요, 아니에요……. 전 그냥…….”

잡힌 손목도, 목도 찢어질 듯 아프다. 숨이 막히고 절로 눈물이 줄줄 흘러나온다.


“으윽, 옆에 있으려고 그랬어요. 그게 다예요. 제발 놔주세요, 교수님.”

한동안 유민을 노려보던 도영은 결국 손을 뗐다.


“네가 혜수에게 한 짓들을 생각하면 끝을 보고 싶지만.”

“윽, 큭……, 콜록, 콜록.”

기도로 들어차는 공기가 자극적이라 유민은 한참 기침을 했다.


“참지.”

“콜록, 콜록.”

“나가, 당장.”

“교수님, 제 말 좀…….”

“나가라고!”

도영의 눈은 정말로 무엇 하나를 부서트릴 것처럼 번뜩였다.

겁에 질린 유민은 도망치듯 도영의 방에서 나왔다. 간신히 옷을 끼어 입고 도영의 집을 나와 후들거리는 다리로 차에 올라탔다.
 

유민은 그대로 병원으로 가 원장실로 올라갔다.

쾅, 원장실의 문이 요란스레 열리고 유민을 본 병억이 눈을 키운다.


“유민아, 웬일이냐?”

웬만해서는 스스로 찾아오던 일이 없던 유민이라 병억은 놀랐다.

게다가…… 꼴이 말이 아니다. 얼굴은 눈물로 얼룩져 있고 손목은 벌겋게 부어올라 있다. 늘 단정하게 잘 갖춰 입고 다니는 옷도 여기저기 구겨져 있다.


“얼굴이 왜 이래? 무슨 일 있었던 게냐?”

대답 대신 유민은 입술을 깨물었다. 어찌나 세게 깨무는지 저러다 찢어질까 걱정이 될 만큼이다.


“무슨 일이야? 어?”

“아버지.”

“말하거라.”

“신혜수 좀 치워주세요.”

“신혜수?”

“이젠 도저히, 도저히 못 견디겠어요. 당장 그 애를 치워주세요!”

“왜? 그 애가 뭐래?”

“꼴도 보기 싫어요. 한 공간에서 숨을 쉬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치가 떨려요.”

신혜수만 없었다면, 도영이 그 여우 같은 계집애에게 홀리지만 않았더라면. 도영과 저는 그럭저럭 결혼을 하기는 했을 것이다.

도영에게는 사랑 없는 결혼이라 하더라도 하기는 했을 거다.

유민은 얼마든지 도영을 사로잡을 자신이 있었다. 일단 하기만 한다면.


“그래 참을 만큼 참았지.”

중얼거린 병억은 턱을 치켜올렸다.


“내가 알아서 하고 있으니 곧 해결될 거다.”

“하고 계시다구요? 뭘 하고 계세요?”

“그건 네가 알 거 없고. 진행 잘 되고 있으니 걱정 마.”

“제게도 알려주세요.”

“글쎄, 알 필요 없다니까.”

“…….”

병억이 이상하다. 도영과의 결혼과 관련해서는 사소한 것 하나라도 의논하던 병억인데, 이번에는 왜 숨기는 것인지.

순간 유민의 머릿속에 도영의 기사가 떠올랐다.


“아버지, 설마 주 교수님 의료 사고……. 그거 아버지가 하신 거예요?”

“어엉? 아, 아니야. 나랑 관련 없어.”

병억은 과장되게 손을 휘저었다.


“관련 없어. 진짜야.”

“정말 관련 없으세요?”

굳은 유민의 얼굴을 살피던 병억이 슬쩍 말한다.


“하지만 잘 되었지 않니? 이제 주기철의 당선도 문제없을 거고. 그럼 나도 장관이 될 테고. 으흐흐흐.”

병억은 두 손을 마주쳐 짝 소리를 낸 뒤 손을 비볐다.


“너도 주도영과 결혼하니 좋을 테고. 그러면 다 행복하게 결론이 나지 않겠니?”

“……주 교수님께 해가 가지 않게 해달라 말씀드렸잖아요.”

“무슨 소리야? 내가 한 게 아니라니까?”

“아버지.”

“아무튼, 가보렴.”

“아버지!”

“어우, 시끄러. 누구한테 소릴 질러, 지금! 나 아니라고!”

유민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강한 힘에 곱게 손질한 손톱이 바스러지는 소리가 난다.


“왜 자꾸 그러세요. 왜 제가 주 교수님 앞에 서지도 못하게…….”

“허, 거 참. 나 아니라니까? 크흠, 큼. 신혜수 그건 내가 알아서 처리하마. 그러니 나가봐.”

“…….”

“나가라니까. 엉?”

“앞으로는 더 이상 주 교수님께 해가 되는 일은 하지 말아 주세요.”

“아, 알았다고.”

“약속해 주세요.”

“아오, 알았다고. 알았어! 나가, 나가!”

그렇게 유민을 떠밀듯 내보낸 병억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대체 주도영 그놈이 뭐가 좋아서 저 난리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혀를 몇 번 찬 병억은 유민이 오기 전까지 보던 종이를 다시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보자. 아비는 빌딩 경비원에 어미는 식당에서 설거지라. 경비원도 한 곳에서 오래 못했군. 10년 사이에 4군데를 옮겼네. 무슨 하자가 있길래 그럴까. 뭐, 그 계집을 보면 충분히 예상이 되기는 하는데.”

한참 눈알을 굴리던 병억이 어느 지점에서 멈춘다.


“응? 이게 뭐야? 한주? 정형외과 전문의? 하! 아비가 의사였어? 그런데 왜 관두고 경비원을 할까?”

갸웃하던 병억이 아하, 손을 딱 튕긴다.


“한주에서 무슨 사고라도 거하게 쳤나 보네. 무슨 사고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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