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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넌 늘 날 치유해 (79/110)


79. 넌 늘 날 치유해
2022.11.02.



 
승원의 차가 도영의 빌라 지하주차장에 도착했다.

차가 서자마자 뛰어내리는 혜수를 승원이 쫓아가 붙잡았다.


“혜수야! 비밀번호는 알아?”

“비밀번호?”

“도영이 아프면 문 열어줄 정신없을 거야.”

“아! 오빠는 알아?”

“……응.”

오랜 시간 도영과 절친한 사이로 지내온 승원답게 도영의 집 비밀 번호도 외우고 있다.


“번호는…….”

하지만 스스로 그 집에 혜수를 들여보내주려니 속이 쓰리다.


“번호는…….”

망설이던 승원은 결국 알려주기로 했다. 여기까지 데려와 놓고는 안 알려줄 이유는 또 뭐람.


“비밀번호는 0000별이야.”

“알았어. 고마워. 나 집에는 택시 타고 갈게. 오빠 먼저 가.”

뭐가 그리 급한지,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한 혜수는 때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혜수의 얼굴이 완전히 사라지고 이미 닫혀버린 엘리베이터를 한동안 바라보던 승원은 벽에 기대 고개를 떨궜다.


‘빌어먹을.’

시멘트와 맞닿은 등에 한기가 서럽게 파고들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혜수는 도영의 집으로 달려갔다. 도영을 빨리 낫게 해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했다.

그런데 집 문 앞에 누군가 서 있다.

중년의 여자는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사람이었다. 비록 지팡이를 짚고 있기는 했지만 복도가 환해질 정도로 빛이 나 절로 시선이 가는 사람.


‘저분 익숙한데. 어디서 봤는데. 어디더라…….’

오래지 않아 혜수는 여자를 기억해 냈다.


‘이은숙 배우? 그러니까 교수님 어머님?’

혜수는 급히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어머님.”

“누구세요?”

“저는 한대 외과 레지던트 1년 차 신혜수라고 합니다.”

“아, 그렇구나. 반가워요. 그런데 여긴 어쩐 일로 왔어요?”

“교수님을 잠깐 뵈러 왔습니다.”

“혜수 양도? 그런데 안에 아무도 없나 봐요. 나도 도영이 보러 왔는데 벨을 눌러도 대답이 없네요. 전화도 받지를 않고. 허탕 쳤어요.”

도영이 아픈 것은 모르는지 은숙은 온화한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저, 실은, 교수님이 지금 아프신 것 같아서요. 그래서 뵈러 온 거예요.”

은숙이 멈칫한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도영이가 아프다니요?”

“아직 확실하지는 않아요. 혹시나 해서 확인하러 왔습니다.”

“어디, 어디가 아픈데요?”

“팔이 아프신가 봐요. 오른팔.”

“!”

팔이라는 말에 은숙이 소스라치게 놀란다.


“팔이요?”

“네.”

“설마 또 겨, 경련이?”

곱던 얼굴에 핏기가 가시기 시작했다.

은숙이 문고리를 잡고 세게 흔들었다. 하지만 문은 꿈쩍도 않는다.


“당장, 당장 문을 열어야 해요! 어떡해, 열쇠 수리공이라도 불러야 하나?”

“제가 비밀번호를 알아요.”

“다행이네요! 그럼 어서 열어줄래요?”

혜수는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은숙도 그 뒤를 쫓았다.

가장 먼저 주방에 있는 식탁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전에 혜수가 앉아서 떡볶이를 먹었던 식탁이 지금은 구급상자와 거기서 꺼낸 약통으로 잔뜩 어질러져 있다.


“이 약들은!”

약을 살핀 은숙의 얼굴은 이제 창백하다 못해 시퍼렇게 질려 있었다. 그 약들은 예전 도영이 팔이 아플 때마다 먹던 약이 맞았으니까.


“세상에, 정말로 또 경련을 하는 거야?”

은숙은 곧장 도영의 방으로 갔다. 다리가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무척이나 빠른 속도였다.

방 문을 열자 침대에 쓰러지다시피 누워 있는 도영이 눈에 들어온다. 가까이 가 도영을 본 은숙은 더욱 놀랐다.


“도영아! 얼굴이 왜!”

도영의 얼굴은 엉망이었다. 입술은 터져 있고 턱은 울긋불긋 부어올라 있다. 피가 말라붙은 자국도 곳곳에 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지금 이렇게 아파하는 것이 얼굴 때문이라 생각할 것이다.

은숙의 외침을 듣고 혜수도 달려갔다. 그리고 도영의 얼굴을 본 혜수도 놀랐다.


“교수님!”

찬찬히 살펴보니 얼굴은 당장 치료가 필요한 상태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지금은 팔이 우선이다.

혜수는 즉시 이불을 들췄다. 여름용 홑 이불은 식은땀에 젖어 온통 축축했다. 그리고, 그 아래 드러난 도영의 팔 근육은 아무렇게나 수축 중이었다.

그 모습을 본 은숙이 이마를 짚으며 비틀거린다.

오래전 나은 줄 알았던 도영의 병이 다시 도졌다니, 그 고통스러운 병이 다시 내 아들을 괴롭히고 있다니.


“당장 119, 119를 불러야 해! 혜수 양, 119에 연락 좀 해주겠어요? 나는 그사이 찜질을 할 테니까요.”

과거에도 도영이 이렇게 아프면 은숙은 도영의 곁에서 늘 더운 수건이나 핫팩으로 팔을 따뜻하게 해주었다. 도영이 괜찮아질 때까지 그게 반나절이든, 하루 종일이든 상관없이 곁을 지켰었다.


“수건, 수건이 어디 있지?”

은숙이 수건을 찾아다녔다. 급한 마음에 지팡이도 짚지 않고 다리를 절뚝인다. 어느새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다.

금방이라도 넘어질 것 같은 모습에 혜수가 은숙을 붙잡았다.


“어머니, 잠시만요.”

“왜 그러니?”

“제가 할 수 있어요. 제가 손을 잡아드리면 나으실 건데, 그러니까. 음.”

말을 해도 믿지 않을 것 같다. 그냥 빨리 보여주는 게 낫겠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그게 무슨 말이야?”

혜수는 도영을 흔들어 깨웠다. 제가 옆에 있다는 것을 인지시켜야 했다.


“교수님! 저 왔어요. 혜수요.”

“신……혜수?”

여러 번 흔들자 도영이 힘겹게 눈을 뜬다.


“팔 좀 봐요, 네?”

“…….”

힘이 다 빠진 도영은 대답 없이 눈을 다시 감아버렸다.


“손잡아 드릴게요.”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는 은숙을 앞에 두고 혜수는 도영의 오른손을 잡았다. 쓸고 주무르며 제 온기가 전해지도록 최선을 다했다.

몇 분쯤 지났을까. 이번에도 도영의 경련은 멎었다. 홀로 몇 시간을 괴로워했던 것이 무색하게 씻은 듯 사라졌다.


“세상에. 이럴 수가…….”

은숙이 입을 틀어막는다.

지금껏 도영의 통증이 이리 죽은 듯 사그라든 것은 처음 봤다. 근육 질환으로 유명하다 하여 찾아간 미국의 병원에서도 어떤 짓을 해도 안 되던 일이었는데.


 


“교수님, 저 혜수예요. 눈 좀 떠봐요, 네? 교수님, 교수님.”

도영이 천천히 눈을 떴다.


“혜수야.”

혜수를 본 도영이 희미하게 웃는다. 도영의 올라간 입꼬리를 본 은숙은 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여긴 어떻게 왔어.”

“재성 선생님이 교수님이 아프다 하셨어요. 아침에 만났을 때 안 좋아 보이셨다고. 특히 식은땀을 많이 흘리신다길래 혹시나 해서 와 봤어요.”

“또 황재성?”

“네.”

“그럼 비밀번호는.”

“승원 오빠가 데려다줬어요. 집 비밀번호도 알려주고요. 문 열어줄 정신이 없을 거라고 하면서요.”

“한승원이?”

“네.”

“……오지랖은.”

헛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린 도영은 말을 잇는 것이 힘에 부치는지 눈을 다시 감았다. 혜수는 도영의 손을 놓지 않은 채 계속 옆을 지켰다.
 

은숙은 조용히 현관문을 닫고 집 밖으로 나왔다.

대체 언제부터 도영이 아팠단 말인가. 다 나은 줄로만 알았는데.


‘난 전혀 몰랐어. 엄마가 되어서 어떻게 그걸 몰랐을까.’

은숙은 흐르는 눈물을 훔쳐냈다.


‘내가 걱정하는 게 싫었겠지.’

사고 이후 도영은 아무렇지 않은 척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했다.

은숙의 다리가 저렇게 된 것이 자신 때문이라는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기에 더욱 아프지 않은 척했다.

다리 때문에 힘든 엄마에게 염려를 끼치기 싫어했다. 나를 신경 쓰지 말고 엄마 다리 재활이나 하라, 연기 연습이나 하라, 라는 말을 달고 살았다.

그러니 지금까지 아픈 것을 숨기고 나은 척을 한 것이다.


‘그런데…… 그건 뭐였지?’

방금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보았다.

혜수라는 아이가 경련을 순식간에 잠재웠다. 경련은 물론 통증마저 없어진 듯 보였다.


‘어떻게 그 아이가 손을 잡으니 경련이 멈췄지? 설마…….’

조금 전 혜수와 도영 둘 사이에서 흐르던 묘한 기류가 떠오른다. 이 시대에 마법이 있을 리 없으니 그들 사이에는 무언가 끈끈한 유대가 있고 통증이 나은 것은 그 때문이 아닐까란 생각으로 이어졌다.


‘혜수 양이 도영이가 좋아한다던 그 아이인가?’

비틀대던 은숙은 겨우 벽을 붙잡았다.


‘곧 결혼 발표가 날 텐데. 이를 어쩌면 좋아. 난 그것도 모르고 내 욕심만 채우려고 했어.’

도영이 혜수에게 온전히 의지하던 모습이 머릿속에 자꾸 맴돈다.


‘도영이가 이렇게 괴로워하는 줄도 모르고 도와달라고 다그쳤어…….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야…….’

 

팔이 완전히 안정되고, 혜수는 도영의 얼굴도 살폈다. 크게 넘어지기라도 한 건지 쓸린 턱과 입술 옆엔 피가 흐른 자국이 잔뜩이다.


“어쩌다 다치신 거예요? 속상하게.”

“…….”

“네?”

도영은 묵묵부답이었다.


“제가 좀 닦아드릴게요.”

혜수는 구급함을 가져와 물에 적신 거즈로 얼굴을 깨끗이 해주고 소독솜으로 닦아주었다. 솜의 시원하고도 간질한 느낌에 도영의 얼굴 근육이 이리저리 움직인다.


“승원 오빠랑 교수님 두 분은 정말 친한 친구 사이가 맞나 봐요.”

“……왜?”

“아까 보니 오빠도 넘어져서 얼굴이 말이 아니더라구요. 어떻게 같은 날 넘어져요.”

“한승원이 그래? 넘어졌다고?”

“네. 계단에서 굴렀대요.”

“……그래. 나도 넘어졌어. 발을 헛디뎌서.”

“조심 좀 하시지. 많이 아팠겠다.”

“별로.”

“그럼 넘어지시다가 팔을 잘못 디디신 거예요? 그래서 근육이 놀란 건가?”

“그런가 보군.”

“팔 아프신데 저 부르지 않고 왜 집으로 오셨어요.”

“…….”

“제가 닿으면 금방 멈추잖아요.”

도영은 고개를 저었다.

차마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고작 이 통증 하나 없애겠다고 널 찾아갈 수는 없었다는 말. 그러다 네가 다른 이들로부터 그런 취급을 받는 일은 만들 수 없었다는 말.


“이번에는 심하지 않아서 약으로도 충분할 거라 생각했어.”

“그래도 연락하지 그러셨어요. 전 교수님이 조금이라도 아픈 게 싫어요.”

걱정이 담긴 혜수의 눈을 바라보던 도영은 손을 들어 혜수의 볼에 가져갔다.

미세한 혈관의 두께 차이조차 찾아내는 도영의 예민한 눈이다. 그 눈이 보기에 혜수의 볼은 잔뜩 부어 있는 데다가 울긋불긋했다.


“나도 네가 아픈 건 싫어.”

“……어제 있었던 일 들으셨어요?”

“그래.”

“……전 아무렇지 않아요.”

“많이 부었어.”

“제가 더 세게 때려줬어요. 언니는 멍들었을 거예요.”

“…….”

“그러니 앞으로는 꼭 절 부르세요, 네?”

방긋 웃어 보이는 혜수의 볼을 도영은 한참 쓸어주었다.

혜수는 구급함을 뒤져 면봉과 연고도 꺼냈다.


“이제 약 발라드릴게요.”

면봉에 연고를 짜 찢어진 입술을 문지르자 도영이 미간을 살짝 찌푸린다. 조심스럽게 한다고는 했는데 쓰라린가 보다.


“많이 아프세요? 천천히 할게요.”

혜수는 조금 더 천천히 도영의 입술에 약을 발랐다.


“이 정도는 괜찮아요?”

“……그래.”

“조금만 참으세요, 환자분.”

도영이 낮게 쿡, 웃는다.


“이제 저쪽 얼굴도 해드릴게요. 고개 좀 돌려보세요.”

도영은 아예 몸을 일으켜 혜수에게 조금 더 가까이 갔다.


“그래요, 이 자세도 좋네요. 고개만 이쪽으로 조금만 더…….”

순간. 도영이 몸을 일으켜 혜수에게 성큼 다가왔다. 도영이 면봉을 쥐고 있는 혜수의 손을 강하게 붙잡는다.


“교수님?”

도영은 그 손을 제 입술로 가져갔다. 도영은 그대로 혜수의 손등에 키스를 했다. 촉, 하는 소리가 옅게 울린다.


“교수님!”

혜수가 손등을 뒤로 빼려 했으나 도영의 힘이 너무 세다. 아무리 힘을 써도 손은 계속 도영에게 붙잡혀 있다.

촉, 촉, 몇 번 더 물기 젖은 소리가 나고.


“신혜수, 그거 알아?”

도영이 한마디씩 뱉을 때마다 더운 숨결이 손등에서 느껴진다.

도영의 검은 눈이 혜수를 짙게 옭았다. 혜수는 대답도, 침을 삼키는 것도 할 수가 없었다.


“넌 늘 날 치유해. 자꾸 욕심나게.”

“…….”

멍하니 입술을 벌리는 순간, 이번에는 도영이 완전히 입술을 삼켰다.

놀란 혜수를 토닥이려는 듯 따뜻한 것이 입술 사이를 부드럽게 핥는다. 덕분에 쌉싸름한 소독약의 맛이 한가득 느껴졌다.

쓰지만 달콤하다. 따스하고 애정 어린 손길 또한 달다.

그 감각이 참을 수 없게 감미로워, 불구덩이에 달려드는 나방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도무지 밀어낼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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