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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죄송합니다 (74/110)


74. 죄송합니다
2022.10.15.



 
할머니도 경애를 보고 입을 떡 벌린다.


“뭐여. 저 선생은 여기 왜 왔어?”

혜수는 할머니에게 다가가 조물조물 손을 잡아주었다.


“할머니, 우리 경애 선생님이 할머니께 사과드리고 싶대요.”

“사과? 사과라고?”

“너무 사과가 늦어서 죄송하대요.”

“크흠. 난 사과받을 생각 없는데.”

“에이, 그러지 마시구요. 우리 경애 선생님도 잘 몰라서 그러셨던 거예요. 지금은 많이 배우시고 익히셔서 훌륭한 주치의 선생님이 되셨어요.”

“그려? 진짜?”

의문 가득한 할머니의 시선을 요리조리 피하며 경애는 혜수를 힘껏 노려보았다.

너 지금 이게 뭐 하는 거냐, 무슨 짓이냐, 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을 겨우 참았다.

혜수는 경애는 무시하고 할머니를 한 번 더 토닥였다.


“그리고 충분히 반. 성. 하셨대요.”

“정말이여?”

“네. 그럼요.”

“정말?”

“네!”

한술 더 떠 혜수는 일어나 경애에게 다가갔다. 가까워지는 혜수를 보며 경애의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커진다.

혜수는 망설임 없이 경애의 머리통을 잡고 할머니가 있는 방향으로 틀었다.

할머니와 눈이 제대로 마주친 경애가 머리를 빼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이, 이……!”

“언니, 아까 저한테 그러셨잖아요. 사과하고 싶다고. 얼른 말씀드리세요, 네?”

“너, 너…….”

부들대는 경애에게 혜수가 작게 속삭였다.


“싫으세요? 그럼 저희 약속은 없던 일로 하죠, 뭐. 주 교수님께 가서 그때 그 껌은…….”

“아, 아니! 잠깐만.”

“하실 거예요? 사과?”

“…….”

“교수님 전화번호가…….”

“해, 해!”

그래, 하자. 하고 지긋지긋한 그놈의 껌, 잊어버리자. 그리고 신혜수. 넌 내가 가만두지 않는다.

그러나. 쉽게 입이 열리지 않는다.

지금껏 병원 생활을 하면서 환자에게 사과를 한 일이 있었던가.

어떤 잘못을 해도 흐지부지 덮이는 게 대부분, 아니 전부였다. 늘 갑의 위치에서 환자를 을로만 다뤄왔는데 사과를 하라니! 자존심이 너무 상한다.


‘제길, 제길!’

한참이나 말이 없자 혜수가 재촉한다.


“언니. 빨리요.”

결국 경애는 입을 달싹였다. 짓눌린 음성이 하나씩 나온다.


“죄, 죄…… 송…….”

한 음절을 말할 때마다 경애의 얼굴은 점점 달아올랐다.


“합…… 니…… 다.”

이 다섯 음절의 말을 하는 데 한참이 걸렸다. 그동안 달궈진 얼굴은 이젠 터질 것 같다.

말을 마친 경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람같이 병실 밖으로 나가버렸다.

씩씩대는 숨소리가 안까지 들려온다. 짧은 사과의 순간이었지만 저 분노를 어떻게 참았나 싶다.


“사과를 했음 내 말도 들어야지, 왜 그냥 가?”

“언니가 쑥스러워서 그래요. 낯을 많이 가려요, 원래.”

“자존심이 세 보이더만.”

“조금 그래요.”

“흠, 그럼 선생님이 대신 전해줘.”

“네, 어떤 말씀요?”

“사과받았으니 나도 다 잊겠다고. 이젠 더 원망 안 한다고.”

“정말요?”

“그래. 내가 조금이라도 더 살았으니 이해해 줘야지. 죄송합니다, 이 말 하는 것도 엄청 힘들었을 거야. 표정이, 어후.”

“하하.”

“이빨도 튼튼한 걸로 새로 해 넣었더니 고기가 더 잘 먹혀. 그러니 이제 모두 끝! 잊자고.”

“……감사해요.”

“감사는 무슨. 솔직히 고생은 우리 선생님이 다 했지. 내가 그때 얼마나 선생님한테 못되게 굴었어? 선생님 덕에 더 잊을 수 있었지.”

껌 사건이 일어난 초반, 혜수는 할머니에게 문전 박대는 기본이요, 들고 갔던 과일로 얻어맞은 적도 있었다.

할머니가 회복이 덜 되어 힘이 없는 상태라 세게 맞은 것은 아니었지만 마음은 심하게 멍들었었다.


“그땐 충분히 그럴만하셨어요.”

“내가 너무 고마워, 선생님. 툭 까놓고 말해서 의사들이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것은 드물잖어. 그런데 선생이 이렇게까지 하는 걸 보니 참 놀랍구먼.”

“……당연한 것을요.”

혜수는 의료인으로서 가장 우선시해야 할 덕목은 윤리라고 생각해왔다. 물론 좋은 머리와 빠른 판단력은 기본이라는 전제하에.

이 모든 생각은 늘 정직을 강조하는 아버지 정섭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부도덕한 의료인들도 있기 마련이다. 그런 사람들이 종종 뉴스에 나오기도, 경찰서에 가기도 한다.

혜수는 적어도 자신이 아는 선에서는 그런 일을 만들지 않도록 늘 노력해 왔다.


“저 이제 갈게요.”

“그려. 바쁠 텐데 어서 가서 일해.”

“수술 잘 받으시구요, 제가 종종 놀러 올게요.”

“언제든 와. 선생님이 오면 난 환영이지.”

“아시죠? 이번엔 껌 씹으면 절대 안 되는 거.”

“허! 당연하지! 그놈의 껌! 내 껌은 쳐다도 안 봐.”

씨근덕대는 할머니에게 혜수는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

남산 근처의 한 레스토랑.

약속 시간 보다 꽤나 일찍 도착한 승원은 자리를 잡고 앉았다.


“대관하신 한승원 님이시지요?”

“맞습니다.”

“지금 준비해 드릴까요?”

“아니요. 일행이 오면 준비해 주십시오.”

“네.”

오늘을 위해 승원은 이곳을 통째로 빌렸다. 맛집으로 이름난 곳이라 평소 손님들로 가득 찼던 곳이 오늘은 듣기 좋은 클래식 소리만 울려 퍼진다.

혜수가 좋아하는 이 레스토랑은 불이 밝혀진 남산 타워가 훤히 보여 운치가 있다. 그래서 혜수가 더 마음에 들어 하는 곳이다.


‘드디어 오늘이다.’

어제 승원은 소송 결과를 받았다. 결과는 가뿐하게 승소.

어릴 적 써왔던 일기와 지선에게 받았던 폭언이 담긴 문자 내역들과 이체 기록 등이 증거가 되어 쉽게 이길 수 있었다.

결과를 받자마자 승원은 혜수에게 연락해 약속을 잡았다. 할 말이 있으니 술 한잔하자고. 혜수는 그렇지 않아도 나도 할 말이 있으니 흔쾌히 그러자 했다.

이후 승원은 기대감에 뜬눈으로 밤을 새우다시피 했다.

그 끔찍한 과거와 끝을 낼 수 있게 된 것도 의미가 있지만 승원에게 더 커다랗게 다가온 것은.

이제 혜수의 앞에 사촌 오빠 한승원이 아닌 남자 한승원으로서 설 수 있게 됐다는 것, 그것이었다.

초조한 시간이 흐르고 레스토랑의 문이 열린다. 드디어 보고 싶었던 얼굴이 나타났다.


“혜수야, 왔어?”

“오빠, 일찍 왔네?”

“아니야, 나도 방금 왔어.”

“배고플 텐데 먼저 시키고 있지.”

“식으면 맛없잖아.”

“오우, 오빠 갬동.”

혜수는 승원이 안내하는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승원이 가방과 겉옷도 받아주고 의자도 꺼내준다. 심지어는 앉을 타이밍에 맞추어 의자도 살짝 밀어 넣는다.


“이 오빠 왜 이래?”

“뭐가?”

“오빠가 언제 내 옷 받아줬다고 그래?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죽을 때가 된 거라던데.”

“앞으로 매번 해줄게.”

“으윽, 싫어! 닭살!”

“푸핫, 안 할 테니 앉아. 어서.”

곧 혜수가 즐겨 마시는 칵테일과 새우로 맛을 낸 전채요리가 나왔다.


“이거 내가 좋아하는 거!”

배가 고팠던지 혜수는 게 눈 감추듯 접시를 비워냈다.


“오늘 점심 안 먹었어?”

“응. 수술 들어가느라.”

“요즘 수술 자주 들어가네.”

“주 교수님 수술이 더 많아져 가지고.”

“네가 도영이 수술을 들어가?”

“응. 자주 들어가게 됐어.”

“……그렇구나.”

도영이 제 마음에 차는 사람만 수술에 들이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이 병원에 있을까.

처음에는 이제 갓 1년 차인 혜수가 도영의 곁에 서는 것을 보고 이례적이란 반응이 태반이었다.

물론 혜수는 다른 뒷말이 나오지 않게 최선을 다했고 여태껏 실수 한 번 하지 않고 도영을 보조하는 중이어서 모두의 인정을 받아냈다.


“힘들지는 않아? 도영이 많이 까다로울 텐데.”

“조금 힘들기도 한데.”

힘에 부치는 때도 종종 있다. 하지만 그 이상의 즐거움이 있었다.

탄성을 자아내는, 동영상으로 찍어 간직하고 싶을 정도의 도영의 수술을 옆에서 직접 보고 배울 수 있다는 것, 도영에게 제가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수술이 끝난 빈 수술실에서 도영과의 비밀스러운 만남. 그 모든 것이 혜수에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이었다.


“괜찮아, 재밌어.”

“……그렇구나.”

혜수는 메인으로 나온 스테이크 접시까지 말끔히 비웠다. 칵테일도 어느새 바닥을 보인다.


“한잔 더?”

“응. 당연하지! 여기 너무 맛있어. 오빠는 왜 술 안 마셔?”

“난 오늘 술이 별로 안 당겨서.”

“그럼 나만 마신다?”

“그래.”

“그런데 여기 왜 이렇게 손님이 없어? 평소엔 바글거리잖아. 망해가나?”

“……글쎄.”

그렇게 한 잔을 더 주문해 마시고 혜수의 볼이 발그레해졌을 즘, 승원은 드디어 말을 꺼내기로 했다.

오랫동안 묵혀왔던, 입안에서 까끌 거리고 있던 그 말을.

이 말을 위해 승원은 술을 시키지 않고 음료수를 시켰다. 술에 취한 채로 진심을 전하기는 싫었으니까.


“혜수야.”

“응?”

승원은 재킷 안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뭉쳐진 서류들이 손에 잡혔다.

이제 이걸 꺼내 혜수에게 보여주고 너와 난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말을 하기만 하면 된다.

그런 뒤에는 내 마음을 네게 전할 것이다.

쿵쿵쿵, 심장이 거세게 떨린다. 손에 잡힌 서류를 꺼내려던 그때.

혜수가 먼저 입을 연다.


“오빠. 나도 할 말 있다고 했잖아.”

“어?”

“할 말 있다던 거. 지금 말할게.”

“……그래.”

승원은 잠시만 더 기다리기로 했다. 그 오랜 세월을 기다려 왔는데 그까짓 몇 분을 더 못 기다릴까.

승원은 꺼낸 서류를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이건 조금만 더 있다가 보여주자.


“무슨 말인데? 해 봐.”

혜수가 뜸을 들이더니 얼굴을 붉힌다.


“사실은 오빠, 나 좋아하는 사람 생겼어.”

“어? 뭐라고?”

당황해 턱을 떨어뜨린 승원을 보며 혜수가 배시시 웃는다.


“뭘 이렇게 놀라. 나 좋아하는 사람 생겼다고.”

“!”

승원은 가까스로 생각을 이었다.

누구지? 설마 주도영? 아니야, 혜수는 도영이를 무서워했는걸. 도영이 혼자 혜수를 좋아한 거지.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안감을 애써 모른 체했다.

그래, 주도영은 절대 아닐 거야. 뭐, 누구든 네 첫사랑 이수호처럼 짝사랑이겠지.

아니면 사귀더라도 이전 남자친구들처럼 잠깐 사귀었다 헤어지거나 하겠지. 이번에도 심각한 건 아닐 거야.


“나 좋아하는 사람 생겼다니까? 표정이 왜 그래?”

“……누군데? 좋아한다는 사람.”

“놀라지 마.”

“어. 안 놀래.”

“실은……. 나 주도영 교수님 좋아해, 오빠.”

“!”

“우리 만난 지 좀 됐어. 오빠에게 미리 말 못 한 건 선거 때문에. 혹시나 해가 될까 해서.”

혜수는 절친인 가은에게도, 친오빠 같은 승원에게도 도영과 연인이 되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말을 할까 했던 때도 있었다. 가은과 승원이라면 믿고 말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때마침 이상한 소문이 병원에 퍼졌다. 제가 승원과 도영을 손에 쥐고 저울질을 하고 있다는 말도 안 되는 그 소문.

그 탓에 혜수는 더욱 몸을 사릴 수밖에 없었다.

저로 인해 당선이 무산되게 되면 도영의 얼굴은 물론, 도영의 부모님 얼굴도 볼 수 없을 것이니까.


“지금은 당선이 확실하다며. 그래서 말하는 거야.”

서울 시장 선거는 이제 코앞으로 다가왔다. 지금 도영의 아버지 주기철의 지지율은 80퍼센트 이상.

가장 큰 라이벌이라고 하는 야당 후보자의 지지율은 고작 10퍼센트 대 초반이다. 나머지는 군소 정당의 후보자들이 조금씩 나눠 가졌다.

이대로라면 하늘이 두 쪽 나는 이변이 없는 한 주기철이 당선될 것이다.


“후아, 후련하다.”

혜수가 체기가 내려간 것처럼 배를 쓰다듬었다.


“그동안 오빠한테 말 못 해서 얼마나 답답했다고. 꼭 속이는 기분이었거든. 오빠한테는 말 못 하는 게 없었는데 말이야.”

“…….”

멍하니 있는 승원에게 혜수가 손을 뻗어 눈앞에서 흔들었다.


“오빠? 내 말 듣고 있는 거야?”

“…….”

“설마 술 취했어? 어라, 아닌데? 오빤 술도 안 마셨잖아.”

“……혜수야.”

“응?”

“네 마음. 도영이에게 말했어? 한 거야?”

“응. 했어. 헤헤.”

“……도영이는, 도영이는 뭐래?”

희미한, 마지막으로 남은 희망을 가지고 물었다.

도영이가 제발 자신의 가족을 위해 혜수에게서 마음을 거두었기를 바라며.

하지만 다음으로 이어지는 말은.


“교수님도 나 좋대. 우리 만나고 있어.”

“어, 언제부터?”

“오래되지는 않았어. 음, 우리 봉사활동 갔을 때. 그때부터야.”

기억난다. 혜수의 집 앞에 도영이 있는 걸 봤던 날.

하지만 그땐 혜수를 데려다주기 위해 온 것이라 생각을 했다. 혜수에게는 도영을 좋아하는 마음이 전혀 보이지 않았었기에.

내가…… 틀렸던 것인가?


“하지만 도영이는 조유민 선생과 약혼을 했잖아.”

“선거만 끝나면 파혼할 거라고 하셨어.”

“파혼…… 한다 그랬다고…….”

“응.”

“…….”

모든 것이 승원이 예상하지 못한 상황으로 흘러가고 있다.

지금은 제가 혜수와 가족이 아니라는 것을 밝힌 뒤 혜수에게 마음을 고백했어야 할 때인데.

혼란스러워하는 혜수에게 그동안 말 못 해 미안하다며 토닥여 줄 때인데.

승원의 속에서 슬그머니 악이 받쳐 올라왔다.

어째서 넌 주도영이 좋다고 말을 하는 거야? 왜 하필 주도영이야? 늘 네 곁에 있던 사람은 나인데!

승원은 테이블 위에 올려뒀던 판결문을 꽉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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