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8. 내가 아는 걸 넌 왜 몰라? (78/110)


78. 내가 아는 걸 넌 왜 몰라?
2022.10.29.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던 혜수가 다시 입을 연다.


“그냥 선거가 모두 끝날 때까지, 교수님이 조유민 선생님이랑 모두 정리할 때까지 기다릴걸. 조금만 더 내 마음 참을걸. 그럼 지금보다는 덜 힘들지 않았을까?”

“도영이 만난 것 후회하는 거야?”

“……조금은.”

“그럼 도영이가…… 이젠 싫어?”

혜수는 곧바로 대답했다.


“그건 아니야. 좋아. 너무 좋아. 지금도 교수님은 좋아.”

도영이 좋다. 미치도록 좋다.

사람을 제대로 사귀다 보면 단점도 보인다고 하던데, 도영을 향한 마음은 단점이 보이기는커녕 날이 갈수록 깊어지기만 한다.

처음 그에게서 가장 눈에 띄었던 외모뿐만이 아니라 의사로서의 능력, 환자들을 대하는 진중한 태도, 무엇보다 제게 향한 마음, 모든 것이 진실로 기껍다.


“그런데 교수님이랑 나는…… 우리의 만남은 이 모래성 같아.”

혜수는 앞 코로 모아진 흙을 톡 쳤다. 아주 살짝 건드렸을 뿐인데 둔덕은 쉽게 허물어졌다.


“언제든 무너질 것 같아. 내가 손쓸 수도 없게.”

“…….”

“내가 할 수 있는 건 참고 이 모든 과정이 끝나길 기다릴 수밖에 없어. 그래서 더 슬퍼.”

“……그래, 그렇구나.”

승원은 쓴웃음을 삼켰다. 이 상황은 싫지만 도영은 싫지 않고 여전히 좋단다. 모든 게 지나가기를 기다리겠단다.


‘네가 할 수 있는 게 그것이라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슬퍼하는 혜수를 달래주는 것, 언제든 편히 기댈 수 있게 자리를 마련해 주는 것뿐인가.

마음이 또 타들어 간다. 승원은 시큰거리는 가슴을 억눌렀다.

또 침묵이 흘렀다. 조용히 쓰러진 모래성만 보던 혜수가 먼저 몸을 일으킨다.


“오빠. 나 한 바퀴 돌고 들어갈게. 먼저 들어가.”

“같이 가.”

“아니야. 혼자 있고 싶어.”

“……그래.”

“내 옆에 있어 줘서 고마워. 역시 오빠 최고.”

배시시 웃는 혜수를 보니 또 가슴 한편이 시큰거린다.


“……너무 늦게 다니지는 말고.”

“알았어.”

혜수가 사라지고 승원도 몸을 일으켰다. 산책로를 뛰다시피 내려간 승원은 그대로 수술실로 갔다.
 

이식혈관외과가 주로 사용하는 17번 방.

마침 조금 전 수술이 끝났는지 문이 열리며 환자가 누운 침대가 밖으로 나온다. 그 뒤로 마취과 의료진, 외과 레지던트들이 줄줄이 나오고 제일 마지막으로 도영도 보인다.


‘주도영! 저 새X가!’

승원은 순식간에 도영에게 달려가 빈 수술방으로 끌고 갔다.


“한승원? 대체 무슨……!”

대답 대신 주먹을 휘둘렀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도영이 뒤로 쓰러졌다.

도영이 터진 입술을 훔치며 몸을 일으켰다.


“다짜고짜 뭐 하는 짓이야!”

퍽. 승원은 한 번 더 주먹을 휘둘렀고 무방비했던 도영은 또다시 넘어갔다.

쿵, 커다란 소리가 바닥에서부터 울린다.

이제는 입가에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손에 묻은 붉은 액체를 노려본 도영은 다시 일어섰다.


“하. 한승원, 지금 나랑 해보자는 건가?”

“잔말 말고. 덤벼.”

“얼마든지.”

손을 까닥이는 승원에게 도영은 망설임 없이 달려들었다. 오른손을 힘껏 움켜쥐며.

둘은 온 힘을 다해 서로에게 덤볐다.

주먹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쉼 없이 울려 퍼지고 거친 숨소리도 끊이지를 않는다. 서로를 노려보는 눈빛이 어둠 속에서도 번뜩인다.

승원도 도영도 쓰러졌다 일어나기를 수차례. 지치지도 않는지 누구 하나 물러설 생각을 않는다.

서로의 기색을 살피며 빈틈을 노리던 그때.

도영은 갑작스레 찌릿거리는 오른팔을 쳐다보았고 그 틈을 타 승원이 몸을 숙여 도영의 허리를 향해 뛰어들었다.


“이 X자식! 너 때문에 혜수가 어떤 꼴을 당한 줄 알아?”

갑작스레 튀어나온 혜수의 이름에 도영은 움직임을 멈췄다. 덕분에 달려드는 승원을 피하지 못했고 순식간에 승원 아래에 깔리게 되었다.


“한승원, 대체 그게 무슨 소리지?”

그렇지 않아도 혜수와 통화하던 중 혜수가 갑자기 전화를 끊었다. 다시 전화를 해도 휴대폰이 꺼져 있었기에 이상하다 생각 중이었다.


“혜수가 너! 너 때문에 어떤 취급을 받는지 아냐고!”

“……그때 그 소문을 말하는 거라면 모두 끝난 일일 텐데.”

물론 도영이 결코 바라지 않는 방식으로 끝난 소문이기는 하다. 그래도 그 후로는 그렇게 다 잠잠해진 줄 알았는데.


“고작 그 소릴 하기 위해 내 앞을 막은 거라면 비켜. 중환자실에 가야 하니.”

도영은 승원을 밀어냈지만 승원은 꼼짝 않는다. 여전히 거친 숨을 몰아쉬며 소리를 지른다.


“그게 아니라고! 너네 과 레지던트들은 혜수를 여전히 소문의 주인공 취급을 한다고! 오늘도 여럿이서 혜수를 둘러싸고 휴대폰을 빼앗지를 않나, 괴롭히지를 않나!”

거친 몸싸움으로 요란하던 심장이 순식간에 바닥까지 쿵 내려앉았다.


“그게…… 사실인가?”

설마 저와의 통화가 갑자기 끊겼던 것이 그것 때문인 건가?


“하. 내가 이 상황에서 거짓말이라도 할까 봐? 혜수가 뺨까지 맞았어! 네놈 때문에! 울었다고! 그 강한 아이가 울었다고! 너 따위 때문에!”

조금 전까지만 해도 승원을 밀어내기 위해 힘껏 움직이던 양 팔에 힘이 쭉 빠진다.


“맞았……다고? 울었어?”

“그래!”

“…….”

아, 어떠한 말도 떠오르지 않는다. 양 팔이 바닥에 털썩 떨어졌다. 이루 말할 수 없이 참담한 심정이다. 동시에 오른팔 근육이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떨리기 시작한다.


“……지금 혜수는 어딨지?”

“몰라, 이 새X야!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네가 알아서 했어야지! 내가 아는 걸 넌 왜 모르는데!”

승원은 소리를 지르며 다시 팔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도영은 더 이상 승원의 주먹을 피하지 않았다.

위에서부터 시작된 통증은 어느새 팔꿈치를 지나 손목까지 내려왔다.

하지만 평소라면 끔찍했을 그 고통도, 승원의 억센 주먹질에 따른 아픔도 지금 도영의 심정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복잡한 머리로 밤을 지새운 혜수는 겨우 몸을 일으켜 숙소를 나왔다.

발은 움직이는데 생각은 하고 있는 건지, 무엇을 보고 있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다.


‘이젠 그냥 쉬고 싶어. 아무 생각도 하기 싫어.’

의국에 다다라 문을 잡았는데 누가 나오던 참인지 문을 열기도 전에 띠릭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등장한 사람은 재성이다.


“신혜수! 오늘 오프지?”

“네, 맞아요.”

힘없는 대답에 재성이 갸우뚱한다.


“너 어디 아파? 얼굴색이 왜 이래.”

“괜찮아요. 좋은 주말 보내세요.”

대충 대꾸해 주고 들어가려던 혜수는 이어지는 재성의 말에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아까 주 교수님도 아프신 것 같더만. 커플은 닮는다더니 같은 날 아프네. 아, 아니다. 같이 있어서 옮은 건가? 으흐흐.”

제 딴에는 농담을 하는 것 같은데, 혜수의 귀에는 하나도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도영이 아프다는 건 예사로운 일이 아닐 수 있으니까. 혜수는 돌아서는 재성의 옷깃을 억세게 붙잡았다.


“선생님, 교수님이 어디가 아프신데요?”

“그건 나도 잘 모르지. 내가 묻는다고 대답해 줄 사람도 아니고. 그냥 수술 끝나고 퇴근하시는 뒷모습을 봤는데 이상했어.”

“어떻게 이상했는데요?”

“목까지 잔뜩 뻘개져서는 식은땀을 흘리고 비틀대더라.”

혜수의 눈이 커다래졌다.


“시, 식은땀이요?”

“그래. 팔도 배배 꼬는 게 꼭 며칠 묵은 변이 튀어나오기 직전의 급박함이 느껴졌달…….”

재성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갑자기 혜수가 복도를 달려나갔기 때문에.


“야, 신혜수! 어디 가! 내가 더러운 얘기 해서 그래? 어?”

아무리 불러도 들려오는 대답은 없다. 총알같이 튀어 나간 혜수는 곧 밖으로 사라졌다.

병원 밖으로 나온 혜수는 택시 승강장으로 가 택시를 기다렸다.

하지만 일요일 아침이라 그런지 병원 부지 안으로 들어오는 택시가 없다. 한참을 기다려도 자가용만 간간이 들어왔다 나간다.


‘택시 앱이라도 되면 좋은데.’

망가진 휴대폰을 다시 켜보려 애썼지만 그조차 되지 않는다. 까맣게 타들어 가는 혜수의 심정처럼 까만 화면만이 보인다.

발을 동동대고 있는데 저 멀리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눈을 갸름하게 하고 보니 병원 현관문을 열고 나오는 사람은 승원이다.


‘그래, 오빠한테 부탁하자.’

혜수는 승원에게 달려갔다.


“오빠!”

“혜수야?”

승원도 퇴근을 하려던 참인지 사복 차림이다.


“오빠, 지금 바빠…… 헉! 얼굴이 왜 이래?”

가까이서 본 승원의 얼굴은 엉망이었다. 눈 밑은 붉은 데다가 턱은 조금 찢어져 있다. 또 뺨은 전체적으로 부어올라 있다.

분명 어제저녁에 산책로에서 승원과 헤어질 때까지만 해도 멀쩡했었는데!


“무슨 일이야? 누구한테 맞기라도 한 거야?”

승원이 손으로 슬쩍 얼굴을 가린다.


“아니야. 넘어진 거야.”

“어쩌다가?”

“계단에서.”

“으이그, 조심 좀 하지.”

“괜찮아. 지금은 아무렇지 않아.”

“아무렇지 않기는! 많이 아플 것 같은데?”

“괜찮다니까. 하나도 안 아파. 진짜야. 그런데 혜수는 어디 가던 참이야?”

“오빠, 나 차 좀 태워줘.”

“차? 어디 가게?”

“주도영 교수님 집.”

“!”

승원이 대답 없이 가만 서 있기만 하자 혜수가 또 묻는다.


“오빠, 왜? 못 가? 바빠? 약속 있어?”

“아니, 그건 아닌데…… 거긴 왜 가려고?”

승원은 이해가 가질 않았다.

혜수는 어제 도영 때문에 그 수모를 겪었다. 생전 맞아보지도 않은 뺨을 맞았고 아직 부은 얼굴이 가라앉지도 않았다. 얼마 전 새로 산 휴대폰마저 망가졌다.

그런데 거길 대체 왜 간다는 거지?


“교수님이 지금 팔이 아프신 것 같아. 내가 본 건 아니기는 한데, 팔을 잡고 퇴근하셨대.”

“팔이 아프다고? 경련?”

“응.”

“…….”

갑작스러운 통증의 이유는 짐작이 간다. 아마 어젯밤 저와 격렬하게 싸운 것이 원인일 것이다.

혜수가 힘겨운 일을 당했다는 사실 또한 심리적으로 큰 자극 요인이었겠지.


“약 먹으라 그래. 늘 그래왔잖아.”

그 새끼는 그래도 싸, 라는 말은 퉁명스러운 말속에 억지로 숨겼다.


“약으로도 완전히 낫질 않으니까 그러지. 엄청 아파하시거든.”

도영의 통증은 제가 아니라면 씻은 듯이 나을 수가 없다. 약도 수액도 완전히 낫게 하지는 못한다.

혜수가 손을 잡아주지 않는다면 도영은 한참을 고통 속에서 괴로워할 것이다.


“전에 말했잖아. 내가 손잡아 주면 금방 좋아지신다고. 그러니 내가 가야 해.”

“하지만 누가 그 집에 네가 들어가는 걸 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할게. 지금은 교수님을 낫게 하는 게 더 급해. 정신을 잃을 정도로 아파하신단 말이야. 요새 한동안은 통증이 없었기 때문에 이렇게 갑자기 아프면 더 괴로우실 거야. 응?”

“하아……. 꼭 가야겠어?”

“응. 가야 해.”

혜수의 의지는 확고했다. 모든 걸 다 잊고 자고 싶다는 생각은 어디로 사라지고 지금은 도영에 대한 걱정만 남았다.


“지금은 연인이 아니라 의사로서 가는 거야. 그래도 안 돼?”

“하, 혜수야.”

“오빠, 제발. 또 이런 부탁은 안 할게. 마지막으로 도와줘, 응?”

“너 정말 너무……! 하…….”

무슨 말을 하려던 건지, 그냥 삼켜버리고 먼 곳을 보며 한숨만 내쉬는 승원의 팔을 혜수가 잡아당겼다.


“오빠. 한 번만 도와줘.”

“하아……. 그래. 가자, 가.”

결국 승원은 혜수를 데리고 주차장으로 갔다. 걸어가는 내내 왼쪽 가슴이 욱신거렸지만 묵묵히 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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