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지금 멈춰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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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지금 멈춰야 한다
2022.11.05.
혜수가 도영에게 간 지 한참이 지났다. 승원은 등이 배기는 줄도 모르고 여태 벽에 기대앉아 있었다.
“승원이? 승원이니?”
저를 부르는 이름에 고개를 들어보니 은숙이 놀란 표정으로 서 있다.
“어머니?”
“진짜 승원이 맞구나. 오랜만이구나.”
승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했다.
“안녕하셨어요.”
“그런데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
승원에게 조금 더 가까이 간 은숙은 깜짝 놀랐다.
“넌 또 얼굴이 왜 이러니?”
“……어제 계단에서 넘어졌습니다.”
“저런. 도영이도 어제 계단에서 넘어졌다던데.”
“……그랬습니까.”
“조심 좀 하지 그랬니. 둘 다 다 커서 넘어지고…… 아!”
같은 시기에 친구인 도영과 승원에게 생긴 비슷한 상처. 그것도 서로의 왼쪽 얼굴에 특별히 많이 난 상처.
은숙은 순식간에 깨달았다. 둘이 싸운 거구나.
“……넌 속이 깊은 아이니까 그냥 넘어졌을 거라 생각하진 않아. 도영이도 그렇고. 둘 다 이유가 있었겠지. 그렇지?”
“……네, 어머니.”
“그런데 왜 여기 있어?”
“혜수를 데려다주러 왔다가 앉아 있었습니다. 이제 가려구요.”
“아, 나도 혜수 양을 만났어. 너도 아는 사이니?”
“제가 혜수의…… 사촌 오빠입니다.”
“어머!”
은숙은 승원의 손을 잡았다.
“이렇게 고마울 일이 있나. 난 네게 늘 신세만 지는구나.”
“아닙니다.”
“아니기는. 혜수 양이 도영이를 간호해 주었단다. 신기하게도 혜수 양을 보니 도영이가 금세 편해지더구나.”
승원은 씁쓸하게 웃었다.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또 확인을 받았다.
“그렇습니까.”
“너도 아니? 혜수 양이 도영이랑 있으면 도영이가 아파하지 않는다는 것?”
“네, 압니다.”
“그래서 오늘 데려온 거야?”
“……네.”
“그렇구나. 내가 본 게 정말 사실이었구나.”
사실이라고 말은 하는데 은숙은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너도 알지? 도영이가 아프면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고통스러워하는 것. 그런데 순식간에 상태가 좋아지더구나. 그렇게 편안한 표정을 짓는 것은 처음 보았어. 정말, 정말 신기했어.”
“…….”
“그걸 보고 나니 도영이가 혜수 양이랑 시간을 보내야 할 것 같아서 그냥 나왔지 뭐니.”
“그렇습니까.”
“참, 지금 시간 괜찮니?”
“네. 다른 일정은 없습니다.”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오랜만에 봤는데 가서 차라도 한잔하지 않을래? 도영이 때문에 물어볼 것도 있고 해서 말이야.”
잠깐 망설인 승원은 곧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승원과 은숙은 근처 카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도영이가 요새도 아픈 것, 승원이 너도 알고 있었니?”
“네.”
“나만 몰랐던구나.”
“도영이가 알리길 원치 않았어요.”
“그래, 그랬겠지. 그래도 난 알고 있었더라면 좋았을걸.”
“…….”
“언제부터 아팠어?”
“계속 아팠어요. 완치된 적이 애초에 없었습니다.”
“그랬구나. 난 다 나았다 그러길래 철석같이 그 말만 믿었어.”
하아, 한숨을 쉬던 은숙이 다시 묻는다.
“요즘은 얼마마다 생기니? 20대 초반 때처럼 잦아? 그땐 일주일에 두세 번도 아팠잖아. 생활이 안 될 만큼.”
묻는 것이 스스로 생각해도 이상했는지 은숙은 헛웃음을 지었다.
“자식이 아픈 것도 모르는 어미라니. 한심하구나.”
“예전만큼은 아니에요. 최근에는 거의 없었어요.”
혜수가 도영과 만나고 나서부터는 그 횟수가 손에 꼽을 수 있을 만큼 줄었다 했다. 혜수의 말에 의하면 악몽을 꾸는 것도 없어졌다고 했다.
“그나마 다행이구나.”
“그렇죠.”
“하아. 그 사고만 아니었어도 도영이가 이렇게 힘들어할 일은 없었을 텐데.”
“……도영이도 종종 그 말을 합니다.”
“그러니? 가능하다면 시간을 되돌리고 싶어.”
은숙의 눈가에 또다시 눈물이 맺힌다.
“그 훈련은 꼭 참가하지 않아도 되던 훈련이었는데 도영이가 가겠다고 해서 가라 그랬어. 내가 더 말렸어야 했는데.”
“……어머니 탓이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도 장소가 한주라길래, 너무 머니까 가지 말라고 했는데 도영이가 꼭 가고 싶어 했어. 내가 조금 더 강하게 말릴 것을.”
은숙이 하는 여러 말 중 한 단어가 승원의 귀를 잡아챘다.
“한주요?”
“그래, 한주. 도영이 사고 난 곳이 한주잖니. 거기 훈련장이 있었거든.”
“아.”
“도영이 팔 수술도 내 다리 수술도 한주 수도병원에서 했고.”
이번엔 승원이 소리를 치다시피 말한다.
“수도 병원이요?”
“반응이 왜 그래? 승원이는 도영이가 어릴 적 사고당한 걸 몰랐던 거야?”
“아니요, 알고는 있었는데…….”
“그래. 그것 때문에 아팠잖니.”
“그것도 알고 있었는데……. 사고 난 곳이 한주인 것은 몰랐습니다.”
“아, 그랬구나. 하긴, 무슨 좋은 이야기라고 얘기했겠니. 도영이는 아마 한주의 한 자도 꺼내기 싫어할 거야.”
“…….그, 그렇죠.”
순식간에 굳어버린 승원의 얼굴을 보며 은숙은 또 고개를 기울였다.
“왜? 왜 그러니?”
“…….”
“승원아?”
한참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잇지 못하던 승원은 은숙을 다시 쳐다보았다.
“저, 어머니. 도영이 사고 난 해가 몇 년도였는지 혹시 기억하세요?”
띠리릭.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며 쿵쿵 울리는 발소리가 시끄럽다.
자고 있는 도영의 옆에 엎드려 손을 잡아주고 있던 혜수는 몸을 일으켰다.
‘어머니가 다시 오셨나?’
몸을 일으키는데 방문이 먼저 벌컥 열렸다. 정신없이 숨을 몰아쉬는 승원이 나타났다.
“오빠? 아직 안 갔어? 여긴 왜 왔어.”
“나와. 혜수야.”
“어?”
“빨리 나오라고.”
“왜?”
“나와. 집에 가자.”
자고 있는 도영의 얼굴을 한 번 쳐다본 승원은 혜수에게 다가가 손을 잡아챘다.
“무슨 일인데?”
“나가서 말해줄게.”
혜수는 승원의 손을 털어내려 했다.
“급한 거 아니면 나중에 하면 안 돼? 나 교수님 옆에 있고 싶어. 경련이 또 언제 올지도 모르잖아. 조금만 더 손잡아 주고 싶어.”
하지만 승원이 잡은 손에 힘이 더욱 강하게 들어간다.
“급해. 많이 급해.”
“무슨 일인데?”
“……이모부 관련한 일이야.”
혜수의 눈이 동그래진다.
“아빠? 아빠한테 무슨 일 생겼어?”
“일단 빨리 나와.”
“어, 응, 알았어.”
결국 혜수는 잠이 든 도영을 둔 채 방을 나갔다.
“오빠, 잠시만. 커튼 좀 치고.”
아플 때의 도영은 빛을 싫어한다. 자그만 빛 또한 자극 요소였기에 가능한 어둡게 지냈다.
혜수는 창마다 커튼을 꼼꼼히 쳐 빛을 가린 뒤 자꾸 재촉하는 승원을 따라 집을 나갔다.
“얼른 타.”
조수석에 혜수를 구겨 넣다시피 밀어 넣은 승원은 운전석에 올라타 핸들을 잡았다. 차는 사나운 소리를 내며 지하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승원이 모는 차는 병원으로도, 승원의 집으로도, 정섭이 있는 용인으로도 향하지 않았다.
“오빠, 지금 어디 가는 거야? 급한 일이 뭔데?”
“…….”
“아빠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거야?”
그래도 답이 없자 혜수는 휴대폰을 꺼냈다.
“그냥 내가 아빠한테 전화를 해봐야겠다.”
“잠시만.”
승원이 손을 뻗어 휴대폰을 잡아챘다.
“왜?”
“차 세우면 내가 얘기해 줄게. 조금만 기다려 줘, 응?”
“……알았어.”
승원은 차는 곧 한적한 공원 주차장에 섰다.
“여긴 왜 온 거야?”
“혜수야.”
“왜 그래?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이러는 거야?”
“그게…….”
아무것도 모르는 맑고 커다란 눈망울이 저를 쳐다보자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응?”
하지만 해야 한다. 혜수가 더 슬퍼하는 일이 생기기 전에 지금 멈춰야 한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게 맞다.
“그…… 이모부가…….”
혜수와 승원이 차 안에 있던 그 시각, 유민은 도영의 빌라 1층에 있었다.
곧 도영과 유민의 결혼 발표가 있다. 의료 사고가 터지자마자 정해진 수순이다. 병억과 기철의 생각이 확고했기에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공식적인 발표가 나기 전 유민은 도영에게 앞으로 잘 부탁한다 말을 하고 싶었다. 일이 이렇게 되고 있으니 미우나 고우나 둘은 한배를 탄 사이임을 명확히 알려주고 싶었다.
그런데 아무리 전화를 걸어도 받지를 않는다. 당직이 아니니 수술 중인 것은 아닐 텐데.
오늘 같은 날에도 받지 않는다니, 결국 직접 찾아올 수밖에 없었다.
엘리베이터 호출 버튼을 누르고 기다리고 있는 데 낯익은 얼굴이 옆에 와 선다.
‘어? 이분은.’
마찬가지로 유민을 알아본 도영의 집 가사도우미가 반갑게 인사를 한다.
“어머, 아가씨.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잘 계셨어요? 전에 뵙고 처음이네요.”
“어유, 전 잘 있었죠. 아가씨는 잘 계셨어요?”
유민의 늘씬한 투피스 차림을 본 도우미가 부럽단 듯 말한다.
“여전히 아름다우세요.”
“과찬이세요.”
유민은 도우미가 들고 있는 과일 봉지를 발견했다.
“주말인데 오빠 집에 가시는 거예요?”
“네. 오늘은 원래 오는 날은 아닌데 과일 좀 썰어 두려구요.”
“아.”
잘 됐다. 집에 찾아가도 쉽사리 들여보내 주지 않을 텐데 도우미랑 같이 가면 뭐라 말을 하지 못할 것이다. 설마 쫓아내지는 않겠지.
그런데, 도우미가 묻지도 않은 말을 주저리주저리 한다.
“아가씨도 병문안 오신 거예요?”
“네……?”
곧바로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 많이 걱정이 되어서요. 그래서 와봤어요.”
“저두요. 그렇게 건강하시던 분이 많이 아프시다니 걱정이 되네요. 사모님 비서 통해서 연락이 왔더라구요. 교수님이 아파서 누워 계시니 과일 좀 들여놓고 죽도 쑤어놓으라고.”
도우미가 봉지를 추켜올린다. 봉지 안에는 비타민C가 많다는 과일이 종류별로 들어 있었다.
“어머, 아직도 누워 있으시대요? 아까 제가 전화했을 때 받기는 하시던데. 그래서 좀 괜찮아지신 줄 알았어요.”
“네. 여전히 꼼짝 못 하고 계시대요.”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이던 유민은 도우미가 들고 있던 봉지를 가리켰다.
“그럼 그것 저 주시겠어요?”
“네?”
“제가 해놓을게요.”
“하, 하지만 이건 제 일인데 어떻게 아가씨께…….”
“제가 저희 오빠 직접 간호하고 싶어서 그래요. 과일도 먹여주고요. 그러니 저 주세요, 네?”
“그게…….”
망설이는 도우미에게 유민은 지갑을 꺼내 지폐 더미를 건넸다.
“저희 오빠 평소에 잘 돌봐주셔서 감사해요. 진작에 감사 인사를 드렸어야 했는데, 제가 늦었죠?”
두툼한 지폐에 도우미의 눈이 끔뻑끔뻑한다.
“얼른요, 받으세요, 네?”
“제가 이걸 받아도 될지 잘 모르겠어요.”
“어머, 무슨 그런 섭섭한 소리를 다 하세요, 당연히 받으셔야죠. 오히려 너무 적은 금액이라 제가 민망하네요.”
유민은 도우미의 손에 지폐를 직접 쥐여주고 대신 과일 봉지를 받아들었다.
“이거 손질은 제가 할게요. 그러니 오늘은 휴가받았다 생각하시고 가서 쉬세요, 네?”
“그, 그래도 될까요?”
“그럼요.”
도우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도영의 예비 아내가, 즉 앞으로 작은 사모님이 될 사람이, 심지어 의사가 직접 과일 손질을 하고 간호하겠다는데 말릴 이유가 없었다.
이왕 이리된 것 공으로 생긴 돈으로 아이들과 오랜만에 외식을 해야겠다 생각했다.
“그럼 잘 부탁드릴게요, 아가씨.”
“걱정 마세요.”
“정말 감사해요.”
때마침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안으로 들어간 유민은 도영의 집 버튼을 눌렀다. 문이 닫히기 전,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는 도우미를 다시 붙잡았다.
“잠시만요.”
“네?”
“비밀번호가 뭐죠? 저 아닌 척하고 들어간 다음에 오빠 놀라게 해주려구요. 전에 들었는데 그새 까먹었네요.”
도우미는 흔쾌히 비밀번호를 알려주었다. 작은 사모님이 얼굴도 예쁜데 하는 짓도 참 예쁘다 생각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