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7. 착하지, 우리 공주, 뚝 하자 (77/110)


77. 착하지, 우리 공주, 뚝 하자
2022.10.26.



 


‘너 따위 때문에 내가 그 노인네한테 고개를 숙인 것만 생각하면! 내가 그날 이후로 천불이 나서 잠을 제대로 못 잤어!’

경애는 온 힘을 다해 혜수의 뺨을 내리쳤다.


‘이 XX 같은 X!’

철썩.

감정이 담긴 몸짓에 살갗이 마찰하는 소리가 커다랗게 진동했다.

혜수의 턱이 휙 돌아감과 동시에 눈앞에 하얀 별이 번뜩였다. 곧 비릿한 피 맛이 느껴진다.


‘아으…….’

눈을 감고 아찔함을 가라앉힌 혜수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똑바로 했다. 여전히 눈을 홉뜨고 있는 경애를 힘껏 노려보았다.


“언니. 아까도 말했는데 그새 잊으셨나 봐요.”

“뭐라는 거야?”

“언니한테 제가 맞을 이유는 없는 것 같은데요. 그리고 이건 정당방위.”

혜수도 번개같이 손을 들어 경애의 뺨을 내리쳤다.

철썩.


“악!”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경애가 휘청한다. 어찌나 빨랐던지 경애 주변에 서 있는 유민이나 레지던트들이 말릴 틈도 없었다.


“전에도 당해보셔서 아실 텐데요. 전 내 몸에 손대는 사람 똑같이 대갚음 해준다는 것.”

“이, 이게!”

열이 받을 대로 받은 경애가 다시 손을 치켜올렸지만 이번에는 혜수가 좀 더 빨랐다.

경애의 팔목을 움켜쥔 혜수가 코웃음을 쳤다.


“두 번은 못 당하죠.”

“이, 이거 안 놔?”

“왜 자꾸 덤비는지 모르겠어요. 보아하니 상대도 안 되는 것 같은데.”

“이, 이게! 너 잡히면 내 손에 죽었어!”

더 이상은 가만 못 있겠는지 유민이 혜수와 경애 사이에 끼어들었다.


“경애 언니, 혜수야. 그만해, 응? 다 내가, 내가 부족해서 생긴 일이야. 그러니 그만 싸워. 제발.”

“유민아!”

“혜수는 레지던트잖아. 그러니 교수님과 전화할 수 있지. 그것 가지고 우리 서로 상처 주지 말자. 가뜩이나 힘든 생활인데 도우면서 지내야지.”

“그게 아니라고! 내가 대화를 들었거든? 밥은 먹었냐, 스트레스 받지 마라, 뭐 이런 얘기까지 하더라니까?”

“그, 그것도 혜수는 레지던트니까……. 같은 과 교수님께 그 정도 이야기는 안부 삼아 하, 할 수 있다고 생각…….”

말을 더듬는 유민의 눈에 점점 눈물이 차올랐다.


“……흐으윽.”

곧 커다란 눈망울에서 방울방울 투명한 액체가 떨어졌다. 곁에 서 있던 다른 레지던트들이 유민을 달래기 시작한다.


“유민아, 울지 마, 응?”

“맞아. 나쁜 건 신혜수인데 네가 왜 울어? 울지 마.”

“흑, 내가 많이 부족한 거 나도 알아. 그러니 혜수가 나 대신 챙겨주면 난 고마워.”

“뭐라고?”

경애가 입을 딱 벌린다.


“유민아,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다만 내가 우는 건…… 내가 너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유민의 눈에서는 눈물이 툭툭 떨어졌다.


“난 왜 혜수처럼 할 수 없는 걸까?”

“유민아, 무슨 그런 생각을 해!”

“이런 일이 반복되면 주 교수님은 나를 점점 탐탁지 않게 생각하실 거야. 이러다 파혼…… 하게 되면 난 어떡하지?”

“뭘 어떡해! 이 착한 것아!”

유민을 달래느라 안절부절못하던 경애가 다시 팔을 걷어붙였다.


“감히 유민이를 울려? 신혜수 좀 붙잡아! 내 오늘 이것을 가만두지 않겠어!”

유민의 뒤에 서 있던 레지던트들이 우르르 혜수에게 다가가 혜수의 몸을 잡아당겼다.


“이거 놔!”

“신혜수, 너 오늘 좀 당해봐라.”

“이거 놓으라고!”

서로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격렬한 몸싸움이 시작되려던 그때.

닫혀 있던 회의실의 문이 쾅 하고 열렸다.


“다들 여기서 뭐해?”

노한 음성이 들린다. 혜수의 몸에 붙어 있던 손들이 화들짝 떨어져 나갔다.

문 앞에 서서 잔뜩 인상을 구기고 있는 사람은 승원이다.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거지?”

혜수의 사촌인 승원의 등장에 경애의 손이 슬그머니 내려간다.


“대답 안 해?”

“…….”

돌아오는 답은 없었지만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혜수에게 적개심을 숨기지 않는 레지던트들과 운 것이 분명한 유민.

상황은 뻔했다. 혜수와 도영의 관계를 눈치챈 유민은 울고, 다른 레지던트들은 혜수를 괴롭히고 있던 것이겠지.


“회의실이 선생들 싸우라고 있는 곳은 아닐 텐데. 그것도 한 명을 상대로 여럿이서 뭘 하는 거지?”

당장이라도 혜수를 괴롭힌 이들을 똑같이, 아니 열 배 천 배로 대갚음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레지던트를 지도하는 교수의 입장에서 같이 싸울 수는 없다.

승원은 처음으로 교수가 된 것을 후회했다.


“하. 더 묻지 않을 테니 다들 가서 할 일 해.”

“하지만 교수님, 신혜수가…….”

“어서 나가지 못해!”

승원의 고함에 레지던트들이 찔끔한다. 그렇게 모두들 바깥으로 흩어지고 승원과 혜수 둘만이 남았다.


“혜수야, 괜찮아?”

“……오빠.”

“어?”

“나 밖에 나가고 싶어.”

“그래, 나가자. 오빠랑 같이 가.”

 

응급실에서 조금만 걸어가면 혜수가 즐겨 찾는 산책로가 있다. 과식을 했을 때나 기분 전환이 필요할 때 찾는 곳이다. 산속 커다란 부지에 있는 병원인 만큼 산책로도 여느 공원 못지않다.

산책로에는 시간이 시간인 만큼 아무도 없었다. 온통 깜깜한 어둠 속, 가로등만이 군데군데 겨우 보일 정도만 길을 밝히고 있다.

승원은 빈 벤치에 혜수를 앉혔다.


“맞은 거야? 얼굴 좀 봐, 응?”

“…….”

“고개 좀 들어봐.”

고집스럽게 내리고 있는 턱을 억지로 올려보니 그새 왼쪽 뺨이 붉게 부풀어 있다. 범위며 부은 정도를 보니 장난으로 내려친 수준이 아니다.


“대체 누가……!”

승원은 혜수를 둘러싸고 있던 레지던트들 중 가장 표독스러운 표정으로 어깨를 들썩이던 레지던트를 떠올렸다.

얼마 전 회식 자리에서도 말도 안 되는 질문을 퍼붓던 사람과 같은 얼굴. 당사자인 유민도 아닌데 더 혜수를 괴롭히지 못해 안달이 나 보이던 사람. 바로 경애다.

승원은 다시 한번 경애의 얼굴을 새기며 혜수의 달아오른 뺨을 어루만져 주었다.


“많이 부었어.”

“괜찮아, 오빠. 내가 더 세게 때렸어. 아마 그쪽은 피멍 들었을걸.”

“그 이경애라는 사람이 널 때린 거지? 2년 차 레지던트?”

“……응.”

“입안은 괜찮아?”

혜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괜찮은 거야?”

“……괜찮대도.”

아니다. 사실은 많이 아프다. 얼마나 경애가 세게 후려쳤는지 여전히 비릿하고 손끝만 갖다 대도 화끈화끈한다.


“얼음찜질 좀 해야겠는데. 안 그러면 내일도 티 날 거야.”

“응, 그럴게.”

“오빠가 가지고 올까? 바로 옆에 응급실 있으니까 거기서 가져오면 되겠다. 조금만 기다려.”

일어서는 승원의 옷깃을 혜수가 잡아당겼다.


“아니야. 괜찮아.”

“왜? 지금 해야 해. 안 그러면 더 부을 거야.”

“나 괜찮아. 괜찮아서 그래…… 나중에 내가 할게.”

“혜수야.”

“괜찮다니까…….”

흐릿하게 괜찮다는 말을 반복하는 혜수를 보며 승원은 깊은 탄식을 뱉었다.


“정말 너 괜찮은 거 맞아?”

“……응.”

하지만. 더이상은 참을 수 없었는지 기어코 꾹꾹 눌러 담았던 울음이 터지고 말았다.


“흑, 으흑.”

불빛만 희미하던 산책로에 혜수의 서러운 울음소리가 섞여들었다. 가엾고 처연한 소리가 아프게도 섞인다.


“흑, 으흐흑.”

그렇지 않아도 붉게 부푼 볼이 더욱 붉어지도록 울던 혜수가 꺽꺽대며 울음을 삼킨다.


“오빠……. 실은 나 하나도 안 괜찮아.”

“……혜수야.”

혜수가 붉은 뺨을 어루만졌다.


“맞은 얼굴이 너무 아파. 저런 취급받는 것도 너무 아프고 당당하게 교수님 못 만나는 것도 내겐 상처야.”

“…….”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나도……. 다른 커플들처럼 손잡고 영화관도 가고 싶고 여행도 가고 싶다고. 으흑.”

굵은 눈물이 쉴새 없이 뚝뚝 떨어졌다.


“그렇지만 참았어. 이런 상황에서 어리광을 피우기는 싫어서. 그리고 그게 우리 둘 모두를 위한 일이라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일이 자꾸 이렇게 되니까 너무 힘들어. 이상한 소문이나 퍼지고 남의 애인 뺏는 사람 취급이나 받고.”

“혜수야…….”

“내 존재는 선거에 방해나 되고. 오늘은 또 어떤 일이 날 괴롭힐까 고민이나 해야 하고. 힘들어 죽겠어. 너무 힘들어……. 으어어엉.”

승원은 아무 말 없이 혜수를 끌어당겨 안았다.

따스한 토닥임에 서러웠던 눈물이 더욱 넘쳐흐른다. 눈물은 길이 되어 내렸고 승원의 어깨는 까맣게 젖어갔다.


 


“으흑, 나 어떡해, 오빠?”

젖어가는 옷을 보며 승원의 마음도 같이 무너져내렸다.

오랜 시간 혜수를 곁에서 봐 온 승원은 혜수가 얼마나 강한 아이인지 안다. 웬만해서는 쉽게 눈물을 보이지 않는 혜수다.

고등학생 때 반에 생겼던 도난 사건 때, 성적도 좋고 친구도 많은 혜수를 시기한 한 아이가 혜수를 범인으로 지목했다.

그 이후로 반 아이들이 모두 돌아선 그때도 난 죄가 없다며 웃고 다니던, 제게 날아오는 비난의 시선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친 혜수다.

그런 혜수가 이렇게 애달프게 운다. 그동안 말은 하지 않았지만 쌓인 것이 많았다는 거겠지.


“혜수야…… 울지 마, 제발.”

“으흐흑.”

“……제발, 응?”

“으흑.”

이러다 온몸의 물이 말라 탈수가 오지는 않을까 걱정될 즈음.

승원은 오래전 주문을 기억해 냈다. 우는 혜수를 뚝 그치게 하던 마법의 주문. 성공률 100%의 엄청난 주문.


“착하지, 우리 공주, 뚝 하자, 응?”

정말로 효과가 있는지 울음이 조금씩 잦아든다. 잠시 뒤, 혜수가 쿨적거리며 눈물을 닦아냈다.


“……오빠. 내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그 멘트야, 훌쩍.”

어릴 적 혜수가 엄마에게 호되게 혼나서 울 때면 승원이 이렇게 달래주고는 했었다. 다 울고 나면 아이스크림을 사 먹였다.

그러면 꼬마 혜수는 언제 울었냐는 듯 방긋 웃어 보였다. 오빠 최고, 나는 역시 공주야! 라는 말과 함께.

즉 승원만이 아는 혜수를 달래는 나름의 노하우인 셈이다.


“오빠가 아이스크림 사 올까? 편의점에 네가 좋아하는 돼지바 있잖아.”

“칫, 내가 애냐고, 됐다고!”

한술 더 뜨는 승원을 보고 말은 퉁명스레 하지만 슬쩍 웃는 혜수다.

승원은 이제야 숨통이 트임을 느꼈다.

아, 다행이다. 혜수가 웃는다.


“이제 좀 진정됐어?”

“응.”

혜수는 얼굴을 뒤덮은 콧물과 눈물을 옷소매로 닦아냈다.


“지금 주도영은 뭐 하는데? 너 이러고 있는 건 알아?”

“......아니. 오늘 KT(신장이식) 연달아 네 개 있거든. 지금 마지막 환자 하는 중이셔.”

“하!”

“......오빠.”

“응.”

“그런데 내가 정말 나쁜 사람인 건가?”

“나쁜 사람이라니.”

“남의 약혼자를 표독스럽게 뺏는……. 드라마에 나오는 그런 사람 있잖아.”

혜수는 고무 신발의 앞 코로 흙바닥을 툭툭 쳤다. 흙이 모여 작은 둔덕을 만들어졌다.


“오빠. 내가 정말 나쁜 걸까? 그런 거야?”

혜수의 질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승원은 대답을 했다.


“아니야, 혜수야. 넌 절대 잘못 없어.”

나쁜 건 주도영이다. 일을 이렇게 만든 장본인.

제 마음도 못 알아차리고 아버지의 선거를 돕는다는 빌미로 마음에도 없는 약혼이나 한 모자란 놈.

이런 순간에도 혜수 옆에 있어 주지 못하는 천치 같은 놈.


‘빌어먹을, 주도영! 내가 이런 꼴 보려고 물러선 게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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