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교수님이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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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교수님이 좋아
2022.10.19.
“오빠, 난 요즘 너무 행복해. 주 교수님이랑 함께할 수 있어서.”
“행복……해?”
“응. 많이!”
“…….”
“어쩌면 내 인생에 이렇게 즐거운 순간은 다시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만큼이야.”
“혜수 너 괜찮은 거야? 도영이는 약혼녀가 있는 사람인데 어떻게…….!”
“괜찮아.”
단단한 대답이다.
“그, 그런 연인 관계가 어떻게 좋아?”
“그래도 난 행복해, 교수님이 좋아.”
이 대답 또한 단단했다. 승원은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감추었다.
“도, 도저히 난 모르겠어, 혜수야. 도영이에게는 약혼자가 따로 있는데 어, 어떻게…….”
“허울뿐인 걸 아니까. 교수님을 믿으니까. 이런 상황을 만들어서 미안하다고 여러 번 말씀하시기도 했고.”
“…….”
“게다가 같이 있으면 나에 대한 교수님의 마음이 온전히 느껴지는걸.”
“…….”
“물론 힘들 때도 있기는 했어. 나 이상한 소문이 났을 때나, 조유민 선생님이랑 나란히 기사에 올라온 걸 볼 때나. 많이 힘들었지.”
“…….”
“그래도 그건 견뎌낼 수 있어.”
곧게 저를 쳐다보는 혜수의 시선을 보며 승원은 깨달았다.
도영에 대한 혜수의 마음은 어린아이 장난이 아니구나. 깊고 분명하구나.
그리고 이어지는 혜수의 말에서 승원은 더는 어찌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주 교수님 팔 아프시잖아. 경련하는 거. 오빠는 알지?”
“……응.”
승원보다 잘 아는 사람이 있을까.
승원은 도영이 얼마나 오랜 기간 투병해 왔는지, 낫기 위해서 몇 차례나 수술을 했고 얼마나 많은 약을 먹었는지 전부 안다.
요즘은 부모님도 모르는 도영의 아픔을 같이 견뎌주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혜수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런데 내가 손을 잡으면 경련이 멎어.”
“뭐?”
“신기하지. 어떤 약을 써도 안 되던 게 고작 내가 손을 잡아줘서 멈추다니.”
“거, 거짓말이지?”
“진짜야. 우리도 너무 신기했어. 교수님이 그러시는데 강한 안정감을 느끼면 그럴 수도 있대. 케이스 리포트 감이라고.”
“……하.”
승원은 아무런 대답 없이 고개를 떨궜다.
테이블 위에는 한동안 적막이 흘렀다. 고요한 레스토랑에는 배경 음악만이 빈틈을 채웠다.
이쯤 되자 혜수도 당황스럽다.
‘반응이 왜 이래?’
승원이라면 두 팔 벌려 환영할 줄 알았다. 승원은 도영과 가장 친한 친구 사이이고, 혜수에게는 가장 좋은 오빠였으니까.
게다가 도영의 아픔을 잠재울 수 있는 방법이 나타났으니 더 기뻐해 줄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 승원의 반응은…… 축하는커녕 떨떠름한 모습이 꼭 저와 도영의 사이를 반기지 않는 것 같다.
“오빠?”
“…….”
“오빠? 왜?”
“…….”
“오빠 왜 그래? 왜 그러는데?”
“…….”
“나랑 교수님의 사이가 오빠는 싫은 거야?”
“…….”
“응? 오빠? 왜 대답이 없어?”
한참을 부르고 나서야 승원이 고개를 다시 들었다. 연하기만 했던 갈색 눈동자에 탁한 어둠이 서려 있었지만 혜수는 눈치채지 못했다.
“싫기는. 조금 당황했나 봐. 내가 제일 아끼는 친구랑 동생이 연인이 되었다니. 놀라서.”
“정말 그것 때문이야?”
“그럼. 도영이랑 잘 만나 봐, 혜수야.”
“진짜지?”
“그럼. 난 늘 네가 행복하길 바라.”
“히힛, 고마워, 오빠. 이것 볼래?”
혜수는 휴대폰을 켜 그동안 도영과 찍은 사진들을 보여주었다.
도영이 그리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아 많이 남기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다른 연인들처럼 나란히 머리를 맞댄 채 찍은 사진들 몇 장은 있다.
환히 웃으며 카메라를 쳐다보는 도영과 혜수. 사진 속 그들에게서 서로를 위하는 마음이 화면 밖까지 흘러나온다.
“어때, 오빠? 우리 잘 어울려?”
“…….”
“응? 말 좀 해 봐. 아이, 이 오빠 오늘따라 왜 이래!”
승원이 답이 없자 불퉁하던 혜수의 입매가 순간 샐쭉해진다.
“아, 나 알겠다. 아까부터 오빠가 이러는 이유를!”
혜수가 승원의 팔뚝을 퍽, 쳤다.
“또 내가 모자라다 그러려고 그러지? 전에도 그랬잖아. 주 교수님한테 나는 안 된다고!”
“……아니야, 그런 거.”
“그럼 대체 왜 그래?”
“……잘 어울리네.”
“진짜?”
“그래.”
“히힛.”
혜수는 해맑게 웃었다.
혜수의 웃음에서, 행동에서, 사진 속 도영을 보는 시선에서 온통 행복한 감정이 느껴진다.
제가 아이돌 LIFT의 티케팅을 해줬을 때보다도, 한정판 애프터눈 티를 먹으러 데려갔을 때보다도 더한.
그런 혜수를 한동안 바라보던 승원은 내려놓았던 서류를 다시 집어 들었다.
“그건 뭐야? 웬 종이?”
“아무것도 아니야. 의국에 내야 하는 서류인데 가지고 와버렸네. 주머니에 넣고 있으니 불편해서 꺼내둔 거야.”
판결문을 품에 다시 자연스럽게 집어넣었다. 기대감으로 날뛰던 심장이 이젠 참을 수 없게 쓰라렸지만 온전히 견뎌냈다.
‘내게는 나보다 네 행복이 더 소중한 것은 변치 않아. 앞으로도 그럴 거고.’
혜수와 승원이 이야기를 나누던 그 시각. 도영은 본가가 있는 성북동에 가고 있었다.
도영은 오늘 무슨 일이 있어도 기철과 은숙에게 유민과 파혼하겠다는 말을 할 생각이다.
기철과 은숙은 그동안 도영의 연락을 받지 않았다. 마치 도영이 무슨 일로 연락을 하는 건지 짐작이라도 한 것처럼.
이제 아버지 기철의 지지율이 80퍼센트가 넘어간다. 콘크리트처럼 단단한 시민들의 지지 속에서 기철의 당선은 거의 확실시되었다. 하늘이 두 쪽 나지 않는 한 기철은 당선될 것이다.
‘반드시 파혼한다.’
커다란 2층 집 앞에 주차를 한 도영은 대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한눈에 다 담기도 힘든 커다란 정원이 나타났다. 수억을 호가하는 소나무들 사이에 놓인 돌길을 걸어갔다.
남의 이목에 신경을 많이 쓰는 아버지답게 어느 하나 흐트러진 것 없이 반듯하다.
긴 돌길을 지나 현관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가자 오랜 시간 집을 관리해 준 김 여사가 도영을 반긴다.
“어머, 도영이 왔니?”
도영은 가볍게 목례를 했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그럼. 어쩐 일이야, 연락도 없이.”
“어머니 뵈러 왔습니다.”
“일단 들어와.”
그런데 집 안이 조용하다. 자신을 살갑게 맞아줄 어머니도, 아버지가 수족처럼 부리는 비서들도 보이지 않는다.
“아버지랑 어머니는 어디 가셨습니까?”
“잠깐 약속이 생겼다고 하셔서. 조금 전에 급히 나가셨어. 곧 들어오신다니까 잠깐만 기다릴래?”
“알겠습니다.”
“네 방에 올라가 있어. 간식 좀 올려다 줄게.”
“네.”
도영은 2층으로 올라갔다. 복도를 따라 늘어진 방 중 가장 안쪽에 있는 방이 도영이 대학생 때까지 쓰던 방이다.
‘오랜만이군.’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익숙한 장면이 눈에 들어온다.
먼지 한 톨 없는 이불이 덮여 있는 커다란 침대, 그리고 옆에는 나무로 된 책상과 책이 잔뜩 꽂혀 있는 책장. 책장의 위 세 칸은 도영이 좋아하는 사진들로 만든 액자를 진열해 놓았다.
도영은 책장에 다가가 사진들을 훑어보았다.
전국 체전에서 처음 우승했을 때의 사진, 전지훈련을 가서 운동장을 뛰고 있는 사진, 사고 후 한대 의대에 입학하면서 찍은 사진, 졸업식 날 학사모를 쓰고 승원과 어깨동무를 하고 찍은 사진.
이 모든 사진은 어머니나 아버지가 찍어 준 것이다.
우두커니 서서 사진을 보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난다. 김 여사가 과일이 담긴 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배고프지? 좀 들어.”
“감사합니다.”
도영이 액자를 보고 있던 것을 알아챈 김 여사가 미소 지으며 다가왔다.
“사진 보고 있었어?”
“네.”
“어릴 때 네가 참 귀여웠는데.”
“…….”
“언제 이렇게 컸나 몰라.”
김 여사가 액자 하나를 들어 올렸다.
“이 사진 좀 봐. 사모님 영화 개봉 첫날에 보러 간 거네.”
사진 속 유치원생인 도영은 은숙의 품에 안겨 해맑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손에는 엄마에게 주려고 산 꽃다발을 들고.
은숙은 도영의 머리에 코를 비비며 도영을 애정 가득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다. 그리고 이 사진을 찍어 준 사람은 도영의 아버지다.
“어쩜 이리 귀여울까.”
그렇게 추억에 젖어 주절주절 떠들던 김 여사는 번뜩 정신을 차렸다.
“아이고, 내 정신 좀 봐. 너무 떠들었네. 얼른 먹어. 난 내려갈 테니 편히 있어.”
“알겠습니다.”
그렇게 과일을 먹으며 기다린 지 한 시간, 두 시간. 하지만 대문은 열릴 기미를 보이지를 않는다.
어느새 자정이 다 된 시각. 더는 못 기다리겠다는 생각에 도영은 몸을 일으켰다.
취침 시간이 더 늦어지면 내일 수술에 지장이 간다. 빨리 제 집에 가서 몸을 누이고 근육을 쉬게 해야 한다.
‘내일은 당직이니 모레 다시 와야겠군.’
방을 나가 아래로 내려가 김 여사를 찾았다. 마침 김 여사는 거실에서 우두커니 서서 TV를 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이상하다.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어깨를 떨고 있는 게 아닌가. 입으로는 연신 어떡해, 어떡하면 좋아, 를 연발한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도영의 목소리에 김 여사가 뒤를 돌아보았다. 눈이며 얼굴이 온통 붉게 상기되어 있다.
“도영아…… 이를 어째. 이게 무슨 일이니? 저게 사실이야? 네가 그럴 리가 없잖니!”
알 수 없는 말에 도영은 김 여사의 곁으로 다가가 TV를 보았다. 화면에는 속보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붉은 화면 속 흰 자막을 읽은 도영의 두 다리가 못이라도 박은 듯 굳었다.
[주기철 시장 후보자의 아들 주도영 - 의료 사고에 휘말려! 선거의 판도가 달라지나?]
다음 날, 가뿐한 마음으로 병동으로 들어서던 혜수는 이상한 분위기를 느꼈다. 군데군데 사람들이 무리 지어서 속닥대고 있다.
‘또 무슨 일이 생겼나?’
구석에서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인턴 이지수에게 다가갔다.
“지수 샘, 무슨 일이에요? 분위기 왜 이래요?”
그러자 지수가 울상을 지으며 휴대폰을 보여준다.
“선생님, 어떡해요. 주도영 교수님 큰일 났어요!”
갑자기 튀어나온 도영의 이름에 혜수는 급히 휴대폰을 쳐다보았다.
지수가 보여주는 화면에는 포털 메인의 뉴스 칸이 떠 있었다.
그런데, 뉴스 제목에는 온통 주기철, 주도영이 적혀 있는 게 아닌가. 유민과의 약혼으로 종종 기사에 이름이 나오기는 했지만 이렇게 도배가 된 것은 처음이다.
다급히 제목을 훑어내렸다.
-주기철 시장 후보자 선거에 빨간불. 아들 주도영의 인성 논란.
-히포크라테스 선서는 어디로? 진료 거부한 주기철 시장 후보자 아들. 환자는 다리 못 쓰게 돼.
-의사 주도영 논란, 모든 것은 잘못된 가정교육 때문인가?
-가정교육에 실패한 주기철, 과연 시장의 자질은?
조회 수를 올리기 위함인지 기사들은 온통 자극적인 제목들을 뽑아놨다. 혜수는 순간 몸이 휘청이는 것을 간신히 바로잡았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저도 몰라요. 주 교수님이 얼마 전에 응급실로 온 환자 수술을 거부했고, 그 환자는 결국 다리를 못 쓰게 되었다던데요.”
수술을 못 했던 환자라면…… 순간 지난번 있었던 일이 스쳐 지나간다.
“설마 그 사람?”
“왜요? 뭐 떠오르는 것 있으세요?”
딱 한 명 있다. 수술을 거부한 건 아니지만 순서를 미뤘던 그 VIP 환자.
죽어가는 환자보다 먼저 수술을 시켜달라, 자신이 누군지 아냐, 목숨에 달린 값어치는 사람마다 다르다고 소리치던, 국회에서 한자리 한다던 그 환자.
“얼마 전에 다리에 혈전 있는 환자 응급실에 왔었는데 주 교수님이 수술을 미룬 케이스가 있긴 해요. 더 응급 환자가 왔거든요.”
“어떡해. 그럼 그 사람 맞나 봐요.”
“맹세코 수술을 거부한 건 아니에요. 순서가 밀리니 그 사람이 전원을 간 거지. 교수님이 환자 치료를 내팽개치는 사람은 아니잖아요.”
“저도 무섭기는 하지만 그럴 분은 아니라 생각해요.”
댓글은 더욱 가관이었다. 자극적인 기사 내용만을 접한 사람들은 기사의 내용 하나만으로 도영을 판단하기 시작했다.
[자식 농사 한 꼬라지 보면 주기철도 뻔한 사람일 듯. 그 나물에 그 밥이지.]
[주기철 뽑으려고 했는데 다시 생각해 봐야겠다.]
[주도영? 쯧쯧, 저 얼굴 뺀질뺀질한 거 봐. 일하기 싫어하게 생겼잖아.]
[아니야, 난 믿을래. 우리 시장님 가족이 그럴 리가 없어.]
죄다 기철과 도영을 욕하는 와중 기다려 보겠다는 댓글이 아주 가끔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